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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23화 (23/122)

00023  4. 가볍게 빛나는 보석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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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여자의 가슴을 보았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가슴을 본 적은 없었다. 가녀린 몸에 가슴만 저리 풍만하니 정말 신이 빚은 것 같았다. 성격은 고약한데 얼굴과 몸매는 플라미네(미의 여신) 수준이니 부조화의 극치라고 할까.

…… 그래서 더욱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제가 신이라도 되는 양 사람에게 사과하라니 어쩌라니 건방지게 굴어도 저 가슴에 자극을 받으면 어차피 다른 암컷들과 똑같은 시시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었다.

독주 한 잔을 먹이면 그 예상은 현실이 될지도.

륀체르의 검고 탁한 눈빛을 마리는 단번에 알아챘으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마리아가 잠든 동안은 함께 마셔주지.”

***

사각의 마을이 서로 거미줄처럼 구조적이고 빽빽하게 연결된 바너.

하이너는 거리 구석구석을 미친 듯 돌아다니며 마리를 찾았다. 만약 지금이 한낮이라면 그녀가 좋아할만 한 장소, 이를테면 마법용품 상점이나 카드점을 보는 가게, 드레스 가게, 장신구 가게, 구둣가게, 달콤한 간식을 파는 곳을 전부 뒤졌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시간인지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술집, 여성 전용 유흥업소가 전부였다.

‘젠장, 이 몹쓸 여자! 나한테서도 도망간 거야, 뭐야!’

아무리 찾아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으니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바너까지 오는 동안은 그저 심심풀이 말상대가 필요했겠지. 이곳 바너에는 시골 오를린이나 네히트와 달리 텔레포트 홀이란 게 있으니 여행자 입장에선 이동이 수월해지는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동이 수월해지면 호위기사는 그다지 필요가 없단 뜻도 되겠다.

그래, 그래. 그 빌어먹을 아가씨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해대고 난데없이 드래곤으로 변해버리는 성가신 호위기사 따위는 필요 없었던 것이다! 커다란 덩치에다 마법을 사용해서 사람의 이목을 끌기만 하는 드래콘 역시 마찬가지! 그래서 마리아 그로스는 진즉 비싼 값에 팔려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리아 그로스가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나?

‘가려면 곱게 떠날 것이지! 남의 동정을 빼앗기나 하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하이너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비록 아가씨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퍼부었지만, 그게 다 아가씨를 향한 애정에서 우러나왔다. 아가씨를 좋아했단 말이었다.

그러나 아가씨는 그게 아닌 듯하다. 어째 호위 기사를 그저 하룻밤 꿀꺽 먹기 좋은 노리개로만 쓰고 떠나버리나…….

하늘에서 가랑눈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이 뜨거운 분노와 배신감을 식히기엔 부족했다.

‘좋다. 나도 내 갈 길을 가겠어!’

다시 침묵의 장으로 돌아가 짐을 꾸리기로 했다. 빨리 돌아가려면 다리 아래 징검다리를 이용하는 게 좋았다. 수위가 높아 이따금 거센 물살이 징검다리를 삼킬 때도 있어서 거길 건너다가 자칫 동상에 걸릴지도 모른다. 뭐 어떠한가. 지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잊기 위해서라면 그런 육체의 괴로움은 오히려 반갑다.

그런데 다리 아래로 내려가다가 하이너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마주하게 되었다.

“으으으… 추워…….”

헐벗은 가시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속옷 한 장 차림의 소년. 겨우 열한 살, 열두 살쯤 되었을까. 지저분한 모습이 거지 같았는데 아무리 거지라 해도 저렇게 홀딱 벗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이너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 꼴은 뭐지?”

하이너의 목소리를 들은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다. 소년은 하이너가 혹시 자신을 쫓아온 나쁜 사람들인가 싶어 더욱 몸을 떨었다.

“으으으… 안 돼…… 안 되는데.”

“이봐.”

하이너가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씌워주려고 다가갔다. 소년은 도망을 가려고 가시나무 사이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마음만 급했는지 팔과 등 여기저기에 가시가 긁혔고, 결국엔 너무 아파서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비틀거리고 말았다.

“아으앗!”

“어이가 없군.”

하이너는 외투를 벗어 소년에게 씌워주고 안심하게 했다.

“무엇 때문에 도망가려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나쁜 사람은 아닐 거다.”

그제야 소년은 조금 마음을 놓았다. 어둠에 적응한 소년은 하이너의 얼굴을 제법 자세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반듯한 이마, 조각 같은 코, 날렵한 턱선, 하나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 어쩐지 낯이 익다.

“다, 당신은…!”

소년은 언젠가 이 남자의 얼굴을 본 적 있었다. 물론 하이너는 소년을 본 적이 없을지 몰라도. 왜냐하면, 당시 하이너는 술에 취해 기절해 있었을 때니까.

“음?”

하이너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는 소년을 보고 당최 알 수 없었다.

소년이 자기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

“저, 그러니까, 아직 모르시나 보군요. 그게… 기사님의 몸에 링클을 잘못 이식한 녀석이 바로 저입니다…….”

그랬다. 이 갸륵할 지경으로 정직한 소년의 이름은 루돌프 하인첼. 고아로 살다가 한스에게 길러진 소년. 한스에게 약학을 배우며 비합법적인 마법, 밀주업 보조도 하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마스터에게서 부탁을 받았다. 영주님 딸의 호위기사에게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깔을 바꾸는 링클을 이식하라고. 하지만 실수로 다른 링클-그것도 값비싼 드래콘 링클-을 이식해버린 것이다. 이식할 당시 하이너는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상태라 루돌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루돌프는 하이너의 얼굴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루돌프는 자기의 실수 때문에 드래곤화라는 불상사를 겪는 사람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기사님께 악감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마스터의 지시를 받아 한 일일 뿐이었고, 그게 드래곤 링클이란 것도 절대로 몰랐습니다. 링클들이 대개 비슷비슷하게 생겼거든요. 어찌 되었든…… 무슨 말로도 용서를 받을 순 없다는 걸 알지만, 정말 죄송합니다. 기사님.”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지 거침없이 자기 잘못을 고백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감추려 했을 것이나, 고작 열두 살의 순수한 소년 루돌프는 그런 뻔뻔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다른 말로 하면 융통성이 꽝이랄까. 드래곤 링클을 다시 마스터께 돌려줘야겠단 일념 하나로 돈을 모으기 위해 가출을 한 것만으로도 루돌프란 소년은 양심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하이너는 분노보다는 측은함을 느꼈다.

“그렇게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어린 네가 무슨 죄가 있겠나. 당사자의 동의도 없이 그런 불법적인 일에 손대는 네 마스터가 죽일 놈에다…… 그런 일을 사주한 어떤 미친년이 죄인이겠지.”

하이너는 자취를 감추어버린 마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루돌프는 하이너의 용서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는데도 쉽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가랑눈에 섞인 찬바람이 한차례 세게 불었다. 루돌프는 더더욱 몸을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지켜보기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하이너는 문득 궁금하여 물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어째서 이런 겨울에 다 벗고 이런 먼 곳에 와있는 거지? 설마 링클 이식을 실수했다고 네 주인이 쫓아낸 건가?”

“아니에요! 마스터께선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저는 단지, 마스터의 귀한 물건을 그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사용해버린 게 정말 미안해서, 돈을 모아서 다시 드래곤 링클을 사드리려고, 그래서 오를린을 떠나왔는데…….”

“그런데?”

“검은 마차를 탄 사람들이 도시에 빨리 데려가 주겠다고 해놓고선 제 짐을 모두 빼앗고 옷을 벗기고…….”

루돌프는 인신매매를 당할 뻔했다. 검은 마차 사람들은 루돌프와 같은 소년 혹은 소녀들을 묘기 단에 팔아버리는 불한당이었다. 어린이들이 반항이 심하면 팔이나 다리 하나를 잘라버려 구걸을 하게 하고, 외모가 괜찮으면 돈깨나 있는 변태들에게 팔아버리고, 사지가 멀쩡하며 말을 잘 들으면 묘기를 가르쳐 기예단에 서게 하는 그런 악질이었다.

루돌프의 경우엔 귀족들에게 팔려가 성 노예로 쓰일 계획이었는데, 그것을 알아차린 루돌프는 도망을 결심했다. 그래서 한 시간 전 감시인이 소홀한 틈을 타서 그곳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고, 이렇게 속옷 한 장 차림으로 다리 밑에서 숨어있었던 것이다.

사정을 들은 하이너는 루돌프 대신 분노하고 루돌프 대신 욕지기를 뱉었다.

“소용돌이 산에 단체 매장해야 할 놈들!”

루돌프를 보면 동생 마르틴이 떠올라 더더욱 감정적이 되었다. 때마침 마리가 사라져서 화가 나 있던 중에 그런 인간쓰레기 같은 놈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분노들이 동반 상승하여 살인 충동에 가까운 감정을 만들어냈다.

하이너의 눈이 살기 어리게 떨렸다.

“…… 그래서 그 빌어먹을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내게 장소를 알려줄 수 있나?”

“예? 저기 삼 번가 팻말 뒤에 가장 낡은 사 층짜리 건물인데, 뭘 어쩌시려고요?”

하이너는 주저 없이 뒤돌아 삼 번가로 향했다.

순간, 루돌프는 아차! 싶었다. 인신매매단의 본거지로 향하는 기사님의 뒷모습에서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설마 나 대신 녀석들에게 복수하시려고? 설마 혼자서 그 녀석들을 다 해치우려 하시는 거야? 그건 위험한데!’

루돌프는 장소를 말해준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기사님이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 드는 것을 본 순간 이미 때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혹독한 겨울바람에 기사님의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가랑눈과 함께 휘날리고 있었다. 달빛의 역광 때문인지 기사님의 뒷모습이 멋져 보였다.

루돌프는 이를 꽉 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함께해야 해! 내게도 책임이 있어!’

루돌프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각목과 짱돌을 들고서 하이너의 뒤를 따라갔다. 인신매매단 녀석들과 다투다가 죽어버리면 어쩌나 두려움이 들었지만, 기사님을 모른 척하고 나만 살자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낡은 사 층짜리 건물 입구로 들어가니 계단에 한 명의 경비가 보였다. 그는 단도를 든 청년과 각목과 짱돌을 들고 들어오는 소년을 보고 휘파람을 불어 침입자의 소식을 위층 사람에게 알리려 했다.

“휘이….”

그러나 휘파람은 중간에서 뚝 끊기고 말았다. 하이너가 번개와 같은 발차기를 날려 경비를 계단 아래로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경비는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하이너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을 기절시킨 것에 자기도 놀라고 있었다. 죽은 건 아니겠지? 하이너는 설마 그 지경은 아닐 거라며 뒤돌아서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루돌프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루돌프요! 루돌프 하인첼!”

“루돌프. 제국법에 인신매매가 불법인 거 알고 있나?”

“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일은 경관 나리들을 대신해서 하는 정의의 심판이니 좀 심한 꼴을 봐도 그러려니 하도록!”

하이너는 거침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

륀체르는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흐리멍덩하게 굴리며 자꾸만 테이블로 머리를 박았다. 그의 시붉은 입술에서 독주의 독한 향이 훅 끼쳐 올랐다.

오를린의 미친 아가씨와 같이 독주를 마셨는데 어째서 자기만 이리 해롱해롱하는지 모르겠다. 미친 아가씨에게 적당히 술을 먹이고 가슴이나 빨면서 놀려고 했는데 그 욕정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자꾸 푼수처럼 신세 한탄도 나오고 있었다. 밤거리에서 일할 때만 해도 일절 주사를 부리지 않았던 자신인데 말이다. 누군가 정신을 조작하는 게 분명하지만, 지금으로선 막을 도리도 없었고 막고자 하는 의지도 딱히 없었다.

오를린의 미친 아가씨의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모두 날아가 버린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 그 은밀한 가슴골을 보면 도리어 욕정이 팍 죽어버렸다. 대신,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의 인격이 나오는 듯했다.

륀체르는 열 살이나 어린 마리 앞에서 떼를 쓰듯 징징거렸다.

“있잖아. 아휴, 골 때리지 뭐야.”

“응, 륀체르?”

어느샌가 마리는 륀체르의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륀체르는 곤란한 지시를 내린 황태자 비오르틴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며 토로했다.

“내 친구 중에 좀 어린 녀석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응응. 그런데?”

“휴우, 나 오늘 그 녀석 때문에 무지 짜증 나잖아.”

마리는 세상에서 륀체르 사파이어란 녀석보다 짜증 나는 녀석도 있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기껏 잘 구슬려 놓은 분위기-드래콘 마리아 그로스에게 부탁한 정신 조작-를 망치게 될 것 같아 온화하고 유한 태도로 대답해주었다.

“어머! 누가 이 아름다운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가진 꽃미남을 짜증 나게 할까?”

“있어. 나보다 열 살쯤 어린 싹수없는 녀석인데. 한때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녀석이 좀 도와주긴 했거든. 그래서 나도 그 빚은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륀체르는 오슬의 수인족을 매수하여 로젠플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두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압박감에 몸서리를 쳤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내란을 꾸몄단 모함을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짜 곤란하지 뭐냐. 아, 녀석이 나한테 하나를 받아가 놓고 백을 달라고 하거든? 이거 불공정거래 아닌가?”

마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럼 싫다고 하면 되잖아.”

마리는 륀체르가 성격상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라 생각했다. 고작 갈보라고 불렸다고 칼을 꺼내 드는 성격 나쁜 녀석이 그런 불공정거래는 어찌 쩔쩔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륀체르가 끄응 앓는 소릴 내며 대답했다.

“그게, 싫다고 하기 좀 어려운 처지라서.”

호위 기사에겐 어리숙한 매력을 내세우지만, 실은 눈치가 백 단인 마리는 뭔가 알아차린 듯 대꾸했다.

“왜? 그 사람 신분이 아주 높은가 보지? 어디 보자, 바너의 보석 길드 마스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면 황도의 귀족들, 로젠플라드 성황예하라 불리는 사람 그리고 할데바인 대공 아니면 황….”

륀체르는 신분 노출이 될 수도 있단 생각에 펄펄 뛰었다.

“신분이 높긴! 녀석은 그저 깡패일 뿐이야! 암! 힘이 좀 센 깡패라 보면 돼!”

졸지에 로귀하르트 제국 황태자는 깡패로 비하되고 있었다. 마리는 륀체르가 깡패라 부르는 이가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앞서 말한 성황, 할데바인 대공 아니면 황족 중 하나임이 분명했다. 마리는 짐짓 모른 척 대꾸해주었다.

“흐음, 깡패라. 바너의 실세인 네가 상대하는 깡패면 좀 규모가 큰 깡패집단의 우두머리쯤 되겠군?”

륀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수많은 제국민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그것으로 방위하면서 저들의 이익도 챙기는 제국 정부도 넓은 의미에서는 조직화한 깡패라 아니할 수 없으리라.

“이봐, 륀체르. 일단 그 깡패한테는 뭐라고 대답해두었어? 백을 줄 수 있다고 해버렸어?”

“그럼, 했지. 안 하고 어떻게 배겨? 싫다고 하면 당장 나를 밟으러 올걸? 뭐, 나를 밟는 건 괜찮아. 하지만 바너 전체가 좆 된다고.”

야심으로 바너의 장인 길드 전체를 통솔하는 실세가 되었으나 그 무게는 상당히 무겁다. 자기 하나 잘못하면 바너 전체가 쑥대밭이 될 수도 있으니. 그래서 륀체르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가 눈을 빛냈다.

“내게 생각이 있어.”

“무슨 생각? 백치 같은 아가씨도 생각을 할 줄 아나?”

륀체르의 이죽거림에 마리는 조금 발끈했지만, 티 내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네가 그 깡패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거야. 오히려 그 깡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그런 가련한 지경이 되어버리는 거지. 깡패도 사람인데 엉망진창인 녀석에게 백을 달라고 조르겠어? 차라리 ‘벼룩의 간을 파먹고 말지!’ 하고서 포기하게 될걸?”

“뭔 소리야? 나더러 망하라고?”

“아니. 융통성 없긴! 이 경우엔 망한 척만 하란 소리잖니. 깡패가 삥 뜯지 못하게 그저 망한 척만 하란 소리. 지금 나한테 구는 것처럼 징징 거리고 떼쓰며 못하겠다고 하라고.”

륀체르는 비웃었다.

“웃기는 소리! 하여간 이래서 백치들과 대화하는 건 무의미하다니까! 언제나 말은 쉽지! 그저 말만 쉬워! 하긴 네까짓 게 내 무게를 알 리가 있나!”

마리는 순간 륀체르를 하이너의 드래곤 꼬리로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 순간, 그녀는 반짝하고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드래곤을 이용하면 되잖아! 너도 바너 지역이 드래곤에게 시달려서 누구 도와줄 형편이 안 된다고 해버려! 그럼 쉽다고!”

륀체르는 뜬금없이 드래곤 타령을 하는 마리를 보고 차라리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래곤을 이용하겠다 생각만 하면 어디서 드래곤이 툭 튀어나와 협조를 해주나? 어찌 됐든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테고, 이 고민도 내일 풀어나가면 되겠지…… 그는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잠들었다.

그러자 마리는 마리아 그로스의 등에 타고 서둘러 침묵의 장으로 돌아갔다. 하이너에게 드래곤화를 부탁할 생각이었다. 드래곤이 바너에 등장해 뭔가를 파괴했단 소문을 흘린다. 그리고 실제로 바너 상공에 드래곤의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그런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만으로도 그 ‘깡패’라는 작자는 더는 륀체르에게 곤란한 부탁을 하지 않으리라!

아니, 못하리라!

“후후! 나는 정말 천재라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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