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처를 주시면 제가 치료비를..."
"아, 아니에요. 그럴 필요까지야."
"그래도.. 너무 죄송해서.."
막말로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래. 당장 치료비를 물어내.' 이런 식으로 말했겠지만..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서 계속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이젠 내가 다 곤란할 지경이다.
순간 마음 속에서 이걸 기회로 연락처를 얻어내 그녀에게 접근해보자는 유혹이 고개를 들었지만,
고작 이런 일로 치료비를 요구하는 쪼잔한 남자로 보이기 싫다는 생각은 그 유혹을 간신히 막아주었다.
'그런데... 날 기억은 하고 있을까 모르겠네.'
그저 단 한번의 짧은 만남. 그것도 단순히 직원과 손님 간의 만남이었을 뿐이었다.
불과 어제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날 기억하지 못하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말을 꺼내보았다.
"저기.. 혹시 저 기억 안나세요?"
"...네?"
보석같이 매력적인 그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그녀.
"어제 미용실에서 잠깐 뵌 것 같은데.."
나는 뒷 말을 흐리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이런...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막연한 실망감이 들어 못내 씁쓸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곰곰히 내 얼굴을 살펴보는 듯 하더니, 이내 손바닥을 마주 부딪히며...
"아, 그 학생분!"
"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 다행이다. 기억해줬구나.
"언니, 어떻게 됬어?"
예기치못한 사고로 마음이 뒤숭숭해진 탓인지, 병원 정문을 걸어나오는 동안 그녀가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변변찮은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그저 걷기만 해야했다.
그렇게 병원 문을 빠져나오니, 건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소녀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여인이라기보다는 소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앳되고 귀여운 얼굴의 소녀였다.
'귀, 귀엽다.'
누구라도 이 소녀를 처음 보는 사람은 귀엽다 라는 느낌부터 받을 것 같았다.
동글동글하고 작은 얼굴에 크고 초롱초롱한 맑은 눈. 아담한 키와 묶어내린 검은 생머리.
마치 인형처럼 깜찍하고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나이는 암만 높게 잡아도 나보다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귀여운 아이가 갑자기 이쪽으로 다가오니 순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 아이가 내가 아닌 내 옆에 서 있는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으응.. 어깨를 다치셨대."
"많이?"
"글쎄.."
뒷 말을 흐리며 내 눈치를 살피는 그녀. 나는 속으로 그녀와 눈 앞의 이 여자아이가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보았다.
답은 쉽게 나왔다.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언니' 라는 말 하나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보니.. 여동생이 있다고 했었지? 그럼 이 아이가?'
미용실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나는 그녀가 말했던 동생이 눈 앞의 이 아이일거라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 여자애가 나와 같은 학교의 2 학년 후배란 말인가?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나는 힐끗 그 여자아이의 외모를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굴을 봐도, 아담한 키를 봐도, 전체적인 분위기를 봐도 역시 아름답다는 말보단 귀엽고 깜찍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그런 아이였다. 정말이지 인형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얘가.. 나랑 같은 학교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어색하기도 하고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서있었더니 그녀가 동생을 부추겼다.
"윤아야. 너도 어서 사과드려."
"에..? 나, 나도?"
"어서."
그녀가 짐짓 엄하게 재촉하자 그 여자아이는 머뭇머뭇거리더니 어색하게 내게 사과를 건넸다.
"우... 미안."
..... 어쩐지 말이 좀 짧다.
도대체 언제봤다고 반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짐작이 맞다면 나보다 1살 어릴텐데.
"...괜찮아요."
그래도 나까지 덩달아서 반말로 받아칠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으음... 제길, 귀여워서 봐준다.
"휴.. 죄송해요. 제 동생인데 철이 없어서.."
"하, 하하. 아니에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다시 꾸벅 숙였다.
나는 그저 어설프게 웃었지만, 그녀의 말을 통해서 이 여자아이가 그녀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왜 나한테 그래~"
그 여자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조그맣게 투덜거렸다.
흐음. 언니랑 동생이랑 성격이 참 다르구나.
"저기.. 역시 제가 치료비를 부담해드리고 싶은데.."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병원을 나와 이만 집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그녀는 한사코 잡아세웠다.
어쩐지 오늘따라 나 답지도 않은 사양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미인에게 쪼잔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은걸.
"그래도 아무 것도 안해드리려니 너무 죄송하네요.."
뭐 사실 위험하긴 했지만.. 그녀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오히려 그녀와 이렇게 사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어떻게보면 약간 기분이 좋기까지 했다.
으음... 나란 놈도 미인 앞에서는 어지간히 한심하구나.
'그렇다고 이런 기회를 놓치기도 아까운데..'
어쩐지 문득 이 기회를 잘 살린다면 그녀와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 정 그러시면 저 다음에 미용실 갈 때 머리나 한번 잘라주세요."
"...네?"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
난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참아내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제가 그 미용실에 또 갈거거든요. 다음에 가면 누나가 한번 이쁘게 잘라주세요."
나는 은근슬쩍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누나' 라고 불러보았다.
비록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그것을 서로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은연 중에 그렇게 부른 것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 시도를 하는 데에는 마음 속으로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꺼낸 나의 말에 그녀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 말의 뜻을 곧 이해했는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요?"
"하하.. 그럼요."
마치 천사를 보는 듯이 황홀한 그 웃음이 이 상황에서도 내 넋을 사로잡았다.
"정말 그 정도로 될까요?"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뭘 그러세요. 충분해요."
그녀를 마주 대하는 내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뛰었지만 나는 용케도 내가 할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죠.. 죄송하기도 하고.."
"하하, 죄송하실 것 없어요."
"언제든지 와주세요. 제가 무료로 해드릴게요."
"네? 무료요..? 그러실 것 까지야.."
"그 정도도 안해드리면 죄송해서 어떡해요. 조만간 꼭 와주세요. 그리고 이거.."
그녀는 내게 조그마한 명함 하나를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은 나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엔 미용실의 이름이 크게 적혀있었다.
"그거.. 미용실에서 쓰는 제 명함이에요. 그거 보시고 다음에 오실때 꼭 저 찾아주세요."
나는 명함을 뒤로 뒤집어보았다.
그곳엔 그녀의 이름 세글자가 가지런히 쓰여있어 내 시선을 곧장 사로잡았다.
[ML 헤어라인 - 송유경]
송유경...
나는 마음 속으로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처음으로 알게 된 그녀의 이름 세글자를 가슴 깊이 새겨두려는 듯.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매혹적인 미소였다.
나는 이 아름다운 웃음을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알 수 없는 기대감이 가슴 속에서 벅차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어쩌면 오늘은 운 없는 하루가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행운의 기회일지도....
주말의 뜨거웠던 무더위는 다음날 월요일까지 조금도 풀리지 않고 계속되어 이른 아침 등교길에서부터
땀방울을 한 바가지로 쏟아내게 만들었다.
그와 더불어 주말의 밤이 지나가고 월요일의 아침해가 뜰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월요병의 우울함까지
덮쳐옴으로써 또 다시 한 주의 힘겨운 시작을 예고했다.
그 모든 것이 내 기분을 저기압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한 요소들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만은 어쩐지 어딘가 조금 달라진 기분이었다.
'그래, 평소대로라면 그랬을 테지만.'
원래 월요일 아침의 등교길 하면 축 쳐진 발걸음과 물 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뚱이가 어울리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오늘의 나는 월요일 아침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했다.
교실에 도착하고나서도 유쾌한 기분이 좀체 끊어지질 않아서 나답지 않게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왜일까?
'왜기는, 당연하잖아~'
굳이 궁금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교복 주머니를 뒤적거려 지갑을 꺼내 펼쳐들었다.
물론 지폐가 다발로 꽂혀있어서 기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지갑에는 지폐보다 더 소중한 것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음흐흐흐~"
조그마한 크기의 명함 한장.
손에 쥐어진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송유경.'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울 것만 같은 그녀의 이름.
잊을래야 절대 잊을 수 없을 만큼 수도없이 머릿 속에 새겨넣었지만 나는 이제 나도 모르게 거의 습관적으로
그녀의 명함을 수시로 꺼내들고 있었다.
"야, 그거 뭐냐? 왜 혼자 실실 쪼개고있어?"
"아, 아무 것도 아냐, 자식아."
실실 웃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했던지 옆의 친구 녀석이 고개를 흘끗 들이밀어 명함을 훔쳐보려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급히 그녀의 명함을 지갑 안에 쑤셔넣었다.
"싱거운 놈. 근데 그건 그렇고... 너 담임한테 뭐라고 할거냐?"
"...뭐가?"
"너 토요일에 야자 튀었잖아. 담탱이 그것 떔에 졸라 열받았어. 어쩔래?"
"....야자?"
아, 그래. 그러고보니... 나 토요일에 야자를 땡 쳤었지.
"담탱이 성격 잘 알면서 왜 그런 미친 짓 했냐? 너 야자 튀고나서 어딜 간거야?"
"....그런 게 있어. 임마."
곧 죽어도 미용실 가느라 야자 튀었다고는 말 못할 노릇이었다.
근데... 야자 튄 걸 담임이 알아챘단 말인가?
하긴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당당히 튀어나갔으니 못 알아챌 리도 없었다.
"담임이 알고있어?"
"당연하지. 울 담임이 어떤 담임인데."
"젠장할.. 책상 좀 치워놓지 그랬냐."
"농담하냐? 우리 담임은 대가리 수 일일이 세봐서 그거 안통해."
이것은 큰일이라면 정말 큰일이었다.
우리 반인 3 학년 3반의 담임은 올해 나이 서른 다섯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결혼을 못한 골수 노처녀인데
그 성격이 더럽다 못해 지랄같아서 한번 걸리면 빼도박도 못하고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호되게 갈구어대는
것으로 굉장히 유명한 것이다. 특히 야자 도주, 수업 무단이탈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성격이 하도 독해서 교사라는 직업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시집을 못 갔을 정도니 말 다한 것이다.
"아.. 젠장. 나 어쩌냐?"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냐. 그러게 겁도 없이 우리 담임 앞에서 야자를 왜 튀었어?
그냥 담임이 부르면 교무실 가서 그저 싹싹 빌기나 해. 괜히 개기면 더 깨지니까."
"으... 빌어먹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