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2)

모친에 관한 추억담들 1.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인터넷에 존재하는 어느 비공개 사이트를 우연히 알게 된 후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먼저 말씀 드리자면 놀랍게도 이 사이트를 만든 사람은 바로 제 친아버지였습니다. 처음엔 저도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이므로 글이 길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대부분의 글이 일인칭으로 쓰여 있어 글에서 말하는 ‘나’가 누구를 말하는지 헛갈릴 수도 있겠습니다. 가능하면 글 단락마다 제목을 붙이고, 대명사 뒤에 괄호를 만들어 누구인지 닉네임을 넣어 혼돈을 줄여 보겠습니다만, 읽는 분의 주의가 필요할 겁니다. 닉네임은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 임의로 만든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닉네임은 me, 제 어머니는 mom, 제 아버지 닉네임은 실제 아버지가 사용하셨던 닉네임 tantan, 제 친할머니 닉네임은 grandmom, 그리고 기타 인물의 닉네임은 그들이 사용한 그대로 쓰겠습니다.

우선 제(닉네임: me) 얘기로부터 시작 하겠습니다. 

제 아버지는 늦게 결혼을 하셔서 어머니와 나이 차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나중에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아버지는 그때 이미 은퇴하셨습니다.) 서울에서 살았으나, 제가 대학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고향집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와 사시던 곳이죠. 서울에서 많이 떨어진 곳입니다. 그곳은 읍내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곳으로 제법 큰 정원을 가진 전원주택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경제적으로 비교적 윤택한 편이어서, 그곳에서 소득을 위해 경작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취미 혹은 소일꺼리, 그러나 단순히 취미 생활이라고 치기에는 아버지는 너무 열심히 자기 밭을 일구셨습니다. 아버지는 진짜 농사꾼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홀로 밭에서 그리고 산에서 보내시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연세에 비해 매우 건강한 분이셨는데도, 그곳으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사지를 못 쓰게 되셨습니다. 뇌졸중, 소위 말하는 중풍이 생기신 겁니다. 몸도 못 쓰는 상태에서 의식 상태도 나빠졌습니다. 뇌 손상으로 인한 치매 때문인지 생각과 행동이 어린애 같아진 겁니다. 제대 직전에 그렇게 되어 복학하기 전까지 저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를 돕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처음 아버지가 쓰러지셨을 때보다는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힘들어 하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당분간 집에 머물겠다는 사실에 한층 더 안도하는 듯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친구, 친척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관심에 지쳐, 어떻게 지내느냐는 주변의 지나친 관심에 일상 모임조차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과잉된 친절을 직접 거절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돌보는 일보다 그런 일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20세나 연하였고, 또 결혼하자마자 저를 낳아 저와 어머니와 나이 차이가 겨우 20여년이란 사실을 그때까지 별로 의식하지 않으며 살아 왔습니다. 친구들의 어머니보다 제 어머니는 훨씬 젊다 것은 알았지만, 또한 제 아버지는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으니까요. 사춘기 충동으로 매일 밤 잠 들기 전에 30대 후반의 어머니 몸을 마음속으로 상상하며 수음을 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이 저만의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 올 때 까지 저에게 어머니는 남편 병 수발을 해야 하는 그저 가여운 여자로만 보였던 것이죠. 아버지의 컴퓨터를 내 방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그녀의 성적 매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겁니다. 

집은 이층집으로 아버지는 이층 큰 방에 모시고, 나머지 두 개의 작은 방을 어머니와 저 하나씩 사용하였습니다. 일층에는 주방 시설과 손님이 오면 사용하는 그렇게 작지 않은 방 하나, 욕실 그리고 거실이 있었습니다. 거실에 아버지가 사용 하시던 컴퓨터가 있었는데, 당연히 제가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밤 늦게 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저를 보고 어머니는 컴퓨터를 제 방으로 가져가서 쓰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컴퓨터를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거든요. 당연히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용 하시던 컴퓨터 안에 특별한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건강 하실 때 아버지가 컴퓨터로 무엇을 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사실 제 아버지 연세의 분들이 인터넷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거든요. 이것저것 컴을 뒤져보다가 아버지의 즐겨 찾기에 등록 되어 있는 한 사이트가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만 접속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왠지 그곳이 평범한 사이트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긴 했지만(기숙사 생활하면서 꽤 많은 성인사이트를 접속했기 때문에), 막상 그곳에 들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집에 돌아 와서 한 달 정도가 지난 후였습니다. 아버지의 비밀번호를 처음에는 짐작도 못했었으나, 어머니 대신 아버지 통장에서 출금하면서 알게 된 통장 비밀 번호와 아버지의 성함을 조합하자 닫혀 있던 그 사이트가 맥없이 열리더군요. 그리고는 그 사이트 첫 장에 쓰인 그 사이트의 규칙을 보고는 저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의 모친과 성관계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비밀리에 각자의 경험담을 교환하고 있었습니다.

이 집단의 규칙은 홈페이지 상단에 적혀 있었습니다.

1. 모든 이야기는 진실해야합니다. 

2. 투고자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이름은 변경해야 합니다. 

3. 모든 이야기는 자신과 자신의 모친에 대한 얘기여야 합니다.

4. 회원은 회원 추천에 의해서만 가입한다. 

회원 투고란의 첫 이야기는 아버지가 직접 투고한 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단단(tantan)"이란 닉네임으로 칭했지만 할머니의 이름은 실명을 사용하여 그 모임의 두 번째 규칙을 위반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이 그가 위반한 유일한 규칙이었습니다.

아래의 이야기가 첫 번째 얘기, 저의 아버지가 그 사이트에 투고한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아래 얘기에서 ‘나’ 혹은 ‘저’는 제 아버지(단단; tantan)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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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 닉네임은 "단단, tanatan"입니다. 제 진짜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나이가 많습니다. 지금은 현직에서 은퇴한 남자입니다. 제가 이 사이트를 직접 만들었고 앞으로 이 사이트를 운영하려고 합니다. 

먼저 제 경험을 여러분들에게 먼저 말 씀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앞으로 하는 얘기는 오래 전에(1960년대) 실제 있었던 일들입니다. 단지 일부의 대화나 기억나지 않는 상황은 제 실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거스르지 않는 한도에서 일부 꾸며낸 것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모두 사실이라고 다시 한 번 더 말씀 드립니다. 

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자랐습니다. 지금 나이 젊은 분들은 말로만 들었겠지만, 당시 생활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폐해에서는 다소 벗어났어도, 힘든 시기였으니까요. 도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지방은 더 심했습니다. 춘궁기라고 보리를 수확하기 전에는 굶는 집이 제가 살던 동네에도 꽤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동네에 저희 집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희 집은 그런대로 잘 살았기 때문이죠. 사실 당시에는 군에서 제일 부자 집이 저희 집이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가 많은 집안이었습니다. 

마을 전체에 경운기 한 대 없을 때, 저희 집에는 차가 있었습니다. 지금 자동차처럼 4륜 차가 아니라 3륜 차였습니다. 기아산업(지금의 기아자동차)에서 일본 마쯔다 부품을 들여와 판매한 차였습니다. 정확한 차 이름이 기아마스타 t2000이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한 상용차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 촌 동네에서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또 무척 아꼈기 때문에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니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는 자동차에 관련된 일을 해서 잊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그 차는 주로 자동차와 농작물을 나를 때 사용했지만 어머니(닉네임 grandmom)가 일요일 교회 가실 때도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운전면허를 따서 그것을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3륜 차였어도 당시 제가 살던 촌 동네에서 저 같이 젊은 놈이 면허를 갖고 운전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자랑꺼리였습니다. 그 차를 타고 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와 읍내를 다닌 것은 주로 저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에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분이었습니다. 일본 유학까지 갔다 오신,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었으나, 직접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기를 좋아하셨습니다. 당시는 시골에 일할 인력이 많아 직접 그런 일을 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나마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시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사람 사귀는 것도 좋아 하지 않으시던 좀 특이한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반면에 저는 농사일은 하기 싫어해도 운전은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무엇이던 좋아해야만, 그것을 잘 할 수 있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 아버지 말씀은 맞는 얘기였습니다. 전 농사일은 못해도 제가 좋아하는 다른 것은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예 제 모친과 연관 된 일을 말하는 겁니다.

당시 아버지(닉네임 grandfa)는 거의 50이 거의 다 됐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인간에 대한 실망감으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서 차라리 집에 홀로 남더라도 마을에 가지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아버지가 전쟁 중에 아주 특별한 경험을 많이 하셨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는 혼자 논이나 밭 혹은 산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낮에 그는 하루 종일 들판에 나가 있었으며 저녁 식사 후에도 헛간이나 창고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밤 9시를 넘기지 않고 잠에 드셨죠.

제 어머니(닉네임 grandmom)은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이가 40이 넘지 않았습니다. 뒤 돌아 보면 어머니는 아버지와 나이 차에 비해서도 너무 젊었습니다. 교회를 가거나 읍내에 가기 위해 약간의 화장을 하고 나면, 그 동네 다른 아줌마는 물론 처녀애들보다도 훨씬 더 예뻤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서울 색시라서 다르다고 말을 하곤 했죠. 어머니의 처가가 서울이고 시집 오기 전에는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머리를 길게 길렀으며, 제게 긴 머리를 빗어 달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한번 어머니는 아버지도 젊었을 때는 간혹 어머니 머리를 빗어 주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미소 지을 때면 그녀 입 양쪽 뺨 아래로 보조개가 만들어졌죠. 웃는 모습이 특히 예뻤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들과 산에 나가 계시고, 전 나는 들판에서 하는 일보다는 집 근처에서 차라리 허드레 일을 하는 것이 좋아해서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제 생각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나, 그보다는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어머니는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친정이 서울이니 일가친척은 물론 친구들조차 가까이에는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일요일이면 읍내 쪽을 바라보며 교회에 가고 싶어 했습니다. 

어머니와 몇 번 교회를 가다보니 운전을 하는 재미보다 어머니 모습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작은 읍내에서 가장 예쁜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과 가까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만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당시 시대상도 그러했지만 좁은 동네에서 별난 소문의 대상이 되는 것을 조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 역시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려운 상대였을 겁니다. 그래도 모두 아버지에 비해 어머니가 젊다는 것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죠.

마을 나들이는 그녀의 정신 건강에 꼭 필요했지만 또한 그곳은 사회적으로는 지뢰밭이 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읍으로 향할 때면 그녀는 많이 긴장했습니다. 읍내에서 어머니는 항시 조심했고 행동을 스스로 많이 억제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 올 때 저와 둘이서만 있을 때는 어머니는 마음 편해 했고 때로는 지나치게 활달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여자들의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그들과의 대화를 기억해서 제게 재잘거렸습니다. 그녀는 나를 믿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가까이 기대어 그녀의 생각을 얘기했고 재미난 소식을 전할 때는 때로 제 팔을 잡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너무 좋았고요.

집으로 돌아 올 때 저는 차 속도를 줄였습니다. 털털거리는 3륜 차였어도 속도 내는 것을 좋아했지만 어머니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을 길게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의도적으로 지름길을 피해 먼 길을 돌아 집에 오곤 했습니다. 혹시 어머니가 그것을 지적하면, 조금 돌더라도 그 길이 지름길보다 운전하기 안전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작정이었지만 어머니는 그것에 대해 뭐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집과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집에서 빨리 가봐야 특별히 할 일도 없었죠. 그 당시 저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입학은 하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일 년 휴학을 하고 쉬고 있을 때였기입니다. 실은 그 덕에 저는 군대도 가지 않았습니다.

날씨가 정말 좋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 어머니가 저에게 가까이 기대어, 어머니의 몸이 제 팔에 닿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일부러 창을 열어 놓고 잘 들리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처음엔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였으나 점차 그녀는 제게 가까이 기대어 앉게 되었습니다. 제 의도대로 된 것이죠. 저는 너무 그것이 좋았습니다. 제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우리 사이에 있던 어머니의 손가방을 조수석 창문 쪽이나 바닥에 내려놓고 제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았습니다. 그러게 하자 어머니의 허벅지가 저와 닿게 되었습니다. 제가 운전할 때 어머니는 제 귀에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속닥여대거나, 팔을 제 어깨 위 등받이로 돌리고 간혹 내 목을 감싸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읍내를 빠져 나와 작은 동산을 오를 때가 되면 어머니는 가방을 창 쪽으로 치우고 제게 가까이 다가앉았습니다. 그러나 집에 다다를 때면 어머니는 언제나 제 자리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마주칠 때나 아주 간혹 다른 차가 따라 올 때도 어머니는 자세를 고쳐 제 자리에 앉은 듯 보이게 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친밀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이었고 그것에 대해 우리는 일종의 공범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무렵이 되면 그녀가 나에게서 떨어져 안기 전에 어머니는 언제나 다 큰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추면서 “휴~ 벌써 집에 다 왔네.”라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저와의 짧은 드라이브를 아쉬워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를 우리들만의 특별한 세계로 빠지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사건이란 접촉- 특별한 이유 없이는 부모 자식 간에 일어 날 수 없는 그러한 접촉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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