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935화 (1,915/2,000)

1935. ex wife-10-

* * *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신성희였다.

카지노 펍에서 만난 여성 바텐더 말이다.

'하아. 귀찮은데 받지 말까?'

[신성희양이요? 아직 업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업적이 있었어?'

[바람바람바람 업적 말입니다. 유부녀를 빼앗아 호감도 100을 만드는 업적입니다. 주인님이 벌써 두번이나 포기하셨던 업적이 죠.]

'아, 그랬었군.'

뒤늦게 기억이 났다.

카지노 펍에서 만났던 여성은 모두 2명.

바텐더였던 신성희와, 카지노 딜러였던 이주아였다.

이 중 주아는 호빠를 박살내는 데 미끼로 활용하면서 인연이 적당히 끝이 났으나, 미션을 진행했던 성희는 아직 인연의 끈이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하-. 전화 받으면 백퍼 만나자고 할텐데···. 간만에 주말에 좀 쉬나 했더니···.'

[그건 주인님께서 선택하십시오. 사실 호빠 미션을 진행하느라 우연히 중간에 얽히게 되었을 뿐, 꼭 미션을 완수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요.]

'가만. 바람바람바람 업적의 보상이 뭐였지?'

[바람의 망토 입니다.]

'그게 뭔데?'

[간략히 설명하면 원하는 위치로 순식간에 순간이동을 시켜줍니다. 일종의 비상탈출용 아이템이랄까요?]

'오잉? 장소가 어디든?'

[아닙니다. 반경은 짧습니다.]

'그럼 마법의 문고리보다 하위호환 아니야?'

[그렇진 않습니다. 마법의 문고리의 경우엔 '문'이라는 매개가 없는 경우 이동이 불가능할 뿐더러 주인님이 한 번이라도 가본 장소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바람의 망토의 경우는 단숨에 반경 500미터 어디든 순간이동이 가능합니다.]

호오.

설명을 듣고나니 이번 구원회 미션에서 진혈의 뱀파이어와 싸우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중에야 환각인 줄 알았지만, 혹시나 그만한 실력자와 맞붙는 상황이 또 생긴다면 요긴히 쓸 수 있는 아이템임에는 분명했다.

'흐음, 피곤하긴 하지만 간만에 업적이나 해결해 볼까? 아이템도 쓸만해 보이고.'

[정말 하시려고요?]

'벌써 두번이나 포기했던 미션이잖아. 사실 그 전에 마음을 접었던 건 멀쩡히 가정이 있는 여자를 꼬시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였어.'

[신성희양은 뭔가 다릅니까?]

'성희는 그래도 사실혼 관계라면서. 본인이나 남편도 주말부부라 사이도 안 좋아 보이고. 적어도 남의 가정을 파탄내는 죄책감은 덜하지.'

[주인님은 여전히 전생의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시는 군요.]

'내가?'

[난봉꾼이 다른 사람 가정 불화를 먼저 신경쓰시니까요. 애인 있는 여자를 뺏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 하면서 말이죠.]

'뭐···. 꼭 그런건 아니고.'

사실 맞는 말이다.

플레이어로 다시 태어난 초반에는 임자 있는 여자를 건드리는데 죄책감을 크게 느꼈다. 정작 내가 상간남에게 칼빵을 당해 죽어놓고, 막상 반대 입장이 돼서 다른 사람을 기만한다는 게 너무나 내로남불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아마도 애자매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서부터 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유부녀를 건드리는 것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애인 사이야 나중에 결혼을 할지 안할지도 모르고, 사귀다 보면 바람도 피우고 헤어지는 게 다반사라지만 결혼한 여자를 잘못 건드렸다간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는 것을 내가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괜히 내 욕심 때문에 남에게 크나큰 불행을 주고 싶지 않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같은 원칙이었다.

그래서 바람바람바람 미션의 경우는 두번이나 마음을 접었다.

'성희는 사실혼 관계라 마음이 덜 불편하잖아. 어차피 남편이랑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아하. 역시.]

그 사이 한 번 끊어졌던 전화는 다시 울리고 있었다.

고민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는데, 안 받으니 또 다시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나는 일부러 자다가 깬척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앗, 이제야 받네. 서준아 나 성희야.

"성희?"

-벌써 까먹어? 홀덤 펍 바텐더 성희!

"아아, 신성희? 미안미안. 내가 자다 깨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피. 여자가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헛갈린 건 아니고?

"내가? 여자가? 많다고?"

-···됐어. 동거남도 있는 처지에 내가 뭐 그런거 따질 건 아닌 것 같고.

성희는 생각보다 쿨하게 반응했다.

자신이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며 동거 한다는 걸 밝힌 입장이다 보니, 딱히 나를 구속하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마지막 섹스 이후로 보름 가량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상당히 고심하다 연락했다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꾸 보자고 보챘다간 내가 쉬운 여자라고 싫증낼까 두려웠을 테고, 그렇다고 아예 연락을 너무 안했다간 잊혀질 것이 겁났을 것이다.

그 애매한 중간이 바로 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그 얘기 하려는게 아니고, 왜 요샌 우리 가게 안 놀러와?

"요새 좀 바빠서."

-대학 시험? 그건 벌써 끝난 거 아니야?

성희랑 마지막으로 하고 헤어질 때 대학 시험 핑계를 댔었던 모양이다.

"응, 시험은 진즉 끝났는데, 다른 일로 좀."

-그렇구나. 좀 놀러 와. 얼굴 잊어 먹겠다.

성희가 저리 말하는 것은 정말로 게임하러 오라는 것은 아닐테고, 아마도 나를 보고 싶은데, 마땅히 댈 핑계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응, 안 그래도 주말에 한 번 가보려고 했는데."

-주말이면 오늘 아니야? 일요일은 주일이고?

"그래? 생각해보니 그러네?"

-시간 되면 오늘 한 번 와. 나 오늘 일 일찍 끝나거든.

"흐음, 그럴까?"

-히히, 진짜? 약속했어?

"호객 행위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나 가서 돈 잃은 적 한번도 없는데?"

-그러니까 돈 따러 오라고. 그걸로 나 맛있는 것도 많이 사주고. 새벽에 일 끝나면 엄청 배고파서 야식 먹고 싶더라고.

성희가 점점 노골적으로 의도를 밝히고 들어왔다.

'로시. 마지막에 성희 호감도 얼마나 채웠었지?'

[잠시만요.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 섹스 당시 호감도 92까지 채우셨습니다.]

'흐음, 그럼 오늘 한번만 작업하면 100을 찍을 수도 있겠는데?'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요새 업적도 부진한데 이번 기회에 마무리를 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대 이름 바람바람바람이라···. 오케이 콜.'

"오케이 콜!"

-응. 나 그럼 새벽 1시에 끝나니까 그때 맞춰서 데리러 와!

성희와 통화를 끝내고 나니 그때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흐음, 꼭 맞춰갈 필요는 없겠네. 일찍 가서 게임이라도 좀 하고 있을까?'

[홀덤 펍에 말씀이십니까?]

'응. 그때 그 마사지 하던 여자도 좀 보고.'

[주인님은 지치지도 않으신가 봅니다. 새벽에 구혜진이랑 5번.

오후에는 김비서랑 3번. 다시 새벽에 신성희양을 보기로 했으면서 중간에 마사지녀를 찾으신다고요?]

'아니. 꼭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마사지나 받으려고.'

[그 말이 그 말 아닙니까?]

'모든 마사지가 퇴폐는 아니라고.'

[모든 마사지가 퇴폐는 아니지만 주인님은 어딜 가든 퇴폐로 만드시니까요.]

'뭐, 그거야 어쩔 수 없고.'

나는 간만에 업적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외투를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저녁시간이었다.

* * *

홀덤 펍 VIP룸 입장은 어렵지 않았다.

도훈이 일전에 회원증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손쉽게 통과 할 수 있었다.

"오늘은 어떤 종목으로 하시겠습니까?"

"잠시만요 한 번도 안해 본 게임을 해보고 싶어서. 이것도 가능한가요?"

도훈은 여러가지 룸으로 나뉘어진 VIP 객실 중에서 '바카라'를 콕 집었다. 이제껏 수많은 도박을 섭렵했던 도훈이지만, 카지노의 꽃이라는 바카라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이다.

도훈의 물음에 데스크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손님. 이곳은···."

"네?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그건 아니고···. 바카라 업장이 이곳 하나 뿐이라 기본 판돈이 좀 센편이거든요."

도박 자금이 문제라는 소리에 도훈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뭐야.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확 그냥 마음만 먹으면 여기를 통째로 사버릴 수도 있겠구먼.'

[무시라기 보다는 주인님이 어려보이시니까 그랬겠죠. 이곳에 자주 드나들던 손님도 아니고요.]

난처해 하는 직원에게 도훈이 거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얼마면 되는데요?"

"예, 예?"

"아니 바카라 업장 입장하려면 얼마면 되냐고요."

"저 그게···."

"여기서 현금으로 바로 칩으로 교환 되죠?"

"네."

도훈이 가방을 꺼내더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이 가방 속에서 사라지더니 인벤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가방에서 나온 도훈의 손에는 5만원짜리 100장 묶음이 잔뜩 들려 있었다.

"이거면 돼요?"

"소, 손님···."

"묶음당 500만원이니까, 대충 4000정도 되겠네. 이거 다 제일 비싼 칩으로 바꿔줘요."

가방에서 현금이 잔뜩 나오자 데스크 여직원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1억을 넘게 들고 게임하는 VVIP손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현금이 주는 비주얼적인 충격이 상당히 컸던 모양이야.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뵀습니다. 바로 교환해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이 현금 다발을 풀더니 빠르게 계수기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현금 4000만원을 모두 확인한 직원이 금고를 열더니 그에 걸맞는 코인 트레이를 꺼내 도훈에게 내밀었다.

"모두 4000만원어치 코인입니다."

"흐음. 이건 팁."

도훈이 100만원 상당의 코인을 가볍게 건네자 여직원이 어쩔 줄 몰라하며 꾸벅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주인님. 돈을 너무 헤프게 쓰시는 거 아닙니까? 방금 건넨 코인이 100만원이 넘는 금액인 건 아시죠?]

'상관없어. 어차피 딸 거니까.'

[아니 그래도···.]

'이제 돈은 나에게 별로 의미 없다고. 조단위 넘는 스폰서가 생겼잖아.'

[구혜진양의 재산이 주인님의 것이라는 건가요?]

'뭐, 마음만 먹으면 곶감 빼먹듯 할 순 있겠지.'

[역시 국내 최고의 기둥서방 다운 자신감입니다.]

거액의 현금을 코인으로 환전하자 도훈에 대한 대접이 바로 달라졌다.

어느새 무전기를 든 직원이 도훈을 직접 에스코트하면서 바카라 룸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쪽입니다, VVIP고객님."

"네. 게임은 바로 시작할 수 있나요?"

"잠시만 대기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모든 테이블에 플레이어가 꽉 차있어서요."

"아."

바카라 장에 입장한 도훈은 VVIP들의 면면을 꼼꼼히 살폈다.

최소 금액이 가장 큰 곳이라서 그런지 다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들이나 중년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젊은 여성도 몇몇 보였고, 도훈 또래의 청년들도 간혹 있었다.

'키아. 세상에 돈 많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구나.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길래 하룻밤에 5000만원을 도박으로 태운담?'

[주인님 같은 분들 아니겠습니까?]

'나?'

[일확천금으로 졸부가 된 사람들이요.]

'어째 비꼬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주인님이 개구리 올챙이적 모르고 돈을 너무 헤프게 쓰는 것 같아서요.]

'걱정 말라니까. 내가 도박하면서 돈 잃은 것 봤어?'

[그렇기야 하지만···.]

'어차피 성희 기다리면서 시간이나 때우는 거라고.'

[바카라 룰은 아십니까?]

'이건 엄청 단순한 게임이야. 쉽게 말하면 딜러인 뱅커랑 플레이어랑 홀짝을 놓고 맞추는 게임이라고 보면 돼.'

[오호라.]

도훈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유독 값비싼 칩이 올라간 테이블을 보고는 옆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올라간 칩만 단순 계산해도 억단위가 넘어가는 엄청난 게임판이었다. 다들 자기돈도 아닌데 손에 땀을 쥐면서 딜러와 플레이어의 승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게임을 하던 중년의 남성이 갑자기 통화를 시작했다.

"네, 김희잽니다."

테이블 가운데서 보란듯이 통화를 하는 남자가 눈에 띄어서 보는데, 손목에 고가의 시계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 뭐야 저건 명품인가?'

[비싼 겁니까?]

'내가 시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하나에 억은 넘는 브랜드같은데.'

[대단하군요. 겨우 4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저런 부자가···.]

"아, 신규회원 문의요? 흐음, 제가 잠시 일하는 중이라 나중에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희재라는 중년이 통화를 끊더니 옆에서 구경중이던 젊은 여자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신입이 하나 오려나 본데?"

"누구? 남자야?"

"아니. 아쉽게도 여자."

"하-. 받지마. 여자는 이미 차고 넘치잖아."

여자는 질투심이 많은 지 눈을 가늘 게 뜨며 희재라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희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 거릴 뿐이었다.

"사람 많으면 다다익선 아닌가? 뭐, 어쨌든 면접은 봐야 결정할 것 같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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