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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77화 (77/122)

00077  6. 돋아난 날개, 몰락하는 별  =========================================================================

즉, 성황파를 무찔러달라?

헤그는 마리를 천천히 지나쳐가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데바인이 악귀처럼 굴었기에 그 잔존 세력인 성황 무리도 할데바인 취급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악귀 같은 그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이들은 많다. 오슬의 수인족부터 시작해 반 로젠플라드 교, 황태자, 할데바인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는 무리 등 많은 이가 성황 무리를 몹쓸 집단 취급했다.

그런데 헤그가 생각하기에 원래, 성황파를 무찌르는 것은 황태자의 다음 목적이기도 하다.

어째서 이 여자가 먼저 와서 부탁하는 것일까?

적어도 황태자가 시킨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늘 친우인 자신에게 직접 표현하곤 했으니까. 굳이 이 여자를 시킬 별다른 이유도 없을 것이고.

지금 이 여자는 궁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부탁했다. 살짝 고집스럽게 느껴지는 눈빛이 그걸 증명한다.

헤그는 무기력한 기분 중에 아주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성황 파를 없애달라니, 나 같은 죄인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는군.”

그를 따라잡은 마리가 살짝 조급하게 말했다.

“무리한 부탁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은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혹시 알고 있나요? 황도에서 당신은 소 황제(할데바인)를 죽이고도 죄인 취급은커녕 영웅 취급을 받고 있어요! 게다가 당신의 부하들은 황궁에 침입해서라도 영웅 지괴르 대령을 구출하겠다고 열의를 불태우고 있답니다! 그런 그들이 당신의 명령을 듣지 않을 리 없잖아요! 당신은 성황 파를 잡기 딱 좋은 사람이라고요!”

헤그는 비웃었다. 사람들이야 흡혈귀 같은 정책만 내세워 온 할데바인이 죽어서 기쁜 것일 테고, 부하들 역시 루빈이라는 공동체를 멋대로 신성 정부에 귀속하여 갖은 훈련을 시킨 할데바인이 미웠는데 그 복수를 지휘관이 대신해주니 좋아서 저러는 것이리라.

하지만 헤그는 그들을 위해 할데바인을 죽인 것이 아니다. 할데바인 살해는 오로지 개인적인 의도, 더럽혀진 마음을 스스로 고통의 구렁텅이로 빠뜨려 단죄하려고 저지른 짓일 뿐이었다.

오직 자신을 위해 한 일인데 어째서 남들에게 찬양을 받아야 하는가? 이제 와 영웅 취급받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 여자는 영웅이 되라 말한다.

“당신만이 루빈을 지휘해 멍청이 패거리를 없앨 수 있어요! 지금으로선 당신밖에 없다고요!”

“…….”

“지괴르 대령! 내 말 듣나요?”

“……좋다.”

헤그는 대답을 하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낮처럼 밝아, 너무 밝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어차피 진흙탕에 굴러도 괜찮을 몸, 신성 정부와 싸우다가 죽는 것도 자신에겐 고통스러운, 그래서 더 짜릿한 싸움이 될 테지.

다만 그는 하나의 조건을 원하는 사람처럼 굴어보았다.

“내가 성황을 죽이면 당신은 내게 뭘 해줄 수 있지?”

어쭙잖은 대답을 듣는다면 왠지 기분이 나쁠 것 같다. 제아무리 스스로 바닥을 구르기로 했지만, 이를테면 제국의 정의 확립이라느니, 평화라느니, 악의 무리 단죄라느니 하는 뜬구름 잡는 목표에는 어울려주지 못할 것이다. 일신의 평화를 스스로 망친 이가 제국의 평화를 위한다는 말에 동조할 순 없는 법이다.

마리는 다시 그의 앞에 서서 기도하는 이처럼 두 손을 모으며 물었다.

“무얼 바라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듯 자신만만한 태도. 두 개의 달이 뜬 밝은 밤이라 그런지 그녀가 뿜어내는 안광도 선명하다. 맑은 눈이다. 좋은 표정이다. 세상의 더러움을 모르고 고생도 겪어 보지 않은, 태어나서 아름답고 밝은 일만 겪으며 살아온 듯한 자의 해맑은 표정을 보고 있으니 문득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이 생각났다.

자신의 양 동생이자 약혼녀도 돌이킬 수 없는 광인의 길로 빠져들기 전에는 저런 표정이었다. 이슬처럼 투명하고 달빛처럼 어둠을 밝히는, 빛나는……. 가슴이 너무 뛰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차마 단 한 번도 만지지 못했던 얼굴.

애증의 얼굴.

“바라는 걸 말해 봐요.”

“…….”

“무엇이든 들어줄게요.”

헤그는 순식간에 불편한 표정으로 변하여 마리를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마리가 그의 한쪽 팔을 잡았다. 헤그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단단한 보석 같은 눈동자가 흔들린다는 것을 마리는 눈치챘다. 그녀의 투명한 눈동자는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

‘이 남자는 텅 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야! 누가 곁에서 훅하고 바람만 불어줘도 그쪽으로 쓰러지기 직전인 그런 남자라고!’

마리는 헤그의 팔을 부드럽게 쓸었다. 가녀리고 기다란 손가락이 스치는 촉감은 부드럽고도 간지러웠다. 긴 시간 고통에 절었던 헤그의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답해 봐요. 당신…… 나를 만지고 싶죠?”

헤그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사내들이 득시글대는 감옥에 있다 보면 당신 같은 여자에게 한 번쯤 손대고 싶은 법이지.”

“그럼 손대요. 얼마든지.”

“……!”

헤그는 자기가 말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했다. 과연, 색광녀라 알려진 자답게 스스럼없다.

“어차피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거 다 알아요. 자신을 스스로 죽이지 못해서 그 너구리를 죽이고 감옥에 제 발로 들어간 거겠죠? 그런 사람에게 그 어떤 명분도 중요하지 않다는 건 잘 알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조건, 참 괜찮잖아요? 황태자비와 똑같이 생긴 창녀 하룻밤 품고 그 창녀의 조건을 들어주는 것? 먹을 거로 치자면 최후의 만찬 같은 느낌도 들 테고…….”

헤그의 눈이 경멸의 빛을 띠며 가늘어졌다.

“스스로 만찬이란 표현을 하다니. 자신감이 대단하군.”

“몸은 더 대단하답니다.”

헤그는 숨이 막혔다.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그리고 서둘러 야울 궁 쪽으로 내려가며 겨우 호흡을 추슬렀다.

그런 그의 등에 가까이 다가간 마리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서로가 좋은 일을 하자고요. 지괴르 대령.”

마침 바람이 불었다. 밤바람은 마리의 몸에서 나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를 온 주위에 퍼지게 했다. 헤그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기도 모르게 대답이 나왔다.

“나쁘지 않지.”

“역시나!”

“아, 하룻밤 가지고는 안 될 거야. 쌓인 게 많아서 말이지.”

마리는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의 대답이라고 생각하며 씩 웃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런데 저 멀리 위에서, 그들이 탈주하는 것을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비오르틴은 편안한 수면에 효능이 있다는 차를 한 잔 마시며 담담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곁에 있는 자가 그에게 말했다.

“저대로 도망가게 두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황궁에 정체 모를 기운이 침입했다는 소리에 놀라서 마법사들에게 주시하라 일렀는데,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를 보게 되었고 그 방문자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마리니시네. 그렇게 찾고 잡으려 해도 꼬리를 밟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스스로 궁에 나타나 줄 줄이야.

한참 전부터 마리와 헤그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마리는 지괴르 대령에 관한 것도 잘 알고 성황파를 없애려는 야심도 가진 여자다. 또한, 무슨 능력을 갖췄는지 이런 궁에도 멋대로 침입하는 게 가능했다. 투명화라는 고급 마법을 쓰면서까지 말이다.

흥미로웠다. 그러잖아도 신성 정부가 눈엣가시였는데 어릴 적 추억의 그 말괄량이가 나타나 헤그에게 신성 정부를 망가뜨려 달라고 부탁하다니. 헤그가 성황을 제거하면 자신으로서야 좋고, 제거하는 데 실패한다 해도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으니 잃을 게 없다. 그러니 앞으로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어서 좋긴 한데 문제는 저 여자가 스스로 창녀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비오르틴은 문득 재판에서 할데바인 측이 주장하던 마리니시네라는 여자의 특징을 떠올렸다. 성적으로 난잡하게 군다는 것. 어디까지나 너구리가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악담에 불과할 뿐이라고 여긴 적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그게 아닌 모양이다.

‘확실히 그냥 시골 창녀로 남기엔 대담한 여자야.’

비오르틴은 찻잔을 내려놓고 하늘을 보았다. 두 개나 떠오른 달 때문에 밤이 밝았다. 아주 쓸데없는 밝기다.

마리니시네가 궁에 침입한 것을 괜히 알아버렸나?

덜 비워진 찻잔이 탁! 하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내려졌다.

***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는 야울 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가, 주인과 죄인 두 사람을 태워 서쪽으로 날았다.

한 시간 이상을 날아 도착한 곳은 아주 크고 조용한 저택이었다. 지붕과 외벽 모두가 남색 타일로 단순하고도 세련되게 만들어졌고 나무는 사시사철 똑같은 소나무뿐이다. 흔한 조각상 하나 없고 정원도 없다. 나쁜 말로 하면 황량하고 좋은 말로 하면 절제미가 보이는 이 집은 누가 보아도 군인의 집 같다. 그렇다. 이곳은 헤그의 저택이다. 하인들과 경비들은 전부 보이지 않았다. 헤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즉 그의 아버지가 마검이 된 후로 저택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던 것이다.

마리가 마리아에게 일러두었다.

“기다리지 말고 당분간 느긋하게 황도 구경이나 하라고 해주렴.”

호위기사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마리아에게는 듣기 좀 이상한 말이었다. 저 죄인과 주인이 무슨 일을 하기에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들어야 할까. 주인의 종이 되어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계획에 관해 듣긴 했고 그래서 주인이 이 죄인을 만나 무엇을 논의할지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마리아는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곧 마리아는 왔던 길을 되돌아 하늘을 날았다. 몇 시간을 날아서 삼각 다리 플래티르콘의 날개 위에 착지했고, 그때부터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다리 아래 불법 건축물, 자기들의 거주지로 가야 할 때다. 예전에 그 거리에서 불량배들에게 당한 적이 있기에 몸을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성용 후드와 로브는 필수다. 키가 커 보이려고 나막신도 신었다. 한낱 인간들 따위에 이런 사소한 것을 신경 써야 한다는 게 영 마뜩잖았다.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드래콘도 긍지 높은 생물이었는데 고작 인간을 조심해야 한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애당초 탓해야 할 게 있다면 인간에게 잡혀 굴종하게 된 숙명을 탓해야 하리라. 소용돌이 산에서 기사님과 만나지만 않았다면…….

“하아.”

점점 인간으로서 내쉬는 한숨에 익숙해져 간다.

거리 입구에 들어서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보았다.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은 비록 후드와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있지만, 자신은 그런 기사님을 잘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사님이 입고 있는 후드를 사다 준 이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밝은 달빛 아래 기사님의 얼굴이 아주 잘 보였다.

“이제 오는구나.”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너가 마리아에게 뭔가를 물으려다가 그만두고 걸음을 나란히 했다. 마리아는 기사님이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혼자 올 거라고 생각했더니 역시나군.”

뜬금없는 말에 마리아는 하이너를 올려다보았다. 하이너는 앞을 보면서 묵묵히 말을 이었다.

“참 겁도 없지. 이런 밤에 돌아다니면 질 나쁜 녀석들에게 시비가 걸릴 수도 있어. 너는 그렇게 남자의 후드나 로브를 입고 둘러도 여자애처럼 보인다는 게 문제다. 다음부터는 투명화해서 다니는 게 좋아. 비록 그림자가 걸릴 수도 있다는 게 문제지만 어쨌든 편하니까.”

마리는 그제야 하이너가 아가씨가 아닌 자신을 걱정하여 마중 나왔단 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마리아는 기사님이 아가씨에 관한 것을 물을 줄 알았으나 정작 기사님은 아가씨에 관해 전혀 묻지 않는다. 아마도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묻지 않는 듯했다.

오늘따라 거리의 사람들이 조용하다. 침묵이 너무 무겁다 보니 밤하늘에 뜬 두 개의 달빛이 마치 소리라도 되는 듯 시끄럽게 느껴졌다. 자신이야 인간의 말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늘 조용하지만, 기사님도 조용한 게 이상하다. 기사님은 외모와 달리 말이 적은 분이 아니시다. 적어도 자기가 아는 기사님은, 언제나 아가씨와 투덜거리셨고 또 그것을 즐기시는 분이었다.

***

마리아와 하이너는 거처에 돌아왔다. 바깥에서도 어색하던 침묵이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 더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리아의 생각일 뿐이었다.

마리아는 지금 소년 루돌프의 빈자리를 아주 크게 느꼈다. 루돌프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런 때 곁에 있다면 이 어색함을 조금이나마 없앨 수야 있었겠지.

‘잘 지내고 있을까?’

마리아는 청소할 것도 없는 방을 괜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하이너도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다. 이 건물은 빈자들에게 머물 곳을 제공하고 월세를 받으려고 만들었기 때문에 시설이 좋지 않다. 그러므로 다른 건물들과 달리 온수 시설 같은 것은 기대해선 안 된다. 욕실에선 녹이 슨 더러운 물만 나오는 편이었는데, 하이너는 자신의 헤츨링 마법을 이용하여 그 물을 깨끗한 온수로 만들어 씻는 데 이용했다.

한참 후 씻고 나온 하이너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물 준비 해놓았다. 씻는 데 쓰려무나.”

그러나 자체적으로 정화 마법이 가능한 마리아는 씻지 않아도 된다. 마리아는 괜찮다는 의미로 조용히 웃어 보였다.

얼마 후, 마리아는 하이너가 외출하려고 외투를 다시 입는 것을 보았다. 하이너는 후드가 아닌 멋진 모자를 쓰기도 했다. 그 순간 마리아는 그가 아가씨를 마중 나갈 거라고 예상했다.

마리아는 아가씨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기다리지 말고 당분간 느긋하게 황도 구경이나 하라고 해주렴.’

마리아는 하이너의 뒤를 바짝 붙었다. 그를 잡아야 했다.

아가씨는 당분간 못 올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기사님께 전해야 한다. 그래야 기사님이 헛된 걸음을 하지 않으시고, 그래야 헛된 실망을 하지 않으시…….

마리아는 하이너의 옷깃을 잡고 돌려세웠다.

============================ 작품 후기 ============================

선, 추, 코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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