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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25화 (25/122)

00025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새하얀 눈이 쌓인 크래파. 한겨울에도 태양은 침묵의 장 지붕에 쌓인 눈을 서서히 녹이며 제 몫을 하고 있었다.

하이너가 의식을 되찾은 것은 쓰러진 후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커튼을 타고 들어오는 따가운 햇볕에 눈을 뜨자 아가씨는 보이지 않았고 검붉은 머리칼의 소년-루돌프-이 자신을 간호하고 있었다. 이름이…… 루돌프라 했던가.

‘얘가 이렇게 생겼던가?’

지난밤에 보았을 땐 캄캄하여 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조막만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그렇다고 남자답게 잘 생겼다기보다는 좀…… 머리만 길면 영락없는 예쁜 소녀 느낌이 난다고 해야 적당하겠다.

루돌프는 기절한 기사님이 깨어나자 몹시 기뻤다.

“깨어나셨군요!”

하이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보았다. 총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

“이상하군.”

“아,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불편한 곳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지.”

모두 루돌프가 치료해준 덕분이었다. 소년은 스승이자 마스터인 한스 레 하인첼 밑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을 이런 위기에 과감히 쓰는 기지를 발휘했다. 조혈 작용과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으로 하이너의 몸을 깔끔히 회복한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러나 루돌프는 자신의 능력을 으스대는 대신 오를린의 아가씨 공이 크다며 추켜세우고 있었다.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필요한 약들과 도구를 사다 주셨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기사님! 이렇게 무사히 깨어나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저 대신 그 몹쓸 놈들을 물리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제야 하이너는 인신매매단 소굴 사건을 떠올렸다. 어린아이들에게 몹쓸 짓을 하는 놈들에게 본때를 보인 일은 태어나서 처음 해본 정의로운 일이자 또한 범죄였다. 열 손가락 이상에 달하는 인간을 죽였다. 그것도 그들 체액을 얼리는 방식으로 죽여 버렸으니, 그 기분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들이 제아무리 인간말종이라고는 하나 인간이 인간을 죽였다는 본질적인 껄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하이너의 불편한 기색에 루돌프가 물 한 잔을 내밀었다.

“목이 마르실 텐데 이거 좀 드세요.”

하이너는 물을 단숨에 마셨다. 물맛이 이토록 쓰디쓴 적이 있었던가.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나 일단 물어볼 것은 물어봐야 한다.

“그 건물 아이들은 무사히 떠났나?”

“예. 대부분 그때 빠져나간 것 같아요. 하지만…….”

루돌프의 얼굴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왜 그러지?”

“다리가 잘린… 아니, 다리가 불편한 애들은 어찌 되었나 모르겠어요.”

루돌프는 인신매매단에게 심하게 반항하다 몹쓸 짓을 당한 그 아이들을 걱정했다. 다른 아이들이야 두 다리가 멀쩡하니 어디로 도망을 쳐도 쳤겠지만, 다리가 불구된 그 아이들은 도망갈 수 없다. 그대로 있다간 또 나쁜 놈들에게 돌고 도는 인생을 살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세상 모든 시름을 다 해결하지 못할 바에는 모르는 게 좋고 모른 척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이 어린 소년은 아직 알지 못했다.

“마리니시네 아가씨께서 약을 사 오시다가 그 아이들이 단체로 마차에 타는 것을 봤다고 하셨는데, 어디로 끌려갔을지…… 물론 제가 이런 걱정을 한다고 그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개자식들!"

하이너는 그 가련한 아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현실에 또 한 번 분노했다. 다행히 이 분노는 살인을 저지른 그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정당화해주었다.

이젠 뭔가를 해야 한다. 해야만 했다. 아가씨를 따라서 대륙을 정복하고 싶은 야망은 없으나 한때 기사를 꿈꾸며 정의를 추구하던 이로서 그런 천하의 몹쓸 놈들을 대륙에서 소탕해버리고 싶은 의무감은 희미하게나마 솟아나고 있었다.

루돌프는 잔뜩 화가 난 하이너의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제 기사님도 깨어나셨고, 저도 이렇게 아가씨께 훌륭한 옷을 선물 받았으니… 이곳에서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아요. 아, 참. 기사님. 언젠가는 오를린으로 다시 돌아오실 거죠?”

“흠, 모르겠다만.”

“저 대신 복수해주신 은혜, 그때 꼭 갚겠습니다. 저는 그럼 이만.”

“어딜 갈 생각이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려고요.”

“어째서? 네 스승이자 주인의 드래곤 링클을 사줄 생각인가?”

“예.”

하이너는 기가 찼다. 바너에서 무시무시한 일을 당해 놓고도 혼자서 여행하려는 이 소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모한 걸까. 겁이 없는 걸까. 열두 살의 소년이 혼자서 돈을 벌고자 여행을 떠나기엔 이 세상은 너무나 삭막하고 가혹하다. 차라리 고향 오를린으로 돌아가서 스승의 일이나 얌전히 보조해주다가 어른이 되어 떠난다면 몰라도.

그때였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그녀의 모습엔 아가씨의 정숙함이라곤 없어 호위 기사의 시름 어린 한숨을 샀다.

마리는 여관 점원 대신 먹을 것을 챙겨 들어오며 외쳤다.

“대륙 정복을 하면 드래곤 링클을 몇 개라도 살 수 있단다, 예쁜 꼬마야!”

바깥에서 대화를 모두 들은 모양이었다. 언제나 하녀들이 해다 바치는 음식만 먹다가 직접 누군가에게 음식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이 사뭇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이너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고 싸늘하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까지 아가씨의 무모한 여행에 끌어들이려 하지 마십시오.”

“어머! 무모한 여행이라니! 긍정의 여행이라고 하면 안 돼?”

“긍정은 무슨.”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지?”

마리는 버릇 같은 말을 하며 신문을 던졌다. 신문에는 한겨울 밤 바너의 상공에 나타났던 드래곤에 관한 기사로 가득했다. 대륙에선 삼십 년 만에 나타난 드래곤이었고 바너에선 무려 백 년 만에 나타난 드래곤이었다. 총 스무 명의 사상자를 낸 드래곤에 대해 제국 정부가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황도 로귀하르트에선 마력기갑부대원들을 바너 관리 명목으로 배치한 상태라고 하니 그 위기감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바너의 수도 크래파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고, 바너의 실세에 도움을 요청한 황태자는 할데바인의 정치적 공격을 타파할 방법이 사라져 난처해졌고, 인신매매단에 얼굴이 알려진 하이너와 루돌프는 몸을 숨겨야 했다.

마리는 신문의 기사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봐봐. 정의로운 기사님께서 인신매매단을 소탕해주셨다가 상을 받기는커녕 바너 전체에 수배를 당하게 되었지. 이게 말이 돼? 나쁜 놈들을 혼냈는데 도리어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게? 한마디로 그 몹쓸 녀석들이 바너 경관청에 뒷돈을 주었단 의미가 아니고 뭐겠어? 이런 도시는 썩었어. 이런 도시를 여럿 거느린 제국 역시 썩은 거라고! 그러니 내가 대륙 정복의 꿈을 품지 않을 수 있겠어?”

하이너는 마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절대 티 내지 않았다.

“인신매매를 목격했으면 합법적인 신고 절차를 밟아 죄인들을 고발해야겠지요. 그러지 않고 저처럼 막무가내로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풉! 웃기지 마! 합법적인 신고 절차를 밟는답시고 쳐! 우리가 그자들을 경관청에 고발했다고 해보자고! 과연 경관청은 그들의 죄를 캐물으려고 할까? 수사는 흐지부지하다가 놈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는 식으로 종결 내버리고 말걸?”

하이너는 마리의 말이 틀린 데가 없다고 생각했다. 기사에선 인신매매단의 죄에 대해 일절 서술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정당한 영업을 하다 피해를 받은 피해자로만 묘사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 조작은 경관청이 인신매매단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자에게 뒷돈을 받았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하이너는 왠지 이런 현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아직은 세상을 향한 믿음이 남아있었고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싶었다. 아가씨처럼 세상에 증오를 격렬히 품는 것만은 가능하면 미뤄두고 싶었다.

“어쨌거나, 신기하군요.”

“뭐가?”

“수배를 당하는 제가 이런 여관에 무사히 머물러 있을 수 있다는 게.”

마리는 침대에 털썩 앉아 하이너의 어깨를 탁! 치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아, 그 점에 관해서라면 걱정하지 마. 내 친구 륀체르가 너와 저 소년을 보호해준다고 했으니. 그러니까 거기 예쁜 꼬마야? 내 말 좀 들어볼래?”

루돌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가씨?”

“글쎄 아가씨라고 하지 말래도! 너에겐 누나로 불리고 싶구나! 아무튼, 엄한 데 가서 경관청에 붙잡히지 말고 이곳에 얌전히 있으렴!”

상황을 파악한 루돌프는 마리의 말대로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하이너와 함께 수배된 지금 길을 나서봐야 득이 될 건 없었다.

하이너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바너의 실세를 벌써 ‘친구’라고 부르는 아가씨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자가 범죄자를 무사히 숨어있도록 선뜻 도와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관절 그자가 그런 일을 하여 얻는 게 무엇일까?

“아가씨,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그 사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

“…… 참 해맑게도 대답하시는군요. 믿지도 않는 사람의 도움을 어째서 받으려 하시는 겁니까?”

“으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하이너, 나는 말이지. 비록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자의 인간성에 대해선 불신하지만 말이야. 그 자가 처한 정치적인 상황 그 자체를 불신하진 않아. 불신할 필요도 없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겠어?”

하이너는 당연히 그 사정을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으니 이해할 수도 없었다.

“가끔은 좀 알아듣게 설명하실 수 없습니까?”

마리는 할 수 없이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륀체르 사파이어가 황도의 어느 높으신 분께 곤란한 부탁을 받았다는 것, 륀체르 사파이어는 그 부탁을 들어주기가 싫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륀체르 사파이어 본인이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상황에 처했다고 엄살을 부려야 한다는 것.

즉, 륀체르가 실세로 있는 바너가 대위기 상황에 부닥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드래곤이 바너의 수도 어느 건물을 휩쓸어버린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너가 드래곤에 의해 쑥대밭이 될지도 모른단 불안감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도 남았다.

그야말로 륀체르에게 있어 천우신조의 기회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예로부터 드래곤이 인간 세상 어느 한 부분이라도 파괴한 이상, 또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드래곤의 출몰은 최소 십 회에서 수백 회에 걸치는 파괴를 불러오는 법이었다. 그것은 오를린 같은 시골에서보다 바너와 같은 대도시에서 더 명확해진다. 기질 상 인간들이 모은 보석을 좋아하는 드래곤에게 부자들이 득시글대는 도시는 협박하기 가장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제국민들은 바너가 드래곤의 먹잇감이 되었다며 걱정하고 있었으나, 륀체르 사파이어만큼은 절대 걱정하지 않았다. 륀체르는 마리를 통해 드래곤의 정체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존심을 버린 륀체르는 마리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호위 기사를 시켜 바너의 하늘을 좀 날아달라고. 때로는 못 돼먹은 놈들의 소굴을 인신매매단 소굴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마구 파괴해도 좋다고 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드래곤의 파괴’로 보일 것이고 그런 일이 자주 있어야 륀체르도 황태자에게 ‘나도 어려워 누군가를 돕질 못하겠소.’라는 변명을 할 수 있다. 륀체르가 정치적으로 난처해질 일도 없을 테고 바너의 정의를 확립하는 일 역시 덤으로 따라 온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륀체르가 여관 주인에게 거액의 돈을 찔러주면서 하이너와 루돌프의 신변을 지켜주는 것도 당연했다.

당사자 아니, 당사‘용(dragon)'인 하이너는 잠시 한참 동안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알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견디다 못한 루돌프는 헛기침하며 객실 ’다른 방에 가서 잠 좀 자겠다,‘ 하고 자리를 피했다. 마리는 그런 소년이 혹시라도 굶을까 걱정했다.

“그럼 여기 빵이라도 가져가서 먹어! 어머, 얘! 예쁜 꼬마야! 듣고 있니?”

“다음에 먹을게요…….”

루돌프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그러자 마리는 ‘성장기엔 많이 먹어두는 게 좋은데….’라고 걱정하며 빵을 한 입 삼키려 했다.

그 순간, 하이너에게 손이 잡혔다. 마리는 하이너가 어마어마한 분노를 느끼고 있단 걸 알았지만, 모른 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빵을 흔들었다.

“먹을래?”

앞으로 무지막지한 잔소리를 쏟아낼 호위 기사의 입을 빵으로 틀어막겠단 생각.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하이너는 그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고 마리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프기 직전까지 세게 잡고서 그저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낼 뿐이었다.

“하이너?”

호위 기사는 대관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심각해 보인다. 눈이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다 혹시 우는 거 아닌가? 그의 심상치 않아 보이는 표정에 마리가 잡힌 손을 까딱였다.

“괜찮아? 하이너?”

하이너는 살인을 하여 심란한 이때, 세상 근심이라곤 모르는 듯 맹한 얼굴을 하는 아가씨가 너무 얄미웠다. 또한, 그러한 낙천적인 성격이 부러웠다.

그리고…… 그 밝은 표정을 계속 지켜주고 싶단 기분도 들었다.

이토록 복잡한 기분을 들게 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이 일그러진 감정을 말로 설명하지 못하고 설명할 수도 없어서 그저 아가씨의 애꿎은 손목만 잡고서 고개를 숙였다.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저는…….”

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가씨의 호위 기사입니다.”

“으응.”

“그러니, 다음부터 어디 나가실 땐…….”

“으응, 응. 무슨 말 하는지 알아. 다음엔 어디 나갈 때 꼭 말하고 갈….”

“나와 같이 가!”

버럭 외쳐진 소리에 마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이너는 그대로 마리의 몸을 침대에 눕히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당신이 어디에 갈 건지, 뭘 할 건지 내게 말하지 않아도 돼! 내게 알려줄 필요도 없어! 나는 당신의 부모가 아니니까! 나는, 나… 저는…… 호위 기사입니다. 당신의 기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저와 같이 가시란 말입니다! 어딜 가셔도 저와 같이 가시잔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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