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화 (1/148)

EP.1 프롤로그

이제는 흐릿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예전에 그는 삼촌을 따라 애니메이션을 하나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제목은 까먹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머리한쪽으로 깊숙하게 남아 있다.

흔하기 흔한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이 어느 날 갑자기 파일럿으로 선택받아,

자신이 살던 도시에서 커다란 로봇을 타고 웬 정체 모를 괴물들과 싸우는 내용이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재밌는 내용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미는커녕 답답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흔히 고구마가 잔뜩 낀 내용이었다.

개연성을 위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파일럿이 된 주인공은 흔한 고등학생답게 평범했고, 미숙했다. 게다가 사춘기 소년의 그것처럼 감정적이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것이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선명한 건, 아마 그때 느꼈던 답답함이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대충 이해는 된다.

그때 보았던 주인공처럼 어느 날 갑자기 뭣도 모른 채 병기를 타고 싸우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

특히 혼자서 싸우는 게 아닌, 남녀 둘이라면.

“하아…. 하악….”

문득 소녀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상념에 잠겨 있던 청년은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오토바이 조정석 같은 공간 위에 몸을 눕히고 있는 단발머리 소녀가 보였다. 그리고 청년은 그런 소녀의 하체 쪽에 몸을 붙이며 그녀의 마력 신경과 연결된 조종간을 쥐고 있었다.

후배위를 연상케 하는 꽤나 선정적인 자세였지만 아쉽게도 이 비좁은 공간 안에 그런 남녀 간의 달콤함은 없었다. 오히려 언제 죽을지 모를 긴장감만이 공존하고 있을 뿐.

그럴 수밖에.

현재 둘은 적과 목숨을 걸고 전투 중이었다. 흔히 <성기병>이라 불리는 생체병기를 타고서 말이다.

“으읏…. 그, 그만….”

계속된 전투 탓에 괴로운 걸까.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소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땀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급박한 숨소리만큼이나 목덜미가 붉다. 흐트러진 숨소리가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계속 허공을 맴돈다.

그런데 그때.

끼이이이익…. 근처에서 불쾌한 소음이 들려오더니 거미를 연상케 하는 흉측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흔히 <버그>라 불리는 괴물이었다.

청년은 곧 적의 움직임을 포착했고,

동시에 그는 망설임 없이 소녀의 마력신경과 연결된 조정간을 움켜쥐며 <성기병>을 움직였다.

“……꺄아아아!”

계속된 전투로 이미 한참 전에 한계까지 내몰린 소녀의 몸이다. <성기병>의 갑작스러운 기동에 소녀가 끝내 참지 못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청년은 그런 소녀를 상냥하게 다룰 생각이 없었다. 지금 당장 적이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괜한 연민이나 상냥함을 발휘했다가는 되려 이쪽이 죽는다. 그는 비명과 숨을 허덕이는 소녀를 최대한 무시한 채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것은 무리한 돌진 같지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버그>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눈앞에 나타난 괴물은 <스파이더>라는 별명을 지닌 녀석으로,

거미 같은 몸체 위에 세워진 포신으로 포탄을 쏘아내는 탱크 같은 녀석이었다.

분명 녀석의 원거리 공격은 위협적이지만, 그 특성 탓에 어떻게든 접근만 하면 제압은 어렵지 않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청년은 성기병의 검으로 스파이더의 몸통을 베었다. 다행히 스파이더의 방어력은 그다지 대단치 않다.

서걱-!

소녀의 마력 신경을 통해 성기병과 연결된 탓일까. 선명히 느껴지는 검격의 감각과 함께 청년은 스파이더의 죽음을 확신했다.

이윽고 비스듬하게 베인 스파이더의 몸통 사이로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을 때였다.

─모두 복귀하세요.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제39구역의 사령관인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싸움의 끝을 알렸다.

드디어 끝인가.

청년은 소녀의 마력신경과 연결된 조종대에서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긴장이 풀린 몸을 한차례 풀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어느새인가 탈진한 듯 조종석 위에 쓰러져 있는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의식을 잃은 건가.

청년은 한동안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조종석 의자에 등을 붙였다. 사령관의 복귀 명령이 떨어졌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성기병>을 ‘정상적’으로 움직이려면 소녀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는 잠시 눈을 붙이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이 빌어먹을 애니메이션 세계관에 한탄하며.

남녀가 짝을 이루며 싸워야 하는,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세계가 그는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다.

* * *

생체기동병기 - 성기병을 움직이려면 젊은 남녀가 짝을 이루어야 한다.

흔히 파일럿들은 이걸 커플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애니메이션의 핵심적인 설정이었다.

기지로 복귀하는 길.

“…커플링은 무슨.”

청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유튜브에서 보았던 애니메이션 PV의 문장이 문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괴물들에 맞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며 싸우는 소년·소녀들.

PV에서 애니메이션 감독은 이런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다.

어린 애들을 성기병이라 불리는 생체병기에 탑승시킨 채, 침략 병기들과 싸우게 하는 게 과연 정상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애니메이션이니까 허용될 수 있는 설정이지만, 이게 현실이 되면 막장이나 다름없다.

사실상 소년병들을 운용한다는 것 아닌가?

지난 몇 년간 계속 생각했던 의문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며 성기병에서 내렸을 때였다.

찰싹-!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꽤나 경쾌하다. 난데없는 손길에 청년의 얼굴이 강하게 꺾였다. 청년은 돌아간 턱을 천천히 되돌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

얼마나 강하게 때린 건지 뺨이 얼얼했다.

아마 망설임 없이 전력으로 때린 거겠지. 아픔을 동반한 열기가 피부 끝으로 선명하게 느껴진다.

사실 피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맞아주었다. 이런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뺨 한 대 맞아주는 걸로 분노가 풀리면 남는 장사다.

그렇기에 그는 태연한 눈으로 이 화끈하기 짝이 없는 손길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너는 정말…"

현재 그의 눈앞에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붉게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는 소녀가 있었다.

오늘 있었던 <버그>들과의 전투에서 그와 커플링을 했던 소녀였다. 할 말을 찾듯 입술을 달싹이던 소녀가 울분이 담긴 목소리를 토해냈다.

“…파트너를 물건처럼 다루는 쓰레기구나.”

이 이상 얼굴 쳐다보는 것도 싫다는 것처럼 소녀는 그 말과 함께 몸을 획 돌렸다. 안타깝게도 뺨 한 대 후려친 걸로는 화가 안 풀렸는지 멀어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분노가 담겨 있었다.

─카렌이 저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보는데….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역시 소문은 과장된 게 아니었던 건가….

파일럿의 분열은 주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덕분에 순식간에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특히 여성 파일럿들의 시선이 따갑다. 그녀들의 눈빛엔 혐오와 경멸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아마 오늘 일도 그렇고, 내 소문을 들은 거겠지.

괜히 그게 우스워서 별생각 없이 쓰윽 쳐다보니,

근처에 있던 다른 남성 파일럿들이 몸으로 자신의 파트너들을 가리기 시작했다.

내 시선이 자신의 파트너에게 닿는 것조차도 꺼림칙하다는 건가?

그 사실에 청년은 그저 헛웃음만 흘렸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떨어진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썩 즐거운 풍경은 아니다. 그는 혐오와 경멸 따위를 즐기는 변태가 아니었으니.

뭐 아무튼 좋다.

모여든 시선 속에서 청년은 소녀에게 맞은 뺨을 느릿하게 매만졌다. 아무래도 오늘 있었던 전투의 격렬함을 저 소녀는 감당하기 어려웠나 보다.

하기야, 과연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을지 시험하며 물건 다루듯이 함부로 굴렸으니 어쩔 수 없나. 하지만 그래도 이겼으니 된 것 아닌가?

우리는 살았고, 끝내 승리했다.

적어도 숨이 끊긴 채 쓰레기처럼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어쩌면 나덕분에 누군가는 살았을지도 모르고.

소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청년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유리창 너머로 오늘 있었던 전투의 결과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폐허가 된 도시와 처참하게 부서진 도로가.

그리고 그 주변으로 무수히 널려 있는 기괴한 생명체들. 그 숫자는 무려 기백을 넘어간다.

흔히 <버그>라 불리는 이세계의 ‘침략자’.

아니, 정확히는 살아 움직이는 생체기갑병기라고 해야 하나.

지금껏 몇 번이나 싸웠을지 모를 그것들을 지그시 관찰하던 청년은,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는 다른 파일럿들의 시선 속에서 조용히 등을 돌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기 만족용 소설 시작합니다.

8.12 삽화 추가

8/17 성기병 그림 추가

8/17 조종석 삽화 추가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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