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운 내 예상과는 다르게, 난타는 커녕 주먹 한대도 더 휘둘러오지 않는 윤아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나는 힐끗 조심스럽게 윤아의 눈치를 살폈다. 슬쩍 살펴본 윤아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쌀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물리적인 폭력을 더 행사하지는 않았다.
으음, 이럴 애가 아닌데 이거 이상하네.
"지, 지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하는거야!"
"아하하. 미, 미안~ 장난이야."
그렇지않아도 매점 안의 많은 학생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 상황에서 윤아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게 되는 것만은 결단코 사양하고 싶었기에 나는 순순히 꼬리내리고 사과했다.
하지만 윤아는 내 사과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 듯, 주저없이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흥! 나 갈래."
"어? 가, 간다고?"
그렇게 차갑게 한마디 남기고선 윤아는 쌩하니 빠른 걸음으로 매점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처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사라져버린 윤아의 모습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서 좋긴한데...'
어쩐지 맥이 빠지는건 또 무슨 이유일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까 그 광분하는 쏠로 집단의 친구들 앞에서 '나 그 누나랑 키스헀다!' 라고
말하는 것과, 윤아 앞에서 '나 너네 언니랑 키스했다!' 라고 말하는 것... 둘 중 어느게 더 위험할까, 라는 생각이.
난 왠지 웃음이 나와서 킥킥거리며 매점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저 멀리 종종걸음으로 뛰어가 있는 윤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성질 고약한 노처녀 담임이라해도, 입원을 했을 정도로 다쳤던 학생이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데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조퇴증을 챙긴 나는 저녁 식사시간이 끝나자마자 야간자율학습
없이 바로 학교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매일매일 이런 식으로 조퇴만 하다보면 공부는 언제할까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솔직히 오늘은 뭐 학교에서 남아있어봐야 자꾸 주위에서 귀찮게 득시글거리면서 유경 누나에 대해
자세히 물어오는 친구 녀석들 때문에 어차피 공부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치료를 받으면서 슬쩍 상처를 보니 이젠 거의 다 아물어있었다. 움직이는데도 불편할 것 없고, 아직 목욕같은건
좀 무리이긴해도 이제 붕대를 푸는 정도는 괜찮다고해서 나는 잘됐다 싶어 이참에 갑갑했던 붕대를 곧바로
풀어버렸다. 방학 중순부터 지금까지 지긋지긋하도록 불편하게 감겨있던 것을 드디어 떼어내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네...
"가벼운 샤워는 괜찮지만 가급적 오래하지는 마세요."
"네."
간호사의 말을 뒤로하고 병원 문을 나서 시계를 내려다보니 대충 여덟시를 좀 넘어있었다.
기왕 이렇게 조퇴한거,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서 잠이나 푹 잘까 생각도 했지만....
'안됐네! 오늘은 언니 하루종일 일하는 날이야.'
문득 윤아가 아까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하루종일 일하는 날이면... 아마도 지금쯤 유경 누나는 미용실에 있겠지?
"으음."
괜스레 손을 들어 머리카락 길이를 한번 재어본다. 예전에 누나가 살짝 다듬어만 줬고, 거기에다 입원이니
뭐니해서 시간이 꽤 많이 지났기 때문에 길이는 상당했다. 반곱슬의 머리결이 삐죽삐죽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이
아무래도 한번 골라내어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내 기억으론 미용실 문 닫는 시간이 아홉시라고
알고있으니 지금 가면 좀 아슬아슬하긴 해도 늦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좋아, 결정했다.
'누나, 기다려요~'
님도보고 뽕도따고. 일석이조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지? 므흐흐흐~
"어서 오세요."
ML 헤어라인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언제나처럼 카운터를 맡고있던 여직원은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소파에 앉자마자 찾으시는 디자이너가 있냐고 물어온다.
"저... 유경 누나요."
이 질문은 참 받을 때마다 대답하기가 쑥스럽다. 이쪽에서 먼저 지목하자니 너무 속보이는 것 같잖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어서 어렵사리 그렇게 대답했는데 내 말을 들은 그 여직원은
묘하게 난처한 웃음을 입가에 띄었다.
"이거 어떡하죠? 유경 씨가 오늘 좀 바쁜 것 같은데..."
여직원은 슬쩍 손짓으로 여러개가 배열된 미용실 의자 가운데 한 곳을 가르켰다.
손짓을 따라 돌아보니 그곳에는 역시나 나의 아름다운 여신이 손님의 머리카락을 손질해주는 일에 한창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미용실 안에 들어온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듯 자신이 맡은 손님의 머리에
세심하게 가위질을 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일하고 있는 유경 누나를 한번 돌아본 여직원은 마치 '안됐군요' 라고
말하는 듯, 애매모호하게 웃었다.
"손님, 그냥 제가 해드리는게 어떠세요?"
"네? 아니 그게... 저는..."
바쁜 유경 누나를 대신해서 선뜻 나서는 그 여직원의 말에 나는 머뭇거리며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본 여직원은 거의 놀리는 것처럼 날 비꼬기 시작했다.
"호호, 물론 남자분이라면 당연히 유경 씨에게 자르고 싶으시겠죠. 그래도 오늘은 사정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 그런게 아니라..."
예전에도 느꼈지만, 이 미용실에 순전히 유경 누나 얼굴이나 한번 보러오는 늑대같은 남정네들하고 내가 똑같이
취급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난 어쩐지 좀 억울했다. 따지고보면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서도....
"뭐 정 유경 씨에게 자르고 싶으시다면야,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네요. 보시다시피 많이 바쁘셔서."
여직원의 말투가 약간 딱딱하게 변한 것으로 보아, 지금 그 직원의 눈에는 아마도 내가 유경 누나 얼굴 한번
보는 것에 환장해서 이렇게 완강하게 고집을 부리는 걸로 보이나보다. 제기랄, 난 억울해!
'난 여기 올 때마다 꼭 자기 찾으라고 유경 누나가 직접 말해줬었다고!'
속사정은 전혀 모른채 이젠 은근히 날 아예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여직원의 눈길이 난 참으로 억울했다.
이보셔, 난 그런 불순한 의도로 이러는게 아니라구... 쳇.
"곧 문을 닫을 시간인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그럼 저 손님 끝날 때까지 여기 앉아서 좀 기다리셔야겠..."
"어? 성재야!"
그런데 그 순간, 여직원의 말을 중간에 끊어먹으며 이 난감한 상황에서 날 구원해주는 천사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던 유경 누나가 앞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그제서야 발견한 것이다.
"누, 누나."
난 어떻게 좀 도와달라는 간절한 눈빛으로 유경 누나를 보았고 그녀는 자신이 맡고있던 손님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는 이쪽으로 급히 다가왔다.
"성재야, 어쩐 일이야?"
"아뇨.. 그게, 머리 좀 손보러 왔는데..."
"이 손님이 하도 유경 씨에게 자르고 싶다고 하셔서 말야... 퇴근시간도 됐고 유경 씨가 하도 바빠보여서
내가 해드릴려고 했는데."
여직원이 중간에 끼어들어 마치 고자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경 누나에게 말했다.
으음... 어쩐지 뭔가 일러바치는 듯한 말투가 상당히 맘에 안드네.
"성재야, 머리 다듬으러 왔어?"
"네... 그, 그런데... 바쁘시면 괜찮아요. 그냥 다른 분한테 할게요."
뭐 좀 허탈하긴 했지만 유경 누나가 많이 바쁘다면야... 굳이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가게 문 닫을 시간이라고 하니...
"미선 씨, 저기 저 손님 미선 씨가 마무리 좀 해주실래요?"
"...네?"
그런데 내 말과는 다르게 유경 누나는 재빨리 내 손목을 홱 붙잡더니, 여직원에게 방금 전까지 자신이 맡고있던
손님을 가르키며 말했다.
"유, 유경 씨는?"
"저는 이 손님 해드릴게요."
그 여직원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유경 누나는 내 손목을 이끌어 비어있는 의자로 날 안내했다.
그렇게 유경 누나에게 끌려가듯 의자로 향하는 내 모습을 보고있던 여직원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할말을 잃은 듯 멍하니 굳어져버렸다.
"들어오자마자 나 찾지 그랬어."
"하, 하하..."
자신이 맡고있던 손님을 거의 도중에 내팽개치듯 다른 직원에게 맡기고는 나부터 먼저 챙겼던 유경 누나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솔직히 지금 너무너무 기분좋다.
"그런데... 아까 그 손님, 끝까지 안해주셔도 괜찮아요?"
"응, 뭐... 미선 씨가 해주겠지."
"많이 바쁘신 것 같던데... 그냥 그 직원 누나한테 자르는게 나았으려나. 하하... 죄송해요."
"무슨 말이야? 나 섭섭하게..."
어쩐지 유경 누나한테 번거롭게 실례를 끼친 것 같아 그렇게 사과했는데, 내 말에 유경 누나는 정말로
섭섭하다는 듯 심통이 난 표정으로 볼을 약간 부풀렸다. 어딘가 삐진 듯한 그 표정... 왠지 윤아하고 똑같았다.
역시 자매는 은근히 서로 닮는 거구나.
'그, 그런데... 이 표정도 정말 무지무지 이쁘다.'
유경 누나의 천사같이 아름다운 얼굴로 그렇게 삐진 듯한 표정을 지으니,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속으로 그렇게 상황에 안 어울리는 엉뚱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유경 누나가 내 어깨에 가운을
둘러주며 물었다.
"내가 해주는게 싫어?"
"아, 아뇨! 싫다니요? 절대 그럴리가..."
어쩐지 유경 누나가 뭔가 오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손까지 내저으며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럼 좋아?"
그녀가 너무 당연한 것을 새삼 물어보는 탓에 순간 당황했지만... 솔직히 고민할 것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 그럼요. 당연히... 좋죠."
너무나도 당연한 대답이었건만, 누나의 표정에서는 토라진 듯한 모습이 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부드럽고 포근한 한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보아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후훗... 그래. 그럼 앞으로는 꼭 오자마자 나 찾아줘. 다른 사람한테 가지말고."
"네... 그, 그럴게요."
가슴을 녹아내리게하는 그 황홀한 미소에 나는 그녀의 말 속에 담긴 그 의미를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만 연신 끄덕거릴 뿐이었다. 멀찍이 의자 몇개가 떨어진 거리에서 아까의 그 여직원이 나와 유경 누나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여전히 한손으로 입을 가린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까지 한번 비비면서
여기를 계속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그 얼빠진 모습이 어쩐지 너무너무 통쾌한 이유는 뭘까?
'어쨌든... 무지무지 행복하다.'
얼굴을 볼 때마다 매번 내 가슴 속에 무한한 행복을 심어주는 이런 여인을,
나는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나. 이제 퇴근시간 아니에요?"
"응. 그러네."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다듬어주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않아 시계바늘은 아홉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가게 안을 둘러보니 아직도 끝나지않은 손님이 몇몇 있긴 했지만 서너명 뿐이었고 그마저도 이제 거의
끝났는지 자리에서 하나둘씩 일어서고 있었다.
일이 끝난 여직원들도 슬슬 퇴근 준비를 하는 듯 윗층의 락커룸에서 핸드백 등을 챙겨내려오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이제 막 머리 손질을 시작한 나는 괜히 나 때문에 유경 누나가 퇴근도 못하고
붙잡혀 있는게 아닌가 싶어 덜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누나. 저 때문에 퇴근 시간 늦어지셨네요."
"어머... 또 그런 소리한다. 자꾸 그런 말 할거야?"
"그, 그래도 집에도 못 가시고...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텐데."
"괜찮아. 난 좋은데 뭐."
가게 안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손님들을 위한 가요 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도 날 좋아할 줄은 몰랐어~♬ 어쩌면 좋아 너무나 좋아~♪ 꿈만 같아서 나 내 자신을 자꾸 꼬집어봐~]
스피커에서는 원더걸스의 Tell me 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평소에 그렇게도 즐겨들었던 노래건만
지금은 그 가사가 어쩐지 좀 묘하게 설렌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누나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써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런데... 저 누나들은요? 퇴근도 못하고 기다리는 것 같은데..."
퇴근 준비를 끝마쳤건만 미용실 안에 아직 내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게 문을 닫지못하는 여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긴 손님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다면 당연히 퇴근할 수가 없겠지...
혹시 지금 저 누나들 속으로 나한테 험담하고 있는거 아닐까? 아, 무섭다...
"으음, 그러네. 조금만 기다려봐."
유경 누나도 그건 그렇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가위를 내려놓고는 퇴근을 기다리고 있는 여직원들에게 다가갔다.
어라... 무슨 말을 하려고?
잠시동안 직원들에게 웃으며 무어라 몇마디 말을 건넨 유경 누나는 곧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누나가 무슨 말을 한건지 궁금했던 나는 얼른 물어보았다.
"뭐라고 하신거에요?"
"응. 다들 기다리지말고 먼저 퇴근하라 그랬어."
과연 그 말대로 미용실 내의 직원들이 유경 누나에게 고개숙여 인사를 하고는 하나둘씩 가게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카운터의 그 여직원이 윗층에서 핸드백을 챙겨내려오면서 유경 누나에게 말했다.
"유경 씨, 정말 먼저 퇴근해도 되겠어?"
"네, 그러세요. 저는 이 손님 다 해드리고 갈게요."
"호호, 그 손님 정말 되게 아끼네? 아무리봐도 둘이 평범한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애인이야?"
"네에?"
뜻밖의 질문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여직원을 동시에 돌아보는 나와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