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77)

Un Ballo in Maschera (1)

내 몸뚱어리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지하 깊숙한 곳에, 꼼짝달싹할 수 없이 얼어붙어 있었다.

신인지 아니면 귀신인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던 뇌와 혈관 그리고 뇌수까지 모조리 꺼내어 버려버린 듯, 텅텅 빈 것 같았다.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니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차디찬 얼음으로 둘러싸인 어느 지옥의 땅 깊이 묻혀 있는 게 분명했다. 

[......]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꿈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같았다.

나는 그 아스라한 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고....노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텅텅 비어있는 내 머릿속과 이미 얼어붙어 있는 내 몸의 모든 감각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렀다.

발끝이 간질간질했다.

마치 시간마저 헤아릴 수 없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얼음덩어리같이 굳어있던 내 발끝이, 갑자기 스쳐가는 온기에 피부가 간질거리는 것처럼 그렇게....

얼마 남아있지 않는 내 모든 신경을 발끝에 집중했다.

[치우...야...]

분명히 들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참혹한 동상으로 꽁꽁 얼어붙어 있던 발끝에 조금씩 온기가 느껴졌다. 

[많이 아프니?]

그.......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갑자기 눈가가 왈칵 뜨거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눈은 뜰 수가 없었다.

어느새 몸 전체에 온기가 돌았다. 

그 지독한 지하 얼음의 땅에서 비로소 조금씩 벗어나는 것 같았다.

[많이 아프니.....많이 힘들었어?]

따스했다.

내 머리가 너무나 부드럽고 폭신폭신한 어딘가에 천천히 뉘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따스한 손길이 뺨에 느껴질 때마다 내 얼굴이 조금씩 달아올랐다.

나는 이 손길과 목소리가 이젠 누구의 것인지 확신했다.

[엄........엄......]

서둘러 눈을 떠 그렇게 그립던 존재를 보려 했지만, 여전히 눈은 떠지지 않은 채, 깜깜한 암흑 속에 변함없이 갇혀 있었다.

그 손길이 꼭 감겨있는 내 눈에서 새어 나오던 뜨거운 눈물을 연신 닦아 내 주었다. 

또다시, 

스르륵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내 머리와 뺨을 보듬어 주던 그 손길은 오랫동안 멈추지 않았다.

암흑천지였다. 

그리고 그렇게 따스한 그 손길과 목소리가 더 이상 느낄 수도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젠 얼어붙은 지옥의 땅에 묻혀있지는 않는 것 같았다.

몸 전체에 따뜻한 온기가 맴돌았다.

깨어나려 또다시 발버둥 쳐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너무나 지루하게,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 들기를.... 수천 번 셀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고만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형부....많이 아파요? 흐흑....

정말 안 깨어나실 거예요?

머리가.....이게 뭐야.....엉엉엉.....

피....피가.....엉망이야......

우리 형부 불쌍해서 어떡해.....

형부, 우리 언니 두고 먼저 가면 안되요,

그러면 언니도 어떻게 될지 몰라.

너무 무서워.....형부......]

[오빠.....힘들어요? 나....보고 싶지 않아요?

기운 내요. 오빤 할 수 있어요.

나는 오빠를 믿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돌아오세요.

오빠.....사실....나 너무 힘들어요.

이러다가.....나도 어떻게 될지....

제발 어서 내게 돌아와 줘요.]

[아이고....어엉엉....치우야...

니가 왜 이렇게 된 거야....

니가 없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친구야....치우야.....엉엉엉....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

너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은 거야?

나쁜 새끼!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그 소리들이 내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가 또다시 희미한 정신이 사라질 때 즈음이면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소리들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형부. 그때보다는 머리가 좀 나아졌어요.

그땐 정말 엉망이었는데....

지금은 새 머리칼이 조금씩 돋아나고 있어요.

조그만 더.....힘내요. 형부.

그리고....

어제 의사 선생님이 불러서 

언니가 상담하고 왔는데...

언니가 다녀와선 펑펑 울었어요.

아마도 안 좋은 이야기인 거 같아요.

언닌 나한테 아무런 말도 안 해주고 

하루 종일 계속 울기만 해요.

보고 싶어요. 형부.....]

[오빠....여보.....이젠 내일 부턴 학교에

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오래 반 애들을 다른 선생님께 맡겼어요.

그리고 지난주에 의사 선생님이....

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의사 선생님이 이제 준비를 하라는....

그런 말들은 믿지 않아요.

오빠는 반드시 깨어날 거예요.

저는 믿어요. 

조금만.....조금만 더....힘내요.

다른 좋은 세상을 조금만 더 이리저리 

여행하다가 저에게로 돌아오세요. 

저는.......기다릴게요. 

더 이상 내가...무너지지 않게.......

사랑해요. 오빠]

내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사랑스러운 목소리였다.

분명히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인데.......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예쁜 목소리가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꿈인지도 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사랑스럽게 속삭이는 이 목소리를 더욱 오래 듣고 싶었다.

또다시 오랫동안 굳어 멈춰있던 내 머리가 조금씩 깨어났다.

내 몸 어딘가가 계속 간질간질했다.

누군가가 나를 간지럽히는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또 다시 짙은 미련만 남긴 채, 잠에 빠져버릴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으음.....어떡해 또 나왔어....다 젖어버렸네.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이거 나오면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했는데........”

그 목소리였다.

흐릿하게 들려오는 이 목소리가 너무나 반가웠다.

오래전 언젠가 어둠에 빠져 있을 때, 내게 속삭였던 목소리 중에 하나였다. 

“에휴.....힘들어서 어떡해요.....많이 힘들죠?”

하지만 이번엔 분명히 달랐다.

희미하게 뭉개져 어렴풋이 들려오던 이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이제 어서 기운 차려요. 

이러고 있으니까....내 마음이 너무 아파...

언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요.

근데 내가 물어봐도 언니는 아무 말도 안 해.

언니가 계속 야위어가요. 

어디 아픈 거 같기도 하고.......“

계속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나는 온 힘을 다해 눈을 뜨려고 노력했다.

천지분간 할 수 없던 암흑이 조금씩 변해 눈부신 빛이 새어 들어왔다.

눈이 부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조금 열린 눈 속에 들어와 박히는 그 밝은 빛이 너무나 아려, 다시 눈을 꼭 감았다가 뜨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나는 어딘가에 누워있었다.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온 건 하얀 천정이었다. 

그리고 내 주위엔 알 수 없는 기기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삑.........삑......삑.....삑...삑....삑.....]

전자음이 들렸다.

그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리 듯, 조금씩 빨라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던 고개를 간신히 아래로 조금씩 내렸다.

머릿결이 풍성한 갈색 긴 머리를 한 여자의 두 손이 내 몸 중간 어딘가에 닿아 움직였다.

여자는 편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삑삑 되는 전자음이 더욱 빠르게 울렸다.

그 경박한 소리에.

내 몸 어딘가에 머물러 움직이던 여자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여자는 잠시 그렇게 얼어붙어 있었다.

여자의 머리가 천천히 나를 향해 움직였다.

화장기가 하나도 없는, 너무나 피곤하고 수척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새하얀 그 얼굴이.......너무나 예뻤다.

하지만 나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자의 커다란 두 눈망울이 똑바로 내 눈에 머물러 있었다.

“흐윽.........”

무표정하게 나를 보던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왈칵 터져 나와 볼록한 두 뺨을 빠르게 적셔 나갔다.

“어.....어떡해..........오......오빠!”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선생님.......흐으윽.....”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여자의 손길이 머물러 있던 아래를 봤다.

그곳엔,

내가 입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하얀 환자복 하의가 벗겨져 있었다.

핏기 하나 없이 이미 죽어버린 듯한 내 성기가 완전히 쪼그라들어 있었고, 그 주위엔 하얀 것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여자의 손길이 머물러 그것을 닦다 만, 흰 수건이 내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힘겹게 들어 올린 내 머리가 다시 뒤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환하던 눈가가 깜깜하게 변해버렸다.

“김...김...치우 씨....환자분.....정신이드세요?”

누군가가 내 뺨을 계속 두드려대는 통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이 열리자 주위에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깨어났다!!!”

그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김...김 치우씨.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어요?”

흰 가운을 입은 채, 연신 내 뺨을 두드리던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천천히.....괜찮아요....”

“여기.......어디........”

간신히 한마디 말을 뱉어 냈다.

“여기.....병원입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왜....내가.....”

“교통사고....뇌....동맥류.......”

남자는 내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서둘러 대답했다. 

이상하게도 그 남자의 눈가에 지금 나처럼 눈물이 맺혀 있는 것 같았다.

“교수님 왔어요!”

간호사들이 트레이 같은 곳에 무엇인가 가득 담긴 것을 들고 뛰어 들어왔다.

의사의 손길이 주위에 있던 기기에 닿아, 주사바늘로 노란 액체를 주입하자 또다시 스르륵 눈이 감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창가를 통해 새어 들어오던 눈부시게 밝던 빛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천정에 달린 형광등만이 내가 누워있는 병실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던 그 여자.

침대 곁에서 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가가,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여자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형부. 이제 정말 괜찮아요? 이제 깨어 난 거예요?”

‘형부?’

여자가 나를 형부라고 불렀다.

그 여자를 보며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갑자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왈칵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머릿속에 깊이 박혀있던 그 소중한 기억들이...

낡은 흑백 사진처럼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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