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 구원회-26-
[주인님도 정의의 사도처럼 똥폼도 잡으실 줄 아시는 군요.]
'뭐 인마?'
[아닙니다. 어서 집에 가서 피로부터 푸시죠.]
도훈은 자신을 전도한 이서에게 다음주에 다시 교회에 오겠다는 문자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작 연락이 온 사람은 이서가 아니라 다른 여자였다.
-벌써 집으로 갔다고? 테스트는 어떻게 됐는데?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승아였다.
양 권사와 입단 테스트를 함께 했던 수호천사.
"그게···. 컨디션 난조로 실패했어."
-실패했다고? 네가? 어쩌다가?
승아는 도훈의 섹스킬을 두번이나 맛 봤기 때문에 그가 떨어질리 없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대단한 실력을 본인의 몸으로 직접 확인했는데, 입단 테스트에 실패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모르지. 직전에 누굴 따먹다 힘을 다 써버렸을지도."
-지금 나 때문에 떨어졌다는 소리야?
"꼭 그런건 아니야. 다행히 아직 탈락까진 아니고 결정을 유보시킨다고 했어."
-유보라고?
"응. 양 권사님께는 잘 말씀해 주신데. 다음에 한 번 더 테스트를 보는 걸로."
-저런···. 그래서 지금 집으로 돌아간 거야?"
"응. 너무 피곤해서. 집에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내일 학교 시험도 있고. 근데 왜 전화했어?"
-이미 끝난 것 같은데 연락이 없길래 궁금해서.
"정말? 간다고 말이라도 할 걸 그랬네."
-아니야. 어쨌든 사정은 알았으니까 나도 권사님한테 말해 놓을게. 권사님이 궁금해 하실 것 같으니.
"고마워. 신경써줘서."
-고맙긴. 다음엔 잘해. 난 민용이 네가 우리 교회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지?
마지막 말은 왠지 사심이 느껴지는 발언이었으나 도훈은 딱히 이유를 묻지 않고 통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쌓여있던 피로가 산사태처럼 밀어 닥쳤다.
'어우, 눈꺼풀이 천근만근이군. 이런 적은 오랜만인데?'
[그럴만도 하죠. 오늘 하루만에 이서양에, 승아양에, 마지막엔 끝판왕 미숙까지 상대하셨잖습니까. 그것도 커져라 여의봉을 계속 유지한 채로요. 코피 정도로 끝난 걸 천만다행으로 아십시오.]
'진짜 체력 후달려서 구원회 조사도 못 해먹겠군. 다음번엔 확실히 보여줘야지.'
[어쨌든 수고 많으셨습니다. 푹 주무십시요.]
'근데 내일 바로 중간고산데 이렇게 그냥 잠들어도 되나?'
[뭘 걱정하십니까? 이번에도 수석은 따놓은 당상입니다.]
로시의 말에 안심한 도훈이 스스륵 잠을 청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넘기기로 했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너무나 노곤한 날이었다.
* * *
중간고사는 예정대로 손쉽게 흘러갔다.
커닝용 안경을 쓴 도훈은 경필쓰기를 하는 것처럼 시험지 위로 영사된 글자를 배끼기만 하면 끝이었다.
너무나 완벽한 답안을 쓰면 괜히 의심받을 까봐 중간중간 쓸데없는 문장을 삽입해 넣기도 했지만, 채점자 입장에서 보기엔 완벽한 답안에 가까웠다. 애초에 학부생 수준에선 절대 써낼 수 없는 답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오전 시험을 끝내고 나온 도훈은, 여전히 시험장에 남아 낑낑대고 있는 다른 학우들을 떠올리며 괜스레 미안해했다.
'이렇게 쉽게 성적을 따도 되는 건지 모르겠군. 다들 눈 뻘겋게 충혈된 걸 보니 날밤이라도 샌 모양이던데.'
사범대 학생들은 여타 단대생 답지 않게 내신관리를 빡세게 하는 걸로 유명했다. 다들 말은 안했지만, 시험 일주일 전부터 날샘공부에 돌입했을 것이다.
[주인님은 큰일을 할 사람입니다. 큰 일 할 사람은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 법이고요.]
'그래. 내가 지금 학점 받는 걸로 신경쓸 때가 아니긴 해. 벌려 놓은 일이 산더미라.'
주말 내내 구원회에 잠입을 시도했던 도훈은 벌써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다.
첫째, 재림 예수 구원회가 단순히 사이비 종교 단체가 아니라 전직 플레이어로 의심되는 장만석의 개인 왕국이라는 점.
둘째, 놈의 능력을 완벽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절대 먼저 정체를 노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나저나 시험 보면서 시간이 좀 남아서 내가 생각을 좀 해봤거든?'
[네. 말씀하십시오.]
'장만석 말이야. 어떻게 금제를 풀었을까?'
[네?]
'탈주 말이야. 놈이 무슨 수로 탈주를 하게 됐는지 갑자기 궁금해 지더라고. 시험이 너무 일찍 끝나서 일부러 시간을 때우고 있다 보니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혹시 주인님도 탈주에 마음이 있으신 건 아니고요?]
도훈은 장만석을 생각하며 삼장법사와 손오공의 모험이야기를 담은 중국의 고서 서유기를 떠올렸다. 제천대성이라 불릴 만큼 대단한 능력을 지닌 손오공을 제압하기 위해, 삼장은 손오공의 머리에 '긴고아'라는 금속 머리띠를 둘러 그의 힘을 통제한다.
장만석은 쉽게 말하면, 스스로 긴고아를 벗어 던진 손오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누구의 제약도 받지 않고 자신의 온전한 힘을 모두 쓸 수 있는 플레이어. 어떤면에서 모든 플레이어들이 꿈꾸는 이상향일지도 몰랐다. 따라서 도훈의 입장에선 장만석이 어떻게 금제를 풀었는지 궁금한 게 당연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왜 탈주를 해? 그냥 시간이 남길래 호낮 생각해 본거라니까.'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탈주는 꿈도 꾸지 않는 게 좋습니다. 라스푸틴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모든 탈주자는 누구보다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니까요.'
[혹시 탈주하다 죽은 플레이어가 더 있나? 내가 알만한 사람으로.]
'미국 대통령 중에도 한 명 있었죠. 링컨도 탈주자였거든요.'
[뭐라고? 설마 그럼 암살당한 이유가···.]
'네.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은 뒤 탈주를 했기 때문에 끝내 응징당했죠. 아주 멀리는 카이사르도 마찬가지고요.'
[브루투스가 그럼···.]
'주인님 예상이 맞습니다. 탈주자를 사냥하는 헌터 플레이어였습니다. 역사적 위인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탈주의 끝은 결국 죽음뿐입니다. 장만석이 만약 탈주자라면, 어차피 그의 끝도 똑같을 겁니다. 탈주를 성공하고 살아남은 플레이어는 거의 없으니까요.'
[거의 없다는 말은 조금은 있다는 소리네?]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플레이어 중에선 탈주를 하려는 사람도 드물거니와, 탈주를 했다고 해도 완벽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우지 않은 한 결국 발각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하긴 그런 강력한 힘을 가지고 플레이어의 금제를 벗어났는데, 조용히 숨어 살기도 쉽지 않겠구나.'
[맞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탈주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탈주를 하려는 목적이 플레이어의 능력을 마음껏 쓰기 위해서인데, 능력을 함부로 썼다간 헌터에게 붙잡히거나, PK단에게 걸려 살해를 당할테니까요. 그냥 조용히 힘 안 쓰고 살 거면 탈주할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도훈은 속으로 장만석을 만나면 꼭 그 부분을 캐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탈주를 꿈꾼다기 보다는, 사람일은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 그 방법이라도 알아 두는 편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물론 로시에게 이 모든 사실은 꽁꽁 비밀에 붙였다.
'근데 장만석이 진짜로 탈주자라면 내가 굳이 직접 소탕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네?]
'로시 네 말대로 모든 탈주자는 언젠간 잡힌다며?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언젠간 헌터가 찾아와 장만석을 사냥할 거 아니야?'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그 기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빠르게 장만석과 그의 사이비 종교를 분쇄하고 싶겠죠.]
'아니면 나를 헌터로 낙점한 건가?'
도훈이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었지만, 로시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럴리 없습니다. 헌터 플레이어로 지정되는 등급은 최소 고수 플레이어 이상부터니까요. 주인님은 아직 중수고요.]
'아···. 그렇군,'
오전 시험을 끝낸 도훈은 오후에 이어지는 시험도 마찬가지로 커닝 아이템을 이용해 후다닥 해치웠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커닝 전용 안경을 쓴 채 쓰윽 문제를 쳐다보기만 해도 답이 알아서 튀어나오나니 초등학생도 해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갑자기 안쓰던 안경을 쓴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설사 다른 사람이 안경을 살펴본다고 해도 들킬 위험도 없었다. 일종의 완전 범죄나 마찬가지였다.
도훈은 본인이 아이템을 쓰면서도 천상계의 말도 안되는 기술력에 혀를 내둘렀다.
'가만보면 1학기 때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나 싶다니까?
이렇게 쉬운 길을 두고 말이야.'
[그땐 주인님이 고집을 피우셨죠.]
'하긴 그땐 나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였지. 전생에 천재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 같은?'
[다만 머리가 나빠져서 고생만 죽어라 하셨잖습니까. 1학기 단대 수석 하나 받으려고 도서관에서 들이부은 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지나고 나니 도훈도 그 시간이 무척 아깝게 느껴졌다.
차라리 그 시간을 아껴 한 명이라도 더 여자를 따먹었거나, 업적을 해결했으면 고수에 더 빨리 올라갔을텐데.
'아니야. 그래도 순수하게 내 실력으로 단대 수석을 차지했으니, 지금 커닝을 해도 죄책감이 덜한 거야. 원하면 내 능력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이번엔 시간이 부족해서라는 핑계를 댈 수 있잖아.'
[맞습니다. 주인님은 미션만 아니셨다면 중간 시험 쯤은 혼자서 해치우셨겠죠.]
오후 시험도 완벽하게 통과한 도훈은 간만에 여유시간이 생겼다. 잠깐 대학 내 벤치에 앉아 망중한을 즐기려는데, 여자들이 그를 가만 내버려 두질 않았다.
'추격 60분'의 강나래 피디에게서 대포폰으로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통화 가능해?
"네. 피디님. 말씀하세요."
-다른 게 아니라 긴히 만나 전할 얘기가 있는데 지금 바로 시간 되나 해서.
'긴히 할 얘기라니?'
도훈은 이미 강피디에게 모든 자료를 넘겼기 때문에 해당 건을 완전히 마무리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욱이 새끼 마담이던 조태오가 휘겸을 담그고 자수를 했기 때문에, 경찰까지 이미 개입한 사건이었다.
[흐음, 강나래 피디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전화로 하기 어려운 얘기려나?'
중간고사는 내일하고 모래까지 계속 되는 3일여의 일정이었다.
물론 다른 학생들처럼 계속 날을 새면서 강행군 할 필요는 없었지만, 예상치 못한 강피디의 연락에 떨떠름한 것도 사실이었다.
"통화로는 어려우세요?"
-응. 좀. 꼭 만나야 해.
강피디가 제법 긴장된 목소리였기 때문에 도훈도 알겠다고 하고 통화를 끊었다.
지금은 중간 고사를 치르는 것 말고는 딱히 정해진 일정이 없었으므로 그녀를 잠깐 보는 것이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다.
도훈은 전화를 끊은 뒤 바로 강피디와 약속한 장소로 차를 몰고 갔다.
약속 장소는 한강 공원이었는데, 직장인들은 죄다 회사에 있는 오후 시간임에도 운동을 하러 나오거나 산책하는 시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날씨가 좋아 나들이를 나오거나, 가을의 마지막 따스한 날씨를 즐기려는 사람들이었다.
[강나래 피디가 왜 이렇게 인적이 많은 곳을 약속장소로 골랐을까요?]
'사람들 이목을 피하려면 오히려 인파 속에 합류하는 편이 낫거든. 아마도 날 몰래 만나려는 모양인데?'
도훈은 강피디의 의도를 이해하고 벙거지 모자에 선글라스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워낙에 큰 키와 비율 때문에 얼굴을 반쯤 가렸음에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힘들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한 강피디 역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는 데, 아무리 오후 시간이라지만 둘 다 한강변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모습이 오히려 사람들 눈에 더 띄는 것 같았다.
이에 도훈이 선글라스를 벗어 상의에 끼우며 인사했다.
"오셨어요."
"왜 이렇게 눈에 띄게 나왔어? 일부러 몰래 만나려고 한 건데."
"왜요? 누가 쫓아와요?"
"나 말고 너 때문에."
"네?"
"일단 걷자."
강피디가 연인처럼 도훈에게 팔짱을 끼우며 한강변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도훈은 엉겹결에 그녀와 나란히 보폭을 맞춰 걸었다.
[주인님을 쫓고 있다니 무슨 뜻일까요?]
'그러게? 내가 무슨 죄진것도 아니고.' 도훈이 의아해하는데, 강피디가 알아서 설명을 시작했다.
"네가 준 영상 파일, 경찰에 싹 다 넘어갔어."
"그래요? 잘 됐네요."
"근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경찰 측에서 제보자 신원을 밝혀 달라고 요청하더라고."
"저를요?"
도훈이 놀라서 묻자 강피디가 대답했다.
"당연히 나는 안 된다고 했지. 우리 프로그램의 방침상 불가하다면서."
"그런데요?"
"경찰 측에서는 영상을 넘긴 널 이번 사건의 핵심 관계자로 여기는 모양이야. 영상에 중요 증거가 많이 담겨 있어서, 기소를 위해선 제보자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더라고."
"정말요?"
"그리고 혹시 너 조태오라고 알아?"
"네. 제가 일하는 곳에 마담이었어요. 영상에도 나왔던."
"그 사람이 네 얘기까지 싹 다 불었나 봐. 그것 때문에 일이 복잡해졌어."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