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177)

Depravity (14)

화창하던 하늘에 짙은 빛깔 구름들이 서서히 몰려오고 있었다.

곧 매서운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가끔 커다란 골프백을 매고 건물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를 타고 떠났지만, 맞은편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그 검은 차는 미동도 없이 그렇게 서 있었다. 

머리에 약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감쪽같이 사라졌던 두통이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듯했다. 

며칠 전 신경정신과에서 처방해준 약봉지 하나를 뜯어 입에 틀어넣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두통은 호전되지 않고 더욱 심해졌다. 

원래 이 약은 흡수가 빨라, 먹고 난 후 금방, 조금이나마 두통을 진정시켜주는데,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다. 

또 하나를 뜯어 삼켰다.

오늘 아침.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콜록....콜록.....”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을 하면서 숨이 입 밖으로 나올 때 마다, 머리의 어느 부분이 무엇인가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에, 한쪽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뒷자리에 있던 노트북을 가방에서 꺼내 전원을 켰다.

사진 폴더에 들어갔더니 날짜별로 정리된 수없이 많은 노란 폴더들이 펼쳐졌다.

첫 데이트..

벚꽃..

외박..

첫 여행..

프로포즈하던 날..

.

.

.

.

.

.

폴더 하나를 열어 첫 번째 사진 파일을 클릭했다. 

반짝이는 크리스털 같은 너무나 예쁜 스웨터를 입은 은비가 동그란 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은비의 볼의 발그레했다. 

노트북 액정에 사진이 하나씩 천천히 지나갔다. 

잔뜩 긴장한 채, 어색하게 서 있는 내 옆에 은비가 내게 팔짱을 끼곤,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들은 은비와 첫 데이트를 하던 날이었다.

아내와의 기억들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항상 이런 식이에요?]

[네?]

[항상 이런 식으로.......여자 손님들한테.....그러시는 거냐구요.]

[아니요. 그게....아니고요..........아....불괘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커다란 눈으로 화가 난 듯, 나를 보며 매섭게 쏘아붙이던 그때의 은비 얼굴이 떠올랐다.

단골손님이었던 은비가 올 때마다 케익이나 쿠키 따위를 그냥 내어주자, 어느 날 은비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날 은비는 내게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도 않고 쌩하니 카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서서 가게를 빠져나가는 은비의 뒷모습만을 바라봤었다.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은비가 앉아 있던 창가 자리를 정리하러 갔다.

테이블 위에는 깔끔하게 비워진 아메리카노와 무스케익을 담았던 접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너무나 예쁜 영어 글씨로 쓰여진 메모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오늘....아메리카노와 

지금까지 내어주셨던 

너무나 달콤한 쿠키와 케익 값은, 

다음에 제가 다른 음식으로 

대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메모지 아래에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우리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 노트북 화면에 떠있는 은비와 내 사진은 이 일이 있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만났던 우리의 첫 번째 데이트였다. 

이 날.....

나는 결심했다.

이 은비라는 이 여자와 내 삶을 함께 하고 싶다고.... 

노트북에 열려있던 모든 창을 닫았다. 그리고 사진 파일이 들어 있던, 파티션을 포맷했다.

그리고 노트북을 초기화 했다. 

재부팅된 화면에는 몇몇 파일만 덩그러니 흩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CMOS에 진입해 나눠져 있던 파티션을 모두 날려버렸다.

스마트폰 화면에 모든 자료를 삭제한다는 경고문구 아래, 공장초기화를 수락하는 버튼이 떠있었다. 

‘이 버튼만 누르면 나는 세상과 단절된 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아내가 축 늘어져 잠들어 있던 새벽. 

아내의 스마트폰에서 봤던 그 메시지들이 머리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더 이상 그것을 본다한들.....

나에겐....아무런 의미도....

그리고 달라지는 건 없다.

[니가 오늘 한 약속은 절대 잊지 마라]

[금요일 저녁에 모임 있으니까. 준비하고 있어.

내가 오후 4시쯤에 데리러 학교로 갈 테니까]

스마트폰에 아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어플에는 아내가 지금까지 내게 보냈던 수많은 메시지와 우리가 주고받았던 추억들로 빼곡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오늘 새벽에 도착한 그 것.

나는 차 스피커에 블루투스로 스마트폰을 연결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했다.

만개한 벚꽃처럼 새하얀 정장을 입은 여자가 문을 열고 룸으로 들어섰다.

여자는 잔뜩 긴장해 있는 것 같았다.

그 룸은 내가 기억하는 공간이었다.

룸에 있던 소파위에서 처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뒤엉켜 움직이던 바로 그 곳....

[어? 왜왔어? 내가 더 이상 볼 일없다고 했잖아]

소파에 편하게 앉아 있던 황 경태가 이제 막 방안으로 들어선 여자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했다.

여자는 자신이 들어왔던 문을 닫고,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된 채, 그렇게 말없이 서있었다.

문 앞에 초라하게 서있는 여자는 아내였다.

새하얀 그 정장은 며칠 전 아내가 학교에 행사가 있다고 한 그 날....

피곤에 지친 채,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곤 내개 안겨 금방 잠들어 버렸던.....그 날....

담배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있던 바로 그 옷이었다. 

황 경태가 문 앞에 서있는 아내를 잠시 보더니, 개의치 않는다는 듯 시선을 돌려 테이블에 있던 노트북을 다시 들여다봤다.

화면이 정지된 듯, 

아내는 가만히 서서 황 경태만을 보고 있었다. 

황 경태는 아내를 없는 사람처럼 투명인간 취급했다. 

가만히 서있던 아내가 황 경태가 앉아 있던 소파로 한걸음씩 다가갔다.

아내의 발걸음이 멈췄다. 

[미안해요. 제가......미안해요....]

황 경태가 앉아 있던 소파 바로 옆에 서서 아내가 말했다. 

아내의 목소리는 주눅 들어있었고, 몹시 떨렸다.

계속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황 경태는 그런 아내를 보지도 않고 담배를 한 개비 집어 들어 불어 붙였다.

황 경태가 짙은 담배 연기를 옆에 서 있던 아내에게 아무렇게나 뱉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아내를 빤히 올려다봤다.

[왜? 니 동생년 여기 데리고 와서 따먹는 거 보니까 그때 서야 정신이 들었어?]

황 경태가 짙은 담배 연기를 옆에 서 있던 아내의 얼굴을 향해 다시 뱉어내며 말했다.

[은설이....니 동생 말이야. 쓸만해...

몸에 탄력도 있고...

유연해서 떡칠 때도 희한하더라고...허허...

어떻게 다리가 그렇게까지 벌어지나...

그리고 무용해서인지 떡감도 좋고 말이야.

자매라서 그런지 니 몸하고도 닮았던데?

야들야들하니...

아직 남자 손이 많이 안탔는지 조금만

데리고 놀면서 가르치면 너 못지않을 거 같다.

너한테 이젠 관심 없으니까. 그만 가봐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너고, 

나는 내 스스로 방법을 찾았을 뿐이야]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이제 더 이상 너 안건드릴 테니까. 그냥 가.

대신...니 동생년 데리고 놀면 되니까.

어제 내가 보낸 파일 다 봤지? 

니 동생 말이야...보통 아니던데?

처음에는 마지못해 대주는 것 같더니.

하다보니까 질질 싸면서 자지러지는 거. 

너도 다 봤지?

그날 두 번이나 안에다 쌌는데. 

피임은 어떻게 했나 몰라? 

약은 먹었대?

여기 와서 나한테 몸 대주고 갔다고 

너한테 이야기 안 해?

계속 만나다보면 보면 혹시 알아? 

니 동생이 나하고 눈 맞아서 결혼하자고 할지.

흐흐흐...그러면 내가 너 제부가 되는 거네?

그럼......개 족보지만....

그것도 나한텐 나쁘지 않은 일이야.

그것도 안 되면....

저번처럼 애들 시켜서 니 남편, 치우 새끼

쥐도 새도 모르게 산에 파묻어 버리든가...

그렇게 되면 너하고 니 동생 둘이만 남네...

흐흐흐...]

[흐음.....]

흐느낌인지 한숨이니 모를 것이 아내의 입에서 새어나와 희미하게 차안에 울렸다.

아내가 고개를 들어 천정 한쪽을 바라봤다. 

천정에 달린 카메라를 찾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아내의 한없이 떨리는 두 눈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 정성스레 화장을 한 것처럼, 평상시보다 매우 진한 화장을 한 아내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 보였다.

새까만 마스카라로 한껏 위로 뻗어있는 아내의 눈썹이 천천히 깜빡이자 짙은 눈 화장의 깊은 눈매가 소름 돋을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 

아내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멈춰있던 아내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정장 재킷을 하나로 연결해 타이트하게 여미어져 있던 재킷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러자 아내의 몸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던 그것이 힘없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아내는 하얀 재킷을 벗어 가지런히 겹쳐 놓고서 몇 발자국 움직여 반대쪽 소파 끝에 조심스레 걸쳐놓았다.

황 경태의 시선이 그런 아내를 따라 함께 이동했다.

아내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자신의 목덜미를 얇게 감싸고 있던 하얀 스카프 한쪽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부드럽게 매듭져 있던 그 스카프가 길고 징그러운 하얀 뱀처럼 아내의 목덜미를 핥아 내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황 경태는 아내가 서있는 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려, 그런 아내의 움직임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내와 황경태의 시선이 서로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춰있던 아내의 손이 다시 뒤로 향했다. 

그러자 아내의 몸을 감싸고 있던, 무릎 바로 위까지 오던 타이트한 하얀 스커트가 조금씩 느슨해졌다.

아내의 몸을 타고 아래로 조금씩 미끄러지던 그 스커트가 아내의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아내의 두 손이 자신의 골반에 걸려 있던 그것을 떨리는 손으로 아래로 당겨 내렸다. 

스커트가 옅은 분홍 빛깔 하이힐을 신고 있던 아내의 발목에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하얀 블라우스 아래, 아내의 길게 뻗어 있는 맨다리와 흰색 팬티가 반 이상 드러나 보였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보던 황 경태가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아 들였다. 

블라우스 단추가 위에서부터 하나씩 풀려나갔다. 

하얀 브래지어에 감싸여 있던 숨겨진 아내의 가슴골이 위쪽부터 조금씩 보이다 어느새 완전히 들어나 있었다.

아내의 몸을 떠난 블라우스가 정장 재킷이 있던 소파에 걸쳐졌다.

눈부신 아내의 몸에 걸쳐져 있는 것은,

새하얀 피부를 바짝 감싸고 있는 브래지어와 팬티

그리고 옅은 핑크색의 빛나는 하이힐뿐이었다.

아내가 고개를 들어 황 경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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