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제 39 구역
현재 인류는 ‘버그’라 불리는 생체기갑 병기들과 전쟁 중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중에서도 지금 청년이 있는 프랑기아 왕국의 상황은 가히 최악이라고 표현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전 국토의 60%를 버그들에게 점령당한 현재.
지금 이 순간에도 국토 어디에선가 ‘둥지’라 불리는 공장에서 버그들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으며,
인간을 향해 적의를 드러낸 채 왕국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아무리 죽여도 끝도 없이 찾아오는 벌레들을 계속 상대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무능한 병사들, 무능한 사령관. 무능한 정부.
마치 이 나라의 멸망을 바라는 것처럼 그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지난 몇 년간 전선을 구르면서 청년이 본 것은 시궁창 같은 현실뿐이었다.
…뭐 당연한가.
처음으로 버그들에게 괴멸당한 나라.
이것이 이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프랑기아 왕국에게 주어진 설정이었으니.
이 나라는 언젠가 분명 멸망할 것이다.
그렇기에 청년은 철저히 생존을 목표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왕국이 멸망을 앞두게 되었을 때 혼자라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위험한 전쟁터에서 성기병으로 버그들과 싸우며 실력을 쌓는 건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였다. 힘이 없으면 필요할 때 탈출 할 수 없을 테니까.
살기 위해선 뭐든 하겠다. 이딴 세상에서 괴물들에게 죽을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다. 설령 그것으로 인해 주변인의 시선이 차가워진다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제39구역에 배치되었을 때도 변함없는 생각이었다.
“벌써 당신이 이곳에 온 지 1주일이 지났네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그와 동시에 청년을 바라보던 이지적인 느낌의 벽안이 차갑게 빛났다. 현재 청년의 앞에는 손에 턱을 괸 채 앉아 있는 금발의 여인이 있었다.
리엔 프러스트.
제39구역 사령관.
믿기 어렵지만, 눈앞에 있는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이 복귀 명령을 내렸던 목소리의 주인이자, 현재 청년이 있는 부대의 사령관이었다.
우스운 일이다.
아무리 근본이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지만,
요상한 말투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 어린 여자가 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있어도 되는 것인가?
아무리 귀족이라도 사령관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닌데….
방금 전에 전투가 끝난 탓일까. 피곤한 표정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여인이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 말입니까?”
반응하는 청년의 태도는 딱딱했다. 상관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어딘가 껄렁껄렁한 기색마저 느껴지는 무례함. 하지만 정작 여인은 개의치 않은 것인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재 당신이 있는, 이 부대에 대해서 말이에요. 이제는 슬슬 부대 분위기 정도는 파악 했을 텐데요?”
“……”
청년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지금 이게 무슨 의미로 묻는 걸까 하고. 그런 청년의 표정을 꿰뚫어 본 듯 여인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어 올렸다.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당신이 대충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알고 있으니까.”
솔직하게…? 그렇게 말한다면야.
“최악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여인의 입가에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마치 지금의 대답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어떤 점에서요?”
“그냥 모든 것이 말입니다. 기본적인 보급을 떠나 장비의 상태를 비롯해 파일럿들의 숙련도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더군요.”
장비는 낡고, 오래되었으며 이곳의 파일럿들은 미숙했다. 아니, 정확히는 경험이 적다고 해야 할까. 재능은 있어 보이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결국 단순히 말해 제39구역은 낡은 구식 장비들로 무장한 신병들을 뭉쳐놓은 듯한 곳이었다.
16세에서 18살 사이의 1,2년차 파일럿이 대부분이다. 이게 정상인가?
“네. 맞아요.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죠. 특히 최전선에서 싸웠던 당신에게는 더욱 황당하게 느껴질 거에요. 게다가 저 같이 어린 년이 웬 사령관 노릇까지 하고 있으니까.”
“……”
어린 년이라니…. 청년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설마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하지만 부정은 하지 않는다. 방금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
리엔 프러스트. 제법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갓 성인이 된 듯한 풋풋한 외견은 어찌 숨길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며칠 전에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아가씨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사람을 외견만으로 판단하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지만, 수년간 여러 전선을 거치며 사령관의 무능을 뼈저리게 느꼈던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 나이에 지휘 경험은 얼마나 있는 걸까?
어린 사령관. 미숙한 파일럿들. 한심스러운 장비와 모자란 보급.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 아닐 수가 없다.
누군가의 악의가 듬뿍 담겨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환경.
이곳에서 지난 1주일간 본 것들은 어처구니없는 것들뿐이다.
“이 곳이 왜 이러는지 혹시 짐작하고 있나요?"
“대충 짐작은 됩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수년이 지났다. 그렇기에 청년은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대충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귀족들의 짓이겠지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간이 찌푸려진다. 제대로 된 사고가 가능한지 의아할 정도로 어리석은 돼지들. 그들이 있는 이상 이 나라에는 희망이 없다.
“네. 당신 생각대로 제39구역이 이 꼴인 건 전부 귀족 놈들 때문이에요. 그들은 내심 제39구역이 붕괴되는 걸 원하고 있을 테니까.”
분노에 잠긴 리엔 프러스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린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마력이 주변의 공기를 서서히 잠식하고 있었다.
‘…이건?’
청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모든 사령관들이 마법사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제법 마력의 색이 선명하다.
어린 여자라 무시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실력은 출중할지도. 하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마력이 흘러나올 정도로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겉으로는 나이에 맞지 않게 냉철한 척하지만 역시 아직은 어린 여자라는 건가.
어쨌든 덕분에 한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리엔 프러스트는 프랑기아 귀족들을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귀족의 한 부류인데도 말이다. 마법이라는 건 철저하게 귀족의 것이었다.
보통 귀족이 이렇게 같은 귀족을 미워하는 경우는 하나다.
혁명군에 가담했던 신귀족.
‘혁명군 귀족 출신의 자녀라도 되는 건가?’
뭐, 아무래도 좋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어린 사령관 아가씨가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가 아니라, 제39구역이 품고 있는 귀족들의 악의였다.
‘좋지 않군.’
대충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프랑기아 귀족들이 제39구역에 악의를 품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제39구역에는 혁명의 시작점이었던 도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껍데기만 남은 시민군 혁명 정부의 마지막 도시이기도 했다.
설마 혁명 정부의 뿌리를 지워내기 위해서라면 몇만 명 정도는 죽어도 괜찮다는 걸까.
정말로 그게 맞다면 어리석은 일이었다. 버그들과 생존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 도중에도 이렇게 추한 짓을 하고 있다니. 제대로 된 이성을 지닌 지성인이라면 불가능한 짓거리였다.
물론 이것에는 나름대로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본래 프랑기아 왕국은 혁명기를 겪는 중이었다. 폭정을 저지르는 귀족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평민들이 들고 일어섰으며, 흔히 프랑스의 그것처럼 귀족들이 단두대에 목이 잘려나가고 있던 시대.
만약 그 흐름이 계속됐다면 혁명은 성공했겠지.
하지만 끝내 혁명은 실패했다.
절정에 이르던 혁명기 도중에 버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운이 없게도 버그들의 침공이 시작된 곳은 혁명 정부의 땅이었고,
미지의 적들은 철저하게 혁명군을 깨부쉈다.
그리고 이것은 귀족들에게 큰 기회가 되었다. 악에 받쳐 있던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미지의 적에게 침략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귀족들은 혁명의 창날을 꺾기 위해 수많은 혁명군을 학살하며 나라를 혁명기 이전으로 되돌려버렸다.
제3 자의 시선으로 볼 때, 정말이지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쓸데없이 많은 피가 흘렀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은 바보 같은 짓거리를 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요즘들어서는 아예 땅을 수복하는 걸 포기하고, 프랑스의 마지노선처럼 절대 방어선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걸 논하고 있는 모양새였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생각하자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버그’들이 넘어올 수 없도록 수백KM가 넘는 커다란 방벽을 세우자…? 과연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만든다고 해도 효용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생체병기답게 끊임없이 진화하는 녀석들의 특성을 떠올리면, 분명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그리고 방벽 뒤에 숨어버리면 녀석들의 둥지는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 다른 건 몰라도 버그를 찍어내는 공장은 어떻게든 파괴해야만 했다.
“……”
아무튼, 제39구역의 상황은 잘 알았다. 그리고 사령관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그렇기에 청년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방금 전에 버그들과 전투를 치른 참이다. 다른 파일럿들은 전부 쉬고 있는데 이렇게 혼자 사령관과 면담을 하고 있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저를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부하 놈과 구질구질한 왕국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건 아닐 터.
청년의 얼굴에 드러난 노골적인 표정을 본 것일까.
리엔 프러스트는 작은 쓴웃음을 짓더니 흐트러져 있던 표정을 정리하며 나직이 말했다.
“그야, 당신의 커플링 파트너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죠.”
커플링 파트너라...
그 말에 청년, 네토루는 무심코 오늘 커플링을 했었던 소녀를 떠올렸다. 여전히 뺨이 욱신거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기 글자수 세는 기준이 뭔가 좀 이상하네요?
6.11 리엔 프러스트 말투 수정 했습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