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 ex wife-9-
옷을 모두 벗은 도훈은 그대로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체력단 련실에서 연결된 발코니로 나간 그는 홀딱 벗은 채 저물어가는 해를 보고 시간이 꽤 흘렀음을 깨달았다.
'내가 대체 몇 시간이나 잔 거야?'
[많이 피곤하셨는지 2시간쯤 주무셨습니다.]
'그런가?'
발코니에 서 있던 몸에 작은 불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이 등신불처럼 타오르자, 쩔어있던 식은 땀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날아갔다.
[설마 방금 몸에 불을 지르신 겁니까? 샤워하는 대신에요?]
'응. 이러면 세균도 한 방에 싹 정리될 거 아니야.'
[아니, 이게 무슨···.]
내공으로 일으킨 불길로 몸을 정화(?)시킨 도훈이 허공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담배를 한 대 빨고 나니 악몽 때문에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다 그런 꿈을 꾼 걸까? 과거의 일은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도훈은 로시에게 들리지 않게 혼자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이었다.
도훈의 몸에 빙의된 지 어언 1년여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이따금 전 마누라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긴 했지만, 죽는 날의 모습이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긴 오랜만이었다.
특히 생전의 얼굴의 완벽하게 떠오른 것도.
-씨발년. 지금 생각해도 예쁘긴 예뻤었구나.
상간남과 발가벗고 뒹굴고 있는 모습에서 느낀 것은 분노라는 감정보다는, 애 엄마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완벽한 몸매에 대한 이질감이었다.
그때야 회사와 집 밖에 모르던 순해빠진 퐁퐁남이었기 때문에 몰랐는데, 수많은 여자를 섭렵한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전 마누라가 남들 보기에도 얼마나 매력적이었을지 새삼 느껴진 것이었다.
-그런 얼굴과 몸매로 먼저 꼬리치고 다녔으면 다른 남자들이 참지 못했겠지.
더구나 윤하는 섹스도 상당히 밝히고 잘하는 편이었다. 이정우와는 늘 정상위만, 그것도 방에 불을 끄고 하는 편이라 전혀 몰랐는데 상간남하고 할 때는 자신도 처음 본 기상천외한 체위로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도훈은 그게 더 열이 받았다.
-씨발. 생각해보니까 억울하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몸뚱이 함부로 굴리면서 남자들하고 즐기던 년이, 마지막엔 다른 새끼한테 임신한 아이를 품고 호구를 물었던 거잖아. 난 그것도 모르고 완벽한 설거지에, 나중엔 도축까지 당하고.
과거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도훈의 분노는 커져갔다.
[주, 주인님. 정말 괜찮으십니까?]
'응? 왜?'
[아니 왜 불꽃 주먹을···.]
전 마누라를 떠올리면서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내공을 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이런. 실수야.'
도훈이 급히 힘을 거두며 불길을 꺼뜨렸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평소의 주인님 답지 않습니다. 무슨 악몽을 꾸셨길래···.]
'아니야. 그냥 죽은 장만석이 진혈의 뱀파이어로 변해서 내가 당하는 꿈이었어.'
[아아, 그때의 가상 현실 때문이군요. 장만석이 환각 마법으로 덫을 설치해둔.]
'응. 그때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걸 느꼈는데, 그게 나한테 굉장히 인상적이었나봐. 도저히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거야 환각 마법이니까 당연하죠. 실제로 장만석이 아무리 진혈의 뱀파이어가 되었어도 그 정돈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
[네. 진혈의 뱀파이어의 무서운 점은 죽이기가 너무 어렵다는 점이지, 강해서가 아니니까요.]
'암튼, 그땐 아무 생각 없이 심장을 뽑아 버리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
[너무 죄책감 느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대는 인간이 아닌 뱀파이어였습니다. 짐승하고 다를 바 없지요.]
'그렇게 말해주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
[주인님이 구원회 일에 너무 신경을 많이 쓰신 것 같습니다. 당분간 급한 미션이나 업적도 없으니 푹 쉬시면서 멘탈을 회복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로시에게 태연히 거짓말을 한 도훈이었지만, 속으로는 전 마누라에 대한 복수심을 겨우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어차피 다 지난 일이야. 로시 말대로 최근에 너무 무리하는 바람에 몸이 허해져서 악몽을 꾼 걸거야. 어차피 엮일 일도 없는 사람인데 뭘.
그때였다. 요리를 하고 있던 김 비서가 2층 계단으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도훈씨! 혹시 2층에 계세요?"
정화를 위해 발가벗고 나온 도훈은, 괜히 잔소리 듣는 게 귀찮아 인벤토리에서 가운을 하나 꺼냈다.
취침용 가운을 재빨리 몸에 걸친 도훈이 담배를 비벼끄고 있을 때, 김 비서가 그를 발견하고 말했다.
"담배 피우고 계셨구나. 식사 다 준비 됐어요."
"그래? 알았어 마저 피우고 내려갈게."
"네!"
김 비서가 다시 주방으로 내려가자 도훈도 손에 든 담배 필터 부분을 화르륵 태워버렸다.
내공만으로 잿더미를 만든 도훈이 씩 웃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꽁초를 버리지 않아도 되니까 되게 편하네."
* * *
맛있게 식사를 마친 도훈이 김 비서를 칭찬했다.
"이야, 희진이는 요리도 잘하는 구나."
"아, 아니예요. 별것도 아니었는걸요."
"진짠데. 이제 시집가도 되겠어."
"정말요?"
김 비서가 눈을 깜빡이며 뭔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도훈을 쳐다보았다.
'아차. 나한테 시집오라는 줄 오해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하셔가지고.]
도훈이 얼버무리기 위해 급히 말을 돌렸다.
"물론 대학부터 다시 졸업해야겠지만."
"대학이요?"
"응, 재수 끝나면 이제 새로 대학가야 하잖아."
"아···."
도훈이 무심코 던진 말에 김 비서는 벌써 먼 미래까지 그리고 있었다.
* * *
"정말 혼자 계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오늘밤 같이 있어드려도 되는데."
"걱정마. 아깐 잠깐 기분 나쁜 꿈을 꾼 것뿐이니까."
"그래요. 다음주에 또 청소하러 올게요."
"응. 늘 고마워. 바래다 줄까?"
"아니에요. 오늘은 혼자 갈게요. 푹 쉬세요."
현관 입구까지 배웅 나온 도훈을 뒤로하고 김 비서가 씩씩하게 돌아섰다. 아직 8시가 넘지 않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딱히 귀가를 걱정할 필욘 없을 것 같았다.
"휴-. 마침내 혼자네."
깨끗하게 청소된 집안 구석구석을 보며 도훈이 새삼 김 비서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하여간 착한 애라니까."
[오늘 밤엔 어디 나가지 말고 푹 쉬십시오.]
'나갈 일이 뭐 있겠어? 학교 복귀도 다음 주 월요일이고, 딱히 만날 사람도 없는데.'
하지만 도훈의 소박한 소망은 곧바로 깨어졌다. 김 비서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걸려 온 것이었다.
"아니, 이 여자는?"
* * *
-아깐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아니란 거 알지?
"됐어, 이년아. 남자친구랑 바람이나 실컷 피워."
-남자친구는 무슨. 나 그런 거 안 키우는 거 알잖아?
"무슨 소리야?"
-그냥 섹파야. 저기 강서 쪽에서 골프용품 납품하는 사장님인데, 가끔 짬 될 때만 보는 사이야.
"참나. 섹파가 대체 몇인데?"
-흐음, 모르긴 몰라도 10명은 넘지 않을까?
세라와 통화를 하던 지안이 혀를 끌끌 찼다.
"정신 차려 세라야. 욕심내서 다 손에 쥐려다가 실수하면 어쩌려고 그래?"
-걱정마. 안 걸리니까. 네가 내 알리바이 해줄 거 아니야?
"너 요새도 나 팔아먹고 다니니? 니 남편한테?"
-딱 좋은 핑계거리지 뭐. 남편하고 사별하고, 재판까지 걸려있는 비운의 여자만큼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지랄하고 있네. 네가 위로나 제대로 해준 적 있니? 맨날 나 만난다는 핑계대로 섹파들하고 뒹굴고 다니는 주제에."
-아이고, 우리 최윤하씨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뿔이 났을까?
"지안이라고! 최지안. 이름 바꾼 거 몰라?"
-알지. 아는데, 평생 부르던 이름이 갑자기 바뀌면 나도 헛갈린다고. 근데 내가 안 해준 건 또 뭐야? 너 업소 다니면 위험하대서 재림 예수 구원회인가 뭔가 연결시켜 줬잖아.
"하-. 아까 내 얘기 하나도 안 들었구나? 거기 권사라는 사람이 ···."
-아, 아! 오케이, 오케이. 맞다, 그랬지? 근데 거기 요새 좀 분위기 흉흉한 거 같더라.
"분위기가 흉흉하다니?"
-글쎄,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칭하던 담임 목사가 며칠 전 급사했다지 뭐야? 대충 분위기 보니까 완전 초상집이던데. 아마 그래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야.
전화기를 들고 있던 지안이 버럭 화를 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한테 지랄이냐고! 지들 목사 죽든 말든 내가 알게 뭐야?"
-맞어 맞어. 거기 그냥 신경쓰지 말고. 아까 클럽 소개시켜 달라고 했었지?
세라가 본론으로 들어가자 지안이 귀를 쫑긋하며 경청했다.
"응."
-너 근데 거기 가입하기 힘들텐데?
"왜? 내가 얼굴이 못 났니, 몸매가 빠지지? 아니면 돈이 없니?"
-그게 아니고,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되는데 비밀 유지를 위해서 엄격하게 가입을 받거든.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넌 연결만 시켜줘."
-음···. 거기 뭐하는 덴 줄은 알지?
"저번에 네가 말해줬잖아. 스와핑 클럽이라고."
-맞어. 별장에 모여서 관전도 하고 스와핑도 하고, 아니면 가끔 노예팅도 하고 그러나 보더라고.
"난 방식은 상관없고, 그냥 섹스만 오지게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이야. 하-. 진짜 몇 달간 제대로 못 했더니 미치겠다니까?"
-너 히스테리 부리는 거 보니까 욕구불만이 너무 심하긴 하네.
성격 나빠지겠다, 얘.
"뭐래? 진짜. 지가 제대로 소개도 못 시켜줘놓고."
-아니 구원회 건은···. 암튼 그건 됐고, 너 혹시 도박 좋아해?
"뜬금 없이 도박이라니?"
-거기 클럽장이 도박을 엄청 좋아해서 맨날 카지노에서 산다더라고.
"카지노면 강원랜드 말하는 거야? 나보고 정선까지 가서 면접을 보라고?"
-노노. 당연히 아니지. 무슨 정선을 가?
"그럼?"
-그냥 사설 도박장 같은 곳이야. 겉은 홀덤바처럼 위장해 놓고선, 실제로 VIP들은 따로 룸을 잡아주고 거기서 한다더라고.
"아니 무슨 면접을 보러 도박장까지···. 됐다. 그냥 없던 일로 해."
-정말? 후회 안 하겠어?
"난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해. 게다가 지금 2심 판결이 얼마 안남았는데, 혹시나 그런 데 갔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걱정 말라니까 그래. 절대 위험한 곳 아니래. 단속에 걸릴일도 전혀 없고.
"네 말 듣고 구원횐가 뭔가 가려고 했다가 뒤통수 맞았는데 그런 말이 나와?"
-아니 왜 나한테 짜증이야? 난 네가 부탁해서 힘들게 알아봐준 것 뿐이잖아. 됐다, 됐어. 길가던 남자를 꼬셔서 따먹든, 출장불러서 사먹든 네가 알아서 해! 진짜, 사람 성의도 몰라주고.
"세라야, 아니 내 말은···."
-됐어, 이 기집애야. 생각나서 전화했더니만 사람 성의를 무시하고. 끊어.
뚝-
"세라야, 세라야!"
지안이 소리쳐 보았지만 이미 종료된 통화에 헛된 외침일 뿐이었다.
"아씨, 계집애 성질머리 하고는."
지안이 다시 아파트 창문을 열더니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있는 아파트가 마치 감옥처럼 느껴졌다.
살인 사건이 나는 바람에 급히 동탄으로 도망치듯 이사를 와야 했고, 그 때문에 주변에 아는 지인들도 단골 가게 하나 없었다.
하나뿐인 딸은, 재판이 시작되면서 시부모가 데려가 버렸기 때문에 40평대 넓은 아파트에서 혼자 외로움을 달래야 하는 것이었다.
'진짜 지나가는 남자라도 하나 꼬셔서 확 데리고 살아버려?'
그런 생각이 굴뚝같은 지안이었지만, 최근에 나온 연쇄 살인범기사를 보고는 마음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동거녀를 살해하고 옷장에 시신을 감췄다는 미친 싸이코패스가 실존하는 마당에, 재산도 많은 미망인인 자신이라면 얼마든지 그럼 범죄에 노출될 위험이 컸다.
더구나 중요한 2심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몸가짐에 더욱 신중해야 했다. 혹시나 자신의 음탕한 버릇이 노출된다면, 이제껏 겨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쌓아놓았던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재판에 혹시라도 지는 날에는 물려받기로 한 유산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하나 뿐인 딸에 대한 양육권도 상실하고 감옥에 끌려갈 처지였다.
'안 돼. 다른 건 몰라도 딸아이를 빼앗기는 건···.'
정우와 지안 사이에 낳은 딸은, 정우의 자식은 아니었지만 지안의 혈육이긴 했다. 지안의 입장에서는 절대 패소하면 안 되는 재판이었다.
'그래. 참자. 뭘 이런 거 하나 못 참겠어? 재판만 이기고 나면 실컷 즐길 수 있는 걸. 지긋지긋한 한국을 떠나 좆 크고 잘생긴 외국 남자들하고 미친 듯이 즐기는 거야. 흑인도 꼭 만나고.'
지안은 흑형의 커다란 물건을 떠올리며 서랍에 숨겨놓았던 딜도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