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4 복귀
1.
성기병을 타는 여성 파일럿에게 오버 히트는 고질병과도 같았다. 반복된 전투로 누적된 피로 탓에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봤을 경험이었고, 최악의 경우 여성 파일럿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당장 카렌이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 있던 것도 오버 히트의 영향이 컸다. 장시간 걸친 무리한 전투는 카렌의 마력 신경계에 커다란 균열을 새겨넣었다.
오버 히트를 치료하는 방법은 딱히 알려진 게 없다.
그나마 오버히트로 인해 몸에 차오르는 열을 식히는 약만이 몇 개 간소하게 존재할 뿐. 심지어 그것조차도 몸에 좋지 않은 독한 약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버히트는 ‘자연 치유’에 의존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 분명 그러할 터이다.
하지만 이 상쾌한 아침은 무엇일까.
평소라면 기뻐해야 할 일이겠지만, 카렌은 순수하게 기뻐하기 대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거짓말…. 이런 게 가능할 리가….’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나 부정해도,
결과는 정직했다.
비록 몸 상태가 만전을 기한 것처럼 완벽한 건 아니었지만 당장 성기병을 기동할 정도의 수준은 됐다. 무리한 전투만 아니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다.
객관적으로 판단해봐도 믿기 어려운 빠른 회복이었다. 사실 카렌, 자신조차도 내일 제대로 성기병을 기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니까.
만약 이것이 조금만 평범한 방법이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속으로 그리 생각하던 카렌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네토루를 흘겨보았다.
“……”
제39구역으로 복귀하기 전,
아침을 해결할 겸 전투 식량을 입에 물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태연했다.
머리에는 붕대를 살짝 감고 있었는데, 그 덕분인지 그의 목덜미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이 얼핏 보면 전투의 부상이 아닐까 싶은 착각을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건 전투의 부상이 아니었다.
카렌이 네토루의 목을 끌어안으면서 새겨넣은 손톱자국…,
저것이 어젯밤이 꿈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내가 미쳤지….’
저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에서 상기되며,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해진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다.
언제 내가 그렇게 남자와 정열적으로 키스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더욱이 어젯밤처럼 혀가 뒤얽히는 어른의 키스는….
‘…하아.’
그래서일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가슴 안쪽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부끄러움과 자괴감뿐. 끝내 카렌은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쉬며 전투 식량을 하나 뜯었다.
머리는 심란한데, 우습게도 배는 고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오버 히트로 인한 열은 전부 몸의 열량을 태운 것이니까. 카렌이 어젯밤에 일어나자마자 괜히 전투 식량부터 꺼내든 게 아니다. 상황이 어떻든 든든하게 부족한 열량을 채워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이미 지나간 일이고….
생각해보면 네토루, 저 녀석이 도움을 준 건 사실이니까.
자기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 시킨 채.
“…읏. 역시 맛없어.”
에너지바를 입에 문 카렌이 표정을 찡그렸다.
몸이 좀 나아지니까 미각도 정상으로 돌아와 버렸다. 어젯밤에는 잘만 먹었는데 말이다.
2.
전투 식량으로 아침을 해결하고서 곧바로 성기병에 올라탔다.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다. 제39구역의 상황을 빨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느 때처럼 카렌이 조종석 위에 몸을 눕혔고, 네토루가 그런 그녀의 뒤에서 자리를 잡을 때였다.
“네토루.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단순히 나를 ‘치료’하기 위한 행위였던 거야. 그렇지?”
“치료?”
“그래, 치료.”
성기병과 커넥팅을 하던 카렌이 평소보다도 낮게 깔린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과연. 결국,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건가.
뒤에 있던 네토루는 그런 카렌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치료면…. 아플 때마다 내가 치료해줘야겠네.”
“…뭐?”
조종석에 있던 카렌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적어도 오버히트로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리고 전투의 효율성도 달라지고. 그렇지?”
“그, 그건.”
“어떻게 보면 군의관보다 내가 나을 걸.”
“아니, 제발 그렇게 뻔뻔한 소리 좀 하지 말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치료법은 내가 반대야! 다른 정상적인 건 없어? 평범한 게 있을 거 아니야!”
끝내 차분함을 잃은 카렌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도 모잘라 하고 있던 커넥팅마저 취소하고서 획 뒤를 돌아보더니 째릿 노려본다.
네토루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다른 거라면?”
“…예를 들어 그냥 서로 손 잡고 하는 건 없어?”
“아, 커플링 연공법처럼?”
“그, 그래! 그런 방식으로 말이야. 그게 더 간편하고 서로 불편하지 않아서 좋잖아. 그치?”
어디, 어린애를 달래는 것처럼 카렌은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네토루는 그저 재미있었다.
저러면서도 아예 하지 말라고는 안 하는 걸 보니 ‘치료’ 자체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네토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카렌. 미안하지만 손잡는 걸로는 안 돼.”
“…거짓말하는 거 아니고?”
“지금 내가 거짓말하는 걸로 보여?”
“응. 그렇게 보여.”
나름 진지하게 말했건만, 카렌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마치 딴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디서 이렇게 신뢰가 비틀린 걸까. 분명 어제 전투 중에는 나름 호흡이 잘 맞았는데 말이다. 하기야, 카렌에게 뺨을 맞지 않는 것도 다행인가.
“흠.”
하지만 네토루가 정말로 거짓말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걸 어떻게 이해시키느냐가 문제인데.
어쩔 수 없나, 잠시 고민하던 네토루는 어젯밤 있었던 ‘치료’에 대하여 가볍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카렌. 어제처럼 ‘치료’를 하려면 서로 간에 특정한 조건이 필요해.”
“조건…? 그게 뭔데.”
“굳이 표현하자면 의식의 합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서로 입을 맞춰야 한다?”
“그런 거지. 서로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제일 쉽고 좋은 방법이니까.”
물론 다른 좋은 ‘방법’도 있지만, 지금 그걸 말했다가는 정말로 뺨을 맞을 터.
“……그 뻔뻔한 얼굴. 솔직히 믿을 수는 없지만.”
한동안 네토루를 지그시 쳐다보던 카렌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이 이야기는 부대에 복귀하면 다시 진지하게 한 번 해보자. 괜찮지?”
“나는 상관 없는데, 너. 그래도 싫다고는 안 하네.”
“그건….”
네토루의 물음에 카렌은 잠시 침묵했으나,
“…어쩔 수 없잖아. 묵혀두기에는 아까우니까.”
이어지는 카렌의 솔직한 대답에 네토루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조정간을 손에 쥐었다.
3.
확실히 고생해서 ‘치료’한 보람이 있는지 성기병의 기동은 평상시처럼 가벼웠다. 격렬한 전투가 아니라면 적어도 움직이는 건 큰 문제가 없을 터.
‘역시 이쪽으로 지나갔나.’
제39구역으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버그들이 새기고 간 흔적들이 가득했다. 남은 발자국만으로도 그 숫자가 예상치 않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제39구역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두 사람 모두 무사한 겁니까!
기다렸다는 것처럼 리엔이 연락을 해왔다.
“예. 이쪽은 무사합니다.”
─다행입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걱정을 많이 했나 보다.
이렇게 아침부터 즉각 관측된 것을 보면 계속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거겠지.
“그것보다 사령관님. 현재 부대 상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 데이터 링크를 해드리겠습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그립던 스크린이 떠올랐다.
안에는 주변의 지형정보와 버그들의 움직임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부대원들의 위치 정보도 역시 실시간으로 갱신되었다.
……역시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건가.
얼핏 전역의 상황을 살펴보니 부대원들이 방어진을 형성하고 있자, 그것을 뚫기 위해 버그들이 차근차근 공격을 준비 중인 모양새였다.
그렇게 상황을 살펴보던 중 문득 버그들의 숫자와 구성들을 확인하던 네토루는 작게 혀를 찼다.
“……장거리 포격형 스파이더가 언덕에 대거 자리 잡고 있군요.”
아무래도 국경 지역에서 한밤중에 보았던 버그 무리가 바로 장거리 포격형 스파이더였나 보다.
─…예. 막지 못했습니다.
면목 없다는 것처럼 리엔이 힘없이 대답했다.
평범하게 활강포로 무장한 스파이더면 모를까, 자주포로 무장한 장거리 포격형 스파이더가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상대하기 까다롭다.
유명 모 게임의 시즈탱크처럼 녀석들은 기동성을 희생한 대신 화력에 집중한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보통 제대로 자리를 잡기 전에 제압하는 것이 일반적인 작전 방침이다.
“초기 제압에 실패한 겁니까?”
─한밤중에 있었던 기습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관측하고서 곧바로 대응에 나섰지만, 대다수의 부대원들이 야간 전투는 처음이었던 지라….
야간 전투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버그들의 특성상 낮에 움직이는 걸 선호하기도 했고.
게다가 성기병에게 야간 전투는 까다롭다.
어두워지면 버그들도 시야가 나빠지는 건 똑같지만, 멀리서 강력한 화력을 투사하는 녀석들과 성기병은 상성이 너무나도 나쁠 수밖에 없다.
특히 버그들은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어두운 시야 속에서도 동료의 죽음이 확인되면, 망설임 없이 총탄과 포탄을 쏘는 녀석들이었다.
막말로 야간을 노려 버그 하나 제압했더니, 어둠 속에서 돌연 포탄이 날아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초보자’들에게는 쉬운 전투가 아니다.
그러니 야간 작전에 실패했다면 분명 몇몇 인원이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했을 터.
“부대 피해 상황은 어떻게 됩니까?”
─……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곧 리엔이 착잡한 심정을 토해내듯 말했다.
─1소대와 2소대에서 각각 2명씩 전사했습니다.
총 4명이라…. 성기병 2기가 당한 것인가.
“……그런.”
이야기를 듣던 카렌은 흠칫 놀란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돌아오자마자 좋지 않은 소식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일까. 순간 커플링이 흔들릴 정도로 카렌의 감정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슬픔, 한, 안타까움, 허탈함….
그러한 감정들이 네토루에게도 이어졌다.
─…두 사람에게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현재 포인트 306에 위치한 장거리 포격형 스파이더들은 두 사람의 존재를 모르는 상황입니다. 혹시 괜찮다면, 뒤를 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단독으로 말입니까.”
네토루는 고민했다.
현재 버그들은 공격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장거리 포격형 스파이더에 대한 방어가 부실한 상황이었다. 아마 뒤에서 적이 올 거라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겠지.
한 번 해볼법한 도전이었다.
…만약 이쪽의 상태가 좋았다면 말이다.
‘지금 상태로는 무리군.’
당장 어젯밤에 카렌은 오버히트에 이른 상태였다.비록 지금은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고 해도 다음날부터 바로 무리한 전투는 현실적으로 힘들 터.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네토루, 한 번 해보자.”
그때 갑자기 카렌이 뒤를 돌아보더니 네토루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리 말했다.
“한 번 해보자고?”
네토루는 미간을 좁혔다.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다. 실패하면 위험해지는 건 단순히 이쪽만이 아니다. 이쪽을 믿는 부대원들 전부다.
“카렌, 지금 네 몸 상태로는….”
네토루는 말을 하다가 뭔가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인가 카렌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아니, 이 아가씨가 설마…?
카렌이 뭘 고민하는 건지 어렵지 않게 깨달은 네토루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렌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네토루, 어젯밤에 했던 그거, 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 순간 네토루는 생각했다.
부대원들에게 이야기를 듣자하니 나츠오라는 녀석은 상당히 무모한 성격이라던데,
이 아가씨도 그런 성격이 옮겨진 것일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써줘' SF 참가를 고민 중입니다. 흠. 그런데 뭔가 SF 맛이 아니려나?
막 로봇 비슷한것도 나오고 하는데.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