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77)

Reunion (1) 

[직원구함]

다이엔 카페에서 함께 일하실 참신한 직원 분을 구합니다.

“바리스타 자격증” 소지 하신 분 우대 (필수사항 아님)

최저임금, 근로기준법 준수

- 인 원 : 女, 1명

- 근무시간 : 오전 11시 ~ 오후 7시 (조정가능)

- 지원방법 : 카페내방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이는 어느 날 아침, 

내 손에는 방금 프린터기에서 출력해 아직 그 온기가 남아 있는 새하얀 A4 용지가 들려 있었다.

미나가 가게에서 모습을 감춘지 벌써 3주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체중이 5킬로 나빠져 버렸다. 

점점 야위어 가는 내 꼴이 보기가 좀 그랬는지 가끔 단골손님들이 간단한 음식이나, 피로회복제, 비타민 같은 것을 나에게 슬며시 전해주기도 했다.

혼자 꾸역꾸역 가게를 꾸려오다 보니 체력은 완전히 바닥이 났다. 

어제 밤 카페 문을 닫으며 결심했다. 내일은 반드시 새로운 알바를 구해야겠다고....

하지만 지금 나는 출력한 A4 용지를 들고 가게 앞에 서서 그것을 문 앞에 붙이지 않고 또 다시 망설이고 있다.

‘하루만이다. 정말 오늘 하루만이다.....오늘 하루만 참아보자......내일은 꼭......이 종이를 붙일 것이다’

나는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하얀 종이를 내려다보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알바 구해드려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무렵 자주 오던 녀석이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네 왔다.

“응?”

“후배 중에 어학연수 갔다가 돌아온 애가 있는데요. 복학 텀이 안 맞아서 놀고 있는 애가 있거든요. 걔도 커피 좋아하는데.....글구.....예뻐요....하하하....”

건강한 치아를 들어내며 웃는 녀석을 보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전화 해봐요? 오늘 학교에 놀러 왔던데....”

“음....알바는....내일 구할 거야. 보고 내일 연락할게.” 

나는 싱크대에서 손님들이 깔끔하게 비워낸 머그컵을 하나씩 씻어 냈다. 새하얀 머그컵에 묻어 있는 까만 커피의 흔적이 예전과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상태 형 주점에서 그 일이 있은 후 승호를 보지 못했다. 정 수연도 마찬가지였다.

퇴근길에 자주 들리던 승호의 모습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왠지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손바닥이 쓰라렸다.

그날의 흔적.

은비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날. 3주가 지났지만 내 손바닥에는 그날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는 머그컵을 씻다가 말고 쓰라린 내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칵테일 잔에 이곳저곳 베여 빨갛게 딱지가 내려앉은 그곳을.... 

“사......사랑해요.....”

또 다시.....분명하게 들렸다.

은비는 축 처진 채, 내 등에 업혀있었다. 그리곤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냘픈 두 팔로 내 목을 살며시 두르곤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은비의 몸이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화장실에서 그 돼지새끼에게 만신창이가 된 은비가......나에게 업혀 사랑한다고 살며시 말하고 있었다. 그 대상이 나인지 아니면 누구인지 알 수는 없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엄마 이후로 가장 사랑하는 여자가 술에 취해 누군지도 모를 남자에게 마음껏 희롱 당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갈림길에 서있다.

은비의 아파트에 도착하니 다행이도 은설이는 그곳에 없었다. 은설이가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은비를 살며시 침대에 뉘었다. 

내가 이곳에 올 때 마다 은비와 사랑을 나눴던 그 침대에...

눈을 꼭 감고 흐트러진 몸가짐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은비에게서 예전의 그 천사 같은 모습은 이미 사라져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은비의 몸에는 단지 참혹함만이 깊게 남겨져 있었다. 

뜯겨진 원피스 사이로 은비의 뽀얀 가슴이 금방이라도 아래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 남자에게 몇 번을 반복해서.... 씹하고 빨린 가슴 주위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말려 올라간 원피스 아래에는 팬티를 입지 않아서인지 예전과 같은 깔끔하게 정리된 검은 털이 드러나 보였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남자의 거친 손길에 상처 입은 흔적과 속살에서 새어나온 분비물이 뒤엉켜있었다.

은비의 얼굴을 더욱 빛나게 했던 진한 화장이....그 화사한 조합의 색조가 지금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여 은비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눈가가 뜨거워져 이내 흐려졌다.

우두커니 서서 침대에 쓰러져 있는 은비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결단은 계속 지체되고, 연기되어 갔다. 

[딸랑]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마치 깊은 체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내 손에는 씻다만 머그컵 한 개가 들려있었다. 

“어? 미나 씨!!!”

녀석의 놀란 목소리가 가게에 울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게 입구를 바라봤다. 

예전과 조금 달라진 한 여자가 서있었다. 머리칼이 조금 길어졌고, 밝은 톤의 그 색상이 너무나 짙은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 야윈 건지 얼굴에 살이 빠져 예전의 그 미나인지 쉽게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미나는 가게 입구에 서서 다소 주눅든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미나의 눈빛에 수많은 생각들이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조 미나! 알바가 빠져가지고.....사장은 혼자 개 고생하는데....너 똑바로 안할래?”

미나는 내 눈치를 살피며 여전히 그렇게 서 있었다.

“조 미나. 뭘 보고 섰어. 조금 있음 손님 몰릴 시간이라 지금 바쁘니까. 빨리 준비해!”

조금 퉁명스런 목소리로 미나에게 쏘아 붙이자. 그때서야 미나의 입 꼬리가 조금씩 올라가......예전에 매일 봤던 그 미소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바쁜 오후였다.

3주 만에 처음 보는 미나에게 할 말도 그리고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밀려드는 손님 때문에 대화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미나와 얼굴을 맞대고 자리에 앉은 것은 저녁 손님이 모두 물러간 9시가 넘어서였다. 

테이블에는 근처 분식집에서 사온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사장님 오빠. 얼굴이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살이 쏙 빠졌어요?”

“하하.....사장님 오빠? 자식아 너 때문에......오늘 오후에 손님 몰리는 거 봤지......혼자 쳐낸다고.....으이구.....”

“힘들면 알바를 구했어야죠......바보처럼 그걸 또 혼자 해요.....어휴....답답해...”

“그래. 3주 동안 놀면서 뭐하고 돌아다녔어?”

“한 일주일 일본 갔다 왔어요. 삿포로.....”

“잘 하는 짓이다. 니가 세상에서 팔자가 제일 좋구나. 부럽다 부러워.”

“근데, 일도 하지 않았는데 왜 월급은 다 입금했어요? 사장님 부자예요? 내가 빠듯한 형편 뻔히 아는데, 헤헤헤...” 

한동안 가게에 미나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이블에 있던 분식이 거의 사라질 때 즈음....

미나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무엇인가 계속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음........은비.....은비 언니는요?”

미나가 너무나 작은...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나는 미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미나가 떠나가고 가게를 정리한 후에 창가에 앉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게 보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승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그와 가게에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오후 10시가 지난 시간....

가게 앞을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이 모습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더 이상 승호를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하고 가게 문을 닫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시야에 들어온 하얗게 빛나는 무엇인가 때문에 나도 모르게 건너편에 시선이 갔다.

내 심장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곳에는 우윳빛 밝은 색 계통의 H라인 하이 스커트와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서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그 여자가 이쪽으로 천천히 건너오고 있었다.

여자의 허리 조금 위부터 시작해 골반과 무릎 조금 아래를 타이트하게 감싸고 있는 그 스커트가 안 그래도 날씬한 몸매와 긴 다리를 더욱 도드라져보이게 했다. 

은비였다.

은비가 걸어올 때 주위의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의 엉덩이와 늘씬한 다리......그리고 밝게 화장을 한 얼굴을 바삐 훑고 있었다.

[딸랑.....]

은비가 가게에 들어와 나를 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빠.....”

“은비야....”

하지만 환하게 웃던 은비의 얼굴이 갑자기 어둡게 변했다. 아마도 내 꼴을 보고 다소 놀란 듯 보였다.

“오빠....얼굴이......살이 왜 그렇게 많이 빠졌어요?”

밝은 갈색 아이부로우를 한 은비의 눈썹이 조금 찌푸러졌다. 그러자 나는 괜히 내 얼굴을 손으로 한번 쓰다듬었다. 

“오랜만이다.......앉아.”

은비가 내가 있던 창가 자리에 다가와 앉자 벌써 그녀의 향기가 카페에 가득했다. 은비의 얼굴 또한 다소 야위어져있었다.

테이블에는 갓 내린 뜨거운 커피에서 뽀얀 김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나도....은비도....한동안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그날.......”

은비가 붉은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한번 살짝 깨 물고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때.....몸은 괜찮았어?”

“네.....그리고 그날 집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은비가 기억을 하고 있다. 엉망으로 망가진 그날......내가 집까지 바래다줬다는 것을......

“오빠....모든 게 고마워요.”

은비의 반짝이는 눈동자 주위가 조금씩 붉게 번지고 있었다.

“그날 오빠 아니었으면.....나....그....남자들한테 끌려가서 엉망이 되어버렸을 거예요. 하지만....그날은....내가 그렇게 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날은....나 스스로 나를 버렸어요. 내가 망가지더라도.....나는 괜찮다....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날 그 술집에서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을 때 구석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는 오빠를 봤어요. 

그때 멈췄어야 했어요. 하지만.....오빠 보는 앞에서 내가 철저하게 망가져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오빠가......나 같은 여자를 완전히 잊을 수 있도록.....

나는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오빠에게.....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은비를 나는 그냥 담담하게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내 가슴은 나의 표정과는 정반대였다.

“오빠. 나는 이상한 여자예요. 

가끔 오빠와 함께 술자리 같은 모임을 나갈 때.....오빠가 잠깐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많은 남자들이 나를 뚫어져라 봐요. 그 눈빛은 오빠와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눈빛 이예요.

고백할게 있어요. 

나.....그날 술집에서 그랬던 거 것처럼......그 전에도.......다른 남자와 그런 적이 있어요.”

순간 내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버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