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몽중연 (12)화 (12/100)

12.

저는 깨어났지만 태의는 며칠 더 들르기로 했습니다. 제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후마마께옵서 태의를 보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사한 한편 저는 괜찮으니 저에게 쓰실 여력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부디 그 힘을 태자 전하께 보태 주십사 청을 올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저는 며칠간 벙어리인 궁녀와 흙 위에 글자를 써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월아였고 황후마마께 악독한 수단을 쓰다 발각되어 사지가 찢긴 현비의 지밀상궁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담했던 죄로 혀를 잘리고 냉궁의 궁녀로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밀상궁이었던 만큼 글자를 매우 잘 쓰고 영특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어요. 월아는 저에게 현 황궁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현재 상황은 태자 전하께 몹시 나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일단 태자 전하는 무구도 벗지 않은 채 황궁으로 돌아오셨고 돌아오시자마자 냉궁으로 향하셨다고 합니다. 황상을 뵙지도 않고요! 거의 반역 수준입니다. 당연히 금군이 제재를 가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몹시 진노하시어 감히 황궁에서 검을 빼 드셨다고 합니다…. “내 비를 내놓아라.”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피가 말라붙은 무구도 벗지 못하신 채로.

저는 정말로 저를 그렇게 찾아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얼마나 복된 삶인가요. 누구도 지어미를 위해 반역을 도모하진 않습니다. 심지어 존귀한 태자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비빈 중 한 명에 불과한 사람을 구하려고 애쓰시진 않지요.

그러나 그분은 달려와 주셨습니다. 그러시면 안 되었어요. 그러시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감사할 일입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 눈을 감고 온몸에 힘을 줬습니다. 울고 싶지 않았습니다. 울면 안 돼서가 아니라 지금 그분이 위험한데 여기서 마냥 우는 건 제가 용납할 수 없어요.

월아가 말해 준 오늘 날짜를 보면, 동궁에 화재가 나는 날은 내일입니다. 내일 그분은 화마에 휩쓸려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반이나 잃게 되실 거예요.

종일 저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잠들어서도 안 됐어요. 만약 잤다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큰일이니까요. 제가 읽은 것에 의하면 동궁 화재는 해시에서 자시로 넘어가는 사이에 벌어졌습니다. 종루에서 종이 치고 있었다고 해요. 동궁 화재를 발견한 사람도 종루에 있던 이였습니다.

이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동궁에는 수많은 궁인들이 불철주야 일하고 있습니다. 황궁은 화재를 매우 경계하기 때문에 존귀한 분들이 계시는 곳에는 반드시 물과 모래가 담긴 거대한 항아리들이 놓여 있습니다. 불이 나더라도 바로 끌 수 있게요. 그런데 종루지기가 발견할 때까지 아무도 동궁의 화재를 발견하지 못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다음 날 아침, 저는 월아와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저희 둘은 같은 보리죽을 먹었어요. 월아는 저를 주인으로 생각하는지 좋은 식사를 받아 오지 못해 죄송하다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월아의 잘못이겠습니까. 황상께서 제게 하사하신 음식이 보리죽인 것을요. 저는 시무룩한 그녀의 팔을 도닥거렸습니다. 그러자 그녀가 울먹이듯 웃었어요.

문득 월아도 사람이 많이 그리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인인 저와 엮여 봐야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텐데 월아는 저와 있는 것이 무척 즐거워 보였습니다.

우리는 많은 걸 필담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주로 월아가 이야기했고 제가 들었어요. 월아는 의녀가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리겠다며 속상해했어요. 혹여나 내가 죽기 전에 나에게 기회가 닿는다면 너를 태의원으로 보내 달라 하겠다고 말해 그녀를 기쁘게 해 주려 했습니다. 흙에다 그렇게 쓰자 월아의 눈이 휘둥그레졌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돌아가신다는 말씀 하시지 마세요. 그녀는 거의 빌다시피 말했어요.

그녀는 냉궁을 돌보는 유일한 궁녀입니다. 돌본다는 표현은 사실 옳지 않네요. 냉궁은 돌보는 곳이 아니니까요. 냉궁의 죄인들에게 식사를 가져다주고 그녀들이 죽지 않았는지 살피는 정도가 월아의 일 전부입니다. 월아는 모든 궁녀에게 무시당하고 발길질도 서슴없이 당합니다. 그녀는 한때 높은 분의 지밀상궁이었어요. 궁녀 사이에서 높은 직책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녀를 비참하게 하지만 그보다 더 절망스러운 건 세상에 그녀의 편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생겼으니 그녀는 무척 기뻤나 봐요.

가여운 사람.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날 월아에게 줄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어요. 하지만 죄인의 신분인 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줄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속상했어요. 그 많던 패물 중 하나라도 있으면 월아에게 줄 텐데요.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은데.

해시, 어두컴컴한 정원에서 저는 오도카니 쪼그리고 앉아 월아에게 글을 썼습니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너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길 바라지만 해 줄 수 없어서 유감이라고.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고. 네가 준 은혜를 이승에서 내가 갚지 못하니 저승에서 꼭 갚겠다고. 그렇게 글을 쓰고 일어났습니다.

곧 동궁이 타오를 겁니다.

꿈에 봤던 대로라면요. 꿈이 그저 꿈이기를, 현실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를 저는 소망했습니다. 그러나 어두컴컴한 곳 어느 한쪽에서 아른아른한 불길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보리죽은 좋은 식사는 아닙니다. 더욱이 저는 자느라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급히 움직이자 몸이 휘청거렸습니다. 휘청거리면서 뛰었어요. 무작정 문으로 뛰어가 금군에게 화재를 알리려 했습니다. 손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어요. 소란을 피우는 저를 제지하기 위해서라도 금군이 들어올 것입니다. 그럼 그들에게 화재를….

한참을 두드려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쾅쾅. 문을 마구 흔들고 두드렸습니다. 난생처음 문을 발로도 차 보았습니다. 금군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문이 헐거워지는 듯하더니 열려 버렸습니다. 스르륵하고요.

화들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어요. 어째서 문이 열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보니 문의 빗장이 제대로 걸려 있지 않아 제가 마구잡이로 괴롭히자 문이 열려 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광경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황궁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냉궁 앞에서 지키고 서 있어야 할 금군도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싸늘하고 스산한 기운만 감돌았어요. 바들바들 떨면서 냉궁에서 한 발짝, 또 한 발짝, 그렇게 두 발을 온전히 바깥으로 디뎠습니다. 고개를 돌렸는데 아무도 보이는 사람이 없었어요. 마치 황궁이 비어 있는 것처럼요.

등골이 오싹했습니다. 황궁이 비었다고요? 동궁의 화재를 아무도 못 알아챌 만큼요?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머릿속으로 생각한 순간 갑자기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습니다. 현재 태자 전하께서는 근신 중이십니다. 동궁의 일은 누구에게 넘어갔을까요? 황후마마께 넘어가야겠지만 황후마마는 태자 전하의 친모십니다. 폐하와 사이도 안 좋으시죠. 그렇다면 후궁의 이인자, 혜비마마께 넘어갔을 것입니다. 또한 황궁 내부와 후궁의 관리 또한 혜비마마께 넘어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달리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으로 권력 구도를 떠올려 봅니다. 혜비마마의 편은 누구였는지. 황후마마의 편은 또 누구였는지. 아니,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혜비마마는 사실 나쁜 분이 아니세요. 좋은 분입니다.

하지만 장황자, 운왕 전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마께옵서는 운왕 전하께 무척 미안한 감정을 많이 가지고 계세요. 당신이 부족하시어 장자로 태어난 운왕 전하께서 태자의 위에 못 오르셨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래서 그분은 운왕 전하께서 원하시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운왕 전하께서도 어마마마의 다정함을 아시기에 도움을 바라실 때 교묘히 말씀하시고요. 나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좋은 쪽만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몇 번이나 혜비마마께옵서는 운왕 전하의 악행을 도우셨습니다. 좋지 않은 일일 것이라 생각은 하시는 것 같았지만 깊게 알게 되어 상처 입는 건 싫으신 듯했어요.

혜비마마께 누가 감히 운왕 전하의 악행을 고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무도 고하지 못했고 그렇게 일은 몇 번이나 벌어지고 아랫사람들이 수습하기를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태자 전하나 황상의 주도하에 수습되기도 했고요.

이 일은 분명 운왕 전하께서 벌인 일일 것입니다.

그분은 늘 그러셨어요. 조금만 더 참으면 되는 일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손끝에 닿을락 말락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시는 분이었어요. 그 초조함을 못 견디시어 일을 벌이시고 화를 당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성정 때문에라도 그분은 태자의 위에 오르기 쉽지 않으실 겁니다. 많은 대소 신료가 그분의 동궁행을 저지할 테니까요. 수많은 학자도 그분을 반대합니다.

많은 사람이 태자 전하를 두고 완벽한 태자라고 말합니다. 성군이 되실 거라고 입을 모으죠. 그런데 왜, 왜 그분은 이런 일을 겪으셔야 합니까. 분함이 치밀어 올라 목이 멥니다. 저는 폐비가 되었을 때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아비를 잘못 둔 탓이니까요. 여식으로서 누린 바가 있으니 여식으로서 당하는 바도 있는 것이 순리니까요. 하지만 그분은, 그분은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저를 구하러 오신 게 그렇게 잘못되었나요. 전장에서 돌아오신 게… 그분이 동궁에서 화재를 겪고 얼굴 반쪽을 잃으실 정도로 잘못된 일이었나요.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분을 외면하여 몰락하게 만들 만한 일인가요. 그저, 그분은 그저, 자신의 처에게 닥친 변고를 두고 볼 수 없는 다정한 지아비였을 뿐인데.

숨이 계속 목에 걸렸습니다. 뛸 수가 없었어요.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이렇게 뛰어 본 적이 없어요. 눈앞이 캄캄해질 지경이었습니다. 다리가 뻣뻣해졌습니다. 통나무같이 굳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어요.

동궁에 가야 했습니다. 동궁이 비었다는 건 그렇다 치고, 왜 그분은 화마에 삼켜졌던 걸까요? 그분은 잠이 별로 없으시고 매우 예민하신 편이었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특히 그분은 어릴 때 여러 번 자객의 위협을 받으신 터라 결코 깊게 잠들지 못하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왜 화기를 느끼셨으면서도 피하지 않으신 거죠? 피하시다 다치신 걸까요?

동궁은 이미 불길이 한참 치솟고 있었습니다. 새빨간 불길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들어가야 해. 아는데, 무서웠어요. 맙소사. 저는 동궁 밖에서 “누구 없어요?”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불길 속으로 들어가기가 무서웠어요. 너무 스스로가 비겁하다는 거 아는데, 그분은 저를 위해 반역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셨는데, 저는 불길에 들어가는 게 무서웠습니다.

“아무도 아니 계십니까! 여기 불이 났어요!”

소리를 지르는데 멀리 담 모퉁이에서 누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 게 보였습니다. 반가워하려는 차, 담 안쪽에 있는 누군가의 팔이 그 사람을 황급히 끌어당겼어요. 들키면 어떡해! 이런 느낌으로요. 아아. 그 순간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네, 버려졌을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요. 이렇게 구경당하는 동물처럼 버려졌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돌렸어요. 다른 쪽 담을 자세히 보니 아른아른 불빛에 비친 사람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다들 담 너머에서 구경하고 있었어요. 태자가 불타 죽는 모습을요. 참으로 대단한 구경거리니까요. 황상에게 버려진 태자가 불타 죽는 광경이라니. 평생 다신 볼 수 없는 구경거리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불길은 무서웠어요. 제 치렁치렁한 옷들이 걱정됐어요. 불타 죽는 건 싫었어요. 굶어 죽는 건 각오했지만 얼어 죽는 것도 각오했지만 불타 죽는 건 정말 싫었어요. 그건 너무 아플 것 같았거든요.

눈을 질끈 감고 뛰었습니다. 제 비겁한 발이 겨우 문지방을 넘었을 때, 화기가 훅 제 몸을 덮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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