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태자 전하!”
뜨거움에 온몸에 진저리가 쳐졌습니다. 한 발, 한 발 걷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저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묶었습니다. 타 죽는 것보다는 법도를 어기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요. 어차피 이 순간 반역자가 되었는데 법도가 지금 무슨 소용입니까. 저는 태자 전하의 안위만 확인하면 더는 바랄 바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차라리 여기 안 계시기를. 무사히 탈출하셨기를.
“전하, 어디 계시옵니까?!”
태자 전하의 편전부터 찾았습니다. 그쪽은 아직 불길이 세지 않아서 금세 확인할 수 있었어요. 전하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침전이에요. 침전 앞에 당도한 저는 흠칫 몸을 떨었습니다. 분명 여기에서 불길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불은 아주 힘껏 치솟고 있었어요.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겨우 창문을 넘었어요. 짚을 곳도 없어 넘는 게 무척 힘들었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체력을 단련해 둘 걸 그랬나 봅니다. 괜한 후회를 하며 어떻게든 넘어서 침전에 들어갔을 때 불타는 곳곳이 보였고 침상 아래에 쓰러져 계시는 태자 전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전하!”
저는 그분을 일으켜 세우려 애썼어요. 그러나 육 척이 넘는 장신에 무예로 잘 다져진 몸을 일으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그분의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어요. 겨우 일으켰다 싶으면 그 몸과 함께 같이 무너졌습니다. 무엄한 짓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전하, 일어나 보세요.”
저는 그분의 양어깨를 잡아 흔들었습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요. 하지만 그분은 일어나지 않으셨어요. 와장창 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옆을 보자 불길을 이기지 못한 나무 기둥이 무너지고 있었어요.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게는 정말로 시간이 없었어요. 손을 들었어요. 주먹을 쥐고 허공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어요. 존위에 계시는 분께 이런 무엄한 짓을 하다니, 정말 대역무도한 행위인데. 그때 또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제 귓가를 찢어 놓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홀린 사람처럼 주먹으로 그분의 가슴을 내려쳤어요.
“일어나세요, 전하!”
소리를 치고 그분의 가슴을 계속 때렸지만 그분은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눈꺼풀이 움직이는 듯 하다가도 다시 눈을 감길 반복하셨어요. 이런 분이 아닙니다. 정말 잠이 없으시고 예민하신 분인데 이렇게 눈을 뜨지 못하신다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약을 먹인 게 분명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시간을 끌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손을 들어 태자 전하의 뺨을 힘껏 내리쳤어요. 두어 대 더 때렸을 때 갑자기 그분이 눈을 뜨셨습니다.
“비? 비께서, 왜…?”
목소리가 여전히 나른했지만 그분은 조금씩 정신이 들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불길이 심각하게 치솟고 있었거든요. 이분을 모시고 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둘 다 여기서 타 죽을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분은 몸을 겨우겨우 가누시면서 힘겹게 움직이셨어요. 저에게 몸을 기대는 모습은 처음 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몸을 지탱하면서 이를 악물고 걸었어요. 대들보 같은 게 무너질 때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불타는 것들이 우리의 몸에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되었어요.
와르르 뭔가가 무너졌습니다.
“전하!”
저는 태자 전하를 안은 채 뒤로 쓰러졌어요. 불타는 파편이 아슬아슬하게 그분의 몸을 비켜서 떨어졌어요. 그분의 옷자락이 타들어 갔습니다. 문득 오싹해졌어요. 그 뜨거운 불덩이가 그분의 몸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그랬다면 큰 화상을 입으셨겠지요.
그 충격에 태자 전하는 정신이 좀 드신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주변을 둘러보자마자 저를 번쩍 안으셨습니다.
“꽉 잡으세요.”
여기가 어딘지, 또 제가 여기 왜 있는지 묻지 않으셨어요. 그분은 저를 안고 바로 뛰셨습니다. 저는 무서워서 감히 통과할 엄두도 못 내는 불길 속을 거침없이 뛰어드셨어요. 그분의 팔이 제 얼굴을 꽉 안고 있었습니다. 그 품 안에서 저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우리가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뜨거움이 사라졌습니다. 화기가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드니 밤하늘이 보였어요. 우리는 밖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옵서 저를 내려 주셨어요. 제가 바닥에 발을 디디자 그분은 부드럽게 웃으셨습니다.
“고생이 많으셨….”
그러나 그 웃음은 아주 잠시뿐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대로 바닥에 허물어지셨습니다. 제가 서둘러 그분을 붙들었지만 제힘으로 그분을 부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요. 결국 우리는 같이 바닥에 무너졌습니다.
“전하, 전하.”
제가 부르며 흔들어도 그분은 다시 정신을 잃으시고야 말았습니다. 분명 무언가를 드신 거겠지요. 어느 무엄한 자가 이런 대범한 짓을 하였을까요. 불타는 동궁을 바라보며 운왕 전하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호쾌한 미남이시지만 번들거리는 시선을 느끼고는 했었어요.
그 눈을 생각하며 저는 천천히 힘을 뺐습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어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전하의 옆에 쓰러지며 이대로 그냥 잠들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어요.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자시를 알리는 종소리였어요.
***
금군들에 의해 저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황궁의 감옥에는 처음 들어와 봤어요. 금군이 몰려오는 소리에 묶었던 치맛자락을 풀었지만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매무새 정리의 한계였습니다. 제 위에는 태자 전하가 계셨고 저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어요.
금군들이 태자 전하를 모셨고 저는 그대로 끌려와 감옥에 갇혔습니다. 진노하신 혜비마마께서 저를 직접 추국하겠다 나서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의연한 척해야 했지만 사실은 몸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고신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시시각각 가슴이 조여 왔어요. 차라리 혀를 깨물어 죽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때마다 죽음이 겁나는 게 아니라 태자 전하의 얼굴이 생각났어요. 그분은 변고가 닥친 저를 구하려다 동궁을 잃게 생기셨는데 제가 여기서 개죽음을 당하면 그분의 한은 어찌합니까.
버텨야 돼.
월아를 생각했습니다. 혀가 잘릴 때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요. 혀를 자르는 작두가 있다고 해요. 그 작두 안에 혀를 집어넣을 때 월아는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혀가 싹둑 잘릴 때는요? 저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추락은 더 아찔한 법. 저는 이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횃불이 밝은 대낮처럼 밝히고 있는 추국장에 끌려 나오자 높은 곳에 앉아 계시는 혜비마마가 보였습니다. 그분은 얼굴을 굳히고 계셨어요. 저는 그분께 법도에 따라 예에 맞게 절을 했습니다. 죄인인 신분에 맞춘 절이었어요. 그러자 그분이 착 소리가 나도록 접선을 펴셨습니다. 부채 펼쳐지는 소리가 사뭇 싸늘했어요.
“감히 동궁에 불을 질렀겠다?”
혜비마마의 목소리가 추국장에 벼락처럼 떨어졌습니다. 형틀 옆에 선 채로 고개를 떨구고 있던 저는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리에 고개를 퍼뜩 들었습니다. 동궁에 불을 질러? 내가? 유폐되어 있던 내가 냉궁을 빠져나와서는 동궁에 불을 지른 다음 태자 전하를 구했다는 건가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해서 눈만 깜빡이며 혜비마마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어요. 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원망보다는 아마… 당황한 표정이었겠죠. 제 얼굴을 본 그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셨어요. 마치 뜨거운 것에 덴 것처럼요. 아마 그분이 뜨거운 것에 데셨다면, 그분이 다치신 곳은 분명 양심이라는 부분이겠죠.
그분이 고개를 돌리시는 순간 깨달았어요…. 이분이 저의 결백을 아시고 계신다는 걸요.
“그….”
혜비마마는 고개를 돌리신 채로 말씀을 끝맺지 못하셨어요. 제가 태자비일 때 저를 꽤 어여삐 여기셨던 분이십니다. 저를 고문하라고 명을 내릴 수가 없으신지 입만 달싹이고 계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저를 동궁의 화재범으로 몰려고 하신다는 것에 충격을 받아 입을 벌린 채 그분을 바라만 봤습니다. 아무리 운왕 전하가 소중하다지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죠? 하늘이 무섭지 않으신가? 저 죄를 다 어떻게 짊어지실 생각이시죠?
“그… 네가, 네가….”
혜비마마의 첫마디는 벼락같았는데, 이제 그분은 어쩔 줄 몰라 하고 계셨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완전히 갈피를 잃으신 상태였어요. 저는 죄인의 신분이라 그분이 하문하시지 않는 한 대답할 수 없는 몸일뿐더러 저도 저대로 말문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어마마마.”
그때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심해하는 듯한 목소리. 그건 어머니를 부를 만한 말투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어조였어요. 운왕 전하께서 들어오고 계셨습니다.
자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아까 들었는데 어떻게 이분이 황궁에 계시죠? 친왕이 이런 한밤중에 황궁에 있다니요? 무엄한 행동이며 법도상 불가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예민한 사안이 있을 때 친왕이 황궁에 계시면 그분의 저의를 의심받습니다. 동궁에 불이 났는데 장황자께서 밤늦게까지 황궁에 계시다니요? 화재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는 걸 피할 수가….
아니, 이분이 저지르셨죠.
이렇게 교만할 수가. 저는 이분이 왜 황궁에 계시는지 깨달았습니다. 아까 동궁의 담벼락에 숨어 태자 전하가 불타 죽는 것을 구경하고 싶어 하던 궁인들처럼, 이분도 자신의 경쟁자로 자신을 막아섰던 이복동생이 죽는 것을 가까이서 보시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래서 황궁에 남아 계셨던 거예요. 그걸 보려고. 그걸 즐기려고. 그 즐거움을 위해 위험함을 감수하셨던 겁니다.
이 얼마나 간악한가.
저와 눈이 마주치자 운왕 전하가 피식 웃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번 훑으셨어요. 그 번들거리는 분이 오싹해서 저도 모르게 어깨가 떨렸습니다.
“많이 놀라셨지요. 한때 태자비라는 존귀한 자리에 있던 년이 이런 짓을 저지르리라고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운왕!”
저는 그분이 ‘년’이라고 부르는 것에 별로 충격받지 않았으나 혜비마마는 놀라신 듯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셨어요. 운왕 전하께서 혜비마마의 옆에 서셨습니다. 그분은 법도를 따르지 않았어요. 어마마마께 드려야 할 절도 드리지 않았고 아래에 서야 하는 것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듯 혜비마마 옆에 서서 즐겁게 웃으시며 말씀하셨어요.
“곧 노비가 될 년입니다.”
노비? 저는 냉궁에 유폐되어 있다가 죽을 텐데요. 죄인이긴 해도 노비는 아닙니다. 의아해하는데 혜비마마께서 눈을 치켜뜨셨습니다. 운왕 전하께 늘 다정하신 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강경한 반응이셨어요.
“어미가 분명 안 된다고 했습니다!”
“두고 보세요, 어마마마.”
운왕 전하께옵서 즐거이 웃으셨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흘끔 보셨어요. 늘 보시던 그 번들거리던 눈이 저에게서 다시 혜비마마께로 옮겨 갔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셨어요. 마치 저 들으라는 듯이.
“소자는 소자의 것들을 되찾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요.”
‘소자의 것’이라고 말할 때 그분의 시선은 분명 저에게 닿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