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93 너 바보야? (1)
매소향과 함께 목욕통에 들어가 몸을 씻으면서, 나는 자지로 억지로 밀어붙였던 이야기를 실제로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간다구요?"
남편에 대한 애정을 붙잡아두던 눈가리개를 벗겨버린 덕에 내 아이를 낳아주겠다고 말은 했지만, 관계가 끈끈하지 않았던만큼 달리 악감정이랄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자식들을 혼인시키지도 못한 상황이니, 아이를 낳고 몸을 추스리고 나면 당분간 화산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 매소향의 생각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요."
"괜찮겠어? 아이를 두고..."
"같이 키워줄 엄마들도 많으니까 괜찮을 거에요. 어차피 유모도 고용할 거고. 게다가 나야 솔직히 아드님은 그다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소향한테는 우리 아기처럼 소중한 아들이잖아요."
매소향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어머니에 대한 경쟁심리로 능풍연과 내가 감정이 상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매소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능풍연이 싫기는 하지만 애초에 별 관심은 없었다.
일단 내가 숙이고 들어가는 시늉을 했으니 그놈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바가 아니었고.
"그래도 웬만하면 빨리 돌아와요. 사람은 아기 때를 기억하진 못해도 그 때 잘 키워야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자라기 쉽다고 하니까요."
"정서...?"
그런 건 어떻게 아느냐는 눈초리에 나는 주약선의 이름을 꺼내려다 멈췄다. 그러고보면 정신에 관한 의학은 애초에 없을 시절이구나.
"전에 어떤 분한테 들었던 이야기에요. 아무튼 엄마가 없이 자라는 시간이 길어서 좋을 건 없잖아요."
"그건 그래..."
고개를 주억거린 매소향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바로 매소향의 임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능휘연에 대한 이야기였다.
"휘연이한테는... 솔직하게 말하는게 낫겠어."
"네?"
"당연히 전부는 아니야. 하지만 위험하니까 아이는 낳는 것이 낫겠다고 말해주는 편이 뒤탈이 없을 거야."
매소향 말하기를, 엉뚱한 소리를 툭툭 던지고는 하지만 간혹 촉이 엄청나게 날카로운 능휘연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사실을 알려주는 편이 괜한 의구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아이는 어떻게 할 거냐고 따님이 물어본다거나, 그런 부분까지 다 생각하고 한 이야기는 맞죠?"
매소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더 따질 것이 없었다.
나 역시도 능휘연이 소림에서 차음진으로 아무 소리도 안 들릴텐데도 야밤에 찾아와 매소향의 안색을 살피고, 심지어 가는 척하다 도로 들어오며 식겁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물론 무공이 그다지 높지 않으니까 괜찮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까.'
능휘연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일단 당가의 호의를 빌려 사람을 붙이고 화산으로 돌려보내면 될 것이었다.
그럼 남는 문제는 단 하나.
"앞으로 같이 지내게 될 건데, 다른 사람들과는 잘 지낼 수 있겠어요?"
내게 여자는 여럿 있지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오직 어머니 때문이었다.
이미 매소향이 내 아이를 가져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하렘에 대해서 대강이나마 알아버렸으니 아예 끌어들이는데 협조해주었을뿐 매소향이 반가워서는 절대 아닐테니까.
"하아..."
매소향은 길게 한숨을 뱉었다.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얼핏 듣기에도 그다지 든든한 느낌은 아니었다.
"어떨 것 같아?"
나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이가 나쁘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좆대가리를 함부로 놀려댔으니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성연군주는 최근 아침이 즐거웠다.
무공을 익히기 시작해 아침부터 가벼운 수련으로 땀을 흘리는 것도 물론 재미있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여럿이 모여 아침식사를 하는 이 곳의 관습이었다.
'정말 여기 있는 여인들은 이상하구나...'
황실의 여인인 그녀는 황실 사내들이 여인을 여럿 두거나, 힘 좀 쓴다하는 고관들이 축첩을 하는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중심이 되는 사내의 총애를 두고 다툴 수밖에 없는 사이라, 그들의 사이는 적대, 혹은 연대 둘 중 하나였다.
서로 적대하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충돌이 없을뿐 언제든지 앙앙불락할 수 있는 사이인 것이다.
"화 언니는 오늘도...?"
"네, 아무래도 몸이 많이 불편한가봐요."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텐데, 괜찮겠지...?"
하지만 여기 여인들은 달랐다. 다들 비슷한 처지, 그러니까 남편이 있거나 있었던 여자들이 아들뻘 남자를 남편으로 모시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런지 서로 특별히 경계하고 지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본인이 애첩의 견제로 고생하기도 했거니와, 황제의 손녀로서 두각을 드러내면 경계를 사기 십상이던 시절을 보낸 성연군주로서는 이런 안온한 시간을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녀석은...!'
하지만 이런 시간도 어쩌면 오늘로 끝일지도 몰랐다.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열 번째 여인'은 제갈미령과 꽤나 사이가 나쁘다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침상에서는 사내의 말에 순순히 따른다지만, 제갈미령은 명색이 의모이고 사내 역시도 그녀가 진심으로 기분이 틀어지면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상황 아니던가.
하필 그런 제갈미령과 열 번째 여인이 사이가 나쁘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목이 생기기 시작하고 제갈미령을 편드는 사람과 편들지 않는 사람으로 또 세가 나뉠터.
그런데도 결국 그 열 번째 여인을 들이겠다고 하니, 적어도 책임감은 있다고 평가해야할지 남근을 너무 절조없이 휘두른다고 꼬집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마. 왔사옵니다.]
그 때, 허공에 녹아든 조장의 전음에 고개를 들어보니 과연 사내가 식당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잘 잤느냐고 반갑게 인사를 건넬 사내였지만, 제법 긴장한 표정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열 번째 여인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성연군주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여인의 시선이 한 곳에 몰리자, 사내는 긴장한 표정으로 여인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여기 계신 모두가 다 말씀드린 바가 있어서 짐작하고 있겠지만... 여기서 같이 지내게 될 식구가 한 사람 늘게 되었습니다."
그 말마따나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굳이 이렇게 소개할 필요도 없는데, 역시 사내도 신경이 많이 쓰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화산파에서 오신, 매소향 여협..."
벌컥
"아, 잠깐, 아직 말 안 끝났는데..."
"이런 짓한다고 뭐가 달라져? 내 입으로 말할테니까 가만히 있어."
사내의 말을 끊고 문을 열고 나타난 여인의 말과는 다르게, 성연군주는 적어도 열 번째 여인의 이름을 새삼 기억하게 되었으니 의미는 있었다.
고양이 같다고 해야할지, 여우 같다고 해야할지.
매소향은 그런 화려한 미모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들은 것처럼 화산파, 매소향이에요. 면식이 있는 분도 있고, 없는 분도 있네요. 앞으로 여기서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잘 지내봐요."
가볍게 목례하며 하는 소개는 정중하다고 보긴 어려웠지만 절도있고 자신감이 넘쳐 다른 선입견 없이 보았다면 꽤나 호감을 느낄만 했다.
"잘 부탁해요, 매 여협."
"잘 부탁해요, 대부... 아니, 이렇게 부르는 것도 이상한가요?"
언소영이 대표로 일어나서 손을 마주 잡자 매소향은 활짝 웃었지만 성연군주에는 그녀의 눈빛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읽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나이가 같으니 서로 편하게 말을 트고 지내야겠다는 대화가 오가는 사이, 제갈미령이 벌떡 일어났다.
성연군주의 눈에는 그녀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그녀가 어떤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신 강윤이 대놓고 조마조마한 표정을 짓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
'저럴 것이면 건드리질 말 것이지...'
"잘 지내봐요, 언니."
"...그래, 앞으로 많이 도와주면 고맙겠어."
매소향은 살짝 말을 끊었다가 다시 말했다.
"동생."
두 사람이 주고받는 눈빛이 어떤지는 성연군주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꽤나 살벌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충분히 예측되던 것이었으니 둘째치고라도, 그보다 그녀는 사실 언소영의 대처에 감탄하고 있었다.
사내의 곁에서 여인들은 모두가 동등했지만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몸이자 첫 번째 부인인 언소영은 특별한 존중을 받고 있었다.
상하관계까지는 아니로되,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그런 위치.
그런 첫 번째 부인인 언소영이 나서서 매소향의 인사를 받아줌으로써, 혹시나 제갈미령에 대한 호의가 매소향에 대한 적의로 바뀌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원천차단한 것이다.
즉, 두 사람 사이의 감정싸움에 다른 사람은 개입하지 말자고 선언한 셈이었다.
"흠흠, 매소향이라 하였느냐? 본녀는 성 부인이라고 부르면 된다. 본녀도 여기에 자리잡은지는 오래지 않으나 혹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하거라."
성연군주 역시 그 뜻에 동참하기로 하고 반갑게 매소향을 맞이하였으나, 매소향은 잠시 요상한 표정을 짓더니 곧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거 든든하네요. 잘 지내봐요. 군주마마."
이 자리의 누군가가 매소향에게 그녀가 누구인지 전음으로 알려준 모양이었다.
아마 요상한 표정의 정체는 대략 '나이도 어리고 내력도 일천한 주제에 말투는 오만한 이 계집은 뭐지?' 정도의 생각이 드러난 것이리라.
본래 정체를 감추려고 했던 성연군주는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평대에 가까운 존대를 써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했고, 매소향의 눈치에 합격점을 주었다.
"아, 그래. 조장, 너도 나와서 인사 나누거라."
그러고보니 매소향이 그들의 처소 근처에 숨어들었던 날 그녀와 맞섰던 것이 조장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인사를 시켜두는 편이 앞으로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으리라 생각한 그녀 나름의 배려였다.
한편 조장은 내키지 않았지만 마치 연기가 빚어져 사람이 되듯 모습을 드러냈고, 매소향은 살짝 눈을 가늘게 뜨더니 살짝 목례하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앞으로는 경계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보다, 이름이?"
"날 부를 일은 없을테지만, 혹시나 필요하다면 조장이라고 부르면 되오. 그리고 군주마마의 곁에 다가오는 모든 사람은 원래 항상 경계대상이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구려."
예외라면 황족의 나신을 제멋대로 가지고 노는 어느 놈팽이 뿐이었다. 제아무리 호위라 하나 그들에게는 황족의 방사를 볼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까닭이었다.
"게다가 이 곳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공격해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황족을 보호해야하는 우리의 의무가 있으니 어쩔 수가 없구려."
혹시나 싶어서 동창 내의 정보기관에 문의해보았으나, 아직도 꼬리가 잡히지 않을 정도의 자들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
매소향이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돌리자 사내가 간략하게 설명해주었고, 성연군주는 매소향의 얼굴이 표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너 바보야?"
성연군주는 매소향의 표정이 일변하는 것을 보고 확실히 저런 표정으로 싸움을 걸어온다면 감정이 안 생길 수 없겠다고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