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67화 〉 167화 (166/173)

〈 167화 〉 167화

* * *

유영은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초조함을 견뎌내면서 조금씩 다가오는 미래의 불안감을 곱씹었다. 그와중에 힘이 되어주는건 자신의 품에 안긴 커다란 개였다. 털이 복슬복슬한 것이 만질 때마다 들숨과 날숨이 다 느껴지는 리트리버 계열의 개. 나는 그 개를 어디선가 봤다고 느꼈다.

‘호두...’

“호두야!”

유영은 품을 탈출하고 어디론가 향하는 호두를 향해 외쳤다. 평소 같았으면 따라가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불안해서 그 뒤를 쫓았다. 호두는 현관문을 지나쳐서 냅다 오른쪽으로 뛰었고 덕분에 시야에서 바로 사라졌다.

“문이 왜 열려있지..?”

유영은 알 수 있을 법한 일 때문에 현관문이 열려있다는 것에도 크게 무너져내렸다.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어떡하지? 따라가야되나? 아니면 그냥 문을 잠글까? 아니, 그 전에 왜 문이 열린 거야? 누가 일부러 열어놨다면... 함정이야... 문을 닫아야해.’

애초에 호두가 찾아갈만한 대상이 무엇인지는 확실했다. 주변에 제 주인이 왔다고 생각한 게다. 그러나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너무도 보편적이면서도 관념적인 생각이지 않나? 유영은 문 앞에서 가만히 기다리다가 참을 수 없었기에 문틈 사이로 오른쪽 끝을 확인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에 있는 울림있는 소리에 유영은 또 다시 붙박이처럼 멈춰 서고 말았다.

끼익­

운전하는 소리. 바퀴가 급정거를 하는 소리.

호두가 후다닥 나간 걸로 봐서는 제 주인이 돌아왔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유영은 일단 다짜고짜 호두가 뛰어나간 곳을 향해 뛰었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서울 시내는 알 수 없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차 있었다. 유영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으면서 안개 속을 유심히 바라봤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집으로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쿵­ 우직­

한 차례 불쾌한 소리가 뇌리를 때렸다. 유영은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뒤로 뛰었고 다시 현관쪽으로 향했는데. 문앞에 우글거리는 형상들이 존재했다. 이미 집 안까지 전부 장악한 듯한 대상은 물러설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유영을 발견하자마자 지랄 발광을 했다.

“허억­ 허억­ 허억­”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환상 속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는 유영은 힘껏 뛰어서 어느덧 옥상까지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서 문을 잠그고 가만히 기다렸다. 문제는 하얀 안개였다. 이미 유영의 몸 속으로 침투해버린 하얀 안개는 그녀의 몸속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DNA 줄기는 파괴됐고 그 파괴된 위치에 다른 존재가 섞여 들어갔다.

준현은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생태의 변환 과정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저게 정말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는 하얀 안개의 움직임. 그리고 준현은 여기서 준현만이 볼 수 있는 걸 보고 말았다.

온몸이 붉은색으로 변했다가 이내 푸른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붉은 반점은 이미 깨우쳐서 알고 있으나 푸른색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리고 이내 온몸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유영은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끙끙거리면서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옥상 문을 열었고 그 안에서 성욕에 눈이 먼 자들이 대거 잠입해 들어왔다.

그러나 유영의 몸도 이제 성욕에 지배됐다. 온통 분홍색 빛으로 물들어버린 유영은 다리를 활짝 열었고 가랑이 사이에 있는 구멍을 통해 이성으로 억제되 있던 통로를 개방했다.

그렇게 한참을 물고 뜯기를 반복했고 이 장면을 준현은 고통 속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TV처럼 채널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꺼주기 전까지는 눈조차 감을 수 없는 환상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했던 것이다.

눈을 뜬 준현은 곧바로 반대쪽에 있는 연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확 빨려들어가는 환상.

이번에는 꽤나 평화로운 배경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준현의 집이었다. 준현의 집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준현을 제외한 전부가 여자들이었고 그중에는 아는 얼굴이 대부분이었지만 모르는 얼굴도 있었다.

연두는 하하호호하며 서로에게 농담도 했고 장난을 쳤다. 행복한 하루는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역시나 이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다니엘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들어왔다. 그는 작은 보따리를 하나 품에 품고 있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보따리였다. 다니엘도 눈물을 삼키며 그 보따리를 연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 앞에서 꺼냈다.

“이미 늦었어. 이미 늦은 거야. 우리는 실패했어.”

다니엘이 주문 읊듯이 말했고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그 자리에 몸이 굳어버렸다.

준현은 환상 속의 자신이 대표로 말하는걸 들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다니엘? 그리고 그 보따리에 들어있는건 또 뭐고요?”

준현은 곧바로 다니엘의 몸을 치료해 나갔다. 반점들을 차례로 공략하면서 망신창이가 된 다니엘의 몸을 치료해 나갔다.

“녀석들이 바이러스의 주범이었어. 원래는 중국에서 발발할 것이었는데 놈들이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그냥 터트려 버렸어. 이걸로 다른 나라들이 적대감을 느낄 거야. 반도를 격리시키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 미래가 바뀌었군요. 아주 안 좋은 쪽으로요.”

“그래, 맞아. 우리는 중국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고 했지. 근데 우리의 계획이 탄로나는 순간부터 녀석들의 계획도 바뀌었다. 내 꾀에 내가 넘어갔어... 미안합니다, 한국...”

“그런 말씀 마세요. 우선 일이 벌어졌으니 막아야겠죠. 제가 발 빠르게 나서면 어쩌면...”

“약을 만들 수가 없어. 우리는 약을 잃었어.”

다니엘은 대화를 마치고 자기가 안고 왔던 보따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걸 건네받은 연두에게로 시선이 쏠릴 뿐이었다. 연두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보따리 끈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뭐지... 무섭다...’

환상을 보고있는 준현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현실로 마주하는 이들의 감정은 오죽할까. 근데 왠지 보따리 안에 뭐가 있을지 예상이 가긴 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제발 그게 아니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따리를 다 풀어내자 모두가 경악했다. 우려했던 것이 안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

보따리 안에는 그레이스의 목만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은 신부들이 아닙니다. 어떤 조직을 이루고 있어요. 목적이 뭔지는 확실하죠. 강준현이라는 사람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중국에서부터 확산하는 대대적인 바이러스를 퍼뜨려서 백신을 이용해서 전세계의 강자로 군림할 계획인 겁니다. 예전의 마피아를 비롯한 삼합회가 이뤄낸 걸 현대식으로 이뤄내려는 방법입니다. 새로운 조직의 탄생이죠.”

유일한 백신 제조법을 알고 있는 조직은 알 수 없는 바이러스를 퍼뜨려 돈을 벌 계획이다.

“그런데 그 검은 옷의 조직원 하나가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레이스를 죽인 놈이었죠.”

“뭐라고 하던가요?”

듣는 이들은 모두 침을 삼켰다.

“한 명만 사라지면 된다. 강준현은 결국 검은옷을 입게 될 것이다.”

다니엘은 그 말을 남기고 숨이 멎었다. 아픈 것과는 상관없는 의문의 죽음. 그러나 이미 그레이스의 죽음을 봤던 이들은 다니엘의 죽음에 원통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놀라워하지는 않았다. 피투성이가 된 다니엘의 죽음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몇분이 지나서 준현은 여자들 하나하나를 불러서 지시사항을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들이었고 여자들은 이미 준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태였기에 그가 하는 말을 따랐다. 누군가는 바로 차에 시동을 켜서 이동했고 누군가는 함께 이동했다. 치요는 일본으로 돌아갔고 서아는 혼자서 어디론가 향했다. 유영은 한서연이라는 여자와 함께 어디론가 갔다.

마지막에 홀로남은 연두는 준현의 마지막 지시를 듣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거실에서 시간이 흐르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연두.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과거의 준현은 한동안 그 초조함에 빠져들어 동시에 없던 습관을 불러일으켜 손톱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연두의 모습은 몹시 불안해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준현이 연두를 불렀다.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연두야. 너한테 정말 중요한 일을 맡겨야 할 것 같아.”

“... 네. 말씀만 하세요.”

“구소민이라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를 찾아야 해. 아마 검은 옷의 조직에 들어가 있겠지.”

“구소민..? 구소민이라면 유영이가 알고 있을 거예요. 근데 왜 저한테..?”

“유영이에게 맡기면 사적인 감정이 섞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할 거야.”

“그럼 저는 되고요? 그 조직에 들어간다..? 무서워요. 날 데리고 무슨 짓을 할지...”

“아마 중요한 인질로써 사용하게 되겠지. 네가 검은 조직에 있다는걸 내가 아는 날에는 꽤 충격을 입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연두는 내키지 않았으나 준현이 시키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요? 그 다음에는요?”

준현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연두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듯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을 내뱉었다. 말 그대로 내뱉는 식의 말은 연두에게는 꽤 버거운 짐이 될 것이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과거의 준현도 미래의 준현의 마음을 알았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구소민. 그 여자를 회유시켜야 해.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 그리고 구해야 해... 그 여자가 핵심이 될 거야. 과거, 내 기억을 지웠던 그녀니까...”

환상은 준현의 말끝이 흐려지면서 끝나갔다. 점점 현실로 돌아가는 준현은 이대로는 돌아가지 못한다며 발악했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현실 세계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구소민이 누군데..! 대체 그 여자가 뭐길래 그렇게 중요한데..!”

끙끙거리며 진실을 듣고 싶은 준현은 결국 그 뒷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현실에서 재차 눈을 뜨게 됐다.

“허억..!”

“사장님?”

“준현 오빠..?”

“괜찮아요?”

“아, 응... 괜찮아...”

생각해보니 그레이스의 목은 정말 충격적이고 그로테스크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소름이 끼치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 나는... 이제 일어나봐야겠어.”

마사지 배드에 세 명이서 누워있는게 비좁기도 했고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걸 깨달았기에 일어났다.

뒤에서 두 여자가 뜨거운 시선으로 날 보고 있음에도 모든걸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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