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푸색마 EP.274 귀하신 분의 뜻이다 (2)
"오오오...!"
환호성을 울리며 물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성연군주를 주변의 백성들은 슬금슬금 피했다.
안 그래도 고생 한 번 안 해본 것 같은 귀부인은 일반 백성에게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런데 그런 귀부인이 미친 것처럼 보이면 얼마나 더 위험하겠는가?
"이것도, 이것도 해보... 시오. 아, 걱정할 것 없소. 이 자가 다 해줄 것이니."
신원도 불분명한 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모습을 조장이 지켜보았다면 통탄할 노릇이었겠지만, 그는 수혈을 짚인 채 병실 바닥에 누워있었다.
족히 몇 시진은 지나야 정신을 차리리라.
사내는 못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물동이를 받아들고 열심히 손잡이를 움직여 물을 받아 가득 채워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것을 몇 차례나 반복하고 나서야, 성연군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훌륭한 물건이로구나. 운가상단이라 하였지? 참으로 기특하구나. 이런 것을 백성들에게 아무 대가도 없이..."
거기까지 말한 성연군주는 잠시 미간을 모았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겠구나. 상인이라는 자들이 이문도 생각하지 않을 리가 없지."
어떤 식으로든 이득을 얻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벌이는 일이 분명했다.
아무튼 충분히 구경하고 만족한 기색의 성연군주를 보고 양하정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돌아가시겠습니까, 조카님?"
"글쎄, 어찌하면 좋겠느냐? 조장을 떼어놓고 가자고 하였으면서, 고작 이것만 보고 돌려보낼 생각은 아니었겠지?"
성연군주는 사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의 권유대로 호위들을 재워두고 시전으로 걸음하기는 했지만, 그녀의 예리한 안목은 사내의 행동이 묘하게 확신에 차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애초부터 본녀를 데리고 나오려고 한 것이지?'
그렇지만 그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속박을 풀어내고 달아나거나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범한 자가 아니던가.
"사천에는 초행이시라면, 구경하실 것이 제법 많을 겁니다. 제가 구... 부인을 안내해도 되겠습니까?"
과연 사내는 자연스럽게 더 돌아다닐 것을 권했다.
그러고보면 외유를 나온 이후로 명의라고 소문난 의원만 찾아다니느라 막상 제대로 풍광을 구경하고 다닌 적은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 성연군주는, 순순히 사내의 권유에 따라 이 곳 저 곳을 구경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무림에 온 이후 가장 오래 머무른 곳이 사천이지만, 나는 명승지라고 할만한 곳을 가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자신있게 안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구룡쟁패에서 만났던 하오문의 문도, 도여중이 읊어준 사천 지역 명승지 가이드 덕분이었다.
흘려들었기는 하지만 성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찾아갈 수 있는 장소 정도는 기억해두고 있었다.
"그런 것을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구나. 그만한 운하를 가지고 있으니 사천 땅이 풍요로워지는 것도 납득이 가는 일이로다."
도강언을 구경하고 온 것이 꽤나 인상깊었는지, 성연군주는 가슴이 벅찬 기색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녀를 데리고 돌아다니느라 삯마차를 타는 등 이동에는 꽤나 고생했지만 그녀는 그런 체험 역시도 꽤나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성연군주와 양하정, 두 여인을 데리고 주루의 별관을 잡았다.
군주는 이참에 제대로 서민체험이라도 해보고 싶은 건지 별관이 아니라 본관에서 사람들 틈에 있고 싶은 듯했지만 양하정이 간곡히 부탁해준 덕분에 마지못해 따라왔다.
'그래도 어머니 생각대로 됐네.'
어머니가 말하기를, 호위가 나중에 합류한 것을 보면 성연군주는 호위와 함께 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잘 부추기면 떼어놓게 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는데, 마침 군주가 수동펌프에 눈이 돌아가있던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조카님, 이만 돌아가시지요."
하지만 양하정이 어째서인지 완강하게 계속 돌아갈 것을 권했다.
"호위의 숫자가 줄어든만큼 조카님께서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이..."
"으으음, 하지만 이모님. 호위들이 따라붙으면 다시 얌전히 의원으로 돌아가있어야할 거요. 어차피 둘이서도 잘 다녔지 않소? 게다가 여기 강 소협도 있는데 무엇이 걱정이란 말이오?"
"..."
지금까지는 의원으로 들어가려고 기를 썼는데, 씨를 듬뿍 받아서 마음의 여유라도 생긴 건지 다행히 성연군주는 굳이 돌아가려고 애를 쓰지 않았다.
게다가 나를 보면서 의미심장한 시선을 자꾸 보내는 것이, 내가 자기한테 작업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틀리지는 않은데...'
"강 소협은 물론 무공이 출중하기는 합니다만, 호위를 염두에 두고 무공을 수련한 적은 없을 것입니다. 내 말이 맞는가, 강 소협?"
한편 양하정은 몇 번이나 성연군주의 안전을 강조하면서 의원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했다.
게다가 완곡하기는 하지만 내 실력이 의심된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대체 왜... 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그렇게까지 염려해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필요하시다면 제가 오늘밤을 새서라도 부인을 지켜드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굳이 가부좌를 틀고서 본격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선 채로 운기만 해도 밤샘 따위로 피로할 일은 없다.
잠을 자지 않고 버틴다면 호위로서의 역량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충분히 성연군주의 안전 정도는 확보할 수 있겠지.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지야..."
"이만 되었소, 이모님. 오늘 하루 정도야 무슨 걱정이 있겠소? 조장에게도 이것이 내 뜻임을 분명히 전했을 것이니 그리 급하게 찾아다니지도 않을 거요. 오늘 하루면 충분하지 않겠소?"
결국 최종 결정권자인 성연군주의 뜻대로, 우리는 이대로 주루의 별관을 빌려 잠들기로 했다.
늦은 밤, 양하정은 좀처럼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사내가 깨어있을 것이라고 하며 그녀까지 깨어있을 필요는 없다고 하였는데, 막상 그녀는 잠이 오지를 않았다.
'역시 돌아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사내의 무공은 일신우일신 새로운 경지를 밟아가며 성장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이라면 양하정도 사내를 상대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무공만이 아니라 호위를 하기 위해서는 주의력이 중요했다.
그녀 역시도 동창의 호위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지만 젊은 시절 기초는 배워둔 덕분에 충분히 호위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었지만, 강윤은 아닌 것이다.
'아니... 아니야.'
사실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양하정이 돌아가고 싶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예를 들면 살금살금 그녀의 침소 바깥을 어슬렁대는 기척의 주인이라거나.
똑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은 양하정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미 기척이 그녀를 향해 접근해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척이 잘 아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머리맡에 놓아둔 연창에 내력을 실어 그 쪽을 겨누었을 것이었다.
"들어오게."
그러자 창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강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시간에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
"오늘 밤은 안 잘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것은 충실히 호위에 임한다는 의미로 들렸는데."
"어차피 바로 옆이지 않습니까?"
별관이라는 이름답게 건물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전력을 다해 몸을 날린다면 세 호흡도 채 되기 전에 성연군주의 침소에 갈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쩔텐가?"
"그럴 가능성은 굉장히 희박할 듯합니다만..."
"...자네가 호위에 성실히 임하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지금이라도 군주마마를 모시고 의원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네. 이래서 내가 돌아가자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거짓말."
양하정은 마치 칼을 내리치는 것처럼 단호하게 자신의 말을 끊어내는 목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 떨었다.
"무슨... 말인가?"
"아까부터 군주님의 보호 얘기를 하는데, 그거 다 핑계잖아요."
사내가 다 안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양하정은 이상한 위압감을 느끼고 숨을 꿀꺽 삼켰다.
"아니죠? 실은 날 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그렇죠?"
"무, 무슨..."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자 양하정은 얼른 몸을 뒤로 뺐다. 손에 창이 잡히자, 마치 뱀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얼른 놓아버렸다.
그러는 사이, 사내는 그녀의 바로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연화와 만났다고 했죠?"
사내는 거침없이 팽연화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양하정의 눈에 불룩한 배를 감싼 채 사내에게 허둥지둥 다가오던 여인의 모습이 얼핏 스쳤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다른 여자 건드렸으니까, 나한테 실망했어요? 그래서 나 같은 놈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건 아니야..."
팽연화에게 간단한 이야기 정도는 들었다. 자신 말고도 여인을 거느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양하정은 사내가 딱히 싫어지지 않았다.
물론 일말의 섭섭함 정도는 느꼈지만, 오히려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뻘보다도 나이가 많은, 자신 같은 여인에게 사내의 모든 장래를 투자하라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아니라구요? 그럼?"
그저, 열패감을 느낀 것뿐이었다. 팽연화도, 성연군주도, 사내보다 나이가 연상이기는 하지만 그녀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웠다.
그들과 비교해보니 자신은 나이들고 추레할 뿐인 여인으로 느껴졌다.
언젠가 사내가 그녀에게 정나미가 떨어지고 마치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 때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특히 노화를 거부하는 경지에 오른 팽연화는 더더욱 그럴 것이었다.
"그, 그게, 그러니까..."
하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그 두려움을 정말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바뀔 것만 같아서.
결국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피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그게... 어, 어멋!"
계속 말을 빚어내지 못하고 더듬기만 하던 양하정은 갑자기 사내가 그녀를 끌어안자 당황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가슴에 뺨이 닿고 사내의 살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자 당황했던 그녀는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다.
"싫어진게 아닌거죠?"
"으, 응..."
"그럼 아직도 나 좋아하는거 맞죠?"
"응..."
"나 피하는 이유, 말하기 힘들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대신, 앞으로는 피하지 말아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
마치 아이를 달래듯하는 사내의 말에 양하정은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점점 사내의 심장박동이 힘차게 느껴지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사내의 허벅지를 훑다가 사타구니로 옮겨갔다.
"하고 싶어요?"
"응... 그런데 군주마마께서 들으시면..."
"밖에는 안 들려요."
그것까지 듣고나면 더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상대의 옷을 벗겨내며 달라붙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