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43화 (1,923/2,000)

1943. ex wife-18-

* * *

새벽에 일을 마친 희재는 불쑥 외로움에 휩싸였다.

신혼집으로 마련한 42평대의 아파트는 혼자 살기엔 너무나 넓었다.

집에 가득찬 혼수 물품도 싹 다 가져라고 했건만, 아내는 미안하다면서 자신이 사들고 온 혼수를 고스란히 놔두고 갔다. 텅 빈 집에 혼수 가전만 가득한 집에서 희재는 이따금 참을 수 없는 공허함을 느꼈다.

'하여간 돈이 많아봐야 아무짝에 쓸모 없다니까? 결국엔 인생은 독고다이로 혼자 가는 건데.'

희재는 다시 여자들을 부를 생각을 했다.

카지노에 데리고 갔던 민하와 나린은 자신이 고용한 일종의 직원이나 마찬가지. 나린은 본래 배우를 꿈꾸던 배우 지망생이었고, 민하는 취업을 준비하며 가끔 알바를 전전하는 중이었다.

로얄 클럽의 멤버인 두 사람에게, 희재는 자신이 월급을 대신 줄테니 필요할 때 부르는 조건으로 취업을 제안했다.

-아저씨, 설마 스폰 제안하시는 거예요? 나 좀 비싼데?

발랑 까진 나린은 앞으로 자기가 월급을 줄테니 하던 일을 그만 두라는 말에 피식 웃으며 까불었다.

-아시죠? 요샌 스폰 기본이 오피스텔 한 채에 생활비 별도라는거. 아저씨 돈 많아요?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얼마를 원하는데?

-음, 능력 되시는 만큼?

-근데 이거 스폰 계약은 아닌데?

-네?

-그냥 적적할 때 가끔 말 상대만 해주면 되는 일이야.

-엥? 그게 진짜 전부라고요?

-응, 대신 내가 원할 땐 낮이고 밤이고 바로 달려와야 하고. 어때?

-···아저씨 혹시 변태 아니죠?

그때 일을 떠올리자 희재가 피식 웃었다.

하루 종일 5만원권으로 세고 있어도 죽을 때까지 못 셀 만큼 엄청난 재산을 가진 그로서는, 나린의 톡톡 튀는 반응이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하지만 나린을 고용하고 난 뒤 한가지 문제점을 발견했다.

나린은 도발적인 매력이 철철 넘쳤지만, 대화상대로는 영 꽝이었던 것. 얼굴 반반하고 몸매 좋은 리얼돌을 세워 놓은 것과 다를게 없었다.

게다가 어린 나이에 클럽에 가입할 만큼 섹스를 지나치게 밝혀서, 희재가 원치 않는데도 맨날 달려드는 등 오히려 귀찮게 굴기 일수였다. 그나마 리얼돌은 멍청한 소리로 떠들지나 않지.

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주워담기 힘들다고 여긴 희재는 이번엔 나린의 대화 상대가 되어줄 친구를 한 명 더 영입했다.

그게 바로 민하였다.

마치 길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주워왔는데, 맨날 놀아달라고 징징대자 다른 고양이를 친구삼아 놀라며 한 마리 더 들이는 꼴이었다. 그렇게 합류한 민하는 나린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인상은 전형적인 청순 미인 스타일로, 반달처럼 휘어지는 눈 웃음이 매력적인 미녀였다.

다만 말수가 별로 없고 주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성격이었다. 그렇게 영입된 두 사람은 마치 희재의 애완동물처럼 그가 부르면 24시간 언제든 달려오기로 한 계약을 맺은 것이었다.

'흠, 일하다보니 새벽 1시가 넘어버렸네···. 지금 부르면 같이자야할지도.'

애초부터 스폰서 계약은 아니었지만, 민하와 나린은 워낙에 음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희재가 밤 늦게 부르면 그를 절대 혼자 재우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그냥 자자고 해도, 몰래 침실로 기어들어와 그의 잦이를 빨거나 얼굴에 가슴을 문지르는 둥 짖굿게 괴롭히기 일쑤였다.

오늘은 딱히 섹스할 생각이 없었던 희재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접었다.

'에이 됐다. 걔들도 가끔은 쉬어야지. 아무리 월급을 준다고 아무때나 자꾸 불러대면 악덕 고용주 소릴 들을지도.'

물론 악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월급을 주고 있는 희재였다.

그때 문득 희재는 아까 도박을 할 때 걸려온 한통으 전화를 떠올렸다.

'맞다. 신규 회원 문의가 있었지? 아까 전화 준다고 해놓고 깜빡해버렸네. 정신머리 하고는.'

로얄 클럽의 클럽장을 맡고 있는 희재는 회원 관리를 직접하고 있었다.

그가 직접 회원을 관리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비밀 사교 클럽의 보안이 황당할 정도로 허술하다는 것.

이는 그가 전국에 있는 클럽을 몇 달만에 싹다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신상을 턴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조금만 실력있는 해커라면, 명부를 관리하는 클럽장의 핸드폰을 털어 전화, 문자, 메신저 기록을 통해 순식간에 해당 클럽에 속 한 명단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스스로가 보안 취약점을 인지한 상태로 새로운 클럽을 만들었기 때문에 희재는 누구보다 뛰어난 보안 전문가로서 스스로 회원 관리를 해온 것이었다.

자신의 자료를 털 수 있는 전문가는 적어도 한국에는 없을테니까.

'흐음, 여성 회원이라. 이번에 대체 누굴까?'

희재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아까 통화한 사람에게 연락을 시도 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프로그래머 출신인 그에게는 평소 활동시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여보세요?

다행히 상대는 아직 안자고 있었는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살짝 쉬어 있는게 뭔가 격한 소리를 내다가 급히 전화를 받은 모양이었다.

'어디서 섹스라도 실컷 하고 온건가?'

"김희잽니다. 아까 연락주셨었죠? 제가 일이 바빠 이제서야 다시 연락드립니다."

-김희재가 누구? 아···. 앗, 죄송합니다. 제가 받은 번호랑 달라서 몰라 뵀어요.

희재는 폰번호를 여러개 가지고 있었다.

지금 건 번호는 추적조차 불가능한 보안폰이었다.

"네, 제가 폰이 두개라···. 늦은 시간인데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네. 괜찮아요. 아직 안 자고 있었어요.

"제 연락처까지 알아내셨다는 건, 우리 클럽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전화하신 거죠?"

-네, 네. 세라 통해서··· 아니, 세라 아는 분 통해서 들었어요.

그는 연락처를 아무에게나 함부로 뿌리지 않았다.

그 인맥을 뚫고 연락을 시도했다는 것은, 최소한의 신원 보증은 끝난 셈이었다.

"혹시 기혼자신가요? 부부동반으로 가입하시는 분도 가끔 계셔서."

-아뇨. 혼자입니다.

"그럼 미혼?"

-그게 아니고···. 전 남편과는 사별했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괜한 걸 물었군요."

통화를 하는 중에도 희재의 손은 분주히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바로 상대방 전화 번호를 이용해 통신사 가입자 명단을 해킹하고 있었던 것.

'최윤하라고?'

천재 프로그래머이자 해커였던 희재에게 번호를 이용해 신상을 터는 것은 아무일도 아니었다.

통신사 가입 정보를 통해 결제 카드사를 알아내고, 해당 카드가입자의 데이터 베이스를 뒤져 주민번호까지 파악하고 나면 전산상에 등록된 모든 거의 개인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엥? 진짜로 사별했네? 남편 사망으로인한 보험금이···. 응?

재판으로 인한 지급 보류 가처분 신청은 또 뭔 소리야?'

정보를 캐던 희재는 최윤하가 생각보다 복잡한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닙니다. 벌써 사별한지 1년이 다 되어가거든요. 괜찮습니다.

"가볍게 자기 소개 좀 해주시겠습니까? 이름이나 직업, 나이 같은 간단한 정보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이름은 최지안, 나이는 올해 서른 넷이고···.

'시작부터 거짓말을.'

클럽에 가입할 때 신상을 속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희재가 피식 웃었다. 특히 나중에 문제가 될까봐 이름와 나이를 속이는 것은 다반사였다. 물론 가입 정보를 속이는 경우, 희재는 곧바로 회원가입을 거부했다.

하나를 속이다 보면, 나중에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최지안님이라고요? 실명 맞나요?"

-어···. 그게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라뇨? 확실히 설명해 주셔야 합니다. 저희 클럽은 실명제로만 운영되니까요,"

-실은 제가 현재 개명을 신청한 상태거든요. 원래 이름은 최윤하인데 최지안으로 이름을 바꾸려고요.

"음."

희재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모니터에 떠오른 형사 사건을 확인했다. 범죄조회 경력까지 한방에 이루어지도록 프로그램을 짜둔 덕이었다.

'이건 또 뭐야? 살인 교사 및 사체유기로 재판을 받고 있잖아?

이게 무슨···.'

정보를 캐면 캘수록 흥미로운 여성이었다.

형사사건으로 입건되어 불구속 수사를 받고, 2심이 진행 중인 여성이라니.

심지어 사별했다던 남편을, 상간남과 공모해 살인 교사 및 사체 유기라는 악질적인 범죄 혐의에 연루되어 있었다.

'헐, 이거 좀 심각한 거 아닌가?'

희재는 자신과 통화하는 여자가 문득 소름돋게 느껴졌다. 재판의 결과를 끝까지 봐야 알겠지만, 일단 사건 자체는 벌어진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희재는 자신이 그녀의 신상을 모두 털었다는 내용은 일언반구 하지 않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런 상황입니다.

"흐음. 대충은 알겠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부분을 여쭤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같은 클럽은 보안이 가장 중요해서요. 괜히 사람 하나 잘못 받았다가 클럽 자체가 날아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희재가 화면을 골똘히 쳐다보며 고심했다.

'일단 나한테 말한 것에는 거짓은 없는 셈인데. 묻지 않았던 재판 관련 부분이나 본인의 상황에 대해선 하나도 밝힌게 없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리 클럽에 들어오려는 것일까?'

희재가 볼때 최윤하, 아니 최지안은 클럽 문의를 하면 안되는 인물이었다.

진실이 무엇이건 중요한 재판을 앞둔 마당에 자숙하고 칩거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난교 클럽에 문을 두들긴다는 행위자체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질 않았다.

그가 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납득할만한 결론은 딱 하나였다.

'설마··· 섹스에 미친년인가?'

"푸하하하하하하!!!!!"

잠시 핸드폰을 음소거로 만든 희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아랫배가 당길만큼 꺽꺽 대며 웃어댄 희재가 눈을 번뜩이더니 다시 음소거를 끄고 통화를 이어갔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면접이 필요할 것 같은데 지금 당장 가능하시겠습니까?"

-면접이요? 지금?

"저희 클럽에 가입하시려면 면접은 필수거든요. 내키지 않으면 안하셔도 됩니다."

-자, 잠시만요. 지금 시간이···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데, 면접을 보신다고요?

"왜요? 겁나십니까? 밤 늦게 클럽장과 단둘이 면접을 본다는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얄팍한 각오라면 애초에 저희 클럽엔 안 들어오시는 게 좋습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는 아시는 거 맞죠? 이것도 일종의 테스트입니다."

-아닙니다. 가, 가겠습니다. 다만 자려다 전화를 받아서 외출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라···.

"상관없습니다. 천천히 오십시오. 위치는 문자로 남겨드리겠습니다."

-네, 네.

통화를 마친 희재가 다시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와우, 좋아! 역시 세상엔 별의 별 또라이들이 많다니까? 푸하하하!"

희재는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1심 재판의 판결문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바람피우던 상간남이랑 공모해 남편을 칼로 찔러 죽이고 저수지에 묻어 버린 여자가, 섹스가 너무 고파서 우리 난 교 클럽에 가입하겠다고 새벽 2시에 나를 찾아온다는 거잖아? 와우, 이런 희대의 쌍년이라니! 안 그래도 요새 시시해 지도 있었는데 간만에 물건이 들어오겠는데?"

희재는 아까 프로그래밍을 할 때처럼 눈빛을 반짝였다.

그가 모두 없애려고 했던 클럽을 만든 이유, 바로 이런 희열감때문이었다.

돈을 너무 많이 번 나머지,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린 그에게 클럽에 몰려드는 인간 군상들의 면면은 그에게 무료한 삶에 자극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 이래야 재밌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온갖 미치광이들을 싹 한 대 모아놓고 때씹 파티를 벌이는 거야. 홀딱 벗고 짐승처럼 풀어 놓으면 정말 인간의 밑바닥까지 싹 볼 수 있으니까.

푸하하하!"

한참을 웃던 희재가 다시 벗어 두었던 정장을 입고 바바리 코트를 걸쳤다. 어느새 멀끔한 IT개발자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차키가 잔뜩 걸린 열쇠함에서 내키는 대로 하나 집어들었다.

그는 아파트 주차장에 대면 혹시나 누군가 알아볼까봐, 근처 건물을 통째로 매입해 오로지 개인 차고지로만 이용하고 있었다.

차고지 건물에 도착한 희재가 리모컨 키를 누르자, 빨간 스포츠카가 전조등을 깜빡였다. 한 층 전부를 개인 주차장으로 활용하는, 그곳엔 십여대가 넘는 값비싼 차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세계적으로 50대 밖에 생산되지 않은 최고급 차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초호화 컬렉션이었다.

돈이 썩어 넘치는 그의 몇 안되는 취미기도 했다.

희재가 차에 오르며 어둠을 향해 말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의 지근 거리에는 늘 24시간 경호를 담당하는 경호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최대한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라는 명령 때문에 거리를 두고 숨어 있을 뿐이었다.

"민재야. 너는 이만 퇴근해. 오늘은 개인적인 손님을 만나러 가는 거라 혼자서 갈게."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둠 속에서 반쯤 모습을 드러낸 건장한 사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아까 사설 도박장에서 희재 뒤에 서 있던 덩치 좋은 청년이었다.

"응. 그냥 미친년 하나 면접보러 가는 거야. 걱정 안해도 돼."

"···미친년이요?"

"있어. 그런 년이, 암튼 수고."

희재가 피식 웃더니 차량을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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