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먹지 못했던 여사친들-223화 (223/295)

< 부산 >

여전히 내 밑에 깔린 이선미.

나는 일부로 계속 위에 있었다.

한참 동안 위에서 누르고 있자 선미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냈다.

"야! 비켜! 무거워."

"코..."

"미친놈아! 자는 척하지 말고."

"음냐. 음냐."

"아오! 너 안 사귄다고 해서 삐진 거냐?"

"아니거든!"

"그럼 왜 안 비키는데? 참나. 그냥 찔러 본 거면서 정색하기는."

"찔러 본 건 여기를 찔러 봤지."

충전형인가? 선미 계곡에 꽂힌 막대기가 다시 딱딱해졌다.

천천히 움직이자 선미가 내 머리카락을 집어 당겼다.

"아!!! 놔라! 선미야 놔라!"

"너야말로 어서 빼! 한번 했으면 됐어!"

쳇. 망할 기집애.

나는 막대기를 뽑은 후, 수건을 가져와서 선미 계곡을 닦아 줬다.

"아하하. 그래도 매너는 있네."

"매너는 옛날에도 있었어."

"매너도 있는 놈이 여자친구는 왜 안 사귀어?"

"너야말로 인제 와서 왜 물어보냐? 갑자기 거절하고 나니깐 욕심 나?"

"웃기네. 자기한테 넘어오는지 궁금해서 그냥 물어봐 놓고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데....

아씨. 나도 모르겠다. 우리 사이는 참 혼돈의 카오스 같은 사이긴 하지.

이해 안 되니 그냥 받아들이자. 그게 속 편하다.

선미는 화장실에 가서 씻은 다음에 다시 속옷을 입고 누웠다.

나도 씻고 와서 선미 옆에 눕는데, 바닥에 깔린 요 위에 경계선이 생겨 있다.

"이거 뭐야?"

"잘 때 네가 덮칠 게 뻔하니깐 칸막이 쳐 놓은 거야."

이불을 돌돌 말아서 일렬로 선이 그어져 있다.

"하이고. 이제 안 그럽니다. 아니지. 너 이거 혹시 덮쳐 달라는 뜻이야?"

"미친놈. 네가 잘도 안 그러겠다. 한 번 하고 나니깐 피곤해서 그래. 그리고 방금 전에 너 너무 세게 박았어. 오래간만에 해서 그런지 아파."

"...괜찮아?"

"갑자기 우수에 차지 마라. 소름 돋으니깐."

"하여튼. 걱정해줘도 난리야. 알았어. 자자."

"아! 너 씻을 때 휴대폰 계속 울리더라. 한 번 확인해 봐."

내 휴대폰이 울렸다고? 연락 올 사람 누구 있지?

휴대전화를 열었는데, 박인혜 문자가 와 있다.

그것도 단문이 아니라 장문이다.

나는 차근차근히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다 읽을 때쯤 선미가 속옷만 입은 채 내 옆에 달라붙었다.

"누구길래 얼굴이 그렇게 심각해?"

"...박인혜야. 흐음."

"무슨 내용인데? 그리고 가슴에서 손 떼라."

"가슴을 만져야지 마음이 안정될 내용이야. 아! 때리지 마라! 사실 별 내용 없어. 이번에 고마웠다고. 그리고 이때까지 미안했다고 문자 와있네."

"그래? 흐음. 어쩔 거야? 답장할 거야?"

"문자 쓰기 귀찮아. 그냥 전화해야겠어."

나는 박인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금 있자 화들짝 놀라는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렸다.

그리고 겁도 조금 먹은 거 같다.

- 현.. 현찬 씨 어쩐 일이세요?

"제가 전화 못 할 곳을 했나요? 왜 이리 겁먹으세요?"

- 아. 아닙니다. 이 시간에 안 주무시는 게 신기해서요.

"그냥 어쩌다 보니 안 자고 있네요. 박 대표님 문자 잘 받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현찬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년에는 많이 미안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박 대표님 할 말 있습니다. 제가 돌려 말하는 걸 못해서 솔직하게 말할게요."

- 아. 네. 뭐든지 말해도 괜찮아요.

박인혜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박 대표님. 이제 우리는 좋든 싫든 한배를 탔잖아요. 나중에 싸우더라도 당분간은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효율적이고 좋죠. 그래서 지금 저는 박 대표님에게 남아 있는 앙금을 다 털어 버리려고 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주위 사람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저 아직 22살입니다. 어리고 감정적인 나이죠. 친구한테 무슨 일 생기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나이입니다."

사실은 32살이지만, 뭐 상관없겠지.

짧은 시간의 침묵 뒤에 박인혜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은미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네. 앞으로는 꼭 조심해 주세요. 그래 주시면 저도 조심하겠습니다."

-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다시는 애교 같은 부탁은 하지 않겠습니다. 은미가 저에게 아킬레스건인 것처럼 애교나 여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박 대표님에게 아킬레스건이잖아요."

- ...아시고 계셨네요.

어느 정도는요.

전생에 우리 회사에 화웅 멱따러 온 관우처럼 당당하게 프리젠테이션 했던 사람이 박인혜다.

그만큼 여성스러움 빼고 실력 하나로 승부해 올라서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라고 했으니, 자괴감마저 들었겠지.

"네. 일부러 아프라고 말한 거였습니다. 박 대표님이 사과하셨으니, 저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제 우리 앙금은 다 털어버리죠. 오빠 분이 민 대표와 편을 먹고 있는 상황 같으니, 박 대표님은 저와 편을 먹어야죠."

- 민현찬 씨는 모르는 게 없나요? 그것도 알고 있었나요?

"뭐, 직접 들었습니다. 여튼 저는 아직도 작년에 박 대표님이 한 행동이 괘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말이죠."

잠시 말을 멈췄는데, 선미가 숨죽이고 보고 있다.

나는 이선미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박인혜에게 말했다.

"올해에 봅시다."

미생 대사를 쓴 건데, 내가 하니깐 왜 이리 폼이 안 살지?

그래도 박 대표의 마음에는 와닿았나 보다. 전화기에서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후훗. 아하하. 네. 현찬 씨. 우리 알고 지낸 거 벌써 2년째네요. 올해 또 만나요.

그래. 이번에는 훌훌 털고 파트너로서 잘해보기로 하자.

- 아. 그리고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어요. 저번에 봉사활동이나 행사 같은 거 구해달라고 하셨잖아요.

"네. 혹시 벌써 구하셨나요?"

- 구하기는 구했는데,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어요.

"어떤 행사인데요?"

- '과학 놀이'라는 행사인데, 정부에서 하는 행사여서 증서가 나와요.

네? '과학 놀이'라고요? 저 문과인데요?

"저기. 과학이 사람 이름은 아니죠?"

- 아쉽게도 아닙니다. 그리고 세 사람 정도 구한다고 했어요. 혹시 같이 가실 분 있나요?

같이 갈 사람이라.

나는 옆에 있는 이선미 머리를 흔들면서 말했다.

"일단은 꼬셔 볼게요."

선미, 세연이, 나. 세 명 가면 되겠다.

이선미 너도 취직해야지. 스펙 좀 올리자.

우리는 푹 자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빌라에서 해장할 겸 짬뽕을 먹고 있는데, 선미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안 간다고 했다."

"야. 스펙 쌓아야지. 너 취직 어떻게 하려고 해? 학점도 안 좋고 토익도 안 좋잖아."

"토익은 좋은데?"

"아. 외국에서 살다 왔으니 영어는 되겠네. 학점은 안 좋잖아."

"3점은 넘어."

우리 학교는 아직 절대 평가인데 3점 넘는 게 뭔 자랑이라고.

여튼 선미는 죽어도 안 간단다. 행사가 보름 정도 진행되는데, 그게 귀찮은 거다.

"후르릅. 이 집 짬뽕 맛있네. 세연이 꼬셔 봐. 수능 치고 이제 할 일 없을 건데."

"안 그래도 이미 불렀어. 조금 있으면 올 거야."

탕탕탕!

그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오빠! 언니! 나 왔어요!

"양반은 안되네."

"아하하. 그러게. 어서 가서 문 열어줘."

나는 일어나서 현관문을 열었다.

빌라 복도에 이세연이 서 있는데, 무슨 좋은 일 있나?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너 로또 당첨됐어? 무슨 좋은 일 있어?"

"킥킥. 오빠! 저 합격 했습니다!"

"뭘? 아! 대학교 발표 났어?"

"네! 우리 학교 의대 붙었어요! 꺄!!!"

"진짜? 와! 축하해!!!"

"아니. 오빠! 왜 그렇게 어색하게 축하해 줘요?"

아니, 사실 점수 보고 이미 알았던 거잖아. 예고편을 미리 봤는데 그 감동이 다시 오겠어.

뭐. 그래도 기분은 좋다.

그때 뒤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미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세연아 붙었어?"

"네! 언니! 아하하. 너무 좋아! 여기 합격통지서 프린터 해 왔어요."

"줘봐! 줘봐! 어디 보자!"

세연이에게 종이를 건네받은 이선미.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이세연을 안았다.

"우쭈쭈~ 우리 세연이 그동안 고생 많았지! 정말 수고했어."

"언니이... 진짜 고마워요. 언니가 최고예요."

선미는 이세연 엉덩이를 토닥거려줬고, 세연이는 선미를 꼭 안았다.

...

아. 저렇게 축하해 주는 거구나. 나도 엉덩이 토닥거리자.

"세연아 고생 많았다."

"오빠. 거기서 스톱."

"아니야. 나도 축하해줄게."

"이미 됐거든요! 흥. 절로 가세요."

"절은 이미 갔다 왔어."

"아! 진짜 재미없어! 오빠는 저기로 가요! 우리끼리 좋아할 거예요."

쳇. 매정한 것들. 자기들끼리 안고 좋아했다.

휴... 그래도 여튼 잘 됐다. 우리 중에 의대생 한 명이 최종적으로 탄생했다.

우리는 한동안 축하를 해주고 자리에 앉았다.

남은 짬뽕에 밥을 비비는데, 선미가 세연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학교도 결과 나왔으니 시간 많겠어."

"헤헤헤. 그럼요. 사실 좀 심심해요. 우리 뭐 할 거 없어요?"

선미가 나에게 눈짓한다.

저거. 자기 가기 싫다고 이세연 팔아넘기는 거 보소.

어지간히 가기 싫나 보네.

나는 피식 웃으며 이세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세연아. 너 할 거 없으면 나랑 행사 진행요원 갈래?"

"예? 갑자기 무슨 행사요?"

"아는 사람이 과학 놀이라는 큰 행사가 있다는데, 갈 사람 있으면 자기한테 말해 달래."

"어디서 하는 건데요?"

...

그러게? 그걸 안 물어봤네?

"...이 근처겠지? 그리 멀지는 않을 거야. 어때 콜?"

"네. 근처라면 저도 하죠. 뭐.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잘 됐다. 오빠도 하는 거죠?"

"나는 당연히 하는 건데, 네 옆에 있는 사람이 안 한단다. 좀 꼬셔봐라."

"언니 안 할..."

"안 해."

"네. 오빠. 언니 안 한대요."

하긴, 이선미를 누가 꼬시겠어.

그런데 나와 이세연, 우리 뭔가를 하나 잊고 있는 거 같은데.

...

뭐 언젠가는 기억이 나겠지.

나는 밥을 먹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나랑 이세연만 가는 거로 하자. 선미 너도 엄청 심심하면 연락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어딘지나 알아봐. 괜히 저 멀리 부산가서 고생하지 말고."

"설마, 그럴 리가. 해봤자 서울이겠지."

"오빠. 한 번 물어봐요."

"그래 현찬아. 한 번 물어봐."

하이고 재촉하기는.

나는 결국 두 사람 등쌀에 전화기를 들었다.

- 네 현찬 씨.

"목소리 밝으니깐 마음이 편하네요. 행사 때문에 전화 드렸는데요, 그거 위치는 어디서 해요?"

- 위치요? 잠시만요.

뭐야? 본인도 몰랐어?

조금 기다리자 박인혜의 어두운 목소리가 들렸다.

- ...부산인데요?

"부산요?"

- 네. 미안해요. 미리 확인해야 했었는데. 저는 당연히 서울 일 줄 알았어요.

"아... 박 대표님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죠?"

- 진짜 아니에요. 죄송해요. 현찬 씨.

아니, 아직 간다고는 안 했으니깐 죄송할 필요는 없어요.

일단 전화를 끊자.

휴대전화를 내려놓자 이선미가 킥킥 웃었다.

"아하하. 야! 뭐야? 진짜 부산이야?"

"어. 이게... 왜 부산이야? 아니. 이거 어떻게... 세연아 일단 잠시만! 안 간다는 말 하지 말고 내 이야기 좀 들어봐."

안 간다고만 말하지 마! 같이 놀러 가면 재밌잖아.

"부산이에요? 진짜요?"

"응. 부산에 회가 진짜 맛있어. 특히 바닷가에서 먹으면 둘이 먹다 하나가 파도에 휩쓸려 가도 모를 정도야."

"그럼 오빠가 휩쓸려 가세요. 그래도 재밌겠다. 저 갈래요! 언니 언니도 같이 가요!"

이세연은 의외로 좋아했다.

아... 수능 치고 가장 할 일 없는 사람이 이세연이지. 안 좋아하면 이상하지.

이거 혹시 의외로 부산이란 게 장점이 되지 않을까?

그래. 이선미도 다시 꼬셔 보자.

"선미야. 너 전국에 안 다녀본 곳 많다면서. 이 기회에 같이 가 행사해서 스펙도 쌓고, 여행도 하자."

"그래요. 언니! 우리 같이 내려가요!"

잘한다! 우리 세연이 잘한다.

하지만, 이선미 표정은 너희 둘이 잘 논다는 표정이다.

"됐어. 나는 안 갈 거야. 아하하. 둘이서 재밌게 놀다가 와."

...

젠장. 하여튼 저 집순이. 너 그러다가 침대 속으로 들어가겠다.

결국, 최종으로 가는 사람은 나와 이세연 두 사람만 가게 되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부산에 내려가는 날이다.

아파트 근처에서 기다리자, 이세연이 자기만 한 크기의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들고 나왔다.

"나 왔어요."

"너 부산에서 일본으로 밀입국하려고 하는 거지? 그 캐리어 크기 뭐냐?"

"우리가 하루 이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보름 정도 있어야 하는데, 이 정도는 챙겨야죠. 부족한 것보다 약간 과한 게 나아요."

틀린 말은 아니네. 이번에 행사 기간은 무려 보름이다.

나와 이세연은 캐리어를 차에 실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오빠. 그런데 방은 예약했어요?"

"응. 나 방 예약하다가 현타 왔잖아."

"왜요?"

"방값이 300이 넘게 나 왔어."

"아하하. 진짜요? 150은 보내 드릴게요."

...사실 300 안 나왔는데. 그냥 허세 부린 건데. 이걸 또 받아주네.

"됐어. 150 어치 밥이나 사든가. 모텔이랑 호텔 중간급으로 예약했는데, 숙소는 나쁘지 않을 거야."

"에이. 그래도 보내 드릴게요. 킥킥. 그런데, 둘이서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 가니깐 왠지 설레요."

그래서인가? 편안하지만 마냥 편하지 않게 신경 쓴 티가 보였다.

원래 키도 크고 날씬한 이세연이라 옷걸이가 좋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눈에 띄게 착 붙는 느낌이다.

뭐 특별한 건 없다. 다리라인을 살린 스키니진에, 손바닥이 가려지는 박시한 후드티를 입고 와서 귀여움도 놓치지 않은 정도.

그런데 패션의 완성은 외모라고 했던가? 이세연과 하나 되자 피팅 모델처럼 예쁘게만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예쁘게 입고 온 거야?"

"치. 나만 차려 입었나? 오빠도 멋있게 입었잖아요."

뭐. 그렇지.

나도 평소 입는 청바지 대신에, 블랙진에 코트 그리고 구두에 시계까지 차고 왔다.

"웬일이래요? 부산에 숨겨둔 여자친구라도 있어요?"

"여자친구는 무슨. 그냥 기분 내고 싶어서 입고 온 거야. 기차 도착했다. 어서 타자."

"네. 오빠."

우리는 부산으로 가기 위해 내 차에 몸을 실었다.

< 부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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