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37화
다음날, 낮 2시 경에 이연두와 만났다. 확실히 샵에서 봤을 때와는 이미지가 다르다. 청초하게 긴 생머리는 끝이 볼륨감 있게 말렸고 화장도 좀 더 진하게 하고 왔다. 옷은 평상시에 입던 스포티한 스타일에서 블링블링한 분홍색 스트라이프 원피스를 입었는데 요즘 저렇게 딱 달라붙는게 유행인지 몸매가 잘 드러났다. 뽕을 좀 심하게 넣었는지 없던 가슴이 솟아올라있었다.
날 발견하자 살랑거리며 몸을 좌우로 흔드는 이연두. 확실히 얼굴값하는 여우짓이다. 다 알면서도 가슴이 자르르 설레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머리를 한번 힐끗 보더니 손을 뻗어서옷매무새를 잠깐 만져줬다.
“오늘 멋있네요.”
너 만난다고 새옷도 사고 미용실도 다녀왔다. 인터넷에서 한참을 찾다가 키 작은 남자에 어울리는 체형에 걸맞는 옷을 찾아 입었다. 약간은 편안해 보이면서도 깔끔해 보이는 의상. 하의로는 요즘 유행하는 조거팬츠와 상의는 맨투맨에 흰티를 레이어드시켰다.
“깔끔하네. 평소에 이렇게 입어요?”
아무거나 잡히는대로 주워입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사실 인터넷 보고 마네킹 벗겨 입은거나 다름 없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두는 씩 웃으면서 만족스러워했다. 여기서 점수 1점 정도 땄으려나.
“가요, 우리. 30분 후에 영화 시작해요.”
“뭐 예매했어요?”
“뭐 좋아할지 몰라서 제가 아무거나 예매했는데. 제목이 ‘산악회에서 생긴 일’이라네요.”
... 그거 성인영화 아니야?
그녀가 보여주는 영화 상세내용을 보자 버젓이 19금 딱지가 붙어 있었다. 노골적인 성인영화는 아니고 19금 로맨틱코미디인 듯하다.
“이런거 좋아해요?”
“네, 뭐. 진지한건 좀 질색이라.”
나 역시 섹드립이 난무하는 가벼운 영화를 좋아했다.
“나도 이런거 좋아하는데 잘 됐네요.”
우리는 영화관에 들어가서 예매표를 뽑은 후에 잠시 앉아서 상영시간을 기다렸다. 샵에서는 그래도 이런 말 저런 말 잘 붙였는데 막상 밖에서 만나니까 두근거리고 떨려서 뭐라고 말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리드하는 건 이연두였다.
“평소에 쉴 때 뭐해요?”
“아, 저는...”
아씨. 야동본다고 말도 못하고 평소에 제대로된 취미라도 만들어놓을걸.
“인터넷 서핑? 웹툰 보거나.”
“풋. 그냥 멍 때리는거 아니에요?”
“맞아요. 하하... 연두 씨는요?”
내가 연두쌤이라고 안 부르고 연두 씨라고 부르자 그녀는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저는 요즘 좀 색다른거 하고 있어요.”
“응? 뭔데요?”
“어... 제가 원래 어렸을 때부터 만화가가 되는게 꿈이었거든요.”
“그림 잘 그리시는구나.”
“뭐, 좀..? 대학 나온건 아닌데 그냥 취미로 그리다가 학원도 짬짬이 다닌 정도에요.”
“그래서 집에서 만화 그려요?”
“음, 정확히 말하면 그냥 카피 정도?”
“한번 봐도 돼요?”
내 말에 그녀는 조금 당황하는 듯 보였다. 이렇게 관심을 가질지 몰랐던 모양이다. 고개를 저으면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한테 보여줄만한 실력이 못되는데.”
“그래도 궁금해요. 보여줘요. 아까도 말했지만, 나도 웹툰 보는거 좋아해서 만화에 관심 많아요.”
“으... 진짜진짜. 진짜 보여주기 좀 민망해서 그래요.”
“흠흠. 혹시 야한 건 아니죠?”
내가 대뜸 던졌더니 이연두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정곡을 찌른 모양이다.
진짜라고? 진짜 야한 만화를 그리는 건가?
“아... 아니에요.”
맞네. 맞구만.
마치 내가 집에서 동영상을 본다고 했을 때,누군가 내게 혹시 야한 동영상 아니냐고 물었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잖아. 거짓말은 못하는 편인 듯.
근데 나는 왜 가면 갈수록 이연두에게 호감이 생기는 걸까. 야한 걸 그리거나 쓰는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좋아하며 순수한 팬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는 말이 있지 않나. 범죄도 아니고 뭐.
“나는 야한거 좋아하는데.”
“그래요? 의외네요. 난 준현쌤이 되게 순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랬지. 적어도 예전의 나는 정말 순진무구했지. 스물아홉까지 동정을 떼지 못한 남자는 요즘 시대에 되게 드물다. 그 전까지는 내 성적 판타지가 거의 야동에 의해 탄생했는데 요즘은 실생활에서 그걸 실천하고 있으니 순진이랑은 거리가 멀어졌다고 해야할까.
“저 완전 밝혀요. 혹시 픽시브라고 알아요?‘
“헉... 픽시브를 알아요?”
“알죠. 특히 야한 그림들 좋아해요. 들어가서 가끔 제 취향 작가들 일러스트 훑어보거든요. 전 묘하게 2D 쪽 보면 흥분되고 그러던데.”
내가 과감하게 말하자 이연두의 얼굴에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꼭 소울메이트를 만난것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픽시브 아시는구나... 저도 좋아하는 작가 있어요...”
그녀는 마음의 문을 조금 열었는지 깨작깨작 자기 스마트폰을 살폈다. 아무래도 내게 보여줄만한 그림이 있는지 찾는 모양이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내가 옆으로 자리를 옮겼는데도 모를 정도다.
“오, 이거 괜찮다.”
나는 선이 유려하게 그려진 여체 스케치를 가리키며 말했고 이연두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언제 옆에 온 거예요?”
“방금. 제가 옆에 가도 되냐고 묻고 왔는데...”
“하으. 깜짝 놀랐잖아요. 제, 제거 계속 다 본거에요?”
“아니, 뭐. 크흠. 저는 다른 그림들이 연두 씨가 그린건지도 몰랐는데 이건 스케치길래 연두 씨가 그렸다고 생각한거죠. 지금까지 다 연두 씨가 그린거였어요?”
“아, 아뇨! 아니에요! 아, 이, 이런 스타일이시구나. 어, 어떤거 같아요?”
“좋은데요? 여체 묘사를 되게 잘하시네요. 되게 디테일하다. 근데 가슴이 좀 작은 느낌이네요. 어느 작가분거 커버한거에요?”
“아... 이건 커버 아닌데...”
“네? 그럼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겨우겨우 입을 뗐다.
“이건 제가 거울보고 그린거에요... 채색이 좀 어렵더라고요.”
...
나도 덩달아 얼굴이 붉어져서 조용히 맞은편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는 서로시선을 회피하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곱씹기 시작했다.
이연두의 실루엣은 이전까지 대충 짐작으로만 알고 있었다. 근데 방금 그 그림으로 상상에 현실성이 부여됐다. 그러다 내 머릿속에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증폭시키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녀의 알몸을 보고 싶은 거대한 욕구에 사로잡혔다.
“여, 영화 시간 다 됐다!”
갑자기 오버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언성을 높이는 이연두. 나도 덩달아 일어나게 됐다.
“영화 보러가요.”
그녀는 가만히 서있는 내 팔을 잡고 끌었다. 팔꿈치 쪽을 손으로 꾸깃 잡고서 상영관 쪽으로 향하는데 그녀의 몸매며 얼굴 때문에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됐다. 진아영과 거리에서 걸을 때 이런 기분이었는데 이연두도 마찬가지다. 이래서 미녀는 괴롭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얘기가 아닌 거다.
티켓 확인하는 아르바이트생도 나와 그녀를 번갈아 봤다. 왜, 나랑 이런 여자가 같이 있는게 믿기지가 않냐?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상영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그녀는 연신 내 팔꿈치 쪽을 움켜잡고 있었다. 가끔씩 이동할 때, 가슴께가 팔에 닿아 뭉개졌다.
역시 뽕은 느낌이 다르네.
“H... H..."
그녀는 해당하는 좌석을 찾기 위해 중얼거렸고 마침내 좌석을 찾았다.
근데 웬걸... 커플석이잖아?
“엇! 왜 커플석이지? 하응... 잘못 예매했네? 으, 어떡하죠?”
나는 이연두에게 말하고 싶었다. 왜 이렇게 연기를 못하냐고. 근데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이연두는 내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제 김유진건도 내가 해결해줬고 신이설과도 화해의 장을 열어줬으니까. 그리고 자기는 해내지 못한 일들을 내가 많이 해내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 커플석은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나는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귀엽... 다.
“전 상관없어요. 커플석이라고 해봤자 가운데 칸막이만 없는거잖아요? 팝콘 먹기도 편하겠네.”
“흐으... 뭔가 일부러 이런데 잡았다고 생각하실까봐.”
“그거야 제 맘이죠. 저 착각 좀 하겠습니다?”
“이씽... 이럴줄 알았어. 암튼 어쩔 수 없으니까, 앉아요! 팝콘은 준현쌤이 들고 있어요, 알겠죠?”
“분부대로 합죠.”
나는 그녀와 나란히 커플석에 앉았다.
영화 예고편이 스크린에 띄워졌다. 근데 하도 가슴이 쿵쾅거려대서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커플석은 몸을 억지로 떨어트려서 끝과 끝에 붙어있는게 아닌 이상, 몸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팔이 내 팔에 맞닿았고 마음만 먹으면 허벅지도 서로 닿을 거리였다.
내가 계속 팝콘을 어설프게 들고 있자 옆에서 이연두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뭐에요. 솔직히 말해봐요. 여자랑 영화관 처음 오죠?”
정곡.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정말 처음이에요? 어머나, 미안해요.”
“아니... 뭘 그런걸 미안하다고 해요.”
“와... 진짜 상상도 못했어요.”
“그거 돌려까는거에요. 두 번 죽이는거라고요.”
“하. 그러면 이렇게 해봐요. 그... 제가 몸을 좀 더 붙일 테니까 팔을 여기에. 네, 그렇게. 좀 편하죠?”
“아... 네... 편하네요.”
꿀꺽.
몸이 과도하게 붙자 나도 모르게 조심스러워진다. 숨 쉬는 것 하나하나.
샵에서는 신처럼 행동했던 내가 영화관에서는 찐따?
하, 찐따여도 괜찮으니까 매주 이러고 싶다. 그리고 매주 찐따 같았으면 좋겠다. 어쩐지 이 찐따미 덕을 보는 기분이니까.
이연두는 내가 여자 경험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좀 더 과감한 스킨십을 했다.
“하, 좀 불편한데 여기 손 좀 올려도 되죠?”
..?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는 이연두. 나는 고개를 돌려 이연두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 여자 설마..?
오늘 날 잡았나?
“뭐, 뭐요.”
내가 한동안 보고있자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홱 돌려 스크린을 바라봤다.
“원래 커플석에 앉으면 이게 자연스러운거에요. 1인석에는 팔걸이가 있잖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하네요.”
“준현 씨도 팔 불편하니까 나한테 의지하는거고. 똑같아요.”
얼굴이 꽤 가깝다.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쁘다.
진아영도 예쁘고 김서아도 예쁘고 박유영도 예쁘지만, 얼굴만 놓고보면 이연두가 최강이다.특히 옆얼굴은 거의 사기에 가까웠다. 연예인인가 싶을 정도로 오똑한 콧대와 몽글몽글한 콧망울. 귀옆에서 뚝 떨어지는 턱선. 그리고 그 작은 얼굴의 1/3 정도를 차지하는 쌍커풀 짙은 커다란 눈. 가끔씩 깜빡이지 않으면 인형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이런 여자가 날 꼬시려고 마음을 먹었다니.
영화가 시작되고 조명이 꺼졌다. 그와 동시에 이연두의 얼굴이 내쪽으로 돌았다. 그녀는 아직도 쳐다보고 있냐고 묻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아, 예뻐서 저도모르게 그만...”
나 역시 마냥 찐따는 아니라고.
잠시 후에 이연두는 내 어깨에 고개를 살포시 묻었다. 진아영이나 김서아한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두근거림.
이연두같은 여자가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는데 산악회에서 홍수가 나서 남녀 단둘이 갇히던 내 알 바 아니잖...
아니? 영화 존잼이잖아?
나는 팝콘을 주워먹으면서 어느새 영화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