〈 185화 〉16장 - 너희가 원하는 대로
“아마 지금쯤이면 율리아, 당신의 숙부에게도 우리들 소식이 닿았을 겁니다.”
“예상하고 있어요. 당신이 아무리 첩자 놈들을 쳐낸다고 해도 생도들의 편지까지 전부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더해서 그 안에 얼마 전 있었던 일들도 전부 적혀있을테고….”
“나와 당신 간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지도 대충 적혀있겠죠. 나의 왕이니, 나의 신하이니.”
클라우스의 말에 율리아는 동의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제 숙부가 몰래 심어둔 자들을 클라우스가 전부 쳐냈기에 시간을 조금 벌었다.
아마 그들이 멀쩡히 살아있었다면 바로 그날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고 그 어떤 서신보다도 빠르게 날아가서 이틀 안에는 자신의 숙부에게 닿았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적은 완벽한 보고문이 말이다.
반대로 동부 마족의 귀족 자제들이 보내는 것은 본가에 보내는 편지 정도.
당연히 자신과 클라우스에 대한 정보가 세밀할 수도 없고 그보다는 다른 내용들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이었다.
따라서 제 숙부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해봤자 어느 누구라도 대충은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전부다.
그렇다고 해서 뭐라 할 수도 없는 것이 제 가문에 속한 자제의 편지를 보내주는 것은 그 가문의 호의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런 정보는 없느냐, 더 세밀한 것은 없느냐 말을 할 수가 없다.
‘클라우스가 아니었다면 상당히 난감할 뻔 했어.’
숙부 휘하에 그런 임무를 맡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 또한 그 자들에게 기습을 당했던 기억이 있음을 떠올리면서.
율리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연다.
“클라우스, 그…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요. 아, 절대 당신의 일처리 능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니까 괜한 생각은 말고요! 그러니까….”
“정말로 당신 숙부의 떨거지들을 전부 치워낸 것이 확실하느냐, 그걸 묻고 싶은 모양이죠?”
“아, 네. 그렇게 되겠네요.”
“전부 처리했습니다.”
“역시 그렇죠?”
“일단은 말이죠.”
일단은? 율리아는 클라우스가 덧붙인 그 말에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짓는다.
전부 처리한 것이면 그런 것이지 일단은, 이라는 말이 왜 들어가는 걸까.
“아직 더 남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숙부가 심어둔 가장 치명적인 비수가.”
“무슨 말인지… 아아.”
클라우스의 말뜻을 이해한 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데미에서 맴도는 늑대 같은 자들도 물론 무서운 자들이었다.
허나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침대 밑에숨어서 때만 기다리고 있는 표범이기도 했다.
“그리고 율리아, 당신한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 모두를 처단할 생각은 없습니다. 최소한 하나 정도는 붙잡아서 정보를 토하게 하거나 역으로 써먹을 생각이에요.”
“가능할까요? 내가 알기로 그들은 숙부에게 자의로든 강제적으로든 충성을 바치고 있는데.”
“허니 더더욱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을 한다면 또한 당신의 반대편에 있는 적도 그리 생각할 테니 말입니다.”
클라우스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타고 따르는 이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고용한 이로 위장한 리르가 끼어있었다.
어차피 그녀의 신분은 위장 신분이었으니 이제는 그걸 버려도 상관없다.
지금 리르는 아카데미의 남성 생도가 아니라 플랑슈를 도와 보조 일을 맡아줄 보조 메이드로서 클라우스에게 고용된 마족 여인이었으니까 말이다.
“…흠흠!”
갑작스레헛기침을 하는 율리아.
그에 클라우스가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저 뒤에서 아주 능숙하게 마차를 모는 플랑슈를 바라보면서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영웅에게는 삼처사첩이 죄가 아니라고 하죠.”
“예?”
“하지만 당신은 내 사람이에요. 내 남자라고요. 당신을 원하는 여인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당신은 영원히 내 거야. 나를 안은 남자니까 그 정도는 감내해요. 알겠어요, 클라우스?”
말을 끝낸 율리아는 그렇게 말해놓고서는 또 부끄러워졌는지 흐응! 하고 고개를 돌린다.
아무래도 자신은 리르를 본 것인데, 그녀는 마차를 몰고 있는 플랑슈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어디를 봐도 자신이 플랑슈에게 밀릴 수가 없는데, 그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남자의 여인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클라우스에게 경고 같은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자신을 여인으로서 안았으니 가능하다면 오로지 자신만 보아달라고.
다른 여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않겠으나 클라우스 선에서 알아서 선을 긋고 거리를 두라고 말한 것이다.
“크흡. 크흠.”
“우, 웃지 마요. 웃지 말라고요!”
율리아를 비웃는 게 아니다, 그냥 정말로 귀여워서 그러는 것이다.
이 상태로 몇 년 만 지나면 저 여인은 철혈 군주로서 다시금 태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때에는 이런 귀여운 투정, 조금은 철없는 소녀 같은 질투 따위 하지 않는다.
그 때의 율리아는 다만 선포하고, 또 명령할 뿐이다.
넌 내 남자다. 다른 여인들의 접근은 허락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도 나를 안아라. 정성스레 핥고, 깨물고, 기쁘게 해라.
이런 식으로 미소 하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그리 말할 것이었다.
‘물론 정작 침대 위에서는 그런 당당한 모습 따위 다 사라지고 앙앙 귀엽게 울어대는 농익은 미녀만이 있을 뿐이겠지만.’
왜 굳이 이렇게나 개고생을 하면서 빌드업을 했겠는가.
앞에서는 다른 놈들의 반발을 사지 않도록 수많은 신하 중 하나로 지내면서.
뒤에서는 마왕의 귓가에 속삭이고 그녀의 몸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마치 황제의 뜻을 좌지우지하는 후궁 마냥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흐르게 하려는 것이다.
“혹시 질투하는 건가요, 율리아?”
“지, 질투라뇨? 하! 저기요, 클라우스? 상당히 불쾌하네요. 고작 메이드 따위에게, 당신의 왕이자 주군인 내가 저 여인에게 그런 감정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아뇨. 당연히 아니죠.설마 마왕께서 그런 부분에 질투를 할까 봐요.”
“그렇죠? 저는 질투를 한 적이… 어…. 어어?”
본인이 말해놓고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다.
질투를 한 적 없다, 자신에게 한참 못 미치는 여인들에게는 그런 감정 지니지 않는다.
그 말에서 율리아는 제 실수를 알아차렸는지 탄식을 흘리다가 클라우스를 흘긴다.
이렇게 된 이상 혹여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제 입으로 말한 것을 번복하는 것이 되었으니 마왕 입장에서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율리아는 노렸군요? 라고 말했지만 클라우스는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한다고 해서 이 여인이 질투를 안 할 여인이냐? 절대 아니다.
나중에 가면 클라우스 곁에 다른 여인이 와서 조금만 묘한 분위기를 잡아도 두 눈을 빛내면서 허튼 짓 하면 나도 허튼 짓 할 거라고 대놓고 시위까지 할 것이다.
헌데 거기서 또 재미있는 부분은, 율리아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나타샤나 세실리, 카엘라 모두가 율리아나 다른 여인들을 질투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고 있기에, 그리고 누가 그의 진짜 여인인지 알고 있기에 한 발자국 물러나서 그저 곁에 있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괜히 율리아와 다퉈봤자 결국 자신들이 손해라는 것을, 클라우스가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아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플랑슈는 조금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클라우스는 혹여 그 둘이 부딪칠까 율리아를 이용해서 플랑슈와의 서열을 잡아두었다.
실제로 그 날 이후 플랑슈는 율리아에 대한 모든 경계와 적의를 거두었다.
클라우스를 대하는 것만큼 그녀 역시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플랑슈의 조금은 억지스러운 반응에 율리아가 일일이 대응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저런 여인한테는 질투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라는 말을 받아두었다.
여인들 문제는 여인들끼리 해결하는 게 가장 좋다지만 지금은 그리 여유롭지 않다.
당장 마왕성으로 가게 되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마왕과 메이드가 계속 기싸움을 벌이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튼, 내 말 이해했죠. 클라우스?”
“극렬하게 반대하거나 막지는 않을 테지만 눈치껏 해라.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조금은 괜한 걱정이라고 해두고 싶네요. 설마 마왕을 옆에 두고 대놓고 다른 여인과 노닥거리는 꼴을 보일까요. 심지어 그 마왕이 나의 주군이고 나의 여인인데.”
모호하게 말을 돌리거나 괜한 소리를 해봤자 하등 의미가 없다.
진심을 다해서 본심을 숨기지 말고 전부 말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당장 자신의 대답을 듣자마자 보기 좋게 달아올라서는 당장이라도 확 껴안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진 마왕을 보고 있으면 그게 정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보다 율리아. 슬슬 하대하는 게 어떨까요.”
“싫어요. 아직 마왕성도 아니고 주변을 봐요. 딱히 여기서 내가 당신에게 존대를 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을 이는 없잖아요?”
그 말에 클라우스는 확실히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마왕인 율리아가 국경을 넘어서 동부로 들어섰는데 마중을 나오는 이가 하나 없다.
아무리 아카데미의 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는 생도라지만 그래도 마왕인데.
다들 눈치만 볼 뿐 움직이는 놈이 보이지를 않았다.
“손 볼 곳이 많군요. 이곳까지 당신 숙부의 눈치를 보는 자들이 있을 정도라니.”
“그나마 다행이죠. 최소한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니까. 아마 그런 놈이 있었다면 진작 습격이라도 했을 거예요. 실제로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 한 번 당하기도 했고.”
“왜 그 부분을 문제 삼지 않았죠?”
“대륙 전쟁 이후 불안한 정국이 계속된 건 서부만이 아니에요. 우리 동부도 상당히 불안했죠. 특히 대륙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 중 원래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 하고 겉으로 돌던 자들이 급기야 도적떼가 되곤 했는데 그것으로 위장을 했었어요.”
율리아의 숙부는 그걸 잘 이용한 것이고, 율리아는 고작 도적이라 하는 놈들에게도 위협을 받았던 것이니 참으로 비참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나마 세실리 레블랑 덕분인지 조금은 호위병들이 붙었지만 말이에요.”
현재 율리아와 클라우스 일행은 자신들 이외에 세실리, 카엘라, 리르, 그리고 플랑슈와 그 외에 그들을 호위하는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블랑 가문 휘하에서 지휘를 받았던 자들이라는데 세실리의 정체를 알고서는 은혜를 갚겠다면서 자원을 한 것이었다.
허면 여기서 궁금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분명 율리아에게 충성을 다 하겠다 맹세한 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 자신들의 왕이 돌아오고 있음에도 조용한 것일까.
“클라우스.”
“네, 율리아.”
“이렇게 해서라도 꼭 마왕성에 귀환 일정을 알리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었나요?”
“당연히 있죠. 깜짝 선물이랄까?”
“…장난치지 말고요.”
“정말입니다. 정말로 깜짝 선물을 해줄 생각이에요. 물론 당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곧 마왕이 도착할 거라는 소식에 어떻게 뒤통수를 쳐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해주는 거죠. 작전을 채 짜지도 못 했는데 짜잔, 하고 말이에요.”
마왕성에서 여태까지 충신 코스프레를 하고 있을 한 남자를 떠올리면서.
클라우스는 그 놈을 어떻게 조져야 할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