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45화 (1,925/2,000)

1945. ex wife-20-

한편 담배를 피우며 긴장을 푸는 척 하던 지안은, 은근슬쩍 희재를 살피는 중이었다.

'걸친 것마다 죄다 명품이네?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

처음엔 새벽 2시에 낯선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에 조금 겁이 났던 것이 사실이었다. 최근 들어 뉴스에 도배되다 시피한 강력 사건은 그녀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그게 토막 살인 사건이었던가? 어디 무서워서 남자를 만날수가 있어야지.'

하지만 결국 성욕은 두려움마저 이겨냈다.

딜도에 의지한 채 긴긴밤을 지새우던 지안으로선, 이번 클럽 가입마저 실패하면 정말 미쳐 버릴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상대가 때리거나 죽이지만 않는다면 차라리 자길 강간해도 좋으니 어떻게든 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약속 장소는 굉장히 비싸보이는 한옥식 요정.

새벽이 넘는 시간이었음에도 사방을 대낮처럼 환하게 조명을 켜둔데다, 고풍스러운 스타일의 건물은 너무나 고급스러워 보였다.

영화에서 나올 법한 옛 건물에, 일하는 직원들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남 직원들은 일제 강점기 모던 보이들이 입고 다닐법한 구식 정장 스타일을, 여직원들은 기생처럼 예쁘게 지은 한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마치 1900년대 초반으로 시간여행을 온 느낌.

길 밖에 인력거가 지나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유흥쪽으로 문외한인 지안으로서는 눈이 휘둥그레질 수 밖에 없는 고풍스러운 화려함.

이런 곳에 자신을 부른 상대라면 최소한 위험한 사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상대도 그것을 노리고 이곳을 약속장소로 잡은 것이겠지만.

'···어쨌든 돈이 엄청 많아 보이는 사람이구나.'

어느정도 긴장이 풀린 지안은 그제야, 희재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난교 클럽의 클럽장이라고 하니 섹스만 밝히는 변태 늙은이나 남성 호르몬 철철 넘치는 털복숭이 아저씨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희재는 무척이나 깔끔한 인상이었다.

검은 색의 두꺼운 뿔테 안경에, 반듯하게 다린 정장 셔츠. 손목엔 명품 커프스까지. 여의도 증권맨이라거나, 혹은 대형 로펌의 변호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로 뭐하는 사람일까? 엄청 잘생긴 건 아닌데, 어딘가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 같아. 적어도 난교 클럽의 클럽장처럼은 절대로 안 생겼는데.'

빠르게 스캔을 끝낸 지안이 홀로 술 잔을 홀짝거리는 희재에게 물었다.

"좋아요. 회장님 설명을 듣고나니 신상에 대한 부분은 저도 충분히 동감해요."

"네."

"그래서 저도 숨김없이 솔직히 밝힐 생각인데, 그전에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뭐죠? 말씀해 보시죠."

"회장님은 혹시 뭐하시는 분이죠? 이름이나 나이는요? 저는 클럽 회원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저만 신상을 밝히는 게 맞나 싶어서요."

"음."

지안의 당돌한 물음에 희재가 속으로 살짝 헛웃음을 지었다.

'이것 봐라? 오히려 자기가 먼저 묻는다고?'

예상치 못한 반응이지만, 지안의 이력을 사전에 파악한 희재는 그녀가 보통내기가 아닐 거라는 건 짐작하고 있었다.

'하긴 혐의가 진짜 사실이라면 남편을 죽이고 저수지에 유기까지 한 여자야. 사람을 죽여놓고도 태연했던 여자인데, 뭔들 무섭겠어?'

"제 이름은 김희잽니다."

"본명 맞나요?"

"굳이 보여드려야 믿는다면···."

희재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운전면허증을 내보였다.

그가 꺼낸 지갑마저 헤르메스라는 명품임을 빠르게 스캔한 지 안은, 신분증에 나온 사진과 희재의 얼굴을 여러번 대조했다.

"···이름은 틀림없네요."

"이제 믿겠습니까?"

"근데 나이가···."

"왜 그러시죠?"

"아뇨, 그 나이처럼은 안 보였거든요. 훨씬 더 어려보이시네요."

"그런가요?"

"음···. 사별한 제 남편이랑 동갑이기도 하고."

"그렇군요."

희재는 지안이 아무렇지 않게 이정우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독한년.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사별한 남편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 설거지도 모자라 도축까지 놓고, 죽은 전남편을 생각하는 것처럼 연민을 유도하다니. 정말로 천하의 쌍년이구나.'

"근데 뭐하시는 분이세요?"

"제 직업요?"

"네. 면접 장소를 이런 곳으로 정한 것으로 봐선···. 돈을 꽤 잘 버시나봐요? 아니면 물려받은 유산이 많거나."

희재는 지안이 자신의 재력을 체크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뭐야? 내가 돈 많으면 나도 도축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천박한 년이로구나. 아주 재밌어.'

희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면접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것은 늦게까지 열린 장소가 술집말고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곳 말고도 다른 술집도 많을 텐데요?"

"그렇긴 하지만 이곳만큼 보안이 철저한 곳은 없거든요."

"보안이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은 정관계 현직 인사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건 잘···."

"여기서는 방에서 사람을 죽여도 절대 신경쓰지 않거든요."

"네, 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습니다. 이곳의 가장 훌륭한 점은 손님이 부르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룸으로 들어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비밀스러운 밀담이 많이 오가기 때문에 정한 원칙이 죠. 가령···."

희재가 갑자기 지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최지안씨를 여기서 강간해도 누구 한 명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 그게 무슨···."

지안이 움찔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나자 희재가 갑자기 환하게 웃더니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농담입니다 최지안씨. 저희 클럽에 입단도 안한 분을 제가 어찌 감히."

"······."

지안은 방금 전 희재가 짧게 보여준 위협에 놀라고 말았다.

만만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눈빛에서 차분한 광기가 번뜩였던 것이다.

'···맑은 눈의 광인이야 뭐야? 무슨 저런 농담을.'

하지만 동시에 지안은 간만에 심장이 콩딱거렸다.

희재가 자신을 강간해 버린다는 농담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 지리고 말았던 것.

'···할테면 확 해버리든가? 말로만 하지말고.'

"자, 어쨌든 질문은 다 끝나신거죠?"

"아, 아뇨. 뭐하시는 분인지 물은건 아직 대답을 안해주셨는데요."

"개발자입니다."

"개발자요?"

"프로그램 개발자요. 코더라고도 하죠."

"IT 계열 일을 하시나 보네요. 그쪽은 되게 바쁘지 않나요?"

"그거야···. 능력없는 프로그래머들이나 그런 거고, 저처럼 잘나가는 프로그래머는 딱히 평소엔 할 일이 없죠."

"그래요?"

"이미 개발해놓은 애플리케이션에서 로얄티를 받고 있거든요.

가만히 있어도 수입이 들어오게 파이프 라인을 구축해 놨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여유롭게 클럽도 운영할 수 있는 거고요.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셨나요?"

"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이제 제가 클럽장으로서 지안씨에게 몇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대신 솔직하게 대답해 주셔야 합니다."

"···네."

"섹스를 좋아하시나요?"

지안은 더 이상 내숭떨지 않기로 결심했다.

괜히 순진한 척 해봐야, 득될 게 없다는 판단이었다.

"네."

"일주일에 평균 섹스는 얼마···. 아 죄송합니다. 남편분 생전에요."

"그건 남편이랑은 별로 상관없어요."

"네?"

"어차피 제 남편이 살아있을 때도 남편하고는 섹스리스 였거든요."

"그럼···."

"일주일에 최소 7번은 했죠. 물론 외간 남자랑."

뻔뻔하게 불륜 사실을 밝히는 지안의 태도에 희재도 슬슬 흥미가 끌어 올랐다.

'이제야 가면을 벗어 던졌군.'

"그렇군요. 똑같은 파트너랑 인가요?"

"설마요. 저는 남자 한명으론 만족 못하는 타입이거든요.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한 명만 물고빨고 하겠어요?"

"훌륭한 대답입니다. 저희 난교 클럽에 딱 어울리는 인재상이 랄까."

"호호, 방금 그 말 칭찬 맞죠?"

"네. 비꼬는 거 아닙니다. 저희 클럽을 찾으시는 분들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거든요. 섹스는 무조건 최대다수와."

"그럼 다행이구요."

"이번엔 좀 더 개인적인 질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네."

"애널 경험은 있으신가요?"

"네."

"참고로 이건 제 개인적인 호기심은 아니고, 나중에 파트너를 정할 때 필수 정보라서."

"상관없어요."

"상관없다는 게···."

"회장님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도 상관없다는 뜻이에요. 면접 보시는 거 아닌가요?"

'이것봐라? 아주 맹랑한 구석이 있구나.' 희재는 인터뷰를 진행할수록 최지안이라는 여자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보통 멘탈이 아닌 건 분명해. 처음 면접와서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 여자도 드문데.'

"2:1이나 3:1 같은 것도 해보셨습니까?"

"해본적은 없지만, 해야 한다면 할 수 있어요. 근데···."

"네?"

"기왕이면 남자 여럿에 저 혼자인 쪽이 더 좋을 것 같긴 하네요."

"아주 솔직하시군요."

"네. 솔직하게 대답해 드린다고 했잖아요."

"이번엔 저희 클럽의 운영방식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네."

"저희 클럽은 일주일에 한 번 정기 모임과, 그 밖에 상시 모임이 있습니다."

"상시 모임이요?"

"일종의 번개 모임이라고 해야 하려나? 단톡방에서 누군가 모이자고 하면 소수의 인원끼리 참석이 가능합니다. 단, 단 둘이 만나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로얄 클럽의 모토는 난교 클럽입니다. 말 그대로 소속된 회원들끼리 최대한 다양한 상대와 섹스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게 클럽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만약 1:1 만남을 허용하면, 단 둘이 눈이 맞아서 클럽의 목적을 훼손시킬 수 있어서 원칙으로 정했습니다."

"흐음, 그럼 개인적인 연락처는 못 주고 받나요?"

"네. 저만 모든 회원들의 연락처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 상시 모임은···."

"그것도 제가 주관합니다."

"잠시만요. 제가 혹시 이해를 잘 못한 걸수도 있는데 조금 이상한데요?"

"어떤 부분이 그렇죠?"

"가령 서로 연락처를 몰래 주고 받은 뒤에 클럽 모임이 끝나고 따로 만나거나 할 수도 있잖아요. 꼭 회장님을 거치지 않아도 ···."

"최지안씨."

"네?"

"제 직업이 뭐라고 했죠?"

"개발자요?"

"네. 맞습니다. 저희 클럽에 가입하면 핸드폰에 제가 별도의 해킹 어플을 설치합니다. 해당 폰으로 연락을 주고 받는 모든 통화문자 메신저 기록을 볼 수 있고, 위치까지 실시간으로 파악되죠."

"아···."

"물론 그렇다면 공중전화나 아니면 서로 세컨 폰으로 연락하면 어쩌나 하는 궁금증이 들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해당 방법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등록된 핸드폰 번호에 활동 반응이 없을 경우엔 불시에 인증 연락이 가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거든요."

"그럼···."

"맞습니다. 제 시간에 인증을 통과하지 못하는 경우엔 자동으로 클럽에서 제명됩니다. 즉, 등록된 폰을 놔두고 몰래 움직였다가는 결국 들킨다는 뜻입니다."

"그럼, 24시간 늘 폰을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잠을 잘때도요?"

"평소 쓰시던 것처럼 쓰면 됩니다. 인공지능이 사용자의 활동패턴을 분석해 맞춤식으로 대응하니까요. 전혀 차이점을 못 느끼실 겁니다. 몰래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요."

"굉장히 철저하군요. 마치···."

"맞습니다. 성범죄자에게 채우는 일종의 전자발찌와 흡사합니다."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클럽에 계속 남아있고 싶으신 분들은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편입니다. 혹시 지안씨는 위의 규칙이 불편하신가요?"

"아뇨. 저야 뭐···."

지안은 어차피 남자와 섹스를 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사적인 만남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다만 어떤 식으로 통제가 되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모임의 장소는 계속 변동됩니다. 원칙은, 하나의 건물을 통째로 빌리는 식입니다. 외곽의 팬션이 되었건, 혹은 호텔 한 층이 되었건···."

"호텔이요? 호텔 한 층을 통으로요?"

"네."

"그럼 돈이 너무···."

"그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모든 비용은 제가 부담합니다."

"아···."

"말씀드렸듯이, 저는 가만히 있어도 파이프라인으로 돈이 들어오거든요. 클럽 활동을 하면서 활동비가 드는 부분은 전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니 뭐, 제가 그게 걱정된다는 건 아니고요."

지안도 재판이 잘 마무리되고 가처분된 유산이 풀리면 수십억대의 부자였다. 하지만 설명을 들어보니 눈 앞의 김희재라는 사람은, 자신과는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부자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가만. 저 사람이 이 정도로 어마어마한 부자라면···.'

지안의 눈빛이 야릇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은 남자를 도축하는 백정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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