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0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아니, 이것은 언니를 감싸는 게 아니라 황태자의 오해를 비웃다가 저절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정말로 궁 생활 따위에 미련이 없다. 언니는 비록 황도와 같은 발달한 도시에 대한 동경, 황족, 귀족들의 물질적으로 부유한 삶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있어도,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불완전한 것이라 하며 전혀 부러워하지 않았다.
어디 그것뿐인가? 기억이 난다. 자신이 어릴 적 황후가 될 거라는 말을 하면, 그걸 듣고 있던 언니는 언제나 그 야심을 ‘멍청이의 눈먼 계획’이라 비하했다.
「황후? 단지 몸이 조금 편할 뿐이야. 예쁘게 꾸며져서 보기가 더 좋은 것일 뿐이라고. 그 인형극 같은 천국이 언제까지 갈진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단다. 특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멍청한 사람에겐 말이야. 로테 너는 역사 공부를 조금만 했어도 그 자리를 꿈꾸지 않았을 거야.」
「정말 공부가 필요한 건 마리 너야! 언제까지 뜬구름 잡는 학문에 빠져 사고만 치고 다닐래? 그러다가 나중엔 결국, 그 곰팡이 같은 오칼에게 시집가는 길밖에 남지 않을 거라고!」
*오칼 : 오를린 영주의 육촌. 정신병을 앓고 있다. 오를린 일가의 유일한 아들이라 훗날 영주의 딸 중 하나와 결혼하여 영지를 물려받게 될 거라는 말이 떠돈다.
「멍청이! 황후 아니면 다른 귀족의 처, 네 머릿속엔 사람으로 태어나 갈 길이 그 두 가지밖에 없는 거야? 그러니까 우물 안 개구리란 소릴 듣는 거라고!」
「더 있는데? 말해볼까? 비렁뱅이 평민의 처! 늙고 기분 나쁘게 생긴 부호의 첩! 창녀! 무당! 심심하고 지루해 빠진 신녀들! 우리 여자들이 갈 수 있는 길은 언제나 그런 것뿐이야! 그게 현실이라고! 나는 그런 한심한 길을 갈 바에 황궁의 안주인이 되겠어! 너는 아마도 끽해야 창녀나 되겠지!」
「황후는 창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지?」
황태자는 그런 언니를 모른다. 모르고서 아내를 그저 언니의 자리를 빼앗은 악녀로만 취급한다……!
남편을 내려다보는 로테의 눈에 한심함이 드러난 것일까. 비오르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네 언니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전하께선 잘못 알고 계십니다.”
“오만함은 벌써 황후 급이군.”
황태자는 로테를 밀치듯 일어나 침소를 나섰다. 그의 몸짓이 너무 과격했던 것일까? 태중의 아이가 신경질을 내듯 발길질했다. 로테는 그 배를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궁에 온 지가 벌써 몇 달인가. 온갖 일을 겪은 이제야 알 것 같다. 언니가 어째서 이 자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마리. 어디서 뭐 하니?…… 행복하니?’
*
마리아는 새벽, 갑자기 바깥으로 갔다. 하이너는 그녀에게 외출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나갈 때는 거의 주인의 부름을 받고 나가는 경우밖에 없기 때문이다. 필요하시니까 그 아이를 불렀겠지, 때 되면 어련히 알아서 오겠지, 하고 내버려 두는 게 좋았다.
어느덧 두 개의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 되었다. 거처에 온 사람은 마리 혼자뿐이었다. 하이너는 아가씨가 오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늦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마리아에게 그렇게 듣기도 했고요.”
“생각보다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어서 말이지. 그럼 난 씻으러.”
하이너는 밤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퀭한 눈을 비볐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아가씨가 벗어놓은 옷에 눈길이 갔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진다. 드래곤이 되어 좋지 않은 점을 말하자면 바로 이거다. 냄새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 아가씨가 벗어놓은 옷에서는 여러 냄새가 났다. 드래콘화한 마리아의 냄새. 아마도 오면서 마리아의 등에 타느라 밴 냄새겠지. 그리고 인간 남자들의 냄새, 낡은 방에서나 날 것 같은 곰팡이, 먼지의 냄새, 젖은 돌 냄새, 불을 붙일 때 쓰는 짐승의 기름 냄새 등, 온갖 냄새가 어우러져 아가씨의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를 지워버렸다.
하이너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가씨의 아침 식사를 차려주었다. 식사라고 해봐야 곡물가루를 물에 갠 것과 말린 과일, 육포가 전부였으나, 그 세 가지만으로도 역겨운 냄새를 잊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씻고 나온 아가씨는 정작 그것들을 먹지 않았다.
“드시지 않습니까?”
“으응. 좀 피곤해서.”
마리는 눈짓으로 뭔가를 부탁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려달라는 요청이었다. 아가씨와 오랫동안 지내온 호위기사는 그 신호를 알아듣고 눈 깜짝할 새에 아가씨의 머리를 보송보송하게 말려주었다.
“고맙습니다, 멋진 기사님!”
건조 마법을 받은 마리는 스스럼없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언제나 자연스러운 몸짓. 호위기사의 앞에서도 알몸을 드러내는 것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는 그 모습. 하이너는 그런 모습을 하루 이틀 본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자려는 아가씨에게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아가씨.”
“음?”
“지괴르 대령은 무사히 구출하셨습니까?”
“어머. 싱겁긴! 구출했지. 그러니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편히 자려는 거 아니겠어?”
“다행이군요.”
마리는 싱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하이너의 시선이 그녀가 벗어놓은 옷가지에 머물렀다. 뒤늦게야 정화 마법을 쓸 곳이 생겼음을 알았다. 그래. 배운 것을 이런 때 써먹어도 좋겠지. 그러려고 그동안 공부한 게 아니던가. 그는 옷가지에다 마법을 썼다. 정화 마법의 기능으로 잠시간 주위가 싸늘해진 것을 느낀 마리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우리 기사님이 워낙 깔끔하셔서 냄새에 민감하구나.”
“실례지만 구출 후에 어딜 다녀오셨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으음, 황궁 감옥, 지괴르 대령의 저택, 루빈의 숙소 등…….”
“그렇군요. 그나저나, 대령은 그 일을 하겠다고 하던가요?”
“그럼! 내게 불가능이 어디 있겠어?”
하이너는 아가씨의 말이 어째 찝찝했다. 듣기로 헤그 레 지괴르라는 작자는 자유분방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데, 그런 자가 아가씨의 부탁을 쉽게 들어주는 것에 안심되지 않았다.
“아가씨는 언제나 그렇게 긍정만 하시는군요.”
“너는 언제나 그렇게 걱정만 하고?”
“헤그를 믿습니까?”
“응. 내가 미끼를 던졌거든.”
“미끼요?”
하이너가 궁금해하는 눈초리를 건넸지만, 마리는 돌아누워 잠이 들었다. 어째 대답을 해줄 눈치가 아니다. 호위기사에게 말해주지 못할 미끼인가?
‘섭섭하군.’
하이너는 환기가 끝난 것 같아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아가씨에게 혹시 들릴지도 모르는 혼잣말을 했다.
“어떤 방식이든 저는 아가씨를 믿습니다. 아가씨의…… 야망마저도.”
창문을 닫았는데도, 떠오르는 태양에 눈이 시렸다.
지금쯤 지괴르 대령은 일을 시작할지도?
***
그 시각 성도 로젠플라드.
로제나 호수.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른 새벽이다.
로젠플라드 신성군은 사철마다 성황 참관하에 대규모 훈련을 하는 관례가 있다. 오늘 열릴 훈련도 원래는 꽃이 가득 핀 봄의 한가운데나 되어야 열리는 것이지만, 이례적으로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은 이 시기에 열리게 되었다.
주변 영지 세력들은 신성군의 훈련 날짜가 앞당겨진 것을 나름대로 힘을 과시하는 한 방법이라고 파악했다. 실렌틴 광산 폭파 사건 이후, 기갑체 부품 구하기가 마땅찮은 각 마력기갑 부대들의 눈치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신성 정부 권력의 보이지 않는 핵심인 할데바인이 살해당한 시기. 이들은 권력의 큰 축이 사라졌어도 군사적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음을 대외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었고, 이번 훈련은 그에 가장 적절한 방식이 될 것이다.
신성군 본군이야 철마다 해온 훈련이고 그게 조금 앞당겨진다 해도 별 불만 없는 편이다. 하지만 원래는 야울을 지키는 부대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신성군에 강제 귀속된 부대인 루빈은 다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향 아닌 타향을 지켜야 하는 상태로 몇 달을 지낸 그들의 불만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뿐이지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한계치는 벗어난 건지도 모른다. 할데바인을 죽인 지괴르 대령을 구출시키자는 말이 떠돌 때부터 그들은 신성군 본군과 적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곳 로젠플라드에서 겪은 것이라고는 본군의 텃세, 본군 출신 지휘관이 시키는 가혹한 일들뿐이었다. 대령 헤그 레 지괴르가 너구리를 살해한 후로 그 가혹한 일들은 더 많아졌고, 부대 전체의 봉급도 축소되었다. 그들은 하루빨리 황태자가 너구리의 잔존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길 원했다. 그래야 자신들 루빈이 야울로 돌아갈 수 있었고, 가족과 고향민이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었다.
루빈의 아만카이트 중령은 신성 정부를 따르기 싫어하는 부하들과 신성 정부 사이에서 곤욕을 치르는 인물이다. 예전에야 지괴르 대령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대령이 투옥당한 지금은 대령의 힘든 일을 모조리 대신 맡아야 했다. 힘든 나날을 보내기 때문인지 요새는 수면 장애를 다 앓을 정도다.
성황 참관의 대규모 훈련을 앞두고서도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아예 잠을 포기했다. 그리고 아침이 밝기 전에 잠시 산책이나 할 겸 로제나 호수 근처를 걸었다. 물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시야가 맑아졌다. 새싹이 조금씩 돋아나는 나무들을 보고, 또 그 나무들 사이를 휘젓는 바람을 쐬니 복잡한 마음이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로제나 호수를 보았다. 봄을 알리는 따뜻한 바람 덕분인지 빙판이 녹거나 깨진 곳이 여러 군데 보였다. 저 위험한 곳에서 아이들은 앞으로 썰매를 타거나 하며 놀진 못할 것이다.
위태로워 보이는 빙판을 보니 부대 생각이 또 머리를 지끈하게 했다. 앞으로 루빈은 어떻게 될까.
비록 대령이 친우인 황태자의 비호를 받아 사형을 당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리데바인의 주인을 죽인 죄는 몹시 크다. 대령의 복귀는 당연히 기대하기 어렵겠지.
훗날 황태자가 루빈을 야울로 귀속한 다음에는 누구를 지휘관으로 올릴지? 어쩌면 황태자는 할데바인 잔존 세력과 기나긴 대립에 지쳐서 타협을 볼지도 모른다. 그 세력의 인물을 루빈의 새로운 지휘관으로 앉히는 조건이라든가, 그런 것 말이다. 군부에선 이미 그런 말이 들리고 있었다.
루빈에 치욕을 줬던 세력에서 온 지휘관을 모실 바에야 차라리 퇴역하는 게 좋을지도?
아만카이트 중령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뒤에서 옷자락을 잡았다. 그 순간 중령은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군인이나 무인은 언제나 기에 민감해야 하는데, 누군가가 기척도 없이 뒤따라 붙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령은 제발 위험한 일이 아니길 바라면서 뒤돌아보았다.
“누….”
한 자그마한 소녀가 중령의 옷자락을 잡고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녀는 마치 인형 같았다. 진줏빛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괴괴한 선홍빛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주 예쁘장한 인형. 그러나 어째서인지 복장은 소년들이나 입을 것 같은 털털한 옷이다.
이런 새벽에 민가라고는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군인의 뒤를 잡는 이유가 뭘까? 중령은 어이가 없어서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다.
“너는 누구냐?”
그 순간, 간결한 정보가 한꺼번에 뇌리에 들어왔다.
기갑체 부품 창고를 지키는 군인들에게 적당한 핑계를 대 그들을 대피시킬 것.
사괴티오르의 열쇠가 숨겨진 곳을 말할 것.
그것은 정보라기보다는 숫제 지시에 가까웠다. 사괴티오르. 그것은 헤그 레 지괴르가 몰던 기갑체의 암호명이다. 파괴력이 굉장한 기체고 그것의 암호명을 아는 자는 헤그의 직속 부관인 아만카이트 중령뿐이다.
중령은 이 소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소녀가 헤그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자신에게 왔단 것은 알 수 있었다.
감옥에 있는 대령이 어떤 일을 시작하기라도 한 건가?
아만카이트 중령은 붉은 눈의 소녀에게 뭔가를 물으려고 했으나, 그사이 또 뇌리에 어떤 말이 들어왔다.
시간이 없다. 성도의 너구리 새끼들을 죽이고 싶다면 얼른 사괴티오르의 열쇠가 숨겨진 곳을 말하라.
아만카이트 중령은 난생처음으로 군인의 길에서 벗어나고야 말았다.
“트리아노네(황후의 봄 별장) 뱀 수인의 배. 그곳에 열쇠가 있다.”
성도의 건방진 무리를 없앨 수만 있다면, 뭐가 어찌 돼도 그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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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