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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51화 (51/122)

00051  5. 눈꽃 샹들리에가 그대 침실을 빛낼 때   =========================================================================

그의 키스는 더할 수 없이 달콤했으나 마리는 왠지 발끈했다. 낭만에 둔하단 말 때문일까?

“흐응. 낭만도 낭만 나름이지. 누가 이런 거친 낭만을….”

“그야 이렇게 씻으면서 또 할 수 있잖습니까.”

아가씨의 이마 전체를 입 맞추던 그는 점점 입술을 노렸다. 입술과 입술의 마주침은 점점 진해졌다. 계곡의 솟아오르는 수증기만큼이나 뜨거운 시간이 또 한 차례 이어질 조짐이었다. 인적이 드문 실렌틴 광산의 계곡은 그들이 은밀한 유희를 즐기기에 최상의 장소가 되었다.

***

해가 질 무렵까지 공부하던 루돌프는 온몸이 찌뿌듯하여 잠시 몸을 풀 겸 밖으로 나갔다. 눈을 헤치고 나가 설산을 내려다보니 하품이 나왔다. 어째 하품하는 모양새가 이런 추위에 제법 익숙해진 느낌이었다.

꼬르륵.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배고픔에 힘이 들었다.

‘다들 어디 가셨지?’

어둑해질 때까지 오시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삼 무서워졌다. 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와 대장 마리니시네 아가씨 그리고 멋진 기사님이 없으면 자신은 그저 무력한 소년일 뿐이다. 불길함이 엄습하자 소년은 급기야 대장을 탓하고 말았다.

‘나, 참. 갈 땐 가더라도 어딜 가시는지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말씀하셔야지.’

또 한 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오늘 한 끼도 먹지 않았으니 이젠 정말로 뭔가를 먹어야 할 때다. 무얼 먹는담. 물론 실내로 돌아가면 먹을 게 있긴 하다. 기사님의 커다란 가방엔 없는 게 없으니까. 그중 먹을 것은 마른 빵, 육포, 말린 과일, 당과 등 보관이 쉬운 것들이 대부분으로 맛도 좋았다. 무려 부자 사파이어 님 측에서 챙겨주신 고급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음식들도 엄연히 아가씨의 물건. 허락도 받지 않았는데 먼저 손대선 안 된다. 누군가의 종이자 조수로 살았던 자신으로서 그런 일은 조금 꺼려졌다.

“하아.”

하품 후에 이어진 한숨이 새하얀 바람에 섞여 멀리 날아갔다. 터덜터덜 힘없이 걷는 소년의 눈에 불현듯 한 생물이 들어왔다. 하얀 눈밭에서 갈색 털을 날리며 달리는 사람 머리 만한 동물.

“포케다!”

포케. 대륙 동남쪽에 서식하는 귀가 축 처진 포유류. 루돌프는 언젠가 스승 한스 레 하인첼이 저것을 잡아 직접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맛이 제법 나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좋아! 오늘은 내가 요리사!”

오늘의 식량을 점 찍어둔 소년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냥을 시작했다. 포케의 다리는 굉장히 날쌔서 소년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달려야 했다. 불어오는 찬바람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로 달리는 데도 포케라는 짐승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이놈!”

포케는 이따금 뛰다가 멈추기도 했고, 헉헉거리는 소년의 앞에서 혀를 내밀기도 했다. 그 행동은 체온 조절을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소년의 눈에는 사람을 놀리고 여유를 부리는 행동처럼 보였다. 감히 고작 식량인 주제에 사람을 놀릴 줄 알다니! 소년은 약이 올랐다.

“좋아! 오늘 널 잡다가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소년이 광전사가 되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열심히 달리던 포케는 한순간 뒤따라오는 자가 없단 걸 느끼고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소년이 오던 쪽을 보았다.

소년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갔는지…….

그때 루돌프는 설산의 어느 구덩이에 빠져 미끄러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파놓은 것은 아닌 자연적인 구덩이인데, 그 구덩이가 눈밭에 파묻혀 있어 소년은 그것을 미처 확인할 수 없었다. 겁먹은 소년은 비명도 지르지도 못하고 구르다가 구덩이 안쪽 깊숙한 곳에 몸이 처박혔다.

“읏! 아얏!”

전신을 파고드는 욱신거림에 한참을 찡그리다가 주위를 살펴보았다. 구덩이 안으로 들어온 햇볕 덕분인지 보는 데 지장은 없었다.

대체 이 구덩이는 뭘까. 가만. 예전에 기사님께서 말씀하셨지. 실렌틴 광산 주변 광부들이 시추를 위해 파놓은 구멍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그렇다면 자기도 그런 데 빠진 건가?

꼬르륵. 꼬르륵.

이런 상황에서도 배고픔은 여전하다. 소년은 구덩이를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그리 깊지도 않고 경사도 완만하여 탈출하는 데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포복하면서 천천히 올라가면 될 거로 생각하고 자세를 잡으려 했다. 그 직전.

“응?”

어떤 빛이 눈을 사로잡는다.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안쪽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자세히 보니 마치 반짝이는 가루를 품은 푸른색 수증기가 나오는 것만 같았다.

‘신비로워…… 실렌틴 광산은.’

이제야 이 구덩이 내부가 어째서 밝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햇볕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저 아래서 뿜어 나오는 푸른빛 때문이리라!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소년은 잠시 탈출을 미루고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특이한 물건을 발견했다. 반질반질하고 바스락거리는 특이한 소재의 주머니가 빛의 중심에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개였다.

‘뭐지, 이건?’

색깔은 빨강이고 모양은 사각. 크기는 넓게 펼친 손바닥보다 조금 크다. 그런데 네 변 모두 뚫린 데가 없다. 그래서 안의 물건을 확인할 수 없었는데, 만져보니 원형의 딱딱한 뭔가가 들어있는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안에 든 물건도 물건인데, 소년의 눈을 더욱 사로잡는 게 있었다.

‘이걸 어떻게 읽으라는 거야?’

주머니 아니, 봉투 바깥쪽에 표기된 검은색 문자들. 마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다른 세계에서 온 문자인 듯 낯설다. 바탕에 보이는 그림도 특이하다. 따끈한 붉은 국물에 꼬불꼬불한 면이 담겨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 하지만 봉지 속에 뜨거운 물이 있다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소년은 황당했다. 잡혀야 할 포케는 잡히지 않고 이런 엉뚱한 것만 보이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배고프다 보니 헛것이 보인 건가?”

그때였다. 갑자기 어깨로 슬금슬금 뭔가가 기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설마 뱀이?

“으아아아아!”

비명을 지르던 소년은 곧 어깨를 타고 오르는 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앞으로 걸어와 섰다.

진줏빛 머리카락에 진홍빛 눈동자의 소녀.

“마리아 누나?”

마리아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느냐는 듯 소년을 보았고 소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 휴우. 심장 떨어질 뻔했네. 그나저나 실렌틴 광산 조사는 잘 되었어요?”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루돌프가 손에 든 붉은 주머니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소녀도 그것의 정체가 몹시 궁금한 듯했다.

루돌프가 설명했다.

“아, 이거요? 좀 특이하죠? 겉은 반질반질하고 바스락거리는 것이 안에는 단단한 게 들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우리 이곳을 빠져나가죠.”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루돌프의 뒤를 지나쳐갔다.

“뭐하세…?”

마리아는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보고선, 그곳에서 봉지를 몇 개나 더 챙겼다. 루돌프는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은근 욕심쟁이라니까.’

***

실렌틴 광산 폐가.

화로에선 불길이 적당하게 치솟고 있었다. 그 위 커다란 냄비에는 물이 한가득 끓었다. 여기서 나오는 온기와 습기 덕분에 실내는 전혀 춥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하이너는 식사를 준비했다. 눈을 녹인 물에 손을 깨끗이 씻고 앞치마를 몸에다 둘렀다. 건장한 체격에 그러한 차림이라니. 마리는 그가 제법 귀여운 듯 웃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를 돕기도 했다.

예전 같으면 호위기사에게 식사준비를 모두 맡기고 유유자적 쉬었겠지만, 이제는 여행의 대장이자 동료라는 개념이 든 덕분인지 그를 돕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보자, 육포와 조미료들 그리고 건조채소만 내놓으면 되는 거야?”

그녀가 짐을 뒤적거려 필요한 재료를 꺼내놓는데, 갑자기 하이너의 낯빛이 걱정에 물들었다.

“루돌프가 어디 간 걸까요?”

“음, 글쎄? 책이 펼쳐진 것을 보니 공부하다 나간 것 같은데. 잠시 가볍게 운동하러 나간 거 아닐까?”

그때 문이 열리고 루돌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마리아는 보이지 않았다. 마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하이너에게 조용히 말했다.

“제 이야기를 하는데 오다니, 저 애도 하여간 귀족은 못 된다니까.”

루돌프는 구덩이에서 주워 온 봉지들을 모조리 테이블 위에 두었다. 봉지는 반질반질하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돌프는 그 주머니들을 보다가 대장과 기사님을 보았다. 이 두 남녀……. 왠지 옷도 깨끗하고 머리도 보송보송하고 무엇보다 얼굴들이 다들…….

“반짝반짝 하시네요들?”

“응? 뭐가아?”

“얼굴이요.”

“어머! 내 얼굴은 원래 반짝반짝해!”

루돌프는 자기도 씻고 싶다고 중얼거리다가 테이블에 오른 봉지들을 가리켰다.

“이것 좀 보세요. 구덩이에 빠졌다가 주워왔는데 참 신기한 물건이에요.”

“위험한 거면 어쩌려고….”

하이너가 루돌프에겐 좀처럼 하지 않은 잔소리를 하며 봉지들을 살폈다. 그런 와중에 마리가 그 봉지 중 하나를 들고선 요리조리 살피다가 아는 체 했다.

“호오! 이거.”

루돌프는 아가씨가 봉지 앞뒷면의 낯선 문자를 읽을 줄 아는 눈치라서 대뜸 물었다.

“이 물건을 아세요?”

“몰라. 하지만 글은 읽을 수 있어.”

그러자 루돌프가 존경스럽다는 듯 보았고, 하이너는 피식 웃으며 화로에 나뭇가지를 몇 개 더 넣었다.

‘읽을 줄 아시긴. 어차피 읽는 척만 하시겠지. 엉터리로 읽어도 다들 알 게 뭐냐.’

하이너가 비웃는 사이 마리가 주머니에 쓰인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왕라면, 매운맛. 물 오백오십… 분말을 넣고 면을 넣은 후 사 분간 더 끓입니다. 분말스프는 식성에 따라 적당량 넣어 주시고, 기, 김치? 파? 계란 등을 곁들여 드시면 더욱 맛이 좋습니다…….”

루돌프가 손뼉을 쳤다.

“우와! 맛? 맛이요? 그렇다면 이건 역시 여기 나온 그림답게 뜨거운 물에 면을 끓여서 먹는 거란 말이군요? 마침 저기 물이 끓으니까 저기다가 해먹으면 되겠어요!”

“어마마! 그러네! 우리 이거 먹어 보자!”

소년과 아가씨가 합심하여 요리하려는데, 하이너는 반대했다.

“구덩이에서 나온 것을 뭘 믿고 먹겠다는 겁니까? 안 됩니다.”

“어머! 촌스럽긴! 이건 자연적으로 생성된 텔레포트 홀에서 이따금씩 나오곤 하는 다른 세계의 식량, 라면이라고.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어쨌든 네가 육포 스프를 끓일 물은 우리가 라면을 끓이는 데 써야겠으니 양보 바랄게.”

하이너는 몹시 못마땅했다. 아가씨는 전에도 호르몬이니 뭐니 하는 제국에선 쓰지 않는 단어를 쓰시더니 이번에는 라면이라는 별 괴상망측한 것을 식량으로 인정하며 아는 체 하신다. 나, 참. 호위기사를 뭐로 보고. 저걸 먹고 잘못되면 자신의 체면이 어찌 되는지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가?

하이너는 어디 한번 잘 먹고 잘 해보라는 듯 짚더미 위에 드러누웠다.

“이거 잘 됐군요. 덕분에 귀찮게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럼 어디 두 분끼리 라면인지 뭔지 맛나게 드시길.”

호위기사는 제 말을 듣지 않는 아가씨께 삐친 게 분명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리는 라면을 무려 다섯 봉지나 끓였다. 루돌프는 새로운 세상의 음식을 맛볼 생각에 군침이 돌았고, 아가씨의 지시에 따라 스프 봉지를 뜯는 등 최대한 도왔다.

그리고 드디어 라면이 완성되었다.

냄새를 맡은 하이너의 잘생긴 코가 조금 전부터 씰룩이기 시작했다.

“킁, 크… 흐엣취!”

“어머, 하이너! 감기야?”

하이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기는 무슨. 그나저나 아가씨 진짜 저걸 드실 생각인가? 냄새만 맡아도 이렇게 매운데? 정말이지 미치셨군. 어디 혀에 한번 불이나 나보라지.’

라면의 매운 냄새에 질린 그가 아예 벽 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아 버렸다. 아가씨와 소년은 신이 나서 테이블에 라면을 차렸다. 루돌프가 바너에서 받은 가벼운 소재의 식기들을 내려놓자 마리는 그 식기를 선물한 이를 떠올렸다.

“사파이어 그 녀석 덕분에 여행이 참 편하단 말이야. 어쩜 이리 가벼운 식기가 있을 수 있는지. 바너는 정말 장인의 도시다웠지…….”

륀체르 사파이어의 칭찬을 들은 하이너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당장에라도 사파이어 그 녀석이 선물한 유방 모양의 반지를 아가씨의 손가락에서 빼내어 라면 냄비에 던져버리고 싶었다.

루돌프가 라면을 그릇에 옮겨 담아 아가씨에게 먼저 건넸다. 마리가 그것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소년!”

마리는 팩 토라져 누운 하이너에게 다가갔다. 눈을 감아 자는 것 같았지만 불퉁한 표정을 보니 완전히 잠든 건 아닌 듯했다.

아니…… 분명 자는 척하는 것이리라.

마리는 포크로 면을 돌돌 말아 후후 불었다. 그리고 대뜸 그것을 호위기사의 입에 슬며시 넣었다. 그렇게 하이너는 원치 않은 라면을 강제로 먹게 되었고…….

“어때? 맛이?”

“정말이지 개의 똥을 먹는 것 같….”

그 순간, 입속으로 퍼지는 매콤한 스프의 맛과 꼬들꼬들한 면발의 감촉, 그리고 강렬한 MSG의 감칠맛…….

“맛있어?”

하이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라면은 그의 목구멍을 지나쳐 위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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