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 E M O R I Z E - IF편 [N극 S극 #001] >
“아아, 잠깐만. 이대로 꺼지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그러면 너는, 결국 부담이 되기 싫어서 도망치는 건가?”
허준영의 한마디. 단 한 마디지만 이유정은 가슴에 묵직한 화살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도망이 아니라…….”
“뭐, 강해지려고 나간다, 그런 소리를 하려는 거겠지.”
“…….”
다시 한번 날아온 주먹에 입을 다문다.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평소 성격 같았으면 무작정 주먹을 날렸겠으나 안현에게 처참하게 패배한 직후다. 그보다 강자인 허준영에게 대들었다가 무슨 꼴이 날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신경 꺼.”
“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너 같은 원숭이라도 머셔너리 창립 멤버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너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들 주목하고 있을 거란 말이지.”
“…그럼 어쩌자고. 싸우기라도 하자는 거야?”
“하, 싸워? 너랑 내가?”
명백한 비웃음. 이유정은 순간적으로 마음이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뭔데! 대체 무슨 의도로 여기까지 와서 날 말리는 거야!”
“결국 떼쓰는 건가.”
“어쩌라고 나보고! 그래! 나 못 났어! 오빠믿고 깝치다가 온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꼴불견이라고! 이제 와서 나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
터져 나오는 울음. 반사적으로 눈가를 문질렀으나 이미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멈출 새가 없었다.
“흐어엉……. 그래서……. 조용히 꺼져준다고 하잖아…….”
“참 나. 어이가 없군.”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이제는 완연한 흐느낌으로 무너진다. 이유정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비틀거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허준영은 허리춤의 긴 검을 건드렸다가 고개를 젓고 품에서 작은 검을 꺼냈다.
“검 꺼내.”
“…….”
“질질 짜더니 귀까지 먹었나? 검 꺼내라고.”
“…뭐야?”
스산한 살기. 허준영에게서 음산한 기운이 나오자 이유정도 눈물이 뚝 멎었다. 그녀가 당황스런 기색으로 몸을 긴장시켰다.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고.”
“몰라서 묻나? 네 정신 머리가 썩어 빠져서 조금 고쳐주려고 한다.”
“…진짜 마지막까지 이런 식으로 하겠다 이거지?”
“그래도 그 멍청이한테 맞으면서 뭔가 깨달은 줄 알았더니 완전한 내 착각이었군.”
팔뚝만한 길이의 단검을 늘어뜨린 허준영이 한걸음 다가왔다. 이유정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면서 바지뒤춤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어 겨누었다. 악에 받쳐 있던 얼굴은 삽시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네가 성장하지 못하는 점. 그건 네가 현실에 안주하고 적당히 시간만 보내서다, 라고만 생각했다.”
“…….”
“근데 한가지가 더 빠졌어. 너는 이 홀플레인에서 가장 치명적인 병에 빠져있는 것과 동시에 이곳이 얼마나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곳인지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무슨 미친 개소리야.”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는 안다. 나도 한때는 그런 적이 있었으니.”
여전히 다가오는 발걸음. 반대로 이유정은 허준영이 다가오는 것과 같은 속도로 뒷걸음질 쳤다. 그의 기세에 밀리면서도 뭔가 두려운 얼굴로 허준영을 거부하고 있다. 마치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것처럼.
“솔직한 심정으로는 김수현에게도 조금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닥쳐.”
“남들은 꿈에도 생각 못할 안전한 울타리를 무제한으로 제공하고 있었으니.”
“그 입 닥쳐어어어!”
“하룻강아지가 귀신 무서운 줄을 모르지.”
이유정이 달려들었다. 악에 받친 얼굴로 허준영을 향해 크게 발을 디딘 이유정은 순간적으로 다가온 얼굴에 숨을 삼켰다.
“뭐……!”
퍼억—
분명 열 걸음은 달려야 닿을 거리였다. 하지만 허준영이 살짝 움직인다 싶을 즈음 그의 얼굴이 바로 지척까지 다와 있었다. 그리고 반응을 하기도 전에 가슴팍에 느껴지는 통증에 이유정은 속살없이 뒤로 밀려났다.
“커흡?!”
“상대와의 격차를 잘 알고 있다. 그 상태에서도 성질만 뻗쳐서 무작정 돌격해 오는 건 누가 알려준 거지?”
빠악—.
“악……!”
“김수현이 그딴 걸 가르쳤을 리는 없고.”
“크흑?!”
“검후인가? 아니, 검후는 누구를 가르치지 않지. 그러면 그림자 여왕? 그녀라면 더욱 효율적이고 영리한 싸움 법을 가르쳤을 거다.”
“아윽!”
순식간에 몸을 난타하는 충격에 이유정이 크게 비틀거렸다. 그런 그녀의 정강이가 강하게 걷어차여지고 이유정은 속절없이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렇다면 혼자 수련했을까? 아니지, 그렇기에는 또 너무 줏대가 없어.”
“…허윽, 허윽…….”
“너. 최근에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배워본 적이 있나?”
“…….”
이유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햇병아리 시절, 고연주에게 흠씬 두들겨 맞으며 배워온 걸 떠올리면 그 이후로 제대로 된 배움을 한 기억이 없다. 그나마 김수현과 함께 다닐 때는 칭찬받기 위해 노력이라도 했었으나 줄곧 베테랑들의 영입이 이어지면서 그녀는 아예 경쟁하는 걸 포기하 듯 살아왔다.
“없겠지. 아니, 없어. 최근에 내 기억에도 네가 땀 흘리는 걸 본 적이 없다.”
“…훈련은 계속 했어.”
“훈련? 그 작은 칼날 몇 번 휘두르고 땀 조금 흘리는 거? 그게 진정 훈련에 의한 땀이라고 할 수 있나?”
훈련에 의한 땀. 그건 단순히 생리적으로 작용하는 현상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속에 담겨있는 끈기와 노력, 열정. 그것이 있었느냐고 묻고 있는 거다.
“…했어.”
당연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유정은 마지막까지 남은 양심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끝까지 거짓말 하는군.”
“했어! 난 계속 노력 했어!”
“이제는 현실 부정이냐?”
“내 그간의 노력을 무시하지마아아!”
콰직.
마력을 품은 도움닫기에 바닥이 부서져 나간다. 폭발적으로 튕겨져 나간 이유정은 양손에 쥔 검을 교차시키며 허준영에게 내리그었다.
“또, 또 직선 공격을.”
물론 허준영은 한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 손쉽게 피해냈지만.
“고양이가 개처럼 달려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입 닥쳐어어어!”
“좀더 생각을 하고 달려들어라. 그 요망한 엉덩이라도 흔들란 말이다.”
“으아아아악!”
미칠 듯이 휘둘러지는 단검들. 붉은색 단검이 환영을 그리며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흔들린다. 반대편 손에 있는 검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은빛과 적빛의 잔영이 이유정의 몸을 감싸며 허공을 맹렬히 찢어발겼다.
“그나마 악에 받치니 쓸 만은 하군.”
“이익……!”
“하지만 그뿐이다.”
살짝이라도 스치면 조각나버릴 것 같은 맹렬한 기세를, 허준영은 단 한번의 발놀림으로 무마시켰다. 그가 팽이 돌듯 몸을 한바퀴 돌리자 순식간에 이유정과의 위치가 뒤바뀐다.
“…아, 윽!”
“그만한 동작을 남발했으니 후에 있을 반격은 조금은 생각 했어야지.”
순식간에 내려쳐진 허준영의 단검이 이유정의 붉은 단검을 날려버린다. 동시에 뻗어진 팔이 이유정의 나머지 팔을 붙잡았고 다시 돌아온 검으로 무방비의 목을 휘감는다.
“자, 뒤를 잡혔군. 이제 뭐를 할 거지?”
“…이익! 놔!”
완전히 제압을 당했으면서 이유정은 발버둥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다리를 뒤로 휘둘러 사내의 급소를 노리기까지. 물론 허준영은 가볍게 막아 큰일을 치르지는 않았으나 이유정의 막무가내에 질색한 얼굴이었다.
“끝까지 말을 듣지 않는다……. 이거지?”
“놔! 놔아앗!”
“후, 그래. 그렇다면 알게 해 줄 수 밖에.”
돌연 머리채를 휘어잡는 감각에 이유정의 눈이 부릅떠졌다. 순간 확 내려쳐지는 느낌과 함께 몸이 뒤집어졌다. 쾅, 하고 머리를 울리는 충격. 이유정은 저도 모르게 눈을 끔뻑거렸다.
“뭐, 뭐하는…….”
“그렇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 직접 알려줄 수밖에. 잘 들어. 한 번만 말한다.”
“…….”
“홀플레인에서 쓸데없는 오기는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른다. 죽이는 건 고사하고 죽고 싶을 정도로 고문을 당할 수도 있지. 여기서 너 같은 녀석들이 잡혔을 때 무얼 가장 많이 당할까.”
스산한 목소리에 이유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제야 자신이 허준영에게 완전히 붙잡혔음을 인지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겠지.”
“…….”
“많이 봐 왔잖아? 건방진 계집들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다 죽는지.”
그의 말대로였다. 대체적으로 여성들이 적에게 붙잡혔을 시 가장 혹독하게 당하는 건 강간이다. 그 뿐이랴? 강간은 기본에다가 일그러진 욕망으로 인한 성고문도 가지각색. 바늘이 달린 성도구를 삽입 당했다가 내장 채로 끄집어 당한 시신도 본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허준영에게 머리를 붙잡혀 눌리고 있는 상태였다. 엎드린 자세로 허준영을 향해 엉덩이를 내밀고 있는 형태. 꼼지락거리다가 그의 허벅지와 닿자 저도 모르게 몸이 굳는다.
“…나, 나한테 왜 이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어차피 네가 이 상태로 나가봐야 무슨 꼴을 당할 지는 뻔해. 실력은 없지,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어디 나대고 다니다가 부랑자 끄나풀이한테 속아서 납치당할 게 눈에 훤하다. 처참하게 당하고 당해서 걸레짝이 된 다음, 머셔너리에 거래 조건으로 내밀어진다. 아주 멋진 스토리가 그려져.”
“…….”
“어떻게 봐도 좋지 않은 내용이지? 그럴 바엔 망가져도 안에서 망가져라. 그러면서도 깨달으면 좋겠지만 깨닫지 못해도 상관없어. 넌 사용자로서는 하급이지만 여자로서는 나름 높게 쳐줄 수 있으니까.”
“…….”
허준영의 목소리에 이유정은 소름이 돋았다. 평소의 스산한 목소리와 같지만 다가오는 느낌이 매우 다르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몸이 떨려 미칠 것만 같았다.
“이, 이러지 마. 내, 내가 잘못했으니까…….”
“너무 늦었어. 네가 잘못했다고 빌면 부랑자들이 그래 알겠다 하고 보내줄 것 같나?”
“아, 아니야. 진짜로 내가 잘못했으니까……. 인정할 테니까.”
대답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뒷목을 우악스럽게 잡는 느낌이 드는 순간, 찌지직, 하고 상의가 찢겨져 나가는 걸 느꼈다.
“뭐, 뭐하는 거야?! 진짜 미쳤어?”
“…….”
있을 수 없다는 일에 당황한 이유정이 재빨리 옷을 여미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머리채를 잡고 있는 허준영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남은 옷가지들을 잡아 뜯는 손길에 이유정이 간절히 빌었다.
“자, 잘못 했다니까? 진짜 다시는 안 이런다고! 진짜 뭐하는 거야!”
“거참 말 많군.”
이어서 소리치려 했으나 이유정은 순간적으로 입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무언가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것이 자신이 방금까지 입고 있던 옷이란 걸 눈치채고는 전력을 다해 몸을 바둥거렸다.
“으으읍! 흐지마아아아! 즈리가아아아!”
그러다 돌연 우뚝 멈춘다. 문득 바지 뒤춤에 닿은 허준영의 손길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리 속으로 매우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흐, 흐지마!”
“…….”
“즤, 즈으다 자모해으니가!(진짜 잘못했으니까!)”
그녀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허준영의 손에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바지 뒤춤을 잡은 혀준영의 손이 마력을 일으키며 천조각을 무참히 찢어발겼다.
찌지직, 찌직.
“으읍?! 으으으으으읍!”
한순간에 천 조각이 되어버린 바지. 단 두번의 손짓에 속옷 차림이 되어버린 이유정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으흑흑…….”
이 처량한 현실에 절로 눈물이 흐른다. 안현에 이어 하승윤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신입에 진 뒤, 자신의 처지는 나락 끝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한테 또다시 즈려 밟히려 하고있다.
“뭐가 그리 슬프지?”
“…으흑흑……. 흐으윽…….”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고작 이거 가지고 우는 거냐.”
정작 그런 자신과 너무나도 대조되는 남자. 자신과 같은 인맥만 믿고 나대는 부류가 아닌, 철저한 실력파로 김수현에게 인정받아 입지를 다진 인물. 이유정의 마음이 갈갈이 찢겨 나갔다.
“나 참. 이래가지고 뭐 깨달을 수나 있으련지.”
“흑, 흑.”
“일어서.”
머리를 짓누르던 손길이 약해진다. 그럼에도 이유정은 몸을 바로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방금 바지가 벗겨지면서 그녀의 의지마저 완전히 찢겨나갔다.
“하, 이거 완전히…….”
햇병아리만도 못한 멘탈.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생각에 허준영은 한숨을 삼키면서도 이유정의 몸을 일으켰다. 괜히 가출하려는 이유정이 못미더워 충격요법으로 정신 좀 차리게 할 생각이었는데 생각 외로 크게 데미지를 입은 것 같아 허준영도 조금 당혹스러웠다.
“대충 이걸로 네 처지가 어떤지는 알 수 있겠지. 넌 그냥 조금 신체능력이 좋은 햇병아리 수준이다.”
“…….”
“나가서 악착같이 살아 크게 성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도 어엿 4년차다. 머셔너리는 너무 커졌고 우리를 시기하고 원망하는 자들도 있을 거다. 그들이 네 이탈을 눈치챈다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겠지.”
“…….”
“…그 입에 물고 있는 것 좀 뱉어라.”
멍하니 훌쩍거리며 천을 오물거리는 이유정의 모습에 허준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허준영이 손가락을 넣어 천조각을 빼내주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이쯤 되면 좀 알아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
“…나는 그럼 어떡해야 해?”
“상 좀 차려줬더니 이제는 밥까지 먹여 달라는 거냐…….”
이유정에게 물렸던 천조각을 내 던지려다가 허준영은 그것을 주섬주섬 한곳으로 모았다. 새벽녘이라 사람이 없지만 원래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다. 찢긴 옷가지가 널려 있다면 수상한 눈을 볼게 훤하다.
“나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난 현실을 알려 준거다. 앞으로의 선택은 너한테 달렸지.”
“…네가 다 막았잖아. 다 헛수고라고 했잖아…….”
“너 진짜…….”
“알려줘……. 제발…….”
시선이 또렷해진다 싶더니 다시금 물기가 차오른다. 허준영은 한숨 쉬었다. 괜한 오지랖 성격이 또 발동해서 귀찮은 짐을 진 기분.
‘하, 젠장.’
살포시 팔을 잡아오는 위태한 여자의 손길을 허준영은 떨쳐낼 수 없었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자.”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걸 눈치챈 허준영은 황급히 이유정의 손을 잡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유정은 현재 속옷만 걸친 차림. 정황상 그것을 눈 여겨 볼 새는 없었지만 함부로 누군가에게 보여줄 자태는 아니었기에.
그렇게 조급해진 허준영이 찾은 곳은 하나였다. 바로 자신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
본인의 방이었다.
*
“……돌겠군.”
허준영은 골치 아픈 얼굴로 이마를 매만졌다. 잠시 허공을 보다가 시선을 내린다. 그리고 자신의 침대 끝에 걸쳐 앉아있는 여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내려간 시선, 힘없이 흘러내린 적발. 마찬가지로 축 늘어진 어깨를 보니 꼭 비 맞은 강아지 같다. 물론 시선을 더 내려 위와는 정반대의 위용을 뽐내는 살덩이를 보면 또 아닌 것 같지만.
허준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는 이유정이었다. 아무리 성숙한 여인이라 할지언정 그에게는 한낯 말썽쟁이 꼬마에 불과했다.
“…이거라도 걸치고 있어라. 눈 둘 데가 없군.”
결국 참다못한 허준영이 옷장에서 아무거나 집어 던졌다. 흰색의 얇은 셔츠. 그걸 주섬주섬 받아 몸에 걸치는 이유정을 보며 허준영은 아차 싶었다.
‘하필이면 저 옷을…….’
속옷만 걸친 여인이 사내의 셔츠를 몸에 걸친다. 단추를 꼭꼭 잠긴 했지만 워낙에 큰 터라 가슴 쪽이 훤히 보인다. 더군다나 옷감이 얇아 그 너머로도 여체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뿐일까. 셔츠 아래로 뻗은 늘씬한 다리는 또 유독 돋보인다. 그래도 민첩을 기반으로 한 용병 클래스라 단련된 탄탄한 각선미에 허준영은 소리없이 침을 삼켰다. 그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내가 저 천둥벌거숭이한테 무슨…….’
하지만 아무리 버텨도 사내의 본능은 계속해서 시선을 잡아 끌었다. 이를 악물며 이유정의 다리를 흘끗 쳐다보던 허준영은 갑작스레 들려온 이유정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제발 도와줘.”
“…뭐, 뭐를?”
“…나 다시 날고 싶어.”
아련하게 쳐다보는 눈동자. 허준영은 순간 심장을 때리는 듯한 충격에 숨을 들이켰다. 그가 마력을 돌려 심장을 진정시켰다. 평소라면 금방 냉정이 되찾아지겠지만 오늘따라 그 속도가 현저히 느리다.
“…도와줘. 이걸 도와줄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왜, 왜 나한테 도와달라는 거냐. 널 도와줄 사람은 많아. 첩보 쪽으로는 임한나가, 암습 쪽으로는 그림자 여왕이 널…….”
“아냐, 당신이 아니면 안돼.”
사내를 뒤흔드는 말. 허준영은 혀를 깨물기까지 하면서 냉철을 유지했다. 그의 주먹이 보이지 않게 떨렸다.
“구체적으로 말해봐라. 왜 굳이 내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당신이 내게 손을 뻗어주었으니까.”
“…….”
“유일하게 날 생각해서 말해준 사람이잖아.”
허준영이 눈을 찌푸렸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단순히 자극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이유정은 이런 고분고분한 여인이 아니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내가 너를 생각해? 무슨 헛소리를.”
“…처음에는 단순히 시비인 줄 알았어. 하지만 당신 말에 틀린 점이 하나 없어서 무작정 화만 났었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옷이 찢겨지니까 알 것 같더라. 인정하지 않으면 진짜로 끝이라는 걸.”
“…….”
충격요법이 제대로 먹힌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허준영은 조금 불편한 기분이었다. 조금 자기가 너무 했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확실히 알겠어. 난 도움이 필요해. 나 혼자선 안돼. 당신의 도움이 있어야 난 다시 날수 있어.”
“…귀찮은 부탁 하지마. 난 항상 혼자였어. 누군가를 가르치는 건 못해.”
“그래도 괜찮아. 그냥 옆에서……. 혼만 내줘.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있으면 바로 다그쳐줘.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따끔하게.”
“…….”
진지한 이유정의 눈. 눈을 찌푸리며 시선을 마주하던 허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미치겠군. 괜한 오지랖을 부렸어.”
“…미안, 나 때문에…….”
“고분고분 사과하지 마라. 갑자기 사람이 바뀌니 어색해서 미쳐버릴 거 같으니까.”
이유는 바로 밝힐 순 없지만 미쳐버릴 것 같은 건 정말이었다. 해서 허준영은 이유정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손을 내저었다.
“일단은 돌아가. 나중에. 나중에 진정되면 다시 이야기하자.”
“…안돼. 이대로는 못 가.”
“뭐?”
그러나 이유정은 거절했다. 허준영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이대로 가면 안돼. 나도 장담 못해. 이대로 가면……. 지금 이 마음이 식으면 또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갈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뭐.”
“지금 확신을 줘.”
“너……. 너무 많이 바라는 거 아니냐?”
이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려 허준영은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혼란한 머리와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욕정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은 해볼 테니까 우선은 방으로 돌…….”
그 순간, 허준영은 쿵쾅거리던 심장에 꽝! 하고 무언가 쳐오는 걸 느꼈다. 조용이 다가온 이유정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너 이게 무슨…….”
“…내게 남은 건 이것밖에 없어.”
“…….”
“…당신이 말한 거. 내가 가진 건 여자라는 것밖에 없다는 거…….”
“떨어져.”
“……이거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써야겠어.”
지긋이 안겨오는 감각에 허준영의 감각이 곤두섰다. 얇은 옷감 너머로 여체의 부드러운 살덩이가 진득하게 느껴진다.
이유정이 말을 이었다.
“……내가 다시 날 수 있도록 도와줘.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거……. 모두 다 줄 테니까…….”
“…후회하지 마라.”
“안해.”
그 말을 끝으로 허준영이 몸을 돌렸다. 한 순간에 두 남녀가 뒤엉키며 침대 위로 쓰러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내의 관심. 그리고 처참한 자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여인의 간절한 마음. 그것이 마주하며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이의 두 남녀가 가장 진득한 곳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다.
“…….”
“…….”
그렇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오던 두 남녀의 입술이 서서히 맞닿았다.
< M E M O R I Z E - IF편 [N극 S극 #002] >
“음… 음…….”
조심스럽게,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시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서야 둘이 떨어졌다. 끈적하게 얽히는 시선.
“…으음.”
다시 허준영의 얼굴이 내려감에 따라 남녀의 입맞춤이 재개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내의 손이 여인의 옷깃에 닿는다. 살며시 옷을 잡아당기자 여인이 거부하지 않고 몸을 펼치며 그 행위에 호응한다.
“아…….”
사내가 준 옷이 다시 사내에 의해 벗겨진다. 하얀 셔츠가 열리며 여인의 흰 속살이 다시 드러난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살피지 못했지만 평소의 성격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게 순수한 백색의 속옷이 허준영의 눈에 들어왔다.
“…하아…….”
“…응.”
허준영의 그런 시선을 느낀 걸까? 이유정이 몸을 배배 꼬았다. 언제나 자신감 넘쳤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 그 모습에 허준영이 다시금 호흡을 들이켰다. 그의 아랫배로 미칠 듯이 뜨거운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다시 와서 묻지. 진정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그런 거 그만 물어. 내 입에서 그런 말 하게 하지마.”
이유정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수줍게 말을 잇는다.
“…지금만으로도 미칠 듯이 부끄러우니까.”
“…미치겠군 진짜로.”
그 말에 허준영은 더 이상 멈추지 않기로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여인의 브래지어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아.”
봉긋 솟은 여인의 가슴이 드디어 사내의 눈에 드러났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여인의 젖가슴. 분홍빛 유실이 부끄럽다는 듯 모습을 드러내자 허준영의 눈이 흔들렸다.
“너, 너무 보지마. 그, 그렇게 볼 만한 것도 아니니까…….”
“…….”
부끄러운 듯 팔로 몸을 가리는 이유정. 그 덕에 가슴이 모아지며 더욱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끝에서 흔들리는 유실에 허준영이 멍하니 그 자태를 바라보았다.
“…예쁘군.”
“…뭐?”
조용히 흘러간 소리. 이유정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가 생각하는 허준영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예쁘다. 평소에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 입만 가만히 있었다면.”
하지만 허준영은 본인이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순수하게 감탄하여 말했을 뿐. 그 말은 여인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기 충분했다.
‘뭐, 뭐라는 거야 갑자기……. 당황스럽게.’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할 말. 차가움의 대명사인 허준영에게 칭찬을 들으니 이유정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 쿵쾅거리는 심장 때문에 얼굴이 더욱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펴, 평소에는 혼내기만 했으면서…….”
“이런 세계다. 네가 정신차리지 않으면 너만 죽는 걸로 안 끝나. 팀원들에게도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스스로 인지해야지.”
“…….”
하긴, 그건 맞는 말이었다.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한 거지만 지금껏 자신이 해왔던 행색을 떠올리면 그동안 얼마나 안하무인으로 살아왔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건 인정해. 포기하니까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 내가 잘못 살아왔다는 게.”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겠지.”
“…오빠랑 당신 밑에서 다시 열심히 노력해야지. 안현… 은 조금 어려울지 몰라도 하승윤 그 계집애는 꼭 따라잡아야겠어.”
“아직도 복수를 생각하는 건가?”
“그게 아냐.”
이유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걔를 꺾어야 내가 다시 부활하는 데에 의의를 둘 것 같아서. 그… 연차 차이가 있는데도 완전히 졌으니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허준영도 알 것 같았다. 모든 일에도 시작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을 하승윤을 꺾음으로써 자신의 새로운 길의 시작을 확실하게 새겨 놓으려 하는 거겠지.
“…그건 좋은 생각이군. 아무래도 목표를 가지는 게 성장에 있어 더욱 좋은 자극이 되겠지.”
“그렇지? 그리고 진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걔는 꺾을 수 있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만 도와주면… 앗?”
허준영이 긍정하자 반색하던 이유정은 순간적으로 가슴에 느껴지는 감각에 깜짝 놀랐다. 아까부터 가슴을 응시하던 허준영이 입을 벌려 유실을 머금었기 때문이다.
“자, 잠깐만……. 아직 말하고 있는데…….”
“…솔직히 참기 힘들어서.”
“…….”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다시 유실을 머금는 허준영을 보며 이유정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와 이야기하느라 까먹었지만 그의 말 한마디에 다시금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피도 눈물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남자가 자신의 몸에 욕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인으로서 기쁨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렇게 피가 몰리자 감각이 극도로 민감해진다. 어느 샌가 온몸의 솜털이 서는 기분이 들더니 허준영의 뜨거운 숨결이 닿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떨었다.
“흐응, 읏…….”
“하아……. 음.”
뜨거운 입술로, 단단해진 유실을 누르듯 물던 허준영이 반대편 젖가슴으로 옮겨갔다. 조심스럽게 손으로 살무덤을 움켜쥐며 그 끝에 부푼 유실을 다시금 한입 베어 문다.
“으흥……. 뜨거워…….”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욕망을 드러내는. 허준영의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보던 이유정은 떨리는 몸을 간신히 억눌렀다. 가슴에서 전해지는 자극이 척추를 타고 하체로 흘러내린다. 아랫부근이 순간적으로 뜨거워지자 이유정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자, 잠시만……. 가슴…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런가. 나도 모르게 빠져 있었군.”
허준영이 아쉬운 듯 떨어지자 이유정은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숨을 돌릴 겸 눈을 감고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킨다. 하지만.
“아읏?!”
갑작스럽게 간질이는 감촉이 가슴을 타고 주르륵 내려간다. 화들짝 놀라 다시 눈을 뜬 이유정은 가슴에서부터 배쪽으로 내려간 허준영의 입술을 볼 수 있었다.
“자, 잠깐만…! 너, 너무 빠르잖아.”
“…이것도 충분히 천천히 하고 있는 건데.”
“…이게?”
허준영으로서는 폭발할 것 같은 심장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능숙하게 마인드컨트롤을 해내겠지만 이상하게 이유정에게 미칠듯한 흥분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불보를 꽉 쥐고 있는 그의 손이 그의 심증을 나타냈다.
“너 처음이잖아.”
“…무, 무슨 소리야?”
“…숨기지 않아도 다 보이는데?”
“…뭐, 뭔!”
느닷없는 정곡에 당황하던 이유정은 지긋이 바라봐 오는 시선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실직고했다.
“…그, 그렇게 티나?”
“뻔한 거 아닌가. 아무리 선머슴이라 해도 남자들한테 그렇게 서슴없이 행동하는 건 남자의 맛을 모르고 있다는 거지. 너나 다른 애들이나 처음인 애들은 눈에 훤하다.”
“…그, 그래? 혹시 나 말고 누가 또 처녀야?”
“안솔은 두말할 것도 없고 괴짜 연금술사도 마찬가지…. 아니, 나한테 무슨 말을 시키는 거냐.”
다시 행위를 시작하려는 허준영에게 이유정이 다급히 물었다.
“그, 그럼 그 재수탱이는?”
“…김한별 말이냐?”
“어, 어. 아, 아니 다른 생각은 아니고……. 그냥 그 재수탱이도 남자하고는 인연이 없을 것 같아서…….”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는 이유정의 모습에 허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라면 남들 속내까지 떠벌리진 않지만 상황이 이래서인지 묘하게 이유정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해서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짓을 해버렸다.
“글쎄…. 그 아이는 조금 특이하다.”
“…특이해? 뭐가?”
“불안정하다 해야하나. 김수현에게 특별히 부탁받아서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다. 애써 강한 척하며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속은 금방이라도 깨질 듯 불안했지. 아마 김수현이나 유독 잘 돌봐주는 정하연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부숴졌을 지도 모른다.”
“오, 오빠가 특별히 부탁했다고? 김한별 걔를?”
다시 이유정의 몸에 입을 갖다 대던 허준영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순간 마주치며 화들짝 놀라는 시선. 이유정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그 찰나의 순간을 허준영은 바로 꿰뚫어보았다. 그것은 분명 김수현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하, 이런 순간에도 김수현을 생각하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나한텐 그런 거 하나도…….”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너 때문이 아닌가.”
“…뭐?”
딱딱한 물음. 다시 바라봐 오는 이유정의 시선을 허준영이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각인시키 듯, 또박또박 말했다.
“김수현이 왜 남들 모르게 나한테 부탁했을까. 위태로운 김한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
“본인이 선택해 다시 영입한 사용자. 내심 클랜원과 잘 어울리며 기량을 발전하길 바랐겠지. 근데 염치없이 돌아왔다고 미움을 받는 것도 모자라 누군가는 분위기까지 조장하며 김한별을 묻으려 했지.”
“아, 아니 그건…….”
“뭐 그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만…. 그 장본인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몰래 나에게 부탁했다는 것만으로 김수현의 배려는 충분히 받은 게 아닌가.”
이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뭔가 말하고 싶어하는 듯 하면서도 선뜻 말이 나오지 않는다. 허준영이 차갑게 웃었다.
“뭐, 그런 이야기다. 그런 시선속에서도 결국 저 정도로 성장한 건 순전히 그 아이의 능력이다. 반면에 누구는 며칠 멸시 받았다고 몰래 가출이나 하려 했으니 쯧쯧.”
“…짜증나.”
“네가 물어본 것 아닌가. 그리고 바뀌기로 했다면서?”
“…….”
불만 어린 이유정의 모습을 본 허준영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마음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하지만 이런 모습이 진정한 이유정의 모습이라고 허준영은 생각했다. 이 모난 마음이 조금이라도 개선만 된다면……. 충분히 좋은 여자가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래도 그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듣기론 황금사자 치부 사건에서 김한별도 꽤나 연관이 되어있다 하더군. 유니콘의 반응을 보면 처녀성은 지킨 듯 보이는데 굳이 성기로만 성접대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
이유정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적대심이 있어도 같은 여성으로서의 연민이 생긴다고 해야할까?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허준영이 피식 웃었다.
“뭐, 어찌됐든 김한별 본인의 선택이다. 이제 와서 동정심을 가질 필요는 없어.”
“…그래도 조금 그러네. 괜히 물어 봤어.”
“남들의 치부를 듣는 건 좋은 일만은 아니지.”
허준영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여체에 새겨놓은 타액이 슬슬 말라가고 있다. 뜨거워진 몸이 식는 건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도 완전 망나니는 아니었군. 꼴 좋다고 웃을 줄 알았는데.”
“내, 내가 무슨 쓰레기야? 아무리 그래도 그런 쪽으로는 조금 그렇잖아…….”
“말은 잘하네. 좋아, 괜찮은 반응이다. 앞으로 이렇게만 해라.”
“…뭐야 그게.”
투정부리면서도, 약간은 풀어진 목소리에 허준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물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이유정은 볼 수 없었지만.
“앗…….”
다시 남자의 입술이 배에 닿았다. 마크를 새겨 넣듯, 입술로 살을 베어 문 허준영이 천천히 그 위치를 아래로 내렸다.
“아응… 자, 잠시만…….”
“더 이상 참는 건 무리라서. 이해해라.”
“아, 아니 그래도……. 응핫…….”
천천히 무방비한 아랫배로. 여체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남자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이유정이 몸을 꼼지락거렸으나 그뿐, 사내에 행동에는 거부하지 않는다.
“아으……. 진짜…….”
이유정 역시 사내의 세심한 애무에 다시 몸이 뜨거워지려 하고 있었다. 몸 안에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뜨거운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지고 있다. 이제 자신의 하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를 보며 미칠듯한 부끄러움이 들었지만 그녀는 거칠어지는 숨을 삼키며 사내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본다.
“쪽, 쪽, 쪽.”
“으응…. 흣……!”
소중한 것을 다루듯 부드럽고도 섬세한 키스. 그 행동에 이유정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허준영이……. 다른 누구도 아닌 허준영이 자신을 매우 사랑스럽게 대해주고 있다.
‘미, 미치겠네 진짜로…….’
배에 느껴지는 감촉도 감촉이지만 이 상황 자체가 그녀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입 밖으로 숨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예쁘군.”
그녀의 배 이곳 저곳을 확인하던 허준영이 앙증맞은 배꼽에 입을 맞추었다. 지금 욕정에 차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이유정의 몸매는 남자로서 좋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근접 능력 사용자인 만큼 군살 하나 없는 몸매에 탄탄하게 뻗어진 복부는 마치 아무도 걷지 않은 설원 같이 깨끗하다. 고연주나 임한나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에 돋보이진 않으나 이유정도 꽤나 보기 좋은 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선머슴 같아 여성같이 보이지 않던 여자. 서슴없이 다가와 몸을 비벼도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해 곤란스러움만 느꼈던 남자 사용자들. 그렇게 얼핏얼핏 눈에 들어왔던 그녀의 매끈한 복부나, 허벅지 안쪽을 떠올린 허준영은 심장이 폭발할 듯 뛰는 걸 느꼈다.
‘미치겠군. 단순히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느꼈던 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그동안 이유정에게 쏠렸던 신경이 그녀의 위태위태한 행동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그런 이유정의 얼핏 보이는 속살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기에 허준영은 함구했다. 지금은 끓어오르는 욕망을 풀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더 진행해도 되겠지?”
“…….”
그녀의 아랫배 이곳저곳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던 허준영이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아 반응이 없는 건 아닌데…….
“잠이라도 든…….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나?”
해서 위를 쳐다본 허준영은 진한 미소를 그렸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이유정이 턱을 든 채 파르르 떨고 있다. 사내의 애무에 여인이 말도 못할 만큼 느끼고 있다.
그녀의 반응을 보며 허준영은 더욱 진하게 입을 놀렸다. 복부에서 골반으로, 골반에서 허벅지 안쪽으로 입술이 옮겨가자 이유정이 허벅지를 꽉 닫았다.
“으흐응……. 흐읍……!”
“허리 들어.”
골반에 걸쳐진 순백의 팬티를 잡아 내린다. 허준영의 지긋한 말에 이유정은 그제야 허준영을 다시 쳐다보았다. 망설이는 눈. 하지만 그가 다시 골반에 키스를 퍼붓자 그녀는 몸을 비틀며 허리를 들었다.
스르륵.
이윽고 드디어 여인의 비부가 드러났다. 흠뻑 젖어 속옷과 맞닿아있는 부분이 조금은 늦게 떨어지자 여체가 파르르 떨었다. 길게 늘어지는 여인의 체액.
“보, 보지마…….”
그것이 부끄러운지 이유정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준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심히, 그 집요한 눈으로 이유정의 치부를 응시한다.
“…원래는 최대한 참아보려 했는데…….”
문득 허준영이 상체를 들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허준영을 이유정이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이윽고 자신에게 다시 다가오는 허준영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물러나려는데…….
스르륵, 스륵.
“안되겠다. 이 이상은 못 참겠어.”
사내가 바지를 풀어 내렸다. 뒤이어 속옷까지 끌어내린 남성이 여인의 깊숙이 몸을 밀착시켜온다.
“왜, 왜? 뭐, 뭘 하려고?”
“마지막으로 다시 묻는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결국 여기까지 오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을 잘 아는 허준영은 그렇기에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분위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의 생각을 알고 싶었기에 그는 자신의 발기한 남성까지 그녀에게 비비며 물었다.
이제는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이 단단해진 남성의 물건이 네 몸에 들어갈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시킨다.
“…….”
그러나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긍정의 뜻이 아니었다. 한없이 망설이는 표정. 수많은 생각을 하며 곤란해하는 이유정의 얼굴을 본 순간 허준영은 생각했다.
‘역시 안되는 건가.’
이미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고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이라면 없던 일로 할 수 있다. 이대로 몸을 돌리면 비록 홧김에 저지르긴 했어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이 선택은 이유정의 몫이나 그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허준영이 몸을 일으키려 하던 찰나였다.
“…해도 돼.”
“…뭐?”
이유정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떨어지려던 사내가 우뚝 멈춘다.
“…해도 된다고. 어차피 하려고 했던 거니까…….”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잠시 쓴 웃음을 지은 이유정이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떨리는 눈동자가 조금씩 확신에 차오른다.
“…….”
그 눈빛에 허준영은 점차 몸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하반신이, 여인의 움츠러든 하복부에 닿는다. 사내의 굳건한 남성이 여성의 허벅지를 찔렀다.
“아…….”
“아까부터 이랬다.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아으……. 그, 그런 말 좀 하지마. 이, 이상하단 말이야.”
몸을 배배 꼬는 이유정.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와중에도 허준영이 허벅지를 잡아 벌리자 천천히 다리를 벌린다.
“…완전히 젖었는데. 딱히 전희는 필요 없겠어.”
“아, 진짜…! 하지 말라니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야. …너도 첫 경험이니 확실하게 봐 두라는 거다.”
허준영의 진지한 목소리. 그 말에 이유정도 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결합이 될 부분을 확인한 순간.
“…뭐.”
이유정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무방비 상태의 자신의 음부는 그렇다 치고 그 앞에서 껄떡거리며 화를 뿜어내고 있는 남성을 보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린다.
“뭐, 뭐야……. 왜 이렇게 화나 있어?”
“다 너 때문이 아닌가. 네가 이렇게 만들었다.”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그렇게 선… 거야?”
“계속 말했잖나. 예쁘다고. 너는 확실히 예쁘다.”
진득하게 전해져 오는 진심에 이유정은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어떻게 해야할까? 갈팡질팡 혼돈에 빠진 이유정이 양 볼을 손으로 식히려는데 허준영이 다가왔다.
“으, 으응……!”
당황한 이유정의 입술을 그대로 덮는다. 사내의 부드러운 키스. 저도 모르게 그 행위에 호응하던 이유정이 다시금 눈을 부릅떴다. 벌어진 입술을 통해 사내의 혀가 기습적으로 침투했기 때문이다.
“으앙… 앗……. 흐응…….”
“하아…….”
입을 통해 사내의 뜨거운 숨을 넘겨받는 이유정은 머리에 차오른 열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내의 노련한 혀놀림에 놀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이상하게도 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뜨, 뜨거워…….’
답답하면서도 뜨거운 숨결에 몸이 녹아간다. 자신의 몸을 덮는 사내의 무게감이 아늑하여 이대로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응, 응… 흐응……!”
그렇게 여체가 사내에 의해 빠져들 즈음, 허준영이 천천히 손을 옮겨 이유정의 비부에 가져갔다. 사내의 손이 닿자 이유정은 움찔 떨었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일렁이는 눈은 두려워하면서도 사내의 손길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 이미 흠뻑 젖은 살을 천천히 달래듯 훑자 여체가 팔딱팔딱 튀어 올랐다. 그것을 달래듯 잠시 멈췄다가 진정이 될 즈음 다시 움직인다. 그것이 몇 번 반복되자 여체의 반응이 조금씩 진정되어간다.
“흐응, 흣! 흐으응……!”
물론 쾌감에 흐느끼는 건 여전하지만……. 처음처럼 깜짝 놀라는 듯한 기색은 없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후아, 후아…. 어?”
허준영이 입술을 떼자 이유정은 본능적으로 사내를 따라가기 위해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행태를 깨달은 건지 당황하며 눈을 굴린다.
“아으으……. 미치겠네 진짜로…….”
허준영이 피식 웃으며 보자 괜스레 오는 민망함에 이유정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운지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던 허준영은 잠시 멈춘 손을 다시 움직였다. 찔꺽, 찔꺽. 흠뻑 젖은 여인의 비부가 음란한 소리를 냈다.
“흐으… 흐으으…. 흐읏…!?”
그 소리가 자극적인지 이유정이 신음을 참으며 몸을 비틀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허벅지에 매력적인 근육이 돋아난다. 건강미가 넘쳐나는, 그런 여인의 육체를 감상하던 허준영은 일순간 그녀의 비부를 손가락으로 좌우로 벌렸다.
“아읏……!?”
울컥, 울컥. 쏟아져 나오는 꿀물들. 안에 찬 열기가 잔뜩 쏟아져 나오는 것을 확인한 허준영은 이내 마음을 먹었다. 그가 천천히 여인의 다리를 벌리며 허리를 진입시켰다.
“…아직도 김수현을 사랑하고 있겠지.”
“가, 갑자기 그 이야기는 또 왜…….”
“상황이 갑작스럽게 이렇게 됐으니까…….”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내려다보는 허준영. 그의 얼굴에서 쓸쓸함을 본 이유정이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이유정의 손길에 놀랐는지 허준영도 눈을 살짝 치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 일을 이후로 우리의 관계는 크게 바뀌어 있을 거다.”
“…….”
“네가 나를 피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원래 사람이란 그런 동물이야.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실수를 저지르는 그런 동물.”
사내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발기한 남근을 여인의 질 입구를 찾아 그곳에 맞춰 놓는다.
“읏.”
“그러니까 미리 말한다. 굳이 이 일에 연연해 하지마. 네가 당장 다시 김수현을 바라봐도 상관없다. 하지만 지금은.”
천천히.
“으앗…….”
“지금은 오로지 나만 바라봐라.”
“으으읏……!”
천천히 사내의 허리가 앞으로 전진한다. 그런 사내의 쓸쓸한 말 때문일까, 아니면 안을 침투하는 남근의 존재 때문일까. 이유정은 이를 악물며 허준영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완전히 밀착할 정도로 힘껏.
“하아악…! 하윽…….”
“윽.”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밀착했다. 그렇게.
서로 완전히 다른 두 남녀가 완전히 결합했다.
< M E M O R I Z E - IF편 [N극 S극 #003 完] >
찔꺽, 찔꺽, 찔꺽.
“흐응, 흥……. 응……!”
천천히 움직이는 사내. 질척해진 살이 엉겨오는 소리가 방안에 조용히 울렸다.
여인이 파르르 떨었다. 사내를 꽉 끌어안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괜찮나? 안은 잘 풀려있는 거 같은데.”
“…응. 조금 버겁긴 한데 생각보다 안 아파.”
“…그래.”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 이유정은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가슴이 찡~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차가운 도시남 허준영이 자신을 특별하게 대해준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흐응. 그러니까 조금 빨리 해도 돼…….”
“아니, 지금은 좀더 널 느끼고 싶다.”
“…마음대로 해.”
다시금 움직이는 사내. 부드럽고 섬세한 움직임에 여체가 파르르 떨었다. 그렇게 천천히, 여인이 자신의 몸에 익숙해 지도록 자기에게 맞는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한다.
“처녀라고 하기 무색할 정도로 잘 엉키는데. 혹시 연습이라도 했었나?”
“뭐, 뭘 물어보는 거야, 갑자기?”
“정곡인가. 뭐 수치스러울 수도 있긴 하겠지만 조금 기뻐서.”
“…기뻐?”
“그래. 한편으로는 조금 씁쓸하기도 하고.”
귀가 마주 닿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미남의 시선을 마주한 이유정이 대답을 촉구하 듯 바라본다.
“원래는 김수현의 것이었을 테지. 김수현을 상상하면서 준비한 걸 가로챈 느낌이다.”
“…갑자기 왜 또 오빠 얘기야.”
“…그냥 그렇단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그만 하기로 하지. 내가 너무 무심했어.”
“…알긴 아나 보네. 당신이 그 얘기 할 때마다 자꾸 오빠 생각나니까 지금은 그런 얘긴 하지마.”
“알았다.”
그렇게 천천히 사내와 여인의 입술이 다시 겹쳤다. 서로의 입술을 맛보듯 부드럽게 서로의 입술을 흡입하면서 허준영의 허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응, 흥……. 흐응.”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넘어오는 여인의 숨결을 고스란히 삼킨다. 부드럽게 조여오는 살무덤을 느끼며 허준영이 깊숙하게 남근을 찔러 넣었다. 잔뜩 긴장한 살들이 단단하게 굳으며 사내를 받아들인다. 얕은 곳을 반복적으로 찌르던 남근이 아직 적응하지 못한 곳을 침투하기 시작했다.
“하앙. 흥, 흣……!”
“힘들더라도 허리에 힘 빼는게 좋을 거다. 그 편이 덜 아플 테니까.”
“으, 응. 알았어.”
여인의 허리가 움찔하며 천천히 기운을 뺀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허리가 편안하게 펴지며 남성의 손이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여인의 호흡이 안정되는 걸 느낀 혀준영이 재차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 항, 흐응, 흐앙!”
“헉, 헉, 헉.”
점차 빨라지는 움직임. 사내의 허리가 부딪혀 올 때마다 여체가 파르르 떨었다. 자신의 안을 헤집는 힘찬 남성을 느낀 이유정이 몸을 움츠리며 허덕였다.
“아응, 흐응! 내가……. 내가 준영 오빠한테……! 준영 오빠한테에에……!”
“헉, 헉, 헉!”
“준영 오빠한테 내가 따먹히고 있어……! 하앙, 하악!”
“너…….”
퍽퍽, 여인의 살을 때리던 남성이 천천히 속도를 늦춘다. 허준영의 어이없는 시선을 느낀 이유정이 살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왜, 왜……? 갑자기 멈추지 마…….”
“너 평소에도 이런 생각하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흠칫 놀란 이유정이 다시 허준영의 시선을 받았다. 하지만 3초도 가지 않아 다시 슬그머니 시선을 회피한다. 한껏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던 허준영이 피식 웃었다.
“나, 참. 이거 앙칼진 고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음란한 고양이였어. 용케도 아직 아무도 채가지 않았군.”
“사,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이유정이 발끈했다. 그에 따라 힘껏 조이는 살에 허준영은 절로 몸을 떨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러면 방금 그 모습은 뭐지? 처녀가 할 말은 아니었다만?”
“그, 그게 아니라…….”
고개를 숙인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 그것을 느끼던 허준영은 가만히 이유정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어 말이 들려오지 않자 그가 허리를 몇 번 쑤셔 넣었다. 화들짝 놀란 이유정이 얼른 말했다.
“아, 악! 아니, 그게 아니라 상대가 당신이니까……!”
“나라서? 내가 뭐라고?”
“…다, 당신의 평소 이미지를 생각해봐!”
거의 발악하 듯 외친 이유정의 말에 허준영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대충 이유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미지. 누구한테나 쌀쌀맞은 행동을 취하는, 이유정이 말했던 대로 차도남 같은 스타일이다. 그런 이가 마음을 풀고 부드럽게 대해준다는 사실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거겠지.
“근데 그게 대답이 되나? 내가 이런 놈인 거야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이렇다고 해서 네가 그런 음탕한 말을 내뱉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데?”
“…으으, 진짜. 음탕하다는 말 좀 하지마…….”
자기가 한 행동이 부끄러운지 이유정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갈 듯이 작아졌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은 허준영이 다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찔꺽, 찔꺽, 찔꺽.
“하응, 흥……. 가, 갑자기 움직이는게 어딨어…….”
“그냥. 가만히 있기 힘들어서.”
“…또 그런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네가 너무 예뻐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
이유정은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였다. 하지만 그녀의 심리를 허준영은 즉각적으로 보고받는 중이었다. 바로 연결된 아랫부분 쪽에서.
“자 말해봐. 왜 그런 말을 했지?”
“…으응, 흥, 흑! 치, 치사해! 움직이면서 그런 걸 물어보면……. 하윽?!”
“대답 안하면 계속 이렇게 괴롭힌다?”
“아으, 진짜……. 마, 말 할 테니까!”
점차 빨라지는 허리. 그러면서도 얕은 곳만 건드리는 얄궂은 움직임에 이유정이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준영은 허리를 멈추지 않았다. 아래쪽에서 쉴새 없이 조여오는 살을 느끼며 그녀가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안을 찔러 넣는다.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 우리 귀여운 암고양이님께서?”
“아으……. 그냥……. 그냥 오빠가, 흑?! 오, 오빠가 나랑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
“그것만으로 그렇게 음탕해진건가?”
“오, 오빠도 잘 생겼으니까……! 수현 오빠랑은 다른 타입이잖아……. 그거 알아? 오빠도 클랜에서 꽤 인기 많은 거?”
조금 쌀쌀맞긴 해도 허준영 정도면 괜찮은 남자다. 겉으로는 무심한 척 해도 뒤로는 잘 챙겨주는 그런 이미지였으니 인기가 없을 리가 없었다. 물론 정작 본인은 잘 모르는 듯 했지만.
“…그런 남자가 나 좋다고 하니까……. 여자로서 조금 기쁘다고 해야하나?”
조금 흐뭇한 얼굴로 미소 짓는 이유정을 보며 허준영은 문득 장난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비죽 웃으며 말했다.
“난 좋다고 한 적 없는데?”
“뭐, 뭐? 나보고 예쁘다며?”
“예쁜 걸 예쁘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나? 말마따나 그림자 여왕이나 검후, 임한나, 정하연도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 그렇다고 내가 그녀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뭐, 뭐야?”
다시 바라봐 오는 이유정의 시선. 화가 깃든 눈빛이지만 크게 요동치는 것이 심하게 상처받은 모양이다.
“…놔, 나 갈래.”
“간다? 나한테 도와달라고 한 거 아니었나?”
“…….”
홱, 하고 고개를 돌리는 이유정. 눈을 힘껏 감더니 덜덜 떨리는 입으로 내뱉었다.
“…빨리 끝내.”
“화났나?”
“아 씨! 빨리 끝내라고!”
윽박지르는 이유정을 보며 허준영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더 놀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이 이상했다간 정말로 울 것 같았기에 그만하기로 했다.
“삐진 건가? 장난 조금 쳤다고 이러면 조금 미안한데?”
“시끄러우니까 빨리 끝내기나 해! 그리고 약속 지켜. 나 훈련 도와주는 거. 속성으로 빼먹을 테니까.”
“싫은데?”
“뭐야?”
아까 고개를 돌렸던 것과 같이 다시 홱, 하고 허준영을 노려본다. 여유 있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괜히 약 올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는데…….
“이미 따먹었으면서 사기까지 치려고? 내가 이대로 넘어갈 거……. 악!”
“그 말이 아니라.”
허준영이 허리를 튕기자 이유정이 움찔 떨었다. 방금 그 장난으로 마음이 조금 식긴 했으나 그녀의 몸은 아직 민감해질 대로 민감해진 상태였다.
저도 모르게 들린 턱을 억지로 내린 이유정이 분노에 찬 눈으로 허준영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허준영이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다가갔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빨리 끝내기 싫다고.”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조금 화가 나긴 했으나 방금까지 애틋한 감정을 느꼈던 사내다. 조금만 움직이면 입술이 닿는 거리에서 이유정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걸 느꼈다. 입가를 간질이는 사내의 숨결에, 혹여라도 입술이 닿을까 쉴새 없이 입술을 꼼지락거린다.
“이대로. 하루 종일 이대로 널 가질 거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를 하룻동안 따먹겠다고?”
“말했잖나. 장난이라고.”
피식 웃는 모습에 이유정은 심장이 펑, 하고 터지는 기분이었다. 허용할 수 없이 번진 감정에 취해 멍하니 사내를 바라본다.
“널 좋아하는 것 같다. 이유정.”
조용히 내뱉어진 사내의 고백. 파르르 떨리는 이유정 눈가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여인을 똑바로 마주하던 허준영이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흐응, 흥…….”
철썩, 철썩, 철썩.
그것을 시작으로 다시금 사내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사내를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여자 역시 사내의 행위에 호응했다. 이유정의 팔다리가 허준영의 목과 허리를 뱀처럼 감싸고 열렬히 끌어당긴다. 사내의 양물이 흠뻑 젖은 여체의 안을 반복적으로 꿰뚫었다.
“하응, 하앙, 하앙……. 오빠……. 준영 오빠……!”
“이유정……. 이유정……. 이유정……!”
서로를 애타게 부르며 남녀가 열렬히 뒤얽힌다. 침대가 완전히 요동칠 정도로 격하게 서로를 갈망하던 두 남녀가 절정에 이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좀더……. 좀더 불러줘. 내 이름…….”
“준영 오빠……. 준영 오빠……. 오빠아아!”
“큭!”
헐떡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허준영은 모든 피가 아래로 쏠리는 걸 느꼈다. 단순히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허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에 휘몰아쳤다. 그 여파가 슬슬 나타나려 했다. 여체는 이미 사내가 주는 쾌락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
“…유정아. 쌀 것 같은데…….”
“흐응, 흥, 흐응! 나, 나도 불러줘!”
허준영의 뒷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이유정의 다리가 더욱 힘껏 허리를 조였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욕망을 억지로 누르면서 허준영이 다시 속삭였다.
“…이유정. 나 쌀 것 같다고. 다리 좀 풀면…….”
“그거 말고……! 이유정 말고 유정이라 불러줘! 하응!”
“너……! 윽!”
허리를 바스러뜨릴 기세로 조이는 다리에 남근을 문 여인의 속살도 미칠 듯이 조여온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시점에서 허준영은 그 공세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의 등이 활처럼 굽어졌다. 깊이 박아 넣은 허리가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큭!”
“흐응! 흐으읏! 흐앗!”
뷰륙, 뷰륵, 뷰르륵.”
파르르 떨리는 사내와 그를 힘껏 끌어안고 마찬가지로 경련하는 여체. 기나긴 사정시간이 끝나고 사내가 여인의 위로 천천히 쓰러졌다.
“하아, 하아……. 너, 진짜…….”
“흐으으……. 흐으…….”
지친 사내의 음성에도 여인은 반응하지 않았다. 기나긴 절정은 남자만이 맞은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사내에게 안겨 절정을 맞은 이유정은 풀린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하, 안에 할 생각은 없었는데.”
“…흐으.”
“왜 멈추지 않은 거냐.”
조용히 묻는 음성에 그제야 이유정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여전히 사내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이유정은 그 손을 풀지 않았다.
“…그냥.”
“…뭐냐 그게.”
“그냥 그러고 싶어서…….”
사내의 행위를 받아낼 때의 온 힘을 다한 게 아닌, 사랑하는 사람을 안아주는 다정한 손길로 이유정은 허준영의 등을 쓰다듬었다. 허준영이 천천히 상체를 들어 이유정과 다시 시선을 맞췄다.
“…괜찮은 건가?”
여러가지를 묻는 물음. 아직까지 김수현에 대한 마음을 염려하는 물음에 이유정은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똑똑하면서도 여자의 마음은 하나도 모른다.
“글쎄. 솔직히 조금 복잡하긴 한데 생각보다 크게 와 닿지는 않네.”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 오빠 말이야.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잘 지워졌다 싶어서.”
조금은 허탈하다는 듯한 말투에 허준영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유정이 여전히 미소 짓고 손을 당겨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이해 못한 얼굴이네. 뭐, 그렇게 평생 이해 못하고 있어라.”
“…뭐라고? 너……!”
순간적으로 짐작 가는 생각에 상체를 들어 올리려던 허준영은 다시금 조여오는 여체의 다리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도발적으로 웃는 이유정을 보며 허준영의 얼굴이 다시 멍해졌다.
“더 안할 거야? 아까는 하루 종일 붙잡아 놓고 있는다면서?”
“…….”
“아래는 벌써 커진 것 같은데?”
방금까지 처녀였던 풋내기의 도발. 그 모습에 허준영은 다시 사내로서 열기가 솟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말마따나 다시 단단해진 물건에 붙어있는 살결을 느낀다. 그가 허리를 툭 튕기자 이유정의 허리가 펄떡 솟았다.
“하윽?!”
“한번 하더니 건방진 성격이 다시 돌아왔군.”
“자, 잠깐만……! 모, 몸이 좀 이상한데?”
절정을 한번 맞이한 몸. 금방 가라앉는 남성과는 다르게 그 여운이 길게 이어지는 여체의 반응에 이유정은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하지만 허준영은 한번 문 먹잇감을 놓아주는 사내가 아니었다. 이유정이 가장 민감해 했던 부위를 쿡쿡 찌르면서 그의 전매특허인 비죽 웃는 미소를 지어 보인다.
“처음에는 얌전히 가르치려 했는데 말이야.”
“자, 잠깐만! 잠깐마아아안!”
“확실히 새겨줘야겠군. 누가 주인님인지 말이야.”
“제, 제발! 잠시만 멈춰줘……! 아으으윽?!”
점차 빨라지는 사내의 움직임에 이유정의 몸이 튕겨 올랐다. 활처럼 휘어진 여체가 사내의 꼬치에 꿰뚫려 바르르 떤다. 그런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녀린 여체를 힘껏 끌어안은 사내가 허리를 격하게 꽂아 넣었다.
퍽, 퍽, 퍽, 퍽.
“아아악! 아윽?! 흐아아악?!”
“아주 콧대를 눌러주지.”
사내의 당당한 포부. 그 목소리를 들은 이유정은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
다음날 아침. 오늘도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세안을 마친 안솔은 복도를 거닐다가 눈을 번쩍 떴다. 복도 저 끝으로 아는 사람이 보였기 때문이다.
“유정 언니! 준영이 오…… 빠?”
반가움에 단숨에 달려가려던 안솔이 문득 멈췄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돼서. 이유정과 허준영. 둘다 머셔너리에 어느 정도 입지를 가진 사용자지만 왠지 모르게 둘이 함께 있는게 이상한 듯한 느낌.
‘그러고 보니까 두분 다 어제 휴가를 내셨었지?’
이유정이야 하승윤에게 깨진 뒤로 두문불출 하듯 모습을 감췄으니 크게 이상할 것이 없는데 허준영의 휴가는 조금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얼굴을 비추는 남자가 허준영이 아니던가?
그런 상태에서 저 두 남녀가 같이 있다? 안솔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뭔가가 있음을.
“어? 안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집요하게 바라봐 오는 시선을 느낀 건지 이유정이 먼저 안솔에게 손을 흔들었다. 움찔 떤 안솔도 그제야 후다닥 그쪽으로 다가갔다.
“언니? 몸은 괜찮아요? 어제 휴가 내셨던데…….”
“응? 아, 뭐. 하루 푹 쉬니까 완전히 괜찮아 졌는데? 너는 웬일이야? 이른 아침부터 나와있고.”
“…네? 아, 오늘 오빠랑 거리에 나가보기로 해서요.”
하승윤에게 진 뒤로 이유정은 베일 듯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금방 신경질이 날아올 거라 생각해 몸을 움츠리고 있었는데 온화한 말투가 나오자 안솔은 속으로 갸웃했다.
“그러냐? 그래, 그럼 잘 다녀오고. 오빠, 빨리 훈련하러 가자.”
“네? 아, 네…….”
아직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유정이 허준영의 팔을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녀에게 이끌리면서도 허준영은 안솔의 머리를 툭 쳤다.
“복덩이. 한눈 팔지 말고 오빠 말 잘들어라.”
“마, 말하지 않아도 잘 듣거든요!”
여전히 짓궂은 장난. 그럼에도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질 않는다.
그렇게 두 남녀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안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기분 탓이겠지, 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문득 그녀의 시선에 묘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잠깐만.”
“응? 왜?”
“먼지가 묻어 있군.”
이유정을 멈춰 세운 허준영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유정의 머리에 묻어있는 먼지를 조심스레 떼어내어 털어주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손길을 받는 이유정의 모습이 매우 이상하다.
“…응. 간지러워.”
“잠시만.”
눈을 감은 채 사내의 손길이 기분 좋다는 듯 미소 짓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마주 미소 짓고 있는 허준영의 모습까지 확인한 안솔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뭐, 뭐, 뭐……!”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겨 완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안솔의 경악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