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타락의 완성
아래로 내려가자 부모님과 카일이 원탁을 가운데 두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루시는 심호흡하고 의자에 앉았다.
“물어볼 게 있어요.”
아버지가 대답했다.
“물어보렴.”
“엘빈에 대해서 자세히 아시나요?”
“무슨 말이니?”
“오늘 엘빈이 제 상점에 왔어요. 그런데 엘빈이 너무 불쾌하고 싫었어요. 엘빈이 제 손목을 잡은 순간 소름이 끼쳤어요. 아주 옛날에 엘빈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루시는 가족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루시만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루시가 애원했다.
“알려주세요. 알고 싶어요. 엘빈이 누구인지.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모두.”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고 괜찮다는 뉘앙스로 어머니의 손을 쓰다듬은 다음 입을 열었다.
“내 불안이 사실이 된 것 같구나.”
“무슨 불안이요?”
“네가 말해주었던 엘빈의 인상착의와 몇몇 습관들 말이다.”
“네.”
“7년 전 우리 집을 습격한 도적이 5명이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엘빈과 같은 인상착의와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자도 도끼와 방패를 사용했어. 네가 말한 머리카락 색과 얼굴도 비슷한 것 같고. 그자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패로 카일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리고 카일의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버렸지. 나는 다른 놈 2명한테 맞았고.”
“카일. 진짜야?”
“.....”
“빨리 말해. 카일.”
카일은 죽었을 때의 공포를 떨치지 못하는 듯 손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맞아. 엘빈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때린 새끼 얼굴이 엘빈이랑 같은 것 같아.”
아버지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구타를 당하면서 카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놈은 카일의 얼굴을 방패로 뭉개버린 다음 비웃으면서 오른손으로 잡은 도끼를 빙빙 돌리며 입술을 핥았다.”
루시가 대답했다.
“그건. 엘빈이 가끔 생각하면서 하는 행동이야.”
어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몸을 덜덜 떨자 아버지가 어머니를 꼭 안아주면서 달랬다.
“여보. 진정해.”
어머니가 떨리는 입으로 진실을 털어놓았다.
“루, 루시야. 나도 말하, 할게. 나를 강간했던 개새끼들 중에 한 명이 바로 그 도끼 전사였어.”
루시는 쏟아지는 충격적인 진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전 남자친구였던 엘빈에게 현재 비호감이 있는 것도 맞지만 그래도 엘빈은 마을의 자경대의 일원이었고 좋은 행동만 했었다.
그런 엘빈이 가족의 원수였다니.
그때 루시의 기억에 잠들어있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이 어머니를 강간하던 두 명의 도적을 파이어볼로 태워버린 후에 15명이나 되는 도적이 멀리서 자신을 향해 걸어오던 장면이었다.
중앙에 있던 강해 보이던 도적 대장의 얼굴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런데 자세히 떠올려보니 중앙에 있던 놈 바로 옆옆에 엘빈과 비슷한 놈이 있는 것 같았다.
루시는 더 자세히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루시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또르륵 떨어졌다.
그 개새끼가 바로 엘빈이었다.
왼손에 방패, 오른손에 한손도끼, 그리고 얼굴까지 완벽한 엘빈이다.
루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바닥에 머리를 박으면서 사죄했다.
“전부 미안해. 미안해! 엄마, 아빠, 카일까지 이렇게 죽어버렸는데 나만 원수 새끼랑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서 미안해! 어엉어어엉”
루시의 눈에서 참회의 뜨거운 눈물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루시의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에 가족 모두가 일어나서 루시를 말렸다.
카일이 누나의 몸을 잡았다.
“누나! 그만둬! 제발 누나 자신을 아프게 하지 마!”
가족의 눈에서는 슬픔의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루시가 소리쳤다.
“어엉엉엉.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했던 거야! 처음 만났을 때 왜 안 말해준 거야!”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가 엘빈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 그래도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죽은 우리가 너의 현실 세계에 간섭하기 싫어서 그랬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 엘빈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나는, 엄마, 아빠, 카일만 있으면 돼! 카일 너는 왜 가만있었던 거야?”
카일이 대답했다.
“나도 누나가 너무 사랑스럽고 평생 누나랑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우린 곧….”
어머니가 카일을 멈춰 세웠다.
“카일!”
루시가 울어서 불어터진 눈으로 소리쳤다.
“잠깐. 뭐야? 나한테 또 비밀이 있는 거야? 말해 빨리!”
가족한테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나중에 고통받느니 지금 충격적인 비밀을 다 듣고 싶었다.
아버지가 카일을 책망했다.
“카일. 너는 참. 그 아무렇게나 말하는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구나.”
“죄송합니다.”
“우린 이제 곧 소멸한단다.”
루시가 동그래진 눈으로 놀라서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빠….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나 지금 너무 행복해. 가족들이랑 있어서 너무 즐거워.”
“위대하신 신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지. 하지만 우리는 이미 소멸했어야 하는 영혼이다. 더는 그분께 폐를 끼칠 수는 없다. 그분이 너한테 아무 얘기 하지 않은 것도 우리가 부탁해서야.”
“그럼, 아빠, 엄마, 카일 모두 사라지는 거야?”
가족 모두 안타까운 눈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의 긍정이었다.
“빨리 신님께 말해야겠어. 가족이랑 계속 만나게 해달라고.”
아버지가 다그쳤다.
“루시. 안돼! 그분께 더는 폐를 끼칠 수 없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이미 너무 많은 힘을 희생했어!”
“그래도 나는 말할 거야. 혼자 있기 싫어. 그동안 너무 외로웠어. 이제야 가족을 만났는데 다시 떨어지기 싫어.”
루시는 엉엉 울면서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집에서 루시를 부르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왔다.
“루시!”
“루시야!”
“누나!”
루시는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공터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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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에서의 시간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루시가 엘빈에 대해서 떠올리자 차가운 분노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통하는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엘빈 따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루시가 신님을 불렀다.
“신님! 신님! 제발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무슨 일이지?”
“혹시 꿈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나는 너의 꿈의 세계에 간섭할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그것은 너의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내가 너의 가족들과 약속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제 가족들의 소멸을 막아주세요. 그리고 꿈의 세계를 없애지 말아 주세요.”
“......”
5분 정도의 긴 침묵이 흐르고서야 신님은 기나긴 세월의 피로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업적도 없는 필멸자의 영혼의 소멸은 세계에 의해 확정된 사안이다. 지금까지 너를 위해서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제발요.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그것은 나의 약화 또는 소멸로 이어진다.”
루시는 침대에서 땅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아주 공손하게 보이지 않는 신님을 향해서 절을 했다.
“부탁드립니다. 저의 신체, 영혼, 마음 모든 것을 드릴 테니 제발 제 가족들을 살려주세요.”
“후우우우. 이런 일이 생길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나를 완전히 신뢰하고 믿고 섬기겠느냐?”
“네. 섬기겠습니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게요. 영혼도 드릴게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일단 너희 가족 모두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지하려면 내가 소멸하고, 내가 소멸한 후에는 너희 가족을 지킬 존재가 없어지지. 하지만 한가지 도박과 같은 불완전한 방법이 있기는 하다.”
“그러면….”
“너의 가족과의 계약 내용은 너를 나의 신도로 만드는 것. 너는 이미 나에게 마음을 열었다. 나는 곧 예전의 힘을 대부분 잃은 상태로 실체화해서 너의 옆에 나타날 것이다. 그 과정에 너의 가족 중 한 명의 영혼과 자아를 나와 섞어주마.”
“그럼 신님과 제 가족의 자아는 어떻게 되나요?”
“나는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복잡한 존재다. 내 본질을 기억하고 있다면 자아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너의 가족의 자아가 내 실체의 주 자아가 될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한 명만 가능한가요?”
“그래.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
“그럼 카일! 카일을 살려주세요.”
루시는 카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부모님도 이해해주실 거다.
“받아들이겠다. 그 대신 제물이 필요하다.”
“제물요?”
“그래. 갓 죽은 인간의 뜨거운 시체가 필요하다. 그 시체의 에너지가 필요해.”
루시의 눈에 기이한 광기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빈에게 완벽한 복수를 하는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깐 내 모습을 보여주마.”
“네?”
그 순간 루시의 머릿속에 번개가 콰르릉 치듯 거대한 존재가 있는 세계가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방 전체가 순간적으로 거대한 존재를 담은 어떤 세계로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루시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가지고 온 신화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것은 1000년 전에 일어났다고 하는 ‘촉수 전쟁’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신화 촉수이자 어둠의 신 카마이트와 엘리아 여신 간의 전 대륙의 명운을 건 거대한 전쟁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어둠의 신이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고 떠올리곤 했다.
지금 그녀가 본 광경은 바로 그 어둠의 신이었다.
어두운 세계에 있는 거대하고 꿀렁거리는 구체의 몸통에 촉수 다리와 눈알이 셀 수 없이 돋아나 있는 모습이었다.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거대한 존재의 모습이 환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몸통에 나 있는 촉수 다리는 얇은 것부터 루시의 수십 배 굵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셀 수 없이 돋아나 있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친구들과 ‘촉수 전쟁’을 얘기하면서 생각한 모든 타락과 원죄를 합쳐서 실체화한 존재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웅장한 모습은 루시의 뇌리에 박혀서 지금도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하지만 루시가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루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아름답고 경이롭다고 생각해버렸다.
루시도 모르게 경외에 찬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아. 아아아.”
루시의 입에서 침이 흐르고 방광 근육이 풀어지면서 오줌이 흘러나왔다.
쉬이이이 줄줄줄줄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격이 다른 위대한 존재를 맞이하며 그녀의 리비도가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실제로 지구에서도 몇몇 소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록스타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 록스타의 공연에서 리비도가 폭발하여 실신, 오르가슴, 요실금 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듯이 말이다.
이어서 광기에 찬 루시가 존경과 숭배에 찬 목소리로 다짐하였다.
“저를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을 완벽하게 섬기겠나이다.”
신님이 그 다짐에 답하였다.
“아무도 모르게 내 제단을 만들고 나를 숭배해라. 나에게 제물을 바쳐라.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제 루시는 신님을 위해서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루시가 먼저 생각한 것은 엘빈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루시에게 이것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루시의 눈에는 자신과 가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이 광기에 물든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