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1 파트너는 누구인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내가 네토루의 방에 와 있는 걸 세레스가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만약 들키면 뭐라고 변명하지?
그냥 네토루에게 볼 일이 있어서 왔다고 말할까?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탈의실에서 세레스와 분명 약속하지 않았는가.
의무실에서 약을 받고 방에서 푹 쉬고 있을 테니까 걱정 말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방금 전에 해놓고 네토루의 방에 이렇게 떡 하니 있으면 어딘가 이상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오버히트 상태로 남자 방에 와 있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그것도 욕탕에서 몸을 깨끗이 씻은 채 곧바로 말이다.
이건 모양새가 이상하다. 뭘 하든 수상쩍은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눈치 빠른 세레스라면 분명 그냥 넘어가지 않겠지. 온화하지만 감이 좋은 여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카렌은 떳떳하지 못한 상태였다.
방금까지 네토루와 하던 것을 떠올리자니 카렌은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며, 다급하게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어떻게 하지? 이걸 어떻게 해야….
안 그래도 오버 히트가 덜 가라앉은 탓일까. 제대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는다.
게다가 방금까지 이 공간 안에서 하고 있던 짓을 생각하니 뭘 하든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카렌. 진정해.”
고개를 숙이며 고민하던 카렌은 문득 자신의 머리를 누르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네토루였다.
“네가 세레스한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겁먹은 거야?”
“그, 그렇지만!”
갑작스레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뭐라 할 여유도 없이 카렌은 고개를 들어 네토루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로운지 조용히 웃고 있었다.
카렌은 그게 황당할 따름이었다.
녀석은 아무런 걱정도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빤히 쳐다보고 있자 네토루가 말했다.
“어떻게 할까? 그냥 내가 세레스에게 잘 말해서 돌려보낼까?”
“…그럴 수 있겠어?”
“아마?”
“그, 그럼…. 그렇게 해줘.”
네토루의 말에 카렌은 다급히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러자 그 모습이 즐거운지 네토루의 입가에 새겨진 미소가 더욱 진해졌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카렌은 세레스에게 지금 이 상황을 들키고 싶지가 않았다.
─…네토루? 안에 없어요?
“……”
다시 한번 세레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렌은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목소리가 세레스에게 들릴까 걱정돼서였다.
─이상하네…. 방에서 분명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
세레스가 왜 네토루의 방에 왔는지 모르겠지만,
카렌은 입을 다문 채 네토루를 흘겨보았다. 어서 가서 세레스를 돌려보내 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알겠으니까, 걱정 마.”
그러자 네토루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유로운 태도를 보니 카렌도 내심 안심이 되는 걸 느꼈다. 뻔뻔하지만 그래도 녀석이 걱정 말라고 할 때는 항상 일이 잘 풀리고는 했다.
그래, 애초에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상황은 아니다.
어쨌든 잘 빠져나가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세레스는 방안의 상황을 전혀 모른다.
“아, 혹시 모르니까 적당한 곳에 숨어 있어.”
“…응.”
카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토루의 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몸을 숨길 곳은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그러면 역시…….
2.
“……흠.”
끝내 카렌이 선택한 장소는 옷장이었다. 네토루는 내심 카렌이 화장실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조금 의외였다.
뭐…. 어떤 곳이든 크게 상관은 없다.
적당히 즐겼으니 됐다. 카렌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보면 볼수록 의외로 허둥지둥거리는 면이 많은 녀석이었다.
물론 그만큼 카렌이 놀랐다는 거겠지만. 아마 세레스가 올 거라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 했겠지.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가 이러한 상황을 일부러 노린 건 아니었다. 세레스가 언제 찾아올지는 그도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세레스를 어떻게 돌려보내면 좋을까.”
아무튼 카렌만큼이나 네토루 역시 지금 이 상황이 난처한 건 변함이 없다. 카렌이 방에 있는 걸 보이면 조금 곤란하다.
그래서 네토루는 세레스를 돌려보낼 말들을 몇 가지 생각해둔 채 문을 열었다.
“……뭐야. 안에 있었네요?”
그러자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세레스가 새침스럽게 서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계속 침묵한 채 말을 무시했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팔짱을 낀 채 네토루를 한차례 훑어보던 세레스가 말했다.
“당신, 왜 이렇게 대답이 없었어요?”
“음. 그냥 화장실에 좀 있었어.”
“…화장실.”
세레스의 눈매가 희미하게 꿈틀거렸다. 뭔가 믿는 눈치는 아니였다. 하지만 깊게 따질 생각은 없는지 나직이 한숨을 쉬고는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이대로 바로 방에 들어올 생각인가.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의 앞을 막았다. 손을 뻗어 방문 입구를 차단한 것이다.
그러자 세레스가 의아한 듯 앞을 막아선 팔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뭐에요?”
“내 방에 들어오려고?”
“네. 단둘이서 이야기할 게 있으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스와핑에 대한 면담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약속을 잡은 걸 보면 뭔가 진지하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방 안에 카렌이 있는 이상 네토루는 세레스를 방 안에 들어오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아직 성인조차 되지 않은 소녀다.
그런 여자애를 방안에 들이고 있다는 걸 들키면 세레스가 어떤 눈초리를 할지 알 수가 없다.
게다가 세레스와 카렌의 친분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니 방 안에 세레스가 들어오는 건, 카렌이 부탁하지 않아도 네토루 역시 진심으로 막아야 할 일이었다.
“세레스.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하는 게 어때? 굳이 내 방에서 할 필요가 있는 건가?”
“안 돼요. 방에서 해요.”
그런데 생각보다 세레스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마치 반드시 이곳에서 하겠다는 것처럼.
뭐지, 이 아가씨는 또 왜 이러는 걸까.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어서.
“…손님을 들이기에는 내 방이 많이 더러운데.”
“저는 상관없어요. 어차피 남자 방이 지저분한 거야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니까요.”
참 배려심 넘치는 말이다.
아니, 그것보다 언제부터 내 방이 이렇게 자유로운 공간이 된 거지. 카렌도 그렇고, 세레스의 행동도 참 흥미롭다.
하지만 이런 세레스를 또 뭐라고 할 수는 없는 게, 그녀는 처음부터 방에 찾아오겠다고 말한 상태였다.
그때는 괜찮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지금 와서 말을 바꾸면 확실히 세레스도 언짢게 느껴지겠지.
그렇지만 역시 지금 방 안에 들이는 건 무리다.
그래서 네토루가 세레스에게 무언가 다른 변명을 하기 위해 말을 꺼내려던 찰나였다.
“…네토루. 이건 진지한 이야기에요. 남한테 들려주고 싶지도 않고, 미루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죠.”
세레스가 방문을 막고 있던 네토루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자 자수정을 박아 넣은 듯한 세레스의 자색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고는 곧 깨달았다.
이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단순히 진지한 얼굴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지금 잘 보니까 이건 진지하기보다는, 마치 이곳에 큰 용기를 내어 겨우 찾아온 것처럼 세레스는 진심으로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 증거로 세레스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 깃들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오늘 커플링 했을 때 보여주었던 망연한 모습과도 비슷했다.
겉으로는 강한척 입을 앙다물고 있지만 처연하게 떨리는 입술도 그렇고, 몸마저도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육식 동물 앞에 선 초식 동물이 이러할까.
이런 걸 보면 방문을 열었을 때 보여준 화난 듯 새침스러운 모습도 연기였을 게 분명하다.
어떻게든 최대한 강한척하며 상대를 속이기 위한 여인의 처세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뭐든 좋다.
‘…좋지 않은데.’
이렇게 용기를 내서 찾아올 정도면 분명 가벼운 용건이 아니겠지. 이런 여자를 매정하게 돌려보내는 건 결국 네토루도 무리였다. 어쨌든 커플링 파트너니까.
네토루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세레스. 꼭 지금 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야?”
“네. 당장 내일이 되면 늦으니까요.”
“……”
그런가.
네토루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되려 세레스가 뭔가 죄를 진 것처럼 몸을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본인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눈치를 보는 그 모습이 무척 아련했다.
“…그래. 안으로 들어와.”
“고마워요….”
고맙다는 말은 또 왜 하는 걸까. 여기서 고마울 게 뭐가 있다고. 덕분에 방금까지 세레스의 새침스럽던 모습이 더욱 우습게 느껴졌다.
입구를 막고 있던 팔을 치워주자 세레스는 조심스레 현관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는데,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잘 배운 귀족 아가씨처럼 차분하고 우아했다. 그저 신발 하나 벗는 것뿐인데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이것도 여기사라 그런 건가?
이윽고 세레스는 그렇게 신발을 벗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미지의 공간을 개척하는 모험가마냥 조심스럽게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란 듯 말했다.
“…어라. 생각보다 방이 깔끔하네요?”
“뭐 그렇지.”
“그런데 분명 아까는 방안이 더럽다고 하지 않았나요?”
“……”
네토루는 입을 다물었다. 그 불편한 침묵에 세레스는 눈을 살짝 치켜뜨고는 불만스럽다는 듯이 입을 오물거렸으나,
“응?”
그러다가 세레스는 책이 가지런히 정리된 책장을 보고는 눈을 빛내며 다가섰다.
책을 좋아하는 걸까. 세레스는 책장 안에 보관된 책들을 살펴보더니 살풋이 미소 지었다.
“이건 조금 의외네요. 설마 당신이 이런 책들을 가지고 있었다니. 굳이 부대에 가지고 올 정도면 꽤나 소중히 다루는 책인 것 같은데….”
책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걸까. 그녀는 책장에서 발견한 책의 제목을 하나둘씩 중얼거리더니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이건 뭐래서 좋다는 둥, 작가가 어떻다는 등 상당히 활기찬 기색이었다. 소설과 인문학을 가리지 않고 두루두루 즐기는 타입인 듯했다. 생각지 못한 곳에서 취향이 맞는다.
네토루는 세레스의 말에 적당히 어울려주며 자신의 옷장 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저 안에 카렌이 있다.
그리고 아마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겠지.
“음…….”
…이거 참 곤란한데.
네토루는 무심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이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뭐 어쩔 수 있나. 상황이 이런데.
네토루는 세레스의 긴장감이나 풀어줄 겸 자연스럽게 책장에 있는 책에 대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5분 정도 떠들어댔을까.
네토루는 자신의 침대에 앉아 슬슬 본론을 꺼냈다.
“세레스. 그래서 내 방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
그러자 방금까지 책장 앞에 있던 세레스가 표정을 바로잡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는 네토루를 보며 길게 숨을 내쉬고는 주먹을 살짝 쥐면서 말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커플링에 관해서예요. 이번 스와핑으로 앞으로 네토루, 당신이 제 커플링 파트너가 되었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혹시 커플링 파트너로서의 협의 같은 거야?”
종종 있는 일이다. 커플링을 위한 서로 간의 가이드 라인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 카렌만해도 자신과 커플링할 때는 이러면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세레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굳이 정확히 말하면 협의보단 부탁이라고 해야겠죠. 제가 당신과 협의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는 건 오늘 전투로 확실하게 알았으니까요.”
“…부탁?”
고개를 끄덕인 세레스는 자연스럽게 네토루의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며 걸터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저는 오늘처럼 일방적인 커플링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은 누가봐도 먼저 몸을 굽히고 들어오는,
어딘가 애원하는 듯한, 애잔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네토루, 어떻게 안 될까요?”
방금 막 씻고 온 걸까. 조금만 거리를 좁혔을 뿐인데 그녀의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그러면서도 처연하게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아름답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봐도 남자를 유혹하는 노골적인 행동거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세레스를 보며 네토루는 문득 생각했다.
남자를 유혹하는 것치고는, 몸에 너무 힘이 들어갔다고.
이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가?
“읏!?”
왠지 그게 우스워서 네토루는 세레스의 팔을 잡아당기고는 자신의 침대 위로 밀쳤다.
그러자 침대가 흔들리며 세레스의 자색 머리카락이 이불보 위로 유려하게 펼쳐졌다.
세레스는 침대에 눕혀진 상태 그대로 조용히 네토루를 응시했다. 아무런 저항 없는, 순종적인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흡사 꺾인 백합을 보는 듯했다.
아니, 꺾인 척 하는 백합으로 보였다.
그래서 네토루는 미간을 좁히며 조용히 물었다.
“…세레스. 갑자기, 뭔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물음에 세레스는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쓴웃음을 흘렸다.
"…하하. 역시 안 통하네요?"
방 안에 들어올 때부터 그렇게 긴장하는 게 보였는데, 설마 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카렌 일러가 나온 것입니다. 이건 슈트 노출 버젼인데... 음. 성기병 조종하다보면 열이 많이 나니 그걸 위한 인체공학적 설계...? ㅎㅎ.
세레스 일러는 이번주 안으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에어프라이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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