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밀푸색마-341화 (341/383)

은령회는 복수의 머리를 가진 조직이었다.

영주(靈主)라고 불리는 통솔자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세력이 뭉쳐있는데, 그 세력의 우위는 당연히 휘하의 전력과 영주의 무공 고하로 나뉘게 되어있었다.

그리고 호령은 그 두 가지에서 모두 다른 영주들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좌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군.'

하지만 일귀는 언젠가 그의 주군인 황두명이 그랬던 것처럼 호령의 처소 앞에서 여인이 내는 교성을 들으며 그것이 정말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명색이 강호를 암약하는 비밀세력의 두령격 존재라면 마땅히 은인자중하며 목적을 이룰 때까지 조용히 칼을 갈아야 옳지 않겠는가?

차라리 잡아온 계집의 목이라도 친다면 모를까, 그런 것 같지도 않으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들어오라 하시었소."

"아, 고맙소."

그 앞을 바위같은 인상으로 지키고 있던 무사의 허락을 받고, 일귀는 천천히 걸어나가며 상당한 미색의 여인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더 나아가자 호령이 가벼운 차림을 하고 검을 손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여인을 안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거늘 뻔뻔하게 검을 손질하는 시늉을 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애초에 그에게 그런 의사표현을 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았는가?"

"예,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잘못된 소식을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잘못된 소식?"

본래라면 호령을 단독으로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니, 그가 대면을 허락해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귀는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제가 듣기로... 강윤 그 자가 아직도 살아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멀쩡히..."

"그야 내가 죽이지 않았으니 다른 일이 있지 않았다면 살아있지 않겠나?"

"예?!"

일귀는 경악했다.

호령은 삼존에 비견될만한 고수라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기에 설령 팽연화가 막아선다고 해도 강윤의 죽음은 기정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요즘 강호에 소문이 돌고 있다지 않은가.

<강호에 암약하는 의문의 세력의 습격에 맞서 화씨일문을 당당히 지켜낸 신진고수가 나타났다!>

강호의 호사가들은 새롭게 나타난 신성(新星)의 존재를 결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 내용도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협객 그 자체였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화씨일문의 제자의 부탁을 받아 한달음에 달려가 흉적들의 음모를 쳐부수었다고 하니 사람들이 얼핏 듣기에도 흥미진진한 것이다.

그 소문의 출처 역시 화씨일문주의 아우인 화운천이라는 자인데, 예로부터 화씨일문은 무림세력은 아니되 그에 준하는 존중을 받는 곳이었기에 더욱 믿을만했다.

소문이 시작된 곳인 서안에서는 무림과는 상관없는 저자에서도 조금씩 이야기가 돌 지경이었으니, 일귀는 그것을 듣자마자 호령을 찾았는데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죽이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내 보기에 자네가 너무 과장한듯 싶네. 비록 기재라고 할만한 수준은 되겠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아."

일귀는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자의 성장세도, 그 자의 사부가 누구인지도 전부 말해주었다.

하지만 호령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했다.

"자네는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기재란 간혹 그럴 때가 있네. 급격하게 성장할 때가. 이전에도 내력 자체는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아마도 근래에 깨달음을 얻었겠지. 하지만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정도 성취라면... 잘해야 간신히 초절정에 올라서는 정도까지가 한계일 것이 분명해. 실제로는 그것도 어려울지도 모르지."

무공이란 경지가 높아질수록 위로 올라가기가 어려운 법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호령의 관점에 동조할 사람이 더 많으리라.

"..."

하지만 일귀는 그 자가 무서웠다. 다음에는 그의 아우들 모두와 협공을 해도 그 자를 이겨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발목을 잡아채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그 자의 문제는 그만 잊게. 어차피 황 노사도 그 자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기회만 엿보고 있지 않은가?"

그 황두명이 도리어 강윤을 감싸는 것으로 보일 정도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것을 호령에게 말해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게다가 호령이 이만 대화는 끝났다는 듯 손질하던 검을 다시 검집에 넣어 벽에 걸어놓는 것을 보았으니 그는 더욱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응?'

그 때, 일귀는 호령의 검이 걸리는 벽을 보고 미간을 모았다. 또 한 자루, 검이 매달려 있는데 그 검은 그가 손질하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검이었던 것이다.

'저 검은, 마치...'

"지금은 쓰지 않는 검이네."

뒤통수에도 눈이 달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호령은 일귀가 무엇에 주목했는지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예, 예..."

"고생했네. 이만 가보게."

예정된 축객령이었고, 가시돋힌 말투도 아니었다.

하지만 호령의 말에 어린 서릿발 같은 기세를 감지한 일귀는 덜덜 떨리는 손발을 억지로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호령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저것은 아마도 그의 역린. 더 건드리려 들었다가는 용의 분노를 감당해야할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일귀는 아직도 강윤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한 근심도 잠시 잊을 정도로, 호령이 순간적으로 보인 모습이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화운천 이 개자식.

"그런 소식을 듣고 강호 남아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리 대협을 찾아뵌 것이외다."

"죄송합니다만, 대협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 낮춰주시지요."

나는 이들에게 내 이야기를 나불나불 늘어놓은 화운천에게 속으로 가운데손가락을 세우며 우선 겸양의 말을 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아직은 그리 멀리까지 퍼진 사실은 아니오만, 이 사실이 알려지면 강 대협이야말로 강호제일 후기지수로 널리 이름을 떨칠 것이외다!"

제발 닥쳐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잖아.

"육 소협도 그쯤 하시오. 강 소협이 난처해하고 있지 않소."

"어허, 대협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아야하는 법이오! 비록 아직 연소하다고 하나 그 이룬 바가 큰데 어찌 동격으로 둘 수 있겠소이까?"

이 두 사람은 각각 곤륜의 육도혁, 청성의 요정립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사실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요정립의 경우 구룡쟁패에서 한 판 붙은 적이 있는 상대인데, 곰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쾌속한 칠십이파검은 생각이 났기에 나는 아는체를 할 수 있었다.

육도혁 쪽은 소림의 진륭에게 아깝게 패해서 눈앞에서 구룡의 자리를 놓쳤다고는 하는데...

문제는 내가 진륭도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는 점이었지만 나는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부족한 이 사람이 운좋게 대단한 분들의 도움을 받아 해낸 일을 이렇게 높이 평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데 그것만이 이리 먼 길을 오신 용건은 아니실듯한데..."

말돌리지 말고 얼른 본론이나 꺼내라는 말을 고상하게 하는 것도 피곤하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요정립이 나서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강 소협은 당사자이니, 화씨일문에 손을 쓴 자들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하오."

"...예."

"또한 그들이 남궁세가를 비롯하여 무림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겠지요?"

응?

그야 나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자결한 은령회의 포로를 강제로 살려내서 심문한 결과를 전해들었으니까.

'그런데 얘들이 그걸 어떻게 알지...?'

분명히 무림맹 차원에서 기밀로 처리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화운천 이 자식이...

"사파는 언제고 끝장을 내야할 악적들, 하물며 이렇게 정파를 도발하고 있는데 정작 무림맹은 사파를 두둔하는 꼬락서니라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

"...잠깐, 육 소협, 무슨 말씀입니까?"

비교적 차분하게 설명하던 요정립 옆에서 육도혁이 이상할 정도로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이 남궁세가에서 대놓고 본교 운운하며 마교임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고 들었소이다! 강 대협은 듣지 못했소이까?"

"아..."

나는 대략 납득하고 섣불리 화운천을 의심한 것을 속으로 사과했다.

아마 불완전한 정보가 제멋대로 섞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마 화운천도 썰을 풀면서 은령회에 대해서는 적당히 얼버무렸나보다.

문제는 제대로 정보를 모르는 놈들은 이렇게 착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교 놈들이 중원을 위협하려 쥐새끼처럼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가 이리 가만히 있어서 되겠느냔 말이오!"

"...육 소협, 이제 내가 마저 설명하겠소."

자기들끼리 눈짓까지 교환해놓고 정작 중간에 나서서 설쳐버린 육도혁을 곱지 못한 눈으로 흘기고는 요정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이것부터 말해두리다. 나는 육 소협과 조금 생각이 달라서 아직 마교라고 특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라고 보오."

요정립 너는 그래도 상식이 있구나... 그렇지, 마교는 아니지...

"하지만 강호에 혼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세력의 존재는 명확한 터. 정파의 미래를 짊어질 동량으로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너무 섣불리 안심해버린 것 같다. 나는 요정립의 말에서 묘하게 불안한 느낌을 받고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 말씀은..."

"그래서 뜻이 맞는 젊은 고수들을 모아 무림수호대를 결성하기로 마음 먹었다오. 그리고 그 대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은..."

"잠깐, 잠깐, 잠깐!"

무림수호대라는 유치찬란한 이름은 우선 넘어가기로 하고, 두 남자가 보내는 뜨거운 눈빛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굉장히 좋은 뜻이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저 같은 사람이 돕기에는 너무..."

"무슨 말씀이오? 화 대협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강 소협은 완연한 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무인이라 하셨소. 또한 그 정의감 역시도 흠잡을 곳이 없지."

아니야, 나 그런 사람 아니야...

"그 말이 옳소! 강 대협이야말로, 우리를 이끌 사람으로서 부족함이 없소이다! 강 대협, 부디 무림수호대의 대주를 맡아주시오!"

아니야... 내가 받고 싶은 건 밀프의 뜨거운 욕망어린 시선이지 꼬추놈들의 땀내나고 부담스러운 시선이 아니야...!

"이것은 우리만의 뜻이 아니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강 소협이야말로 그 자리에 걸맞는 인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였고, 우리는 그들을 대표하여 온 것이니."

두 사람은 내게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디, 수락해주길 바라오. 대주."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즉시 거절의 뜻을 표했고,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싫다는 신호를 몇 번을 보냈는데 그런 상상도 못했다는 표정을 짓는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아무튼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꺼져! 밀프수호대나 결성해서 다시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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