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Ballo in Maschera (17)
짙은 숲의 향기가 연신 나에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눈을 스르륵 떠졌다.
시간도 공간도 개의치 않고, 그냥 무심히 포근한 땅바닥에 누워 있는 것처럼, 마치 내가 숲속의 나무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푸르던 하늘이 어느새 황홀한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당에 있던 나무 평상에 누워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잠이 들었던 것 같았다.
내 몸에 오랫동안 스며있던, 나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듯 개운했다.
평상에 누운 채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오후 6시가 넘어 있었고, 부재중 전화와 몇 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치우야? 어디냐? 주말에 은비 씨하고 같이 저녁 먹으러 와.]
[형부. 어디세요? 안 오세요?]
[오빠 바빠요? 전화 안 되네요?
갑자기 회식 잡혔어요.
식사만 하고 빨리 들어갈게요]
평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덩굴로 둘러싸인 건물 현관 바로 앞에, 검은색 고양이 한 마리가 정 자세로 앉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 고양이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움직임이 없던 고양이의 꼬리가 천천히 살랑거리고 시작했다.
[로이엣]
이제 막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 환하게 불을 밝힌 간판하나가 눈에 띄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내게 말을 걸던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멈췄다.
나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곤 차에 달린 네모난 거울을 잠시 들여다봤다.
지하로 내려가 자동 유리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입구에 있던 카운터는 텅 빈 채,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 봤다.
항상 이런 곳에서 풍기던 싸구려의 익숙하고 인공적인 향기가 아니라, 잘 꾸며진 화원에서나 맡을 수 있는 그런 상큼한 향기가 느껴졌다.
“엇! 죄송합니다. 사장님.....룸 정리한다고....오신지 몰랐습니다.”
흰 셔츠를 입은 어린 청년이 안쪽 룸에서 빠져나와 나를 발견하곤 급히 다가왔다.
“사장님 몇 분이신가요? 예약은 하셨습니까?”
“아니요......혼자....”
잠시 그 청년이 나의 이곳저곳을 몰래 훑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사,,,장님. 이쪽으로.....”
잠시 머뭇거리든 청년이 나를 안쪽 끝에 있는 방으로 안내를 했다.
룸은, 오랫동안 묵은 쾌쾌한 담배 냄새나 흐트러진 남녀가 뒤엉켜있던 전날의 흔적이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룸은 작은 편이었지만, 테이블과 소파의 배치, 그리고 이국적인 벽지의 문양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아늑함이 느껴졌다.
“사장님. 술을 어떤 걸로 드릴까요?”
“블랙라벨하고......믹서할거 좀 알아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청년이 룸을 빠져나가자 소파에 깊게 몸을 기댔다. 한껏 부풀어 올라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소파가 너무나 편안하게 느껴졌다.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안녕하세요....신 혜원입니다.”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늘어트린 한 여자가, 옆트임이 길게 나있는 흰색 스커트를 입은 채, 내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방금 머리를 한 것처럼 여자의 머리칼이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늦었어요, 혼자 오셨어요?”
“네.”
“지금 애들 출근 다 안했는데. 우선 있는 애들 보여드릴게요. 마음에 안 드시면 조금 기다리셨다가 다시 인사시켜 드릴게요.”
“아....네..”
여자가 나와 눈을 맞추곤 한번 방긋 웃어 보이더니 급히 룸을 빠져 나갔다.
테이블엔 술과 간단한 안주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조용한 룸에 밖에서 분주히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조금 전 내게 인사를 했던 여자가 짧은 홀복을 입은 두 명의 또 다른 여자를 데리고 룸으로 들어왔다.
“얘들아....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은서예요.”
“안녕하세요. 세은이에요.”
처음 룸에 들어왔던 여자의 말에 두 여자가 번갈아가며 인사를 했다.
“둘 다 우리 가게 에이스예요. 예쁘죠? 어때요?”
나는 말없이 나와 가까이 서있는 여자를 바라봤다.
자신을 신 혜원이라고 소개했던 여자가 몸에 붙는 갈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의 등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웃으며 내게 다가와 살짝 안겼다.
“오빠. 술 어떻게 드려요?”
“언더락에......믹서하고 좀 연하게 줄래?”
여자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오빠! 짠!”
여자가 내게 잔을 건 내주곤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연하지도 진하지도 않은 내가 원하던 적당한 맛이었다.
“오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여자가 내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여자의 한 손이 내 허벅지 위에 살며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오빠. 근데 모자를 왜 그렇게 꾹 눌러 썼어요?”
“좀 다쳤어.”
“정말? 얼마나 다쳤어요?”
“응...많이.....”
“어떡해.....아파요?”
여자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모자를 꾹 놀러 쓴, 내 머리 쪽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갔다. 부담스럽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믹서와 옅게 섞인 술이었지만, 반복되다 보니 몸 전체가 조금씩 달아오르고 있었다.
“오빠. 처음에 초이스 할 때.....그냥 한 거죠?”
“응?”
“나는 눈빛 보면 다 알아요. 나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마음에 들어.”
“치이~ 거짓말.
다른 손님들은 나 보자마자 못살게 구는데...
오빠는 내 몸에 손도 안 대고......”
나는 말 없이 앞에 놓여 있던 술을 마셨다.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여자의 손길이 느껴졌다.
여자는 조심스레 내 뺨을 쓰다듬기도 하고, 다시 허벅지에 닿아 좀 전 보다 더 깊이 그곳에서 움직였다.
여자가 내 바지 위 그곳을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익숙함에 감각이 둔해진 사이, 또 다른 좋은 향기가 강하게 느껴졌다.
독특한 향기였다.
눈을 떠 옆을 바라봤다.
그곳엔. 나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처음에 봤던 신 혜원이라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긴 옆트임 스커트 사이, 여자의 하얀 허벅지가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일어났어요? 은서가 손님 주무시는 거 같다고 해서요....”
“아....미안해요.....”
정신은 멀쩡했지만 몸이 무척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멀쩡하던 바지가 느슨하게 풀어헤쳐져 있었다.
신 혜원이 시선을 내게 둔 채, 스트레이트 잔을 자신의 붉은 입술 속에 천천히 담아 넣었다.
“맞죠?”
신 혜원이 무슨 비밀이라도 알았다는 듯 웃고 조용히 웃고 있었다.
“이 상황.......그때 그분이죠?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6개월 넘게 지났죠?”
신 혜원이 옆으로 다가와 내 잔을 채워 주었다.
나는 그 잔을 한 번에 마셨다.
독한 술이 빠르게 내 몸에 퍼져 나갔다.
“장 형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마침, 긴 침묵을 뚫고 말했다.
“은인이죠. 너무나 고마운 사람.....
나를 구해준 분이죠.
제가 고2때,
아빠가 하는 일이 좀 잘못됐어요.
아빠 덕분에 괜찮게 살던 집이 완전히 망한 거죠.
아빠는 지방으로 도망 다니고....
아빠가 무슨 돈을 잘못 끌어다 썼는지...
어느 날, 학교에서 밤늦게 돌아와 보니.
훗......
거실에서 엄마가 이상한 남자 둘하고 그걸 하고 있더라고요.
지금도 엄마가 남자들하고 엉켜있던 게 지워지지가 않아요.
멍하게 그걸 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내 손을 잡아끌더라고요.
그날이 내 첫 경험이었어요.
그것도 엄마가 보는 데서......엄마하고 같이....
그날 밤새도록 엄마하고 그렇게 번갈아가며 그 남자들한테 당했어요.
그날 이후.
그 남자들이 돈을 독촉하는 횟수가 점점 짧아졌어요.
남자들은 내가 학교에서 돌아 올 때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매일....
엄마하고....남자들하고....같이....그룹섹스를 했죠.
지옥 같았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니...견딜 만했어요.
가끔 그 남자들이 학교에도 찾아왔어요.
그 남자들이 부르면 점심시간 때 잠깐 나가서 그 남자들 차에서 하고 다시 와서 수업 듣고...
후후....”
여자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건 너무나도 참혹한 얼굴이었다.
“저는 견딜 만했어요. 근데 엄마가.....
이렇게 지내다 보면 무슨 일이 생길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끝에 담임선생님한테 모두 털어놓고.........”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 벌컥 열렸다.
“김 사장!!! 당신......기억 돌아왔죠? 그런 거죠?”
문 앞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험한 인상의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제가 연락드렸어요....”
옆에 앉아 있던 신 혜원이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장 실장이 맞은편 소파에 앉자마자 목이 탄 지 앞에 있던 탄산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를 보는 그의 눈 속에 너무나 많은 할 말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김 사장님!!! 그...새끼.....최 약사....그 새끼 하고 절대 어울리지 마.....개새끼....”
갑작스런 거친 그의 말에 신 혜원이 무척 놀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나는 말 없이 스트레이트 잔을 들어 마셨다.
“혜원아. 김 사장님하고 말 좀하게 잠깐 자리 비켜줄래?”
방금 전과는 달리 너무나 다정한 말투였다.
신 혜원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부르시고요.”
장 실장의 시선이 신 혜원의 스커트 옆트임 사이로 반쯤 드러나 있는 그녀의 허벅지에 꽂혀있었다.
신혜원이 룸을 빠져나가고 그와 둘이 덩그러니 남겨지자 분위기가 다소 어색했다.
“김 사장님. 내가 당신 얼마나 걱정한 지 알아요?
어휴.....정말....
나는 처음에 다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김 사장님이 다행히 깨어났으니까....
그런데,
나 혼자 얼마나 고민하고 끙끙댔는지 알아요?
내가 살면서 이렇게 답답한 적은 없었어요.
정말 형사 하면서 개 같은 꼴,
볼 거, 못 볼 거 다 봤는데...
이렇게 답답한 적은 없었다니까.....
혜원이 한테 김 사장님 여기 와 있다고 연락받고,
지금 여기 오면서도 수십 번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김 사장님 기억이 돌아온 이상.....
나도 어쩔 수 없어요.
김 사장님.
정말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잔뜩 찌푸려진 그의 눈가에 굵은 주름이 더욱더 짙게 변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