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ption (16)
한적한 국도에는 울긋불긋한 옷을 갈아입은 작은 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아, 조금 전까지 식별 가능했던 산을 수놓고 있는 화사한 그 색상이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문득 돌아가신 장인어른이 떠올랐다.
자식을 해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며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갈등을 했을지 생각이 들어, 내 가슴 한쪽에서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의 아내, 은비.....
은비와 내가 약혼을 하고 파타야에 다녀온 뒤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나와 은비와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더 이상 정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은비는 나와 결혼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게로부터 협박을 당했다. 그 위협의 대상이 은비 자신뿐만 아니라 동생인 은설이에게 까지 뻗혀 있었다.
몇 달 전 어머님이 일본에 거주하는 이모님에게 간다고 했을 때, 은비는 은설이를 데리고 가라고 어머님에게 끈질기게 부탁을 했었다. 결국 일본으로 가기 싫어하던 은설이는 어머니의 설득에 출국 길에 올랐다.
그 당시에 나는 은설이를 일본으로 보내려고 하는 아내의 행동이 나와 단 둘이 신혼생활을 보내려고 그런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은비는 은설이를 어떤 위협의 대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시키고 보호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되었다.
동일인물이든.....아니든......
아버님을 협박해 죽음으로 내몬 위협의 주체와 은비에게 접근해.....이미 그녀를 망가트려버린 대상이 분명히 나는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 위협의 대상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위협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고 우리의 삶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그것들을 막아내고 싶었다.
내가.....상처받고.....처참하게 무너져 내려도......
창밖에 노란 불이 켜진 첨성대가 눈에 들어왔다.
많은 관광객들이 그 주위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잠시 스쳐지나간 그들의 표정이 지금의 나완 다르게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어느새 차는 보문호가 시작되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쓸쓸하게 변해버린 노랗게 가로수들이 줄지어 나를 반기고 있는 것 같았다.
보문호 중간 대형 리조트 입구에 플랜카드가 붙어 있었다.
[소린중학교 1학년 경주 현장학습을 환영합니다]
나는 몇 개로 나눠져 있는 리조트 주차장을 천천히 돌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주차장 몇 개를 돌아 로비가 보이는 보문호 앞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내 차가 멈췄다.
내 심장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아내와 닮은 새하얀 차가 한쪽에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아내의 차가 잘 보이는 맞은편에 주차를 했다.
환하게 불을 밝힌 리조트 로비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정면에 주차되어 있는 아내의 차 블랙박스에서 이따금씩 푸른 불빛이 반짝리는게 보였다.
막상 아내가 있는 이곳 리조트까지 와서 아내의 차를 발견했지만,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차에 앉아 고민에 빠진 채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배가 고팠다.
카페에서 미나와 세희가 음식을 사와 내게 전해줬지만 나는 그것을 깨작깨작 제대로 먹지를 못했었다.
나는 고민을 하다 차를 빠져 나왔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나를, 당장 아내가 스쳐지나가도 나를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주차를 한 바로 아래 보문호가 펼쳐져 보였다. 보문호를 빙 둘러 노란 불빛이 수놓아 있는 광경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아마 아내도 이 광경을 보고 좋아했으리라.....
나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담배 한 갑과 샌드위치와 커피, 우유 따위를 사서는 내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내의 차가 잘 보이는 곳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던 탓인지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던 편의점 샌드위치 맛이 나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내 시선은 아내의 차와 리조트 로비만 번갈아 가며 그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내가 앉은 벤치 앞을 지나던 한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빤히 보더니 쭈뼛쭈뼛 내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 누구니?”
“안녕하세요. 저번에 학교에서 아저씨한테 인사드렸었는데요....”
녀석이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모자를 눌러쓴 나를 자세히 훑어보고 있었다.
“어!!! 너.......”
“1학년 2반 이 은비 선생님 남자친구 아니에요? 지난번에 학교에서 인사 드렸었는데......”
녀석은 지난번 아내의 학교에 갔을 때 회의실에서 양 선생이 아내를 몰아세우던 그날.....만났던 녀석이었다.
“너....난지 어떻게 알았어?”
“헤헤헤.....”
녀석은 날 보며 말없이 배시시 웃고만 있었다.
“이거 마실래?”
나는 녀석에게 편의점에서 사온 바나나우유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녀석은 그것을 받아 들고 내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당황스러웠다. 녀석이 어떻게 나를 알아봤는지......그렇다면 아내도 나를 한 눈에 알아보는 건 아닐지 걱정이 밀려왔다.
“이 은비 선생님 만나러 오셨어요?”
내가 건네준 바나나 우유를 빨대로 빨아먹으며 녀석이 말했다.
“아....아니......”
“그러면.....서프라이즈에요?”
“응?”
“몰래 와서 이 은비 선생님 깜짝 놀래켜 주려고 오신 거예요?”
녀석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음......너 이름이 뭐야?”
“저요? 윤 승현이요...”
“승현아....서프라이즈 맞아. 그런데 나하고 약속하나 해줄래? 이 은비 선생님이나.....니 친구들에게는 나를 봤다는 거 비밀로 해줄 수 있어?”
나를 보는 녀석의 얼굴엔 장난스런 미소만이 가득했다.
“히히히....알겠어요.”
“고맙다.....”
혹시나 녀석이 나를 봤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까 잠시 걱정이 되었지만. 그 눈빛이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갔다.
한동안 말없이 노란불빛을 머금은 호수만을 바라봤다.
“근데요......어제 이 은비 선생님 울었어요.....”
녀석의 말에 넋 놓고 호수를 바라보던 중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 울......울었어? 이 선생님이?”
“네. 1학년 5반 선생님하고 싸웠어요. 아니지....싸운게 아니고요. 일방적으로.....당했어요.”
“뭐? 그...그게 무슨 말이야? 1학년 5반 선생님이 누군데”
“양 희진 선생님이요. 양 희진 선생님이 이 은비 선생님한테 막 소리 질렀어요.....”
“음.....이 은비 선생님이 무슨 잘못을 했어?”
“아니요. 양 희진 선생님 원래 그래요. 애들이 다 싫어해요. 매일 화만내고.....”
“그랬구나......이 은비 선생님 이전에도 학교에서 울고 그랬어?”
“아니요. 이 은비 선생님은 매일매일 예쁘게 웃어요....히히히....”
아내는 어제 또 그 양 선생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내가 구석에 앉아 울고 있는 장면이 연상이 되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아.....이제 가야겠다.”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에 손에 들려 있던 바나나우유가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아저씨. 전화번호 알려줄래요?”
“어? 내 전화 번호? 그건 왜?”
“음....다음번에 또 이 은비 선생님 울면요. 내가 알려드릴게요. 그러면 아저씨가 이 은비 선생님 울리는 사람 혼내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녀석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녀석이 떠나고 홀로 담배만 펴대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9시가 훌쩍 넘어있었고,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비던 리조트 로비가 한산하게 변해있었다.
호수에 찬바람이 불어 쌀쌀하게 느껴졌다.
마저 남은 담배를 다 피고 차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라 옆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오늘이 마지막이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옆 벤치에 사내둘이 자리 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독한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야! 너 그 소리 들었어? 이 은비 선생 교감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
남자들의 역한 냄새에 벤치를 떠나려는 순간......나는 조용히 다시 자리를 잡았다.
“뭐? 누가 그래?”
“교감하고 이 선생하고 밤에 둘이 학교에서 있는 걸 누가 봤데......근데 분위기가 묘했다든데...”
“양 선생이 그랬지?”
“어...너 어떻게 알았어?”
“하여튼 양 선생 그 여자 그 참.....왜 이 선생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어제도 이 선생한테 하는 거 봐. 어제 양 선생한테 당하고 이 선생 우는 거 보니까 내가 다 맘이 짠하더라....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학교에서 이 선생 안 좋아하는 남자 있어? 예쁘고 몸매 좋지 똑똑하지 일 잘하지.......”
“음....그건 그래. 하하하......”
“양 선생이 이 선생한테 왜 그런지 몰라서 그래? 양 선생 아직까지 쓸만하잖아. 그 나이에 잘 꾸미고 얼굴도 그 정도면 반반하고......성질이 더러워서 그러지...
이 선생 우리학교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교장, 교감 남자 선생들 양 선생하고 술 한 잔 마시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 선생이 와버리니까 양 선생은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된 거지.....
지한테 쏠리던 관심이 싹 다 이 선생한테 넘어가버리니까.....샘나서 그런 거지”
“으하하하.....하긴 좀 안됐어. 양 선생. 여하튼 여자들이란 유치하게 왜들 그래....어이그....”
“야. 그건 그렇고. 오늘 이 선생 스커트 입은 거 봤지?”
“하늘색 딱 달라붙는 거?”
“와......지금까지 이 선생이 입고 온 옷 중에 정말......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스커트에 이 선생 몸매 그대로 다 보이두만......엉덩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세히 보니까 거기......보지 불룩한 거까지 표시나더라....”
“하하하....미친놈. 선생이라는 놈이.....말조심해라....보지가 뭐냐 보지가......”
“오후에 애들하고 행사할 때 이 선생 무대에서 춤췄잖아. 애들이고 선생이고 고추달린 것들은 다 선생 몸매만 뚫어져라 보고 있더라.
그리고 호텔에 일하는 놈들하고 지배인까지 와서 얼굴 벌개서 이 선생 춤추는 거 보고 있더만.....”
“음.....누가 이 선생 데리고 사는지 존나게 부럽다......그 얼굴에....몸매에......또 색기까지 있어요.......이 선생 같은 여자하고 딱 일 년만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하하....좋을 거 같지? 이 선생 같은 여자하고 산다고 생각해봐. 니 마음이 편하겠냐? 이 선생이 살림만 하는 여자도 아니고 밖에서 사회 생활하는 여잔데....
이 선생 같은 여자가 밖에서 일하면 주위에 남자들이 가만히 두겠어? 남자들한테는 이 선생같이 생긴 여자는 결혼을 했건 안했건 중요한게 아니야.
무조건 한번 역어서 따먹으려고 하는 놈들뿐이야.
솔직히 말해서 나도 기회 되면 이 선생하고 따로 만나서 한잔하고 자빠트리고 싶어서 미치겠는데....
그리고 이 선생은....아닌 듯하면서......끼가 있어. 남자들 홀리는......화장하는 것도 그렇고 옷 입는 것뿐만 아니라, 말투나 행동하는 거 보면 남자들이 미치지..........절대 가만두지 않아.”
“하하....야....말 나온 김에 지금 이 선생 1층에 있는 Bar로 나오라고 해서 한잔할까?”
내손에 끼워져 있단 담배가 어느새 필터까지 타들어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