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Ballo in Maschera (16)
그가 창가 자리에 앉아, 가만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반면, 나는 Bar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좋은 빈티지의 쉬라즈 와인 한 병을 꺼내어 놓고,
안줏거리가 될 만한 달콤한 쿠키 따위를 접시에 소복이 담았다.
또한 평소에 아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과일 치즈를 꺼내, 적당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예쁘게 펼쳐 놓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일 치즈에 노란 가루와 하얀 가루를 듬뿍 뿌리고는 샌드위치처럼 또 다른 치즈 조각을 덮어놓았다.
너무 집중해서인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갔다.
쟁반에 와인과 버건디 와인잔, 그리고 정성들여 준비한 안주를 들고 창가로 갔다.
“아이고.....뭐를 이렇게 준비했어. 너 귀찮은데 그냥 대충 마시지....”
인기척을 들었는지 내가 들고 있던 쟁반을 그가 서둘러 받아 들었다.
와인을 땄다.
붉은 드레스를 곱게 입고 있던 와인, 코르크 정 중앙에 날카로운 스크류가 조금씩 박혀갔다.
‘뽁!’
와인병을 갑갑하게 막고 있던 코르크 열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하게 들렸다.
나는 그의 잔에, 테스팅을 하라는 의미로 와인을 조금 따라주었다.
“하하하.....고맙게 테스팅도?”
그는 웃으며 와인잔들 들어 입에 살짝 머금었다.
“좋다! 맛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버건디 와인잔에 반이 조금 안되게 와인을 따랐다. 그러자 서둘러 와인병을 받아 든 그가 내 잔에도 자신의 것과 비슷하게 채워주었다.
“야....이거 맛있다. 이 와인하고 딱이네.....”
정성들여 준비한 과일치즈가 그는 마음에 드는지, 적당한 크기로 잘려진 그것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처제한테 들어보니, 병원 있을 때 많이 도와주셨다고 하던데....”
“별말을 다 한다. 우리 사이에.....”
그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는 와인을 한 모금 깊게 머금고는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 알싸한 첫맛이 더욱 짙어질 때 즈음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삼켰다. 사라지지 않고 입에서 맴도는 짙은 향기가 다소 복잡한 내 마음마저 편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치우야. 너......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나니?
우리 세희도 기억 안나?”
“아.....미안합니다.”
“미안하긴...너 이렇게 깨어난 것만 해도 정말 다행이지...”
그가 잠시 둥글게 흔들던 와인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정말 실례일 수도 있는데. 우리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들어보니......각별했던 것 같은데......“
“음......”
그가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각별한 사이지.......친한 형 동생처럼.....”
그의 표정이 예전 언젠가를 떠올리고 있는 듯이 잠시 추억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처음 어떻게 만났습니까?”
“그게....우리 세희가......여기에서 일하게 됐어.
마침 이 동네에 약국을 오픈하게 됐고.
그래서 널 알았고, 친해졌고....뭐 그렇게 된 거지.”
그는 온화한 미소를 지은 채,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별말 없이 그렇게 우리는 와인을 마셨다.
와인이 줄어들 듯, 안주로 내어온 그것들 또한 비슷한 속도로 줄어들었다.
“치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기억은 언젠가는 돌아오겠지.
아니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하지만 변하는 건 없어.
안 그래도 아직 성치 않은 몸인데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스트레스 받지 말고...”
“내가 병원에 있을 때, 은비는...어땠습니까?
깨어나 보니 은비가 살이 너무 많이 빠져서...”
급하게 마신 와인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붉게 변해 있었다.
“음......은비 씨, 고생 많이 했지.....
한번 씩 병원에 갈 때마다,
점점 더 힘들어지는지....
얼굴이 많이 안 좋더라고.
너 사고 나고 3개월 정도까지는
그렇게 묵묵하게 버티더니....
어느 날 담당 교수가 이젠 더 이상 가망 없다고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했다더군....
그때부터 많이 힘들어 했지.
의사까지 그렇게 이야기를 해버리니까.
니가 깨어날 거라는 작은 희망 하나로
버텨왔는데.....
그 희망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거지.....
잘은 몰라도.
그 날 이후부터..........”
그가 남아 있던 와인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다시 그 잔을 채워주었다.
내 머릿속엔 아내가 의사에게 불려가,
더 이상 내가 소생할 희망이 없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는 아내의 초라한 모습이 그려졌다.
‘나였으면 어땠을까?’
‘만약 반대로.....그 상황이 나였으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끊임없이 무너져 내렸다.
[오빠. 카페에서 절대 무리하면 안돼요.
그리고 몸 안 좋으면 바로 연락해요. 알았죠?]
그리고 이른 아침 카페에 나간다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치우야....너한테 참 고맙다. 우리 세희.......”
그가 감정에 복받쳤는지 갑자기 말이 끊겨버렸다.
“우리 세희......잘 돌봐줘서....너무 고맙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눈 속이 순간 글썽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Bar로 갔다.
그리고 미리 꺼내어 놓았던 와인을 들고 와서 그의 잔을 다시 가득 채웠다.
“치우야. 우리 이렇게 가끔 한잔씩 하자.....옛날이야기도 하고...”
그가 문 앞에 서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취한 것 같았다.
조금 전 자리에서 일어날 때 어지러운지 비틀거리던 그가 기억났다.
나 또한 술기운이 느껴졌다.
“혼자 갈 수 있겠어요? 바래다줘요?”
“아니야. 아니야......바로 앞인데.....그리고 너도 술 마셨잖아. 뒷골목에 차 세워둬서 천천히 몰고 가면 돼....”
그는 붉은 얼굴로 내 손을 꼭 쥐곤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다.
내 얼굴이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때서야 오랫동안 반짝이던 내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형부. 나 방금 집에 왔어요. 세희 언니는 미나 집에서 잔데요.
그리고 언니 지금 걱정 많이 해요.]
[오빠? 많이 늦어요? 제가 데리러 가요?]
처제와 아내의 메시지였다.
아내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오빠!”
“어...미안 미안. 좀 늦었지?”
“어디세요? 아직 카페에요?”
“응. 오랜만에 이야기하다보니까 시간가는 줄 모르겠네. 승호 방금 갔어.
은비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갈게......”
“후....오빠도 참....빨리 와요.......같이 자요.”
“사랑해.......”
아침부터 나는 서둘렀다.
오늘은 내게 무척 바쁜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주차장에 있던 차에 올라타 최근 내비게이션 목록을 훑어봤다.
지하 주차장 저 멀리서 처제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처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처제는 차에 올라타 별말 없이 줄 곳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제 어디 갔었어? 맛있는 거 먹었어?”
“일식집 갔어요.”
“언니한테 물어보니까 일찍 왔다던데....왜 더 놀지 않고?”
“미나하고 세희 언니는.....맥주한잔 한다고 해서 먼저 들어왔어요.”
평상시 같지 않은 처제의 행동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어제 저녁 식사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저기 형부....”
한동안 고개를 돌린 채, 창밖을 내다보던 처제가 나를 불렀다.
“응?”
“어제......카페에서....세희 언니가 방에 들어갔을 때......”
“어?”
“세희 언니하고 뭐했어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그랬어요?
세희 언니하고 왜 그랬어요?”
커다란 처제의 두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다 들었어요.
세희 언니가 하도 안 나와서.....
그쪽에 갔다가......밖에서 다 들었어요.”
“왜 그런 거예요?
세희 언니하고 왜....잤어요?
아니면 오래전부터 둘이 그런 사이에요?”
처제의 물음에 나는 단 한마디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카페 앞에 차가 도착하자.
처제는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잠겨 있던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던 처제의 눈빛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차가 깊은 산속도로를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에 마지막 목적지였던 그곳이 찍혀 있었다.
30분 정도 좁고 가파른 길을 올라가니 크게 휘어진 급커브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를 벗어나 좁은 공간에 차를 세우고 중앙선을 가로질러 절벽이 있는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낭떠러지를 막고 있는 회색 가드레일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에.....
몇 개가 다른 것 들 과는 달리 색이 바래지 않아 따가운 햇볕에 반짝였다.
내비게이션 안내 멘트가 종료되자 입구에 대형 석제에 새겨진 이름이 보였다.
‘가음CC’
주차장에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차들이 서 있었다.
나는 건물 출입문과 가장 멀리 있는, 울창한 아름드리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 주차를 하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수많은 나무 향기들이 뒤섞여 편안하고 좋은 향기가 차에 가득 찼다.
방금 도착했는지 건물 입구에 있던 차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와 커다란 골프백을 챙기곤 건물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차에 편히 앉아 화려하게 반짝이는 그 건물만을 보고 있었다.
눈부시게 하얀 빛깔의 골프 웨어를 입은 여자가 건물을 빠져 나왔다.
여자가 입고 있던 스커트가 바람에 찰랑 거렸다.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여자 뒤를 따랐다.
남자가 차 트렁크에 골프백을 싣자 여자가 트렁크를 닫았다.
여자가 남자의 목을 두르더니 둘은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한동안 맞닿아 있던 두 얼굴이 떨어지고. 각각의 차를 타고 주차장을 벗어났다.
내비게이션에서 두 번째 목적지의 방향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골프장이 있던 산과는 전혀 반대쪽에 있는 또 다른 산이었다. 도시를 관통하여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200미터 앞에서 좌회전하세]
차분한 여자목소리에 내비게이션을 보니 벌써 두 번째 목적지 근처에 다가와 있었다.
좌회전을 하니,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고, 다소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아래로 쭉 뻗어 있었다.
하지만 입구에는 아무런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비포장 된 흙길에 타이어 자국이 있는 걸로 보아, 이 길로 차가 다니긴 다녔던 모양이었다.
조심해서 천천히 흙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 작은 회색 자갈들이 깔린 넓은 평지 입구에 다행히도 차가 들어섰다.
자갈이 깔린 넓은 마당 안쪽에 단층으로 된 검은색 긴 건물이 보였다.
커다란 상자같이 생긴 검은색 건물 벽면은 통유리가 외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색 건물 벽면을 이름 모를 녹색의 넝쿨들이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진입했다.
차에서 내려 보니 산 중턱에 홀로 파묻혀 있는 이곳이 무슨 요새 같았다. 얼기설기 연결되어있는 건너편 산봉우리가 마당 아래로 펼쳐져 보였다.
너무나 고요했다.
마당은 텅 비어있었고, 건물 안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아무도 살지 않고 비워져 있던 그런 건물 같았다.
현관으로 보이는 곳으로 갔다.
“저기요? 계세요?”
고요한 그곳에 조금 긴장한 내 목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현관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훑어보았다.
오랫동안 묵은 먼지가 손가락에 가득 묻어났다.
하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마당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너무나 훌륭해,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곳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비가 참 좋아할 것 같았다.
은비에게 이 좋은 경치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세월의 흐름이 진하게 묻어나는 목재 평상 위에 조금 치쳐버린 내 몸을 뉘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에서 반짝이던 태양이,
솜사탕처럼 커다란 구름에 가리어져, 내 눈을 천천히 보듬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