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88화 (88/148)

EP.88 NTO

프라시온 전투가 끝난 지 하루가 지났을 시점이었다.

─보고는 받았네. 리엔 사령관.

도시 하나가 파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그렇지만 상급 사령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평온했다.

아니, 오히려 어딘가 후련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리엔은 구역질 나는 걸 느꼈다.

─설마 데스 웜이 그런 식으`로 후방에 있는 도시를 먼저 공격할 줄이야···. 정말 놀랍군.

말과 달리 상급 사령관─지베르트 백작의 얼굴에는 놀라워하는 기색이 하나 없다.

안 그래도 수상쩍게 여겼던 일이었지만, 덕분에 리엔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리엔은 그제야 저번에 지베르트 백작이 숨기려고 했던 전투 기록이 무엇인지 대략 알 것만 같았다.

이들은 이미 데스 웜에게 한 번 당했다.

어제 프라시온이 당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반응이 나올리가 없다.

그러면 그러한 기록을 왜 숨겼는가.

그건 단순히 시민들에게 공개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진정한 의미로 이번 일을 기회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프라시온을 붕괴시킬 수 있는 기회.

이들은 자신들에게 제일 먼저 반기를 들었던 도시의 시민들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확실히 이번 일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야. 그래도 그나마 자네의 훌륭한 지휘가 아니었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겠지.

훌륭한 지휘라···. 바보 같은 이야기다. 리엔 역시 데스 웜에게 당한 것은 똑같았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태에서 제일 큰 힘이 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의식 불명이고 말이다.

리엔은 간신히 표정을 관리하며 상급 사령관─지베르트 백작을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의 벽안에서는 시리도록 차가운 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급 사령관님. 정말 몰랐던 게 맞습니까?”

─뭐가 말이지?

“이번 사태에 대해서 말입니다. 데스 웜이 일부러 후방을 공격할 거라는 걸, 정말 몰랐던 겁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귀띔을 해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부대에서 더 지원을 받아내고 후방에서 나타날 데스 웜에 대비했겠지.

─그러면 우리가 숨기기라도 했다는 건가?

순간 호의로 가득 차 있던 지베르트 백작의 눈이 천천히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리엔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차가운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면 아닙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군.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지베르트 백작은 코웃음쳤다.

─자네가 이번 일에 대해서 큰 충격을 받은 건 알겠지만, 쓸데없는 의심은 말게나. 지금같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괜한 분란을 일으키면 되겠는가?

“······”

─게다가 우리는 자네가 해달라는대로 해주었네. 성병기는 물론이고, 전술 마법탄과 다른 부대의 지원 병력도 차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그래, 어째서인지 협력을 잘 해준다 싶었다.

상황이 위급했던 탓에 저들의 저의를 차마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저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들이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였다.

비록 이번에 도시를 지키는데 실패했지만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했다.

시민들에게 떳떳하게 드리내밀 ‘노력’의 증거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이번 일은 모두가 최선을 다했지만 막지 못했을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이번 일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네.

과연 그럴까. 그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그들은 정말 이번 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다.

단지 있으면 좋겠다고 자그마한 희망만을 가질 뿐.

저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이번 일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단순히 사사로운 복수에 성공했다고 기뻐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프라시온 시민들의 대규모 피난 계획은 걱정 말게나. 이번에는 사령부쪽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줄 예정이니.

···이번에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통신이 끊겼다.

“······”

리엔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손으로 눈구덩이를 짓눌렀다. 손가락 끝의 차가움이 그나마 뜨겁게 달아오른 감정을 식혀주는 듯했다.

하지만 이걸로 괜찮아질리가 없다. 리엔은 울렁이는 감정을 겨우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2.

하룻밤 동안 비가 계속 내린 탓일까.

오늘은 하늘이 무척이나 쾌청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햇볕이 쏟아지는 그 모습이 전날의 전투가 그저 꿈이 아니었을까 싶게 만들었다.

······물론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지난 전투의 흔적이 이곳저곳에서 보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직 그 남자도 일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네토루가 병석에 누워있는 상황 속에서,

당분간 393부대는 상급 부대의 배려로 담당하던 구역에서 벗어나 프라시온에 주둔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단순한 배려는 아니었다. 어차피 부대 전체가 싸울 상태가 아니니, 이번 전투로 인해 폐허가 된 도시를 정리하는 걸 도우라는 방침이었다.

여전히 도시 곳곳에는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널려 있었고, 그걸 치우기 위해서는 성기병의 힘을 빌리는 게 합리적이니.

그래도 사실상 휴식 기간에 가까웠다.

건물 잔해 치우는 게 버그들과 싸우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으니까. 언제 출격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매번 긴장하고 있는 것보다는 도시에서 시민들을 돕는 게 마음 편한 일이었다.

물론 393부대가 후방에 빠지면 기존의 관측 영역에 공백이 생겨난다. 그러면 버그들이 영역 안으로 침투하는 걸 감지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393부대가 책임지고 있던 구역은 외부에서 지원 오는 다른 부대가 맡기로 했다.

아무튼, 그러한 상황 속에서.

병실에 돌아온 세레스는 방금 막 물을 채우고 온 꽃병을 창가에 놔두고는, 네토루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놔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손에 턱을 괸 채 빤히 그를 바라보았다.

미지근한 침묵 속.

세레스는 그 침묵을 찢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 오늘도 안 일어나는 건가요.”

그날 전투로부터 여전히 네토루는 혼수상태였다. 가끔씩 세레스가 이렇게 말을 걸어보고는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다. 단지 숨만 쉬고 있을 뿐.

···정말. 이 사람, 일어나기는 하는 걸까?

비록 카렌에게는 침착한 얼굴로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이쯤 되면 세레스도 걱정될 수밖에 없다.

가슴 안의 초조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렇지만 세레스는 애써 차분한 얼굴로 네토루를 계속 간병했다. 원래는 카렌이 옆에서 도와주기도 했지만, 오늘은 세레스가 떠맡은 상태였다.

일단 세레스가 네토루의 커플링 파트너라는 것도 있었고, 어차피 오버 히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네토루가 회복을 도와주었으면 모를까, 세레스는 한두 달 동안은 푹 쉬어줘야 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병원에서 대기하고 있는 세레스와 달리 카렌은 오늘부터 나츠오랑 같이 건물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나갈 예정이었다.

당연하지만 저번 전투에서 무리한 카렌이나, 원래 입원 중이던 나츠오의 몸이 멀쩡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건 전투가 아니라, 건물 잔해를 치우는 간단한 일인지라 몸에 부담이 덜했고, 그러니 가벼운 기동까지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던가.

아무튼,

‘···그 두 사람 괜찮으려나.’

세레스는 어제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서먹해 보여서 걱정이었다.

뭔 일이 있었냐고 물어도 카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나츠오가 뭔가 잘못하기는 했다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뿐.

‘···사이 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두 사람을 내심 귀여운 동생들로 보고 있던 세레스로서는 우울해지는 일이었다.

끝내 이 우울한 감정을 견디지 못한 세레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보았다.

“···에잇.”

이윽고 앞으로 나아가던 세레스의 손가락이 네토루의 뺨에 닿았다. 평소라면 하지 못할 행동. 하지만 의식이 없으니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세레스는 네토루의 뺨을 콕콕 찌르며 장난쳤다.

솔직히 말해서 본인 스스로도 의식 없는 환자한테 이게 뭐하는 건가 싶었지만,

···이런 거 당하기 싫으면 빨리 일어나던가.

그렇지만 정작 네토루에게 장난치면서도 세레스는 즐거움을 느끼기보다는 흐릿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도 네토루는 반응은 없다.

그저 잠든 아이처럼 조용히 숨만 쉬고 있을 뿐.

이윽고 뺨을 찌르던 세레스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좀 일어나요. 부탁이니까.”

눈시울이 붉어지며, 또 눈앞이 흐려진다.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에 좀 더 뭐라고 말해둘 걸 그랬다.

걱정 말고 뒤에서 응원하라더니, 이게 뭔가.

괜스레 허세 부리던 그의 뒷모습이 생각나서 세레스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러던 그때였다.

“······너, 매번 느끼는 건데 정말 잘 우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세레스는 흠칫했다. 그리고는 눈가를 훔치던 손등을 천천히 내렸다.

순간 환청인가 싶었다.

“설마 나 때문에 우는 거야?”

하지만 환청이 아니다. 그가 뚜렷한 눈동자로 세레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레스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기다렸던 네토루의 목소리인데.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세레스는 훌쩍이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 언제 일어났어요?”

“네가 에잇하면서 볼 찌르고 있을 때?”

“···아.”

“덕분에 고민 많이 했어. 이거 일어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러니까···. 그게···.”

“그런데 세레스, 네가 갑자기 울어버리니까···. 나도 뭐,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겠더라고.”

“······윽.”

네토루의 능글맞은 미소에 차마 세레스는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무척이나···. 반가운데,

꼭 이렇게 지금 깨어나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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