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2 파트너는 누구인가
1.
“…하하. 역시 안 통하네요?”
경직된 분위기. 침대 위에 너부러진 상태로 세레스가 입꼬리를 살짝 당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지만 네토루가 보기에는 세레스가 애써 여유로운 척하는 걸로 밖에 안 보였다.
일종의 허세인 것이다.
그녀가 정확히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세레스.”
“…네?”
네토루는 그녀의 질 나쁜 장난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다.
그는 침대에 눕혀져 있는 세레스와 거리를 좁히며 그녀의 얼굴 옆에 양손을 둔 채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
“……”
약간의 공간을 둔 채 서로의 시선이 마주하며,
세레스의 얼굴 위에 네토루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남자에게 깔려 있는 모양새가 되자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그 모습이 마치 겁에 질린 초식 동물 같다. 네토루는 그 상태로 냉담하게 말했다.
“빨리 꺼내.”
“……”
당연하지만 세레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살짝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틀고는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눈치챘으면 직접 가져가든가요.”
“그래도 괜찮겠어?”
네토루는 차갑게 웃었다.
설마 이것도 반항이라고 하는 건가.
그런 네토루의 웃음에 뭔가 생각하던 세레스도 뒤늦게 이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말을 바꿨다.
“아, 아니요. 역시 안 되겠….”
“미안하지만 늦었어.”
“아앗!? 지금 어, 어디를 만지는…. 꺄앗!?”
네토루는 망설임 없이 세레스의 몸에 손을 댔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옷을 뒤졌다. 하지만 딱히 그녀를 희롱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건가.’
이윽고 세레스의 살결을 타고 흐르던 손끝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잡혔다. 네토루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서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자 세레스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역시 녹음기인가.”
네토루가 발견한 건 마도구였다. 아마 소리를 저장하는 마법이 담겨 있는 거겠지. 형태도 딱 현실에서 보던 녹음기처럼 생겼다. 작고 가벼워서 숨기기 좋다고 해야 할까.
내가 유혹당해서 자신을 덮치면 소리를 저장해서 뭔가 약점이라도 잡으려고 한 건가?
제법 음흉한 짓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다지 화가 안 난다는 점이었다.
애들도 장난도 아니고 뭔가 계략을 짤 거면 연기라도 잘 할 것이지,
방앞에서부터 보여준 세레스의 모습은 정말…. 화가 나기는 커녕 한탄만 나올 지경이다.
남자를 유혹하기 좋은 몸을 지닌 주제에, 그런 어수선한 모습으로 도대체 뭘 유혹하겠다는 건가.
정작 본인은 잘 모르는 것인지 세레스가 말했다.
“…당신, 이건 어떻게 알았어요?”
“글쎄. 감이라고 해야 할까? 애초에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부터가 글러 먹었어. 그렇게 긴장한 얼굴로 오면 딱 봐도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지.”
“……읏.”
조소하는 웃음에 세레스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건지, 치욕스러운 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둘 다인가.
방금 전의 세레스는 풋풋한 처녀 아가씨가 애써 야한 척하며 유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네토루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의외로 그 나이 될 때까지 남자 경험은 많이 없나 봐?”
“…비웃지 마요. 그냥 저는 남자를 유혹해본 적이 없을 뿐이에요.”
세레스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기야, 세레스는 여기사였다.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 따위를 배웠을 리가 없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도 이성을 진심으로 유혹해본 적은 없을 테고.
애초에 타쿠야 같은 꼬맹이랑 파트너를 하고 있는데 남자를 유혹할 일이 뭐가 있을까.
게다가 유혹할 필요도 없다. 세레스의 몸이라면 굳이 유혹할 것도 없이 남자들이 알아서 넘어왔을 테니까. 아마 세레스가 별짓을 안 해도, 타쿠야 그 꼬맹이도 홀려 있었겠지.
몸매 좋고 온화하고 따스한 누나.
대부분의 소년들이 좋아할 만한 여성상 아닌가.
아무튼, 뭐든 좋다. 어쨌든 이 아가씨가 제법 엉큼한 짓을 한 건 변함이 없다.
이런 세레스가 괘씸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
안 그래도 네토루는 애써 태연한 척하는 세레스가 마음에 안 들었다.
──삐걱
그래서 그는 세레스의 양 손목을 쥐고서 위로 강제로 끌어 올렸다.
“꺗? 자, 잠시만…! 지금 뭘 하려고!?”
“뭘 놀래. 원래 이럴 생각으로 온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거지.”
“……!”
비록 여기사라고 하지만 세레스가 여자인 건 변함 없는지라 얇고 가냘픈 손목이다. 세레스는 손에 힘을 주며 저항해보지만 무의미했다.
“이, 이거… 놔요!”
여성 파일럿이 남성 파일럿을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몸 안에 존재하는 마력 신경계의 구조와 근원부터가 다르니까.
여성 파일럿은 성기병을 움직이기 위해 몸 안에 마력 신경계를 담고 있지만,
남성 파일럿은 육체 강화 쪽에 특화되어 있었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투에서 반응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남성 파일럿의 육체적 한계를 끌어올릴 수밖에 없으니까.
“으윽! 으읏!”
하지만 세레스는 포기하지 않고 양 손목에 힘을 주며 발버둥 쳤다. 다리를 뒤뚱거리며, 온몸이 들썩인다. 심지어 가슴팍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덕분에 애써 정리했던 이불보가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세레스의 향기가 더욱 진해졌다.
방금 막 씻고 온 육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자극적이었다. 촉감도, 냄새도, 어느 하나도 나쁠 것이 없다.
…과연 연기는 어색해도, 준비는 철저하다.
게다가 살결이 희미하게 비치는 새하얀 셔츠에, 적당히 피부를 노출하는 돌핀 팬츠까지. 적어도 남자가 뭘 원하는지 알고는 있다.
네토루는 무의식적으로 속으로 감탄했다.
“놔, 놔요…! 저는, 그냥…!”
“그냥? 그래서, 뭘 하려고 했는데? 세레스. 네가 직접 말해 봐.”
“…그, 그러니까.”
지친 걸까. 세레스의 얼굴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숨소리도 거칠다.
그러다가 끝내 어느새인가 저항을 멈추고는 몸에 힘을 뺀 채 중얼거렸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놔줘요.”
“뭘 잘못했는데. 그거 말하기 전까지는 못 놔줘.”
여기서 사과하면 그만인 줄 아는 걸까.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알고 있는지 차갑게 노려보자 알아서 시선을 내리깔며 기가 죽는다.
이쯤 되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려고 한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정말로 자신의 계략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네토루는 압수했던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그러자 아래에 깔려있던 세레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읏? 자, 잠시만요. 그걸로 뭘 하려고요?”
“당연히 네 잘못을 녹음하는 거지. 그러니까 네가 하려고 했던 걸 모두 말해. 그러지 않으면 이거 안 놔줄 거니까.”
“……으읏.”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세레스의 얼굴은 불쌍할 정도로 아연하게 변해 있었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런 세레스의 모습은 꽤나 유혹적이었다.
어설픈 행동 하나하나가 오히려 시각을 자극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계속 입을 앙 다물고 있는 걸 지켜볼 수는 없다.
“꺄앗? 그, 그만…!”
네토루는 세레스의 두 손목을 한손으로 잡은 채 좀 더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남은 손으로 그녀의 옷자락 끝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이윽고 새하얀 배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의 세레스는 완벽히 제압된 상태다.
하지만 네토루는 섣불리 선을 넘을 생각은 없다.
여기서 세레스가 정말 비명을 질렀다가는 난리가 나니까. 그럴 때는 네토루도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이건 조금 음흉한 구석이 있군.’
분명 세레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그러니 아마 그건 최후의 수단일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진정으로 믿는 건, 네토루가 일정 선을 넘지 못할 거라고는 확고한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네토루는 일부러 그 아슬아슬한 선을 넘을듯 말듯 세레스를 애간장 태우고 있었다.
천천히 올라가던 옷자락이, 부드러운 봉우리에 걸렸을 때였다. 파일럿용 브래지어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낼때 쯤.
이윽고 고뇌하던 세레스가 예상했던 그대로의 내용으로 협박했다.
“…네토루. 당장 여기서 멈춰요. 안 그러면 지금 제가 이 자리에서 곧바로 비명을 지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무섭기는커녕 귀여운 협박이다.
하다못해 표독스럽게 노려보기라도 하던가.
자기가 화났다는걸 말하듯 눈에 잔뜩 힘만 줘봤자 그것은 더욱 남자를 자극하게 만들 뿐이었다.
“비명 지를 거면 지르던가. 그런데 할 수 있겠어? 어차피 못하잖아.”
“으윽…. 당신, 정말 이럴 거예요?”
비명을 지르는 건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애초에 세레스가 원하는 건 ‘네토루’ 라는 사내를 옥죌 수 있는 무언가였다. 적어도 서로가 파탄에 이르는 최악의 결말은 절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어수선한 부대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대로 생각이 있다면 세레스는 비명을 지르지 못한다. 정말로 강간당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던 세레스가 이제는 항복했다는 듯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하면 여기서 멈출 건가요?”
“글쎄? 하는 거 봐서.”
“……”
세레스는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걸까.
이윽고 세레스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 저는……. 하려고……. 했어요.”
떨리는 목소리가 당장 울 것처럼 애달프다.
그런데 목소리가 작다. 단어 그대로 개미 목소리였다. 네토루는 녹음기를 그녀에게 가까이 대며 말했다.
“세레스. 안 들리니까 제대로 똑바로 말해.”
“다, 다시요? 그, 그렇지만….”
“어서.”
“윽…. 저는…. 당신한테 강간당한 척해서……”
여전히 목소리가 작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마도구에 소리를 저장할 수준은 된다. 네토루는 세레스가 자신의 잘못을 털어놓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덜컹
별안간 방구석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체 모를 소음.
“……”
그 소리에 간신히 말을 이어나가던 세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며 잠시 주변을 방황하다가 이윽고 네토루를 응시했다.
아무런 말은 하지 않지만, 자색 눈동자가 말하였다.
방금 이 소리는 뭐냐고.
그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네토루는, 방금 그 소리를 못들은 척 자연스럽게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한 채 세레스에게 말했다.
“뭐해. 하던 말이나 계속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카렌 일러 후원자 명단
(기브릴 얀별 잠자는곰군 무딜링호흡망나니 사라말아이솔 파페포포 vnk9982 광휘 커피@@ 눈나조아 이불킹 고운말 Vurgil darkep)
세레스 일러 후원자 명단(앞으로 추가 예정)
(에어프라이 졸린듯 앱없나 미르마루 천경)
7/14 졸린듯님, 앱없나님, 미르마루님, 천경님! 후원 감사합니다! 덕분에 세레스 일러 제작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이 중복으로 올라갔는데, 일단 비밀글로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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