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3. 빌드 업-48-
오직 중년의 미시만 도훈을 옹호했다.
"아이, 왜들 그렇게 신경이 날카로워요? 총각, 칩 떨어지면 누나가 빌려줄테니 걱정말고 쳐."
중년의 미시는 이중에서 가장 칩이 많았다.
눈으로 대충 훑어도 100여개가 훌쩍 넘게 쌓여 있었다.
도훈은 빈정거리는 대머리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귀찮아서 10개만 환전했는데, 돈 떨어지면 바로 바꿔올테니까 걱정마요."
"아이고, 말은 청산유수네 그랴. 바꿀 현찰을 들고 하는 말이지?"
도훈은 계속 시비를 거는 대머리를 노려보았다.
'저 문어대가리 새끼. 반들반들한 대가리에 딱밤 한대만 때리면 좋겠네.'
[주인님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마십시오. 상대를 흥분시키려는 심리전입니다.]
'알지. 일부러 기죽이려는 수작이라는 거.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사이에 도를 넘는 거 아닌가?'
도훈이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찔렀다.
"거참, 속고만 사셨나. 사람 말을 못 믿네."
그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연결해 현금을 뭉텅이로 집어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탁-
한눈에 보기에도 스무장 가까이 되어 보이는 오만원 권 지폐였다.
"이거면 충분해요?"
거의 100만원에 육박하는 돈다발에 대머리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젊은 청년이 선글라스를 밀어 올리며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였고, 색기 넘치는 미시도 침을 꼴깍 삼켰다. 돈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는 면면을 보니, 확실히 도박중독자들 다웠다.
주아가 도훈을 향해 경고를 주었다.
"손님. 저희 가게는 현금 참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현금을 꺼내 놓으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집어 넣어 주세요."
"알았어요. 저 아저씨가 나한테 자꾸 돈 없다고 시비 걸잖아요. 넣을 게요."
도훈이 도로 주머니에 현금을 넣었다. 많은 양의 현금에 바지 뒷주머니가 빵빵해져야 정상이었지만, 현금은 다시 인벤토리로 들어갔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흠흠. 다시 말씀드리지만 서로 비방하는 말씀을 삼가주세요. 폭언이나 모욕적인 언사가 계속될 경우, 게임에서 퇴장조치 될 수 있습니다. 그럼 참가자분 모두 칩이 확인 되었기 때문에 게임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주아가 곧바로 현란한 셔플을 자랑했다. 확실히 카지노딜러 학과를 다녔다고 하더니 카드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텍사스 홀덤 게임입니다. 홀덤은 기본 포커 룰과 다르게···."
주아가 카드를 섞으며 게임룰을 설명하는데, 또 다시 대머리 중년이 말을 끊었다.
"이봐, 아가씨."
"딜러입니다만."
주아가 발끈하자 대머리 중년이 피식 웃더니 말을 정정했다.
"그래. 딜러 아가씨. 우리가 초보도 아닌데 왜 룰을 설명하고 있어? 그냥 바로 패나 돌리자고."
"그래요. 기다린 시간도 아까운데 후딱 끝냅시다. 난 여기서 딴 칩으로 VIP룸으로 직행할 거라서."
"오늘이 토너먼트 데이였어? 흐응, 그것도 모르고 왔네?"
참가자들의 대화를 듣던 도훈이 귀를 기울였다.
'VIP룸? 토너먼트 데이? 그게 뭐지?'
도훈이 뜻을 궁금해하고 있는데, 또래로 보이는 선글라스 청년이 대신 설명했다.
"한달에 한 번씩 열리잖아요. 오늘이 맞아요. 저 문자 받았거든요."
"어머, 자긴 문자도 받아? 그건 한번이라도 VIP 룸에 참가한 손님들한테만 보낸다던데?"
"맞아요. 제가 그 VIP 거든요."
청년이 우쭐해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도훈은 이들의 대화를 들으면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반 게임 말고 VIP만 입장할 수 있는 룸이 따로 있는 모양이군. 그리고 거기서 한달에 한 번씩 토너먼트 대회가 열리고.'
[그런것 같습니다.]
'거긴 입장 금액이 훨씬 높나? 저 미시 아줌마도 한번도 참여 못했다고 하니.'
중년의 미씨가 보유한 칩은 대강 봐도 흰색 칩 100개에 상응하는 양이었다.
환산하면 30만원이 넘는 금액임에도 참가를 한 번도 못했다는 것은, VIP 룸의 참가 자격이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재밌군. 여기서 돈 따서 참가한다는 걸 보면 대충 자본금 100만원 이상부터 입장이라는 걸까?'
[근데 이상하군요. 보유한 칩은 분명 현금 환전이 안 된다지 않았습니까? 경품이나 술을 사는데만 쓸 수 있다고요.]
'맞아.'
[그런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 칩을 따려는 거죠? 술 값 치고는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나도 그게 수상해. 분명 뭔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사행성 도박일까요?]
'룰렛에 자석장치까지 단 걸 보면 더 이상 일반적인 카지노 펍은 아니라고 봐야지. 어쩌면 VIP룸 참가자들만 따로 칩을 현금으로 바꿔주는 걸지도.'
도훈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주아가 다시 중심을 잡으며 게임을 재개했다.
"그럼 룰에 대해선 숙지했다고 판단하고 바로 게임 시작하겠습니다. 기본 베팅은 흰색 칩 2개이며, 첫번째 히든과, 두번째 히든을 받을 때마다 베팅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오케이."
"최대 상한이 얼마였지 아가씨?"
"최대 베팅은 블랙 칩 3개까지 입니다. 그 이상의 칩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블랙칩 3개면 가장 싸구려인 흰색 칩의 30배가 되는 양이었다. 한마디로 단 한번의 베팅으로 최소 참가액만 들고 참여한 플레이어를 보내버릴 수 있다는 뜻.
"오케이 콜."
"그럼 바닥 패 깔겠습니다."
셔플을 마친 주아가 바닥에 5장의 카드 패를 깔기 시작했다.
텍사스 홀덤은 일반적인 포커 게임과 달리 바닥에 깔린 5장의 공유카드와, 자신이 받은 2개의 히든을 조합하는 방식의 변형 룰을 적용하는 게임이었다. 회전이 빠르고, 공유 카드를 보고 상대의 패를 계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포커 게임과는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바닥에 깔린 5개의 패를 보고 참가자들이 기본 판돈을 가운데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도훈도 쌓아 놓았던 2개의 흰색 칩을 넣었다.
"자자, 처음이니까 다들 살살 하자고요."
"플러쉬 뜨겠는데? 바닥에 다이아가 3장이나 깔렸어."
"그게 어디 쉽게 되나요?"
다들 한 마디씩 거들며 첫번째 카드를 받았다.
도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테이블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저 대머리는 입만 산 허풍쟁이군.'
[왜요?]
'자기 카드를 받자마자 바로 감정을 드러냈거든. 포커페이스도 유지 못하는 놈이 도박을 잘할리 없지.'
[그렇군요. 그럼 중년 여성은요?]
'저 아줌마가 차라리 실력은 조금 나아 보여. 그래봐야 도긴개긴이지만.'
[근데 왜 자꾸 주인님 쪽을 힐끔 거리는 걸까요?]
중년 여성은 가슴이 깊이 파인 의상을 입고 있었는데, 도훈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골이 훤히 비추일 지경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도훈을 보란듯이 자꾸 고개를 숙여 가슴을 노출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은가 보지.'
[설마 그 젯밥이 주인님인가요?]
'아마도? 그냥 노름 좋아하는 부잣 집 사모같아. 주말 저녁에 밖으로 싸돌아 다니는 걸 봐선, 유흥도 제법 즐기는 타입같고. 도박도 좋아하지만 젊은 남자도 엄청 밝히는 듯.'
[주인님이 미남계를 이용할 수 있겠는데요?]
'굳이 저런 아줌마랑? 젊고 예쁜 딜러가 이렇게 많은데?'
[하긴. 그럼 저 선글라스 청년은 어떤가요? VIP룸에도 입장했다는 걸 보면 상당한 실력자 같은데요.]
'내가 볼 땐 저놈이 제일 껄끄러운 상대야. 머리 회전도 빠른것 같고,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감이 넘친달까? 심지어 감정을 숨기기 위해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입장했잖아. 눈빛을 안 들키려고. 하지만 저런 타입이 어떤 면에선 제일 요리하긴 쉽지.'
[어떻게 말입니까?]
'포커를 수학적 확률로만 익혔을 거거든. 가량 6구까지 같은 도형이 4개가 모여있으면 마지막 히든때 플러쉬 메이드 될 확률이 얼마라든 지 말이야.'
[원래 포커는 확률 게임 아닙니까?]
'맞아. 그건 맞는데, 머리만 좋다고 이길 수 있는 게임은 절대 아니야. 그럼 계산 잘하는 수학자들이 모든 포커 대회 다 우승했겠지. 하지만 전혀 아니거든.'
[하긴 그렇군요. 주인님은 그럼 어떻습니까? 사기를 안치고 이길 자신이 있으십니까?]
'아니?'
[네?]
'내 목적은 딜러를 맡은 주아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거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여기 있는 판돈을 싹 다 털어야 겠지. 이기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다 할 거야. 사기는 당연히 쳐야지.'
[역시 주인님 답습니다.]
첫번째 카드가 돌자 흥분한 표정의 대머리가 곧바로 베팅 칩을 던졌다.
"삥."
기본 판돈인 흰색 칩 두개를 올린다는 뜻이었다.
"콜."
중년의 미시가 같은 금액으로 따라갔다.
하지만 세번째 차례인 선글라스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참나,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삥이 뭐야, 삥이. 바로 하프."
하프는 걸린 판돈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넣는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베팅액이 한번에 올라가자 대머리와 중년 미시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벌써? 하프? 1구만 받고?"
"홀덤 처음하세요? 이미 바닥패 다 깔렸잖아요. 이건 6구라고 봐야지."
"아씨, 대체 뭐지?"
"벌써 메이드 됐나보네. 난 다이."
"나도 죽을게."
다들 게임을 포기하는 중 어느새 도훈의 차례가 왔다.
[주인님. 시작부터 큰 돈을 잃으면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가뜩이나 자본금도 다른 사람보다 적으니 그냥 이 판은 포기하시죠.]
'아니야. 저 새끼 지금 사람 간보는 것 같은데?'
[간을 보다뇨?]
'시작부터 블러핑을 쳐서 플레이어 성향을 알아보려는 거야. 금액을 갑자기 올리면 상대가 좋은 패가 나왔다고 착각하고 결과를 보기도 전에 죽어버리거든. 그렇게 다 죽으면 자기 패를 깔 필요도 없이 곧바로 판돈을 먹게 되겠지.'
[그렇긴 하지만 진짜로 좋은 패면요?]
도훈은 자신이 받은 패와 바닥패를 확인했다.
'나도 지금 A 원페어 거든. 저놈이 뭘 들었는지만 확인하면 돼.'
[마음의 소리를 쓰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어차피 정정당당 붙을 생각은 없다니까?'
도훈이 마음의 소리로 안경 청년의 생각을 읽었다.
{어쩔거냐? 난 벌써 J 원페어인데? 잘하면 플레시도 가능하고.}
'흥, 겨우 J 원으로 설레발은. 뻥카 맞네.'
"하프요? 받고 따당."
따당은 앞 사람이 건 돈의 두배를 올리는 베팅이었다.
예상외로 도훈이 세게 나오자 이번엔 선글라스가 살짝 당황했다.
{뭐야, 저새끼? 시작부터 대체 얼마를 박겠다는 거야?}
"따당?"
"혹시 귀 잘 안들리세요? 좀 더 크게 말할까요?"
도훈이 도발을 걸어오자 상대가 동요했는지 선글라스를 밀어 올렸다.
'오케이. 쿠세 하나 찾았고.'
[버릇이요?]
'응. 긴장하면 선글라스 코받침을 드는 습관이 있네. 이런 습관을 미리미리 하나씩 파악해 둬야 큰 승부에서 활용할 수 있거든.'
"음···. 콜. 일단 마지막 패까지 가보자고."
선글라스 또한 플러쉬가 가능했기에 승부를 던졌다.
이제 둘만 남은 상태로 주아가 카드패를 돌렸다.
도훈은 계속 청년의 속마음을 들여다 보았다.
{아씨, 플러쉬는 나가리네. 그래도 자투니까 한 번 달려봐?}
"선 베팅 하세요."
"하프."
이미 판돈이 많이 올라간 상태였기 때문에 판돈의 절반도 상당한 규모였다.
하지만 상대의 패를 모두 확인한 도훈은 일부러 피식- 웃어 보였다. 여유가 넘치는 웃음이었다.
"딜러님. 아까 베팅 상한액이 얼마라고 했죠?"
"최대 블랙 칩 3개까지 입니다."
"뭐, 일단 저는 다 넣을게요. 넘지는 않는 것 같으니."
도훈이 갑자기 들고 있던 모든 칩을 올인하자 선글라스를 쓴 청년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시작부터 올인? 저 놈 미친 거 아니야?}
도훈의 화끈한 베팅에 앞서 게임을 던진 대머리가 극도로 흥분해 소리쳤다.
"떴네, 떴어. 시작부터 플러쉬야?."
"어휴, 호들갑 좀 그만 떨어요. 이미 다이하신 분이 무슨."
"바로 올인 때리는 거 봤잖아. 당연히 메이드겠지."
선글라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기대했던 플러쉬는 불발되고 최종 J투페어인 상황.
어지간한 금액이면 따라가보겠지만, 시작부터 30개 가까운 칩을 태울 순 없었다.
"따라가시겠습니까?"
주아가 망설이는 선글라스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은 자신의 패를 한 번더 들여다본 뒤 도훈의 표정을 읽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블러핑인가? 근데 첫 판부터 바로? 혹시 저 놈도 플러쉬 메이드였나?}
망설이던 안경 청년은 결국 카드를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다이."
"게임 종료입니다. 상대가 다이했으므로 패를 보여주실 필욘 없습니다."
주아가 다시 바닥에 깔린 카드를 회수하려는데 도훈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카드를 노출시켰다.
"오예, 제가 이겼네요."
도훈의 패를 궁금해 하던 참가자들이 서둘러 패를 확인했다.
"어? 플러쉬가 아니네?"
"지금 A원페어 들고 올인을 때린 거야?"
"와, 대박! 배짱하난 좋구나!"
"······."
도훈의 패를 알고 난 청년은 분을 참을 수 없는지 테이블을 꽝 내리쳤다.
끝까지 콜을 받았으면 투페어인 자신이 결과적으로 이기는 게임이었다. 다 이긴 게임을 기세에 밀려 포기해 버린 것이다.
"아니, 내가 죽었는데 왜 굳이 패를 까요? 룰도 모릅니까?"
"죄송요. 실수로 손이 미끄러져서. 왜 근데 화를 내세요? 혹시 투페어 이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