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 귀족 - 귀축왕(5)
그렇게 이틀. 에키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주들의 조교가 완전히 끝나고 알몸 결혼식의 준비까지 하고 있을 무렵. 레즈우 왕국에 음유시인 무리들을 풀어 로키시와 라키시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를 잔잔히 풀어내고 시민들을 안심시킨 후 지방 귀족들을 모아 로키시의 정당성을 인정시키는 둥의 행위가 계속된다.
처음부터 라키시의 사정을 알고 있던 자들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조아려, 그렇지 않은 자들도 새로운 권력에 무릎을 꿇어, 반골심이 있는 자들은 살아남은 드래곤과 로키시의 손에 의해 직접 처단당해, 아주 간단히 내부를 잠식한다. 그 중심에는 로키시가 있으며 바로 옆에는 스노가 붙어 있다. 라키시의 유모 일을 그만둔 후 왕성 근무를 했었던 그녀는 내부 사정을 꿰고 있었으며 일이 빠르게 진행되도록 도움을 주었다.
“사정은…… 알았다……”
“음.”
일이 좀 정리된 후 왕성의 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라키시와 스노. 한쪽은 흑색 하나로 도배된 정장과 또 한쪽은 파란색으로 도배된 정장을 입은 극명한 두 사람. 라키시는 대놓고 당황한 것 같은 표정으로 스노와 이야길 나누었다.
“즉, 내 아들, 울 애깅은, 네가 평생 꿈꾸던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고. 그게 너무나 탐나서 레아의 복수를 하는 겸 이번 일을 도왔다고… 아니, 듣기는 했지만 네 입으로 그렇게 들으니까… 영…”
로키시에게 들었던 것처럼 스노의 목적에 대해 물어본 모양이지만 답은 같았는지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 있다. 진지하지도, 웃기지도 않은, 그런 얼빠진 표정으로 스노를 내려다보는 것이 영 패기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 전장을 헤쳐 나온 남자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의 분위기다.
“야만족에 노추르와 호모우까지 끌어들인 대규모 사건이었지만 이제부터 있을 일을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대가이기도 함. 물론, 내 사심이 가득 섞인 일인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레아에 관해 생각하는 바가 없는 건 아님. 그녀는 내 친구였고, 내 사상에 동조하는, 유일한 동료였음.”
“레아의 복수를 덤 취급하지 않았더라면 그 말을 긍정해줬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우리 애깅이 목적이었다며?”
“이건 레아 또한 바랄 일이었음. 호기심 많은 그녀라면 자기 아들의 재능을 진작에 발견했을 것임. 나는 그녀가 했어야 할 일을 대신 이뤘을 뿐. 친구의 아들을 이끌어 그 재능을 세상에 풀어놓는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임. 나는 유모니까.”
“너도 어지간히 레아를 아끼는 모양이야. 울 애깅의 재능은 덤 아니냐? 차라리 그렇게 말해주면 너도 수줍은 점이 있다 생각하고 납득해주겠어.”
“그놈의 애깅 타령은 무시해주겠음. 그런 친구는 좀처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좀 진지해졌을 뿐임. 내 처음이자 마지막, 진정한 친구였음. 그래서 노력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으니 이 이상 캐물어보는 건 그만뒀으면 함.”
“하…”
자기 전 동료이자, 친구였던, 레아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런 티를 안내는 스노. 정말로 이제부터 있을 일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에 대한 마음을 죽이고 이번에 있었던 이야기를 가볍게 나눈다.
“그때는 놀랐다. 레즈우 왕국에서 비밀리에 기르고 있던 성체가 되지 못한 드래곤을 데려오다니. 아직 어린 드래곤이라고는 해도 레즈우 왕국의 병사들의 마음을 꺾기엔 충분했지.”
“이 날을 위해 왕성에서 근무했던 거니 말임. 제2 공주의 도움도 있었으니 어려운 일은 아니었음. 늘 로키시와 레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대 당한 불쌍한 공주였지만…”
“그 공주님은 어디 계시지? 다른 왕자님들이나 공주님들처럼 어디 유폐돼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 찾아도 시간 낭비임.”
“어째서?”
“자살했음.”
라키시의 눈썹이 아주 작게 흔들린다. 본래 제1 공주인 로키시의 건이 대중에 숨겨져 있었으므로 실질적인 제1 공주는 그녀였다. 그러나 그런 제2 공주님께서 자살했다고 하니 스노에 관해 괜한 의심을 품었다.
“그런 눈으로 노려보지 말아 줬으면 함. 이 왕성에 종사하는 다른 이들에게 물어보면 알 거임. 자기 아버지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그토록 비교당하며 살아왔던 로키시 본인이 여왕이 될 테니 이 이상 살아있기 싫었던 모양임.”
“비교 당했다?”
“레즈우 왕은 로키시의 모습에 레아를 겹쳐봤음. 그러나 제2 공주는 그렇지 못했고 레즈우 왕의 불흥을 사 늘 고통받았음.”
“그래서 자살이라고? 극단적인 선택이야. 너도 그렇고, 공주님도 그렇고.”
“라키시에게 듣고 싶지는 않음. 이 날을 위해서 흑수대를 기른 이 반역자 놈. 내가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언젠가 자진해서 움직였을 주제에.”
“부정은 하지 않겠지만… 그것참…”
라키시는 호모우 왕국에서 잠깐 보았던 레인을 떠올렸다. 자기 아들의 변기 취급 당하고 있던 레즈우 왕국의 공주님.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남아 있는 편이 더 나았을 거라며 아쉬운 소리를 흘려댔다. 레즈우 왕의 광기는 그 누구보다 라키시가 잘 알고 있었기에 제2 공주에 대한 안타까움이 목까지 차올랐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눈이 약한 남자임. 레아가 마지막으로 가는 길을 눈물로 장식한 바보 놈. 마지막엔 웃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넌, 너무 삭막해.”
그 말에 코웃음치는 스노.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이야기 주제를 바꿔버렸다.
“흥, 에키시는 어떰? 잘 지내고 있음?”
“울 애깅? 학교에서 봤다고 하지 않았나?”
“의례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마주 봤을 뿐임.”
그 말에 스노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라키시.
“걱정하지 마. 아주 건강하기니까. 하루 종일 여자나 안고 다니다가 갑자기 자유로워지니 공주들까지 끌어모을 정도로 절조가 없어졌지. 울 애깅이지만 참…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기둥서방 스타일이다. 게다가 이번 일을 저지른 널 망가뜨리기 위해서 이를 갈고 있는 중이지. 잘못된 분노라는 걸 알면서도 레아에 관해 숨긴 걸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카울에 관해서는 놀랐음. 분명 그 자리에서 레즈우 왕이 죽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를 감싸들며 에키시의 이름을 들먹였으니. 저 꼴을 보아하니 내 목숨도 위험하겠음.”
“레아에 관해 잘 이야기해줘. 성적 고문 이상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고. 기껏 해봤자 짐승 공주처럼 맹목적으로 변하는 것 정도로 끝난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임? 나를 좀 감싸 줄 생각은 없음?”
“아, 난 아들 편이라서.”
“이 망할 놈이…?!”
드디어 성을 내는 스노의 모습에 라키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아무리 스노라도 카울이 저기까지 변하는 건 예상 외였는지 아주 조그맣게 식은땀을 흘린다. 애초에 카울이 자리를 이탈해서 에키시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예상 외였다면서 쓴소리를 흘릴 정도로 기분 나빠했다.
성적 조교를 당하는 정도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린 거다. 에키시가 여자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건지 그 내막을 모르는 스노로선 이번 일은 말할 필요도 없이 위험했다. 카울의 모습은 명백히 이상했고 밤낮 가리지 않고 에키시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위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다.
“그럼 솔직히 말해줘. 레아를 위해서 이번 일을 벌였다고 한 마디만 해주라고. 그럼 나도 울 애깅에게 한 마디 해주지.”
“내가 여태 말했던 거. 그 뉘앙스가 어떤지 아예 못 알아먹은 거임?”
“유모니까, 레아도 그랬을 테니까, 그런 말보다는 직설적인 말이 필요해. 그래, 꼭 네 입으로 듣고 싶다. 레아를 위해 이번 싸움을 비밀리에 준비했다고. 그런 기특한 말을 해줬음 한다.”
“너, 변태임? 레아가 죽고 난 후 성욕이 너무 쌓여서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님?”
“아니, 가끔은 괜찮지 않나 싶어서. 일도 정리됐고 너와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래간만이니. 게다가 원수도 잡았겠다 언제 이럴 시간이 또 오나 싶은데?”
“흐으음………”
에키시와 피가 이어진 게 맞는지 짓궂은 표정이 자기 아들과 쏙 빼닮았다. 방금까지 제2 공주의 일로 슬퍼했으면서 금방 표정이 바뀌어댄다. 반면 스노는 레아의 이름을 연신 중얼거리면서 「넌 결혼을 잘못했어」라며 이미 죽어버린 친구를 애도한다.
“아니, 차라리 조교 당하겠음. 이 썩을 귀족 같으니라고. 널 기뻐하게 할 바에야 젊은 소년의 노리개가 되겠음.”
“천국에 있는 레아가 참 좋아하겠군. 자기 친구가 아들에게 조교 당하는 꼴이라니.”
“그따위로 말하지 말아 줬으면 함. 귀족 자제의 동정을 떼주는 것도 유모의 일이기도 하잖음? 특히 나 같은 미녀라면 당연한 일임. 너무나 전형적인 소재라 재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남자의 로망이기도 하잖음?”
“로망은 운운은 어쨌든, 미녀라고? 아, 어디에? 누가?”
“난 미녀임.”
“하, 퍽이나.”
아들과 딸이 없어서 그런지 평소 이상으로 건들건들한 라키시. 이게 친구들에게만 보이는 진짜 모습이기도 했지만 스노는 그런 라키시가 부담스러워 보였다. 마치 에키시 2호나 다름 없는 행동이었기에 더욱이 말이다.
“이런 말 하기는 정말 뭣하지만 지금이라도 좋으니 도망치는 게 좋을 거다. 우리 애깅은 정말 여자에게 가차 없거든. 로키시의 꼴을 봐라, 저게 뭐가 가족이냐? 아주 잠깐 방치했더니 육변기나 다름없는 꼴로 전락해버렸다. 네가 얼마나 우리 애깅의 지식을 원하고 그 옆에서 나라를 발전시키고 싶은 건지는 몰라도. 그걸 위해서라면 정말로 많은 상식을 버려야 될 거야.”
“지금 날 걱정해주는 거임?”
“그래도 동료였으니까. 내 딸을 기른 유모기도 하고. 이번 일에 책임도 느끼고 있다. 그러니……”
“아, 솔직히 말해도 됨?”
“뭔데.”
“너, 역겨움. 엄청 역겨움.”
“…………………”
스노의 자그마한 발이 라키시의 다리를 밟는다. 너무나 앙증맞은 다리라 라키시에게 아무런 피해도 못 줬지만 그럼에도 그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자식 교육 실패에, 몸을 던지면 레아의 복수를 할 수 있음에도 방치하고, 영지에 틀어박혀서 가족끼리 지내는데 만족했음. 그런 네가, 이제 와서 날 걱정해도 역겨울 뿐임. 흑수대 하나 만으로는 너무나 모자랐음. 퀴어 왕과 커넥션을 가진 건 칭찬해주겠지만 그건 순전히 운이었잖음? 상황이 좋았을 뿐임.”
“그건 그렇지.”
“넌 쓸모없는 남편이었음. 아들에게 기둥서방이라고 욕하지 말길 바람. 너도 똑같은 놈이니까. 순전히 운에 의지해서 원수를 갚다니 레아의 얼굴을 보기 부끄러울 정도임.”
“틀린 말 하나 없군.”
다리를 밟는 걸론 아무런 피해도 못 주니 정강이를 차자 그제야 반응이 나타난다. 라키시의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등을 벽에 기댔다.
“그래도 해냈잖아? 저 썩을 놈을 잡았다. 그리고 아들의 손에 의해서 천벌이 내려질 예정이지. 내 손으로 고문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에키시라면 훌륭히 해낼 거다.”
“그래, 네 말마따나 에키시는 잘 해 줄 거임. 잠깐 안 본 사이 왜 저렇게 큰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울의 꼬락서니를 보면 실패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움. 그런 점에서 넌 아들 하나는 잘 길렀을지도 모름.”
“가끔은 직설적으로 칭찬해주라… 이 나이 먹고 울 애깅들에게 울고불고 난리 칠 수는 없잖아… 가족 빼면 남는 게 없는 남자에게 왜 이렇게 차가운 거냐…?”
“아, 제발. 내 눈앞에서 꺼졌으면 함.”
“그러지 말고 한잔하지? 아, 그래, 울 애깅한테 편지! 아주 잘 써서 보내줄 테니까!”
“이 망할 것이…”
결국 라키시의 페이스에 이끌린 건지 그의 손에 잡혀서 식당까지 끌려가는 스노. 그 파란 머리카락이 땅바닥에 질질 끌리면서 크게 발버둥 치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하고 밤새 술을 나눠먹게 됐다.
그렇게, 왕성 이야기는 정리되어 가고……
레즈우를 안정시키며 한 달이 지날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