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조금 주제넘는 듯한 말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내가 그녀에게 선물을 할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만, 마치 그렇게 약속이라도 잡는 듯한 내 말에
그녀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을 뿐이었다.
"기대할게."
그리고 가슴은 또 다시 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유경 누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했던 고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너 되게 잘한다..."
"하하.. 이래보여도 자취 중이니까요."
난 그녀의 부엌 싱크대에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들을 능숙한 솜씨로 씻어내며 웃음을 지었다.
상당한 양의 식기들이 싱크대에 들어차있는 것을 본 내가 넌지시 설거지를 해드리겠다고 누나에게 말했고
처음에 누나는 집에 온 손님에게 어떻게 그런걸 맡기냐고 한사코 말렸지만 일단 고무장갑을 끼고
번개처럼 접시들을 씻어내는 내 숙달된 움직임을 보고나서는 그저 감탄만 할 뿐이었다.
문득 예전에 이 부엌에서 그 남자와 난투극을 벌였던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나는 주위를 슬며시 둘러보았다.
꽤 시간이 흘러서 그렇겠지만... 그 때의 난장판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집 안에는 깨진 접시조각이나
화분 파편 한조각도, 그리고 내가 그 때 쏟아냈던 핏자국조차도 한방울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그 남자가 그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과 별일이 없었다는 말을 들었긴 했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지금 그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괜히 좋지않은 화제를 꺼내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기는 싫었다.
"그러고보니 너 부모님하고 떨어져서 산댔지...?"
"네."
"힘들지 않어?"
"어느정도 되니까 할만해졌어요. 밥도 알아서 하고 빨래도 알아서 하는걸요 뭐."
"후훗, 멋지네. 나중에 가정적인 신랑이 되겠구나."
난 어쩐지 볼이 달아오르는 그 칭찬에 '전 누나같은 신부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라는
약간은 어색하고 느끼한 멘트를 던져도 될까 말까 잠깐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약간 묘하게 아쉽게도 그녀는 내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언제 한번 원룸에 놀러가도 되니?"
"예? 제 집에요?"
그 순간 놀라서 접시를 떨어뜨릴 뻔 했던 나는 간신히 그것을 움켜잡았지만,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고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괜히 이상한 상상하며 과잉반응한 것 같아
무안해져서 다시 접시를 씻기 시작했다.
"네.... 언제든요."
"고마워."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마도 오늘부터 시작해서 내내 그 날만을 목빠지게
기다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설거지를 끝내고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많이 흘러 소나기가 그치고 하늘이 잠잠해져있었다.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바깥은 어둑어둑했지만 햇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보아 시간은 이미 저녁이었다.
"슬슬 윤아가 올 시간이네."
"아직 멀었지 않나요?"
3 학년들은 시험을 보는 날이라 일찍 마쳤지만, 중간고사를 3학년처럼 일찍 보지않는 1, 2 학년들은
정상수업을 마치고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윤아가 야자하는걸 한번도 본적이 없거든."
"하긴..."
왠지모르게 납득해버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나기 다시 오면 큰일인데... 얼른 집에 가야겠네?"
"네... 그래야겠죠."
분명 그래야했지만 솟구치는 아쉬움은 자꾸만 내 발을 붙잡았다.
솔직히 유경 누나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지만... 그렇다고 계속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오늘 즐거웠어."
"네? 네... 저, 저도요."
어쨌든 그녀가 즐거웠다니 정말로 다행이었다...
나는 나같이 별볼일 없는 녀석과의 데이트로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즐거움을 느꼈다니 어쩐지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다음 말은 나를 몇배로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후훗, 다음에는 꼭 영화도 보자."
다음에는...?
나는 그 다음을 기약하는 그녀의 뜻모를 말에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콩콩 뛰었다.
"여기에 또 와도 될까요?"
그 분위기를 탔기 때문인지 나도 그녀와 무언가 다음을 기약해두고 싶었다.
다 큰 처녀 둘만 사는 집에 또 와도 되냐고 묻는 그 약간 뻔뻔하기까지 한 질문은 분명 평소대로라면
제대로 꺼내지조차 못할만큼 낯간지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나는 내 주제에 뭘 믿고 이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분명히 허락해줄 것이라 믿었다.
"자주 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기대이상의 그 황홀한 대답에 마치 심장이 녹아들 것만 같았다.
"조심해서 가... 바래다주고 싶지만 윤아가 올 것 같아서 말야. 후훗.. 미안해."
"처, 천만에요."
"우산 하나 가져가. 혹시 모르니까."
우산을 하나 빼어주며 현관문에 서서 신발을 신는 날 배웅하는 유경 누나는 부드럽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온몸을 포근하게 만드는 그 웃음... 정말 이런 여인에게 반하지 않을 남자는 없을거야.
"생각나면 또 오구."
"네에..."
마음 같아선 내일 또 오고 싶은데...
친절하게도 손수 현관문을 열어주려고 신발장으로 나오는 유경 누나와 내 몸이 서로 가까이 맞붙었다.
문을 열어주려는 손을 손잡이에 가까이 가져가던 유경 누나는 문득 잠시 손을 멈추고는 그렇게 밀착된 상태의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인치고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남자인 내가 10센티 정도 더 컸기
때문에 나는 그 도도하고 우아한 눈망울로 날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내려다 볼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러세요?"
가까이 딱 붙은 우리 사이의 거리는 손 한뼘 정도조차도 떨어져있지 않았다.
그렇게 가까이서 이유없이 뚫어져라 날 빤히 올려다보는 그녀의 맑고 깊은 호수같은 눈동자.
잔잔한 눈망울과 언제나 공주처럼 고아하고 아름다운 그 눈매를 계속 마주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그 호수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
천천히... 그녀가 그 크고 예쁜 눈을 살며시 내리감았다. 눈꺼풀이 스르르 덮히며 마치 누군가가 그려놓은 것만
같이 곱고 속눈썹이 긴 그녀의 눈꼬리가 서서히 가늘어진다. 그녀가 왜 눈을 감는지 순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그렇게 눈을 지그시 감은채 까치발을 들듯 천천히 발 뒤꿈치를 약간 들어올리기까지 하는 유경 누나의 행동을
보고는 믿을 수 없는 의혹의 파도에 휩싸였다.
유경 누나는 그렇게 눈을 감고 까치발을 들었지만 고개를 약간 앞으로 당겨올렸을 뿐,
아무런 다음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무슨 반응이라도 하기를 가만히 기다리는 듯한 그 모습...
'이거 혹시..'
멜로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숱하게 보아왔던 바로 그 몸짓인가...?
'에이.. 설마..'
나와 키를 맞추고는 턱을 약간 올려들은 유경 누나의 아름다운 얼굴이 너무나도 바짝 다가와있었다.
긴 속눈썹이 가닥가닥 보이고 숨결조차 희미하게 와닿을 정도로 어느새 그녀와 내얼굴이 서로 가까워져있었다.
단아하고 오목조목한 그녀의 이목구비가 바로 눈 앞에서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그 자세 그대로 어떠한 미동도 하지않고 그렇게 굳은 것처럼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그녀...
'설마... 키스해 달라는건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내 짐작이 맞다면 분명 이것은 여인이 남성에게 키스해달라고 말없이 요구하는
무언의 몸짓이 틀림없었다. 유경 누나가 나에게 그런 요구의 행동을 취했다는 사실이 너무 믿기지 않아서
분명 착각일거라 마음 속으로 되뇌어 보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제스처는 어떻게해도 설명이 되지 않을
그런 모습이었다.
여성 쪽에서 먼저 그런 무언의 신호를 보냈다면, 대부분의 남자는 아무 생각없이 일단 입술부터 낼름 먹고보는게
정상이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유경 누나와 함께 그런 상황에 놓여있고보니 어떻게해야할지 막막하게
감도 잡히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꼭 감고있는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현관의 어두운 조명 아래 너무나도 매혹적이게 빛나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예전에 병원에서 내게 짧은 입맞춤을 해주었던 그 짜릿한 기억이 순식간에 머릿 속을
가득 메워왔다.
꿈에서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황홀했던 순간의 그 느낌, 어떻게해서든 다시 느껴보고 싶었던...
"...."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뒷감당이야 어쨌건간에 차려놓은 밥상을 마다할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그 밥상이 세상에 다시없을 진수성찬이라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나 역시도 고개를 조금씩 아래로 내려 유경 누나의 아름다운 얼굴과 서서히 내 얼굴을 맞대었다.
키스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없는 것도 아니었다. 2학년 때까지는 거의 날라리로 살아오면서
이런 애 저런 애 적당히 사귀다보니 그런대로 키스는 어느정도 해본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단언컨대, 솔직히 유경 누나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아름다운 이성과의 키스는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전까지는...
심장이 터질 듯이 쿵쿵 뛰고 있었다.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인 유경 누나의 분홍빛 입술에 나는 내 입술을 천천히
포개어갔다. 그리고나서 곧이어 온 세상이 마치 슬로우모션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득해지며 입술을 통해
너무도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촉촉하게 전해져왔다. 그다지 매끄럽다고 할 수 없는 내 약간 메마른 입술과
는 전혀 다르게 그녀의 입술은 더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전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그 촉촉한 감촉에 나는
금새 황홀경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 때부터일까, 거기서부터 뭔가 내 이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거의 본능적인 움직임들이 저절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허락도 구하지 않았거늘, 아니, 솔직히 뭐 허락을 구할 틈도 없었긴 하다만은 나는 미처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내 혀를 그녀의 입술 안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하지만, 더욱 놀랍게도 그녀는 이런 내 행동을 거부하지 않았다.
유경 누나가 아무런 저항없이 입안으로 내 혀를 받아들이자 나는 분명히 속으로 놀라고 말았건만 이상하게도
혀놀림은 멈추지않고 저절로 그녀의 입안 구석구석을 춤추기 시작했다. 마치 이성과 본능이 동떨어진 것 같은
괴리감이라고 해야할까... 그것은 정말로 낯설고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뇌와 혀가 따로 놀고있었다.
키스 테크닉에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고는 해도 나는 무례할 정도로 누나의 부드러운 혀까지 마음껏 침범하고
있었다. 그녀의 혀와 내 혀가 입안에서 서로 이리저리 복잡하게 뒤엉키고 숨결이 점점 더 뜨거워져갔다.
유경 누나의 혀를 내 혀끝으로 탐닉하고 있다는 그 느낌에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내 혀가 마구잡이로 날뛰는 것을 그대로 다소곳이 받아들이며 내가 이끄는대로 혀의 움직임을
맞추어왔다. 황홀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그 아찔한 쾌감이 입 안부터 시작해서 척추를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며 강렬한 전율을 만들어내었다. 나는 그녀가 내 심장박동이 몇배로 빨라져 거세게 뛰는 소리를
분명 듣고있을 거라 생각했다.
전율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나는 그녀의 개미처럼 얇은 허리를 나도모르게 끌어안고 있었다.
한팔로 안고도 남을 얇은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더더욱 밀착시키자, 이제 서로 간의 간격이라고는 조금도 남기지
않고 그녀와 내 몸이 마치 한몸처럼 꼭 달라붙었다.
'앗...'
그 어마어마한 쾌락의 파도 속에서도 나는 잠시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내 가슴에 닿아 짓눌러지는 그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블라우스 셔츠 위로 느껴지는 그녀의 둥근 가슴의 윤곽... 안에 브래지어도 하고 있었고 가슴이 맞닿았을
뿐이라서 직접적으로는 아니었지만, 그 속으로 대충 느껴지는 그 말캉한 감촉은 내가 유경 누나를 처음보았을
때부터 무던히도 상상해왔던대로 이루 말할 수 없이 탄력이 넘치고 그 크기 또한 보통이 아님을 분명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가슴팍으로 느껴지는 한없이 뭉클하고 부드러운 그 느낌에 그만 정신이 혼미해질 것만 같았지만,
나는 그녀가 이런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하지는 않을까, 혹시 날 밀쳐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 와중에도 걱정되어
눈을 감은채로 살며시 그녀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분명히 이것은 이성간의 정상적인 신체 접촉이라고 보기에는 이미 그 선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무례하다못해 불순하기까지 한 이러한 접촉에 나는 그녀가 화를 내기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분명히 거부할 것만
같아서 마음대로 그녀의 입안을 휘젓던 혀의 놀림마저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애써 잠시 멈추어버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유경 누나의 반응은 내게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혀의 움직임이 멎은 내 고개를 그녀는 양팔을 들어 목 뒷덜미부터 꼭 끌어안기 시작했다.
마치 목에 매달리듯 고개를 끌어안는 유경 누나의 희고 가느다란 양팔의 움직임에 나와 그녀의 몸은
더더욱 서로 꼭 붙어버렸다. 이젠 그야말로 물샐 틈도 없이 서로가 밀착되어있었고, 당연히 가슴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말캉한 가슴 감촉은 한층 더 생생해졌다.
갑작스럽게 허리를 끌어안은 내 과감한 행동에 그녀는 아예 내 목까지 끌어안으며 더더욱 과감한 반응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나서 유경 누나는 잠시 멈추었던 내 혀를 이번엔 자신 쪽에서 부드럽게 혀로 감싸오며
리드해나가기 시작했다. 정말 믿을 수 없게도...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지만, 유경 누나와 나는 그렇게
어두컴컴한 현관문의 불빛 아래에서 깊고 끈적하기 짝이없는 그런 딥키스를 서로 주고받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천상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절세의 미인과 이런 몽환적인 딥키스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은 내 몸에 전율을
흐르게 하다못해 아예 파들파들 떨리게까지 몰아가고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시간이 정지해버린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녀와 나는 이 세상 어느것보다도 서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 느낌 그대로, 언제까지고 서로 계속 떨어지지않고 붙어있을 수만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아..."
하지만 그 황홀한 몽환의 늪은 어처구니 없게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순간적으로 깨어져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그것은 정말이지 불가항력이었다. 교복 바지 위로 서서히 고개를 들던 내 자지가 팽팽히 솟아오르더니
그 기세를 멈추지않고 결국엔 짙은 키스를 나누며 서로 딱 밀착되어있던 유경 누나의 안쪽 다리에 기어코
살짝 닿아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