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279화 (279/295)

< 오디션 >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PD를 보았다.

당신 악마의 편집을 했던 전적이 있잖아.

지금 TOP3까지 올라왔는데, 진희의 짝사랑 남자가 나라는 게 밝혀져서는 좋을 게 없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요."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했는데, 어라? 이놈의 PD 양반이 나를 보며 껄껄 웃는다.

"아하하하. 재밌네. 재밌어."

"뭐가 말이에요? 혹시나 남자가 여자를 위해 서로의 관계를 비밀로 한다.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죠?"

"잠시만! 나 배 아파 죽겠어. 으하하하!"

...

이 양반이 정로환을 한 통 다 먹었나?

미친 사람처럼 배를 잡고 끅끅댄다.

그 모습을 보던 스탭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수군덕거렸고, 그제야 PD 양반은 웃음을 멈추고 나를 봤다.

"담배 피우세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럼 우리 담배나 하나 피우죠."

"네. 알겠습니다."

흡연자들이 같이 담배 피우자는 말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겠다는 뜻이지.

따라가 보자.

우리 둘은 구석진 나무 아래에 갔다.

담배를 하나 물어서 불을 붙이자, PD도 자기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어이. 민현찬. 너무 어깨에 힘주고 있는 거 아냐?"

갑자기 반말했다.

당신 나이가 30 중후반은 되어 보이지만 갑자기 반말은 아니지.

"뭡니까 지금? 설마 진희 방송 분량 가지고 협박하는 건 아니죠?"

"으하하하. 그만 웃겨. 이러니깐 어깨에 힘주고 있는 거 아니냐고 묻는 거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네가 진희 짝사랑 남자인 게 밝혀져서 내가 얻을 게 뭐 있어?"

"화제성?"

"그것도 초반에야 유효하지 후반에는 아무 의미 없어. 지금은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할 때야."

"그러니깐 더 이해가 안 되네요. 왜 계속 유도 질문을 하는 거예요?"

"진희에게 짝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걸 밝히기 위해서지."

"아니, 지금 말장난하는 거예요?"

"대신 그 사람과 잘되면 안 돼."

"그러니깐. 네? 뭐라고요?"

"굳이 표현하자면 실연이라고 할까? 나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은 거야. 사람들은 아픔이 있는 여자에게 동정하잖아. TOP3에서 강한 모습으로 올라가서 반전 매력을 한번 보여준 뒤, 결승에서는 애절한 발라드로 사람들을 울리는 거지."

"...이해는 됐어요. 흠···. 나쁘지는 않은 거 같아요."

"으하하하. 일개 대학생이 대기업 PD한테 나쁘지가 않다니. 넌 배짱이 어떻게 된 놈이야?"

제가 돈이 100억이 넘게 있거든요. 그래서 거칠 게 없네요.

"여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로 정리하죠. 계속 이야기해주세요."

"내가 이런 생각을 왜 하는지는 안 궁금해?"

"그건 마지막에 물어볼 겁니다. 지금 중요한 건 우리 둘 다 추구하는 방향이 비슷하다는 거겠죠. 한진희의 우승. 맞지 않나요?"

"오케이. 나이답지 않게 말하기 편하네. 여튼 그런 스토리를 만들려면 중요한 게 하나 있어. 짝사랑하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야 해. 분위기 쫙 몰아갔는데 갑자기 저기 어디서 '내가 짝사랑 남인데, 사실 나도 너를 좋아했어!' 이러면 곤란하거든."

"그렇다면 진희한테 직접 물어보지 왜 저를 떠보는 거예요?"

"이야기를 안 해주니깐. 보물 같은 존재인지 절대 말 안 해주더라고."

크흑. 진희야... 나를 지키기 위해서니? 조금 감동이다.

PD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런데 말야. 내가 보기에는 아무리 봐도 그 짝사랑 남자가 너야. 맞지?"

"글쎄요? 확실한 건 갑자기 다른 곳에서 튀어나올 일은 없습니다."

"암묵적 동의라고 생각하겠어. 너는 어때?"

"뭐가요?"

"나는 네가 짝사랑 남자란 걸 은근히 드러낼 거거든. 물론 이런 건 신비한 게 좋아. 확실하게 '이 남자다' 하면 재미가 없어. 그래서 아주 은근슬쩍 드러낼 거야. 그래도 대중들은 '너다. 아니다'로 시끌벅적 할 수도 있어. 어쩌면 너로 기정사실화 시킬 수도 있고. 그래도 괜찮겠어?"

"은근히가 아니라 확정적으로 방송에 내보낼 거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방송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 이미지 생각 안 하잖아요. '불똥 튈지도 모르니 마음의 준비를 해라' 이렇게 들리네요."

"으하하하. 사회생활 몇 년 한 사람이야? 눈치 빠르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려. 나는 최대한 너라는 게 티 안 나게 은근히 드러낼 거야. 신비주의. 그게 무너지면 안 돼. 특히 말이야."

PD는 내 얼굴을 요리조리 봤다.

"너처럼 잘생긴 사람이 짝사랑 남자라면 오히려 진희 이미지에 디스 어드벤티지가 되거든.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 여자로밖에 안 보이잖아. 그럼 일반인들이 감정 이입을 못 해. 그래서 최대한 알 듯 말 듯 하게 힘 조절을 할 거야."

흐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PD는 왜 진희를 밀어주려고 하는 걸까?

이거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짝사랑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올 일은 절대 없습니다. 있다면 백프로 사기꾼입니다."

"오케이. 믿을게."

"PD님은 어떻게 저를 믿으세요?"

"그거는 네가 지금 할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으로 말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질문부터 할게요. 왜 진희를 밀어주려고 하는 거죠?"

"첫 번째. 상품성이 보이니깐. 다른 두 사람도 매력 있어. 특히 서민국은 방송물 먹으면 인기가 많이 올라갈 거야. 근데 진희에게는 못 미쳐. 애가 원석 같은 매력이 있거든. 발전할 가망성이 훨씬 커. 내성적인 성격인데 활발한 모습도 있고, 항상 남들한테 기죽어 있는데 독기를 품어야 할 때는 확실하게 해. 반전이 있는 캐릭터인 거지."

"첫 번째 이유는 이해됐습니다. 다음은요?"

"민정상. 이제야 알겠어?"

"아! 설마?"

"맞아. 대국민 오디션 할 때 네가 괜히 촬영장에 들어온 거 아니야. 내가 직접 민정상한테 부탁받았기에 아랫사람을 시켜서 너를 촬영장에 들어오게 해준 거야."

"그렇다면 제 정체도 아시겠네요?"

"23살에 회사 2대 주주로 있는 사람? 뭐 그 정도?"

"아니. 그럼 진작 부탁받았다고 하시지."

"나는 내가 보고 들은 사람만 믿거든. 그래서 말 안 했어. 혹시나 떠버리처럼 내가 짝사랑 남이에요 하는 사람이면 멀리하는 게 더 좋지."

"그런데 굳이 민정상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희를 괜찮게 보고는 있었나 봐요?"

"그럼. 처음 대국민 오디션 때 너도 봤잖아. 위기의 순간에 기죽지 않고 너를 바라보고 노래 부른 거. 대한민국에 몸매 좋고 예쁜 사람은 많아. 여기에 노래 잘하는 사람도 많고.

하지만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은 드물어. 진희는 한 번의 기회를 포착했고 씹어먹었어. 그런 애들은 쉬프팅 해줄 만 해. 그게 빛이 난다는 스타의 기질이니까."

처음 대국민 오디션 때부터 진희를 눈에 넣었었구나.

"알겠습니다. 딱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그렇게 해서 PD님이 얻는 이득은 뭐예요?"

"말해서 뭐 해? 당연히 시청률이지. 이거 처음 해보는 거야. 망하면 나 다큐멘터리 가야 해. 그리고 보람도 있어."

"보람요?"

"그럼. 내가 발굴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그 맛이 없다면 하지 않았을 거야."

"...알겠습니다. 이제 궁금증이 조금 풀렸습니다."

"그럼 빨리 한진희한테 가서 준결승 때 강한 노래 하도록 설득해. 우리가 말한 시나리오도 결승까지는 올라가야지 의미가 있지, 여기서 떨어지면 아무 의미 없어. 그러니 발라드는 무조건 피해."

"네. PD님은 학교 나오는 장면에서 내성적인 모습이 두드러지도록 잘 편집 해주세요."

"오케이. 그럼 한배를 탄 거로 알게. 무슨 노래를 추천해 줄 거야?"

나는 PD를 보며 씨익 웃었다.

"론리 나잇이요."

"론리 나잇···? 그 노래 어려운데···. 어떻게?"

"처음에는 서정적으로 하는 거예요. 뒤에 그림판에 진희의 외로운 학교생활이 나오는 것도 좋을 거 같네요."

"그림판이 아니라 디스플레이. 후반부는?"

"락 발라드처럼 강하게 가는 거죠. 빵빠레 같은 것도 넣고요."

"빵빠레가 아니라 밴드. 보자···. 오케이. 이해됐어. 대충 그림이 나오네. 자세한 건 무대 준비할 때 보면 되겠네."

"네. 이상 있으면 진희한테 말해주세요."

"그건 안 돼. 직접적인 쉬프팅은 말 나와. 네가 완벽하게 짜줘."

"...저는 음악은 잘 모르는데요?"

"네 주위 사람들은 알 거야. 민정상 드라마 제작사야. OST 때문에 아는 프로듀서 제법 있어. 그리고 말야. 너를 만나고 싶어 하더라고."

"저를요? 왜요?"

"그건 만나보면 알 거야. 나는 이만 간다."

PD가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옆을 스쳐 지나갔다.

"하나만 더. 돈 있는 놈이 활용 못하면 상대방은 너를 만만하게 봐."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제법 마음에 드나 봐요? 조언도 해주고요."

"으하하하. 마음에 드냐니? 재밌는 놈이네. 돈 많은 사람 싫어할 리가 없잖아. 진희가 우승하면 술 한잔 먹자고."

"네. 그럼 들어가십시오."

"마지막 예의 좋았어. 간다."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아니네.

그나저나 진희 도와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자문 역할 정도는 남아있나 보다.

나는 지금 KP 엔터 앞에 있다.

오래간만에 와보네.

오늘 할 일은 민정상에게 괜찮은 프로듀서를 소개받는 거다.

대갈빡이 딱~ 집안의 사람 아닙니까!

같은 민씨끼리 부탁 잘 들어주겠지.

정문 앞에서 조금 기다렸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 민현찬 씨 도착했습니까?

"네. 민정상 대표님. 지금 바로 앞입니다. 올라갈까요?"

-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나가겠습니다.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알겠습니다."

식사라. 역시 집안사람은 틀리네.

조금 있자 정장 차림의 민정상이 나오더니 나에게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간혹 오셨다면서요?"

"네. 몇 번 왔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연락도 안 해주시다니. 조금 섭섭합니다. 요즘 박 대표랑 너무 잘 지내는 거 같아서 질투가 날 정도입니다."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세요."

"아하하 저는 농담 아닌데요. 이거 필요할 때만 저를 찾는 기분이 드네요."

···

저기. 아저씨 설마 삐진 거 아니죠?

부탁 많이 한다고 투덜거리는 건 아닌 거 같고. 내 지분이 박인혜한테 쏠리는 걸 경계하나 보다.

근데, 내가 투자자인데 뭘 투덜거려? 생각해보니 열 받네.

"저기. 민 대표님 지금 제 부탁이 귀찮다는 뜻인가요?"

정색하며 말하자 당황해한다.

"아··· 그게 아니라. 뭐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요즘 유난히 저를 이용하기만 하는 기분이 들어서요."

"그건 대표님 기분 탓이 아니라 진실입니다."

"뭐라고요?"

"필요할 때만 연락드린 거 말이에요. 사실입니다."

이제는 얼굴이 붉어진다.

이 정도 긁었으면 됐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민 대표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죠. 세상 살아가는데 정으로 사는 건 아니잖아요. 나에게 도움 되는 사람. 내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랑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거죠."

'당신이 나에게 더 필요하고 그만큼 더 가까워.'라는 뜻으로 입에 발린 말을 했는데 알아듣겠지?

"후후후~ 그럼요! 당연하죠! 받기만 하는 인간관계는 존재할 수가 없죠. 허허허."

민정상은 알아들었는지 껄껄 웃는다.

"자. 사소한 오해는 풀렸으니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경상도 식으로 말하겠습니다. 아재요. 뭐 사주실 건가요?"

"오늘 기분 좋은데, 괜찮은 횟집 가시죠. 코스로 나오는데 분위기도 매우 좋습니다."

회라··· 나는 소고기가 더 좋은데.

"아니면 소고기 먹으러 갈까요?"

"네!!!!"

"으하하하. 솔직해서 좋네요. 그럼 가시죠."

나는 민정상과 함께 고깃집으로 갔다.

지이익.

내 앞에 소고기가 익어간다. 그런데 나도 민정상도 고기를 굽지 않고 있다.

우리 테이블 옆에서 40대로 보이는 단아한 여종업원이 고기를 구워주고 있다.

···

저기요. 여기 너무 비싼데 아니에요? 이런 대접 익숙하지 않은데.

나와 반대로 민정상은 익숙한지, 내 앞에 놓인 빈 잔에 콜라를 따라줬다.

"정말로 술 안 드실 겁니까?"

"네. 오늘은 차를 가지고 와서요."

"허허허. 처음으로 술 한잔하나 싶었는데 아쉽네요."

우리가 아직 술잔을 나눌 사이는 아니잖아요.

오늘은 밥 정도가 적당하다.

"자~ 그래도 이렇게 밥 한 끼가 어딥니까. 그런데 오늘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죠?"

"아··· 저 그게."

고기 굽는 여종업원을 눈으로 가리키자 민정상은 씩 웃었다.

"여기는 괜찮습니다. 더한 이야기도 밖으로 안 새는 곳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별 일은 아니고요. 프로듀서 한 분을 소개해줄 수 있나 싶어서요."

"프로듀서요? 가수 되시려고요?"

"저 말고 한진희입니다."

"아!!! 저번에 부탁했던 사람 말이군요. 그러고 보니 TOP 3에 들었죠. 신기하게도 현찬 씨 주위에는 재능있는 사람이 많네요. 그게 아니면 재능있는 사람을 잘 찾던지요."

"다른 경우도 하나 있죠. 재능을 피워주는 경우요."

"후훗. 그 말도 맞습니다. 그래서 프로듀서가 필요한 이유는 뭐죠?"

나는 민정상에게 울스케 준결승 무대에 관해 이야기했고, 이야기를 들은 민정상은 술을 입에 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게다가 PD가 추천까지 했으니, 안 할 이유는 전혀 없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준비해 두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이번 도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하나 부탁할 게 있으니깐요."

"네? 설마 또 투자는 아니죠?"

"투자 맞습니다. 단 이번에는 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면··· 저는 연예인 할 생각 없습니다!"

"···저희도 민현찬 씨가 연예인으로는 필요 없습니다."

네.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해본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을 투자받고 싶으신 거죠?"

"한진희 양입니다. 아직 소속사 없죠? 유심히 보고 있는데 재능이 있는 거 같습니다. 제가 한 번 키워보겠습니다."

당신이 키워본다고요?

아... PD가 진희를 밀어준 이유가 하나 더 있었네. 민정상도 나름의 부탁을 했었나 보다.

그런데 당신은 드라마 제작사 쪽이잖아. 갑자기 가수를 왜 키워?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내가 또 한 잔머리 하잖아. 잘하면 앞으로의 진희 연예계 생활에 민정상을 이용할 수도 있겠다.

< 오디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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