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1. 제주도 푸른 밤-91-
갑작스러운 도훈의 등장에 보미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도훈이 김형사 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 몰랐던 것. 하지만 얼굴이 바뀐 상태였기 때문에 김형사는 도훈을 바로 앞에 마주하고도 누군지 알아채지 못했다.
“한데 이분은 누구···.”
“안녕하십니까. 광주 광산서에서 파견 나온 강력반 이동석이라고 합니다.”
도훈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김형사는 도훈의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워낙에 독특한 인상이라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아, 이분이···.”
김형사는 도훈의 험상궂은 외모에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평생 범죄자들을 마주하고 살아왔던 만큼 어지간한 인상으로는 놀라지도 않는 것이다.
오히려 도훈이 공조수사 협조를 핑계로 온종일 윤 경위와 붙어 다녔다는 소식을 듣고 살짝 배알이 꼴린 상태였다.
‘이런 깡패같은 몰골로, 감히 윤 경위님을 하루 내도록 뺑이 치게 했다는 거지?’
말단 순경도 아닌 윤 경위를 운전기사처럼 부렸을 도훈을 생각하니 슬슬 열을 받는 김 형사였다. 성격 좋은 윤 경위는 거절도 못하고 놈이 시키는 대로 질질 끌려다녔을 것이다.
그는 도훈과 손을 맞잡으며 은근슬쩍 힘을 주었다. 도훈이 그의 속내를 감지하고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것 봐라? 이놈이 나한테 악력 자랑을?’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맞잡았다. 일부러 시비를 거는데도 꿈쩍 않는 도훈을 보며 김 형사가 약이 올랐다.
‘표정 변화도 없다고? 감히 내 앞에서?’
김형사는 도훈이 피하지 않고 맞서자 본격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검도를 배웠고, 지금도 체력측정 때마다 악력 계측기에 80을 넘기는 타고난 장사타입이었다.
맨손으로 사과를 쥐어 즙을 짜낼 만큼 강력한 악력의 소유자 앞에서 도훈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전라도 형사님들은 힘도 좋으신가 봅니다?”
“하하. 힘이랄 게 있나요. 이거 가지고.”
도훈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김 형사가 힘깨나 쓰는 편이긴 했지만, 그의 앞에선 3살 아이가 재롱잔치를 벌이는 꼴이었다. 도훈이 받아주자 김형사도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특히 윤보미가 보는 앞에서 다른 사내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 두 사람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보미가 급히 끼어들었다.
“두 분, 인사를 너무 찐하게 나누시는 거 아니에요?”
보미가 둘을 뜯어말리는데도 김형사는 얼굴이 뻘게질 만큼 씩씩거렸다. 결국 보미가 한 번 더 만류하고 나서야 김형사가 먼저 악수를 풀었다.
“운동 좀 하셨나 봐요?”
김 형사가 저릿한 손아귀를 쥐었다 풀며 도훈에게 물었다. 도훈은 여전히 여유 있게 대답했다.
“네, 매일 하죠. 숨쉬기 운동이라고.”
“그게 무슨···.”
“그나저나 윤 경위님. 퇴근하고 저녁 사주신다더니 언제 출발합니까? 뱃가죽이 등허리에 붙겠네! 진짜.”
도훈은 일부러 김형사가 들으라는 듯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저녁이요?”
예정에 없던 약속에 보미가 당황하는데, 김형사가 물었다.
“두 분이 같이 저녁 드시기로 했어요?”
김 형사는 자신의 데이트 신청이 거절된 이유가 바로 도훈에게 있었음을 깨닫자 더더욱 흥분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격이었다.
“제가 점심을 대접했더니 굳이 저녁 사주시겠다고···. 하하 저희 둘이서 종일 같이 순찰 다녔거든요.”
‘저희 둘이서’라는 도훈의 표현에 김형사의 눈이 뒤집혔다.
딱 봐도 조폭처럼 생긴 도훈이, 순진한 윤 경위를 어떻게 작업해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은 좀 아니지만, 몸매만큼은 장난 없는 윤 경위의 진가를 인정하는 김 형사로선 열불이 터질 일이었다. 자신만의 소중한 보물에 누군가 눈독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김 형사는 윤보미가 옆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표정관리를 했다.
“아이고, 그런 거라면 저한테 말씀하시지.”
“예?”
“멀리서 제주도까지 오신 손님이신데 저녁 대접 가지고 되겠습니까? 제가 오늘 해산물 풀 코스로 시원하게 쏘겠습니다.”
“그쪽이 왜요?”
“아참, 제 소개가 늦었군요. 서귀포서 강력반 김관구라고 합니다.”
“오, 같은 형사님이시구나. 저는 지구대에서 나오시길래 여기 직원인 줄 알았죠.”
“윤 경위님, 제가 같이 대접해드리는 편이 낫죠?”
“아···.”
중간에 끼게 된 보미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김 형사는 일전에 자신이 잠깐 마음에 두었던 사람이었다. 김형사가 왜 갑자기 무리수를 던지는지 이해하는 처지에서 예정에 없던 삼자대면이 편할 리가 없었다.
보미가 망설이자 도훈이 먼저 대답했다.
“듣던 대로 제주도 형사님들은 인심이 참 후하네요. 안 그래도 윤 경위님이랑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고 싶었는데, 술은 또 못 드신다지 뭡니까? 이런 날은 또 한 잔 꺾어줘야 잠도 솔솔 잘 오는데 말이죠.”
“하하, 술이라면 더더욱 제가 맞상대를 해드려야죠. 제가 형사생활 안 했으면 어디 가서 술상무했을 거라는 소릴 자주 듣습니다.”
갑자기 의기투합하는 두 사내를 보며 보미가 난처해 하자 도훈이 눈짓으로 몰래 사인을 보내 안심시켰다.
약속 장소를 잡은 세 사람은 각각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옆자리에 앉은 도훈에게 보미가 방금 일을 물었다.
“방금 왜 그런 거야?”
“멀리서 듣고 있으니까 김관구가 너한테 찝쩍거리잖아. 그걸 내가 어떻게 참아?”
“내가 적당히 둘러대고 거절해도 됐는데···.”
“아니야. 차라리 잘 됐어.”
“잘 됐다니?”
“어차피 나 서울 올라가고 나면 김 형사가 계속 너한테 들이댈 거야. 이 기회에 그냥 확실히 정리해 버리자.”
“정리라니?”
“보미 네가 노선을 확실히 정해야 한단 뜻이야. 안 그럼 김 형사만 중간에 바보 만드는 꼴이니.”
보미는 연애경험이 없었으므로 남녀 간 벌어지는 미묘한 삼각관계를 다루는데 서툴렀다. 도훈이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고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김 형사가 너한테 마음 있는 건 알고 있지?”
“나한테 직접 고백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대충은 눈치챘을 거 아니야. 말 안 한다고 모른다고만 하지 말고.”
“으음···.”
“네가 데리고 놀 게 아니면, 김 형사가 먼저 단념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라는 거야.”
“데, 데리고 놀다니. 내가 무슨?”
“의도가 그게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김 형사를 희망 고문하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저 사람은 우리 관계를 모르니까 저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한 거고.”
“그럼 너랑 사귄다고 말하라고?”
“꼭 그런 말이 아니라 적어도 네가 김 형사에게 사귈 마음이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려줘야 한다고. 앞으로 미련 갖지 않게. 그래야 노총각 김 형사가 다른 여자 만나서 장가라도 들지.”
“아···.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어.”
“괜찮아. 그러면서 하나씩 배우는 거니까. 나중에 김 형사가 술좀 들어가면 둘이서 따로 얘기할 시간을 줄게. 그때 확실하게 말해줘. 그게 김 형사를 위하는 거니까.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았어 도훈아.”
횟집에 도착한 세 사람은 저녁 식사 겸, 반주 삼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이 들어가자 김형사는 일단 도훈의 나이부터 물었다. 한국에선 나이 많으면 일단 먹고 들어가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근데 이 형사님은 올해 춘추가···.”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예?”
김형사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저 액면이 20대라고? 이제껏 동년밴 줄 알았더니.’
“스물아홉요. 김 형사님은?”
“흠흠.”
김형사가 차마 자기 나이를 못 밝히는데 보미가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아직 마흔은 안 되셨어. 그쵸, 김 형사님?”
“내가 한참 선배였구먼.”
“아이고, 이런 형님도 몰라뵙고. 너무 동안이셔서 몰랐습니다.
사죄의 의미로 한 잔 올리겠습니다.”
도훈이 넉살 좋게 술을 따라 주었다. 처음 악력 대결을 펼칠 때만 해도 험상궂은 인상 때문에 거슬리던 도훈이었지만,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눠보니 보통 형사들보다는 훨씬 말이 잘 통하는 친구였다.
“하하, 그래. 동석이라고 했지? 내가 한참 형이니까 편하게 이름으로 부를게.”
“그러시죠.”
도훈도 술을 넙죽 받아마시며 김형사의 비위를 맞췄다. 어쨌든 오늘은 보미와 김형사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그가 적당히 취기가 오를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이고, 내가 술을 너무 급하게 마셨나 보네. 나 잠깐 화장실 좀.”
김 형사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보미가 도훈을 향해 말했다.
“너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김 형사님이랑 대작하지마.
저분 술 엄청 잘 마시는 걸로 유명하거든.”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래? 얼마나 잘 마시는데?”
“지난번 회식 때보니까 앉은 자리서 소주 3병을 넘게 마시고도 끄떡없으시더라고.”
“고작 3병? 나는 3 궤짝도 상관없는데?”
“뭐?”
도훈은 몸속으로 들어오는 알코올 성분을 내공으로 태워버릴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술을 아무리 들이부어도 밑 빠진 독처럼 다 흘려버리는 것이다.
“걱정마. 난 하나도 안 취했으니까. 김 형사가 취해야 네가 얘기를 하기 편할 것 같아서 같이 마셔주는 거야.”
“아···.”
“좀 있다 내가 담배 피운다는 핑계로 자리 피해줄 테니까 둘이서 잘 말해봐.”
“뭐라고 말하지? 난 이런 적 처음이라 너무 부담스러운데.”
보미는 안절부절못하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도훈이 안심시키 듯 말했다.
“김 형사님이 꽉 막힌 사람도 아니고, 나이도 적당히 드신 양반이니까 진상 피우며 매달리진 않을 거야. 정 힘들면 그냥 나를 팔든지.”
“팔라니?”
“나랑 사귀기로 했다고 말하라고. 남자친구 생겼다고 하면 남자들은 보통 단념하거든.”
“어떻게 오늘 처음 만난 너랑 사귀게 되었다고 그래?”
“형사 말고. 대학생 이도훈 말이야. 옛날부터 알던 사인데 이번에 사귀게 되었다고.”
“아···.”
“알았지?”
도훈과 보미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혼자 화장실에 간 김 형사는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있었다.
“오줌발 실한 거 보소. 껄껄.”
얼큰하게 취한 김 형사는 기분이 상당히 좋아진 상태였다. 광주에서 왔다는 이 형사와 보미 사이를 오해했는데, 아무리 봐도 업무상의 관계 이상으론 보이지 않았다. 보미가 먼저 저녁을 사려고 한 것도, 신세 지기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 탓이었다. 오히려 함께 술을 마신다는 핑계로 퇴근 후 보미와 저녁까지 술을 마시게 된 것이 기회처럼 느껴졌다.
‘그래. 오늘이 고백할 타이밍이구나. 더 질질 끌지 말아야지.’
김 형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팔에 문신을 한 젊은 남성둘이 옆자리 소변기에 섰다. 놈들은 금연인 화장실임에도 입에 담배를 하나씩 꼬나물고 있었다. 김 형사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굳이 오늘 같은 날 경찰티를 내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두 사람이 서로 오줌을 누며 대화를 나누었다.
“하, 씨발. 어제 클럽에서 만난 고년들 연락 안 받더라?”
“아서라 새끼야. 여자애들도 눈이 달렸으면 니 면상보고 연락하겠냐? 그러니까 취했을 때 확 봐버리니까 뭘 질질 끈다고.”
“뭐래 개새끼가. 지 면상은.”
서로 시비를 걸던 청년 중 하나가 팔로 다른 청년의 어깨를 툭밀쳤다. 밀린 청년의 몸이 옆으로 돌아가면서 하필 오줌 방향이 꺾이더니 오줌이 김 형사의 구두로 튀고 말았다.
“야이 씹새끼야! 너 때문에 오줌 튀었잖아!”
청년은 오줌을 튀기고도 김형사에게 먼저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친구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졌던 김형사는 그 순간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구두에 오줌이 튄 것도 열 받는 일이었지만, 껄렁껄렁한 양아치 놈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자신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무시하는 태도가 괘씸했다.
“이봐.”
소변을 마친 김 형사가 양아치 청년들을 불렀다.
“뭐요?”
“구두에 소변이 튀었는데 사과 한마디가 없네?”
청년 둘은 양팔에 잔뜩 문신을 한데다, 덩치도 제법 있었기 때문에 김 형사의 지적에 콧방귀를 뀌며 오히려 위협하기 시작했다.
“아저씨. 술 처먹고 객기 부리지 말고, 갈 길 가쇼.”
“처맞기 싫으면 눈 깔고 끄지라 좆밥 새끼야.”
김 형사는 문신 충들이 가오 잡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가 형사치곤 인상이 좋은 편이긴 했지만, 덩치가 작은 편도 아니고 눈빛도 제법 매서웠기 때문에 양아치들에게 시비를 걸려 본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술에 취한 젊은 친구들이 객기를 부리고 있었다.
“어린 친구들이 말로 해선 안 되겠구먼.”
“뭐래 병신 꼰대가.”
“아, 꺼지라고, 씨발!”
양아치 하나가 손에 들고 있던 담뱃불을 김 형사의 얼굴을 향해 털었다. 눈에 불똥이 튀면 실명까지 이를 수도 있는 위협적인 행동이었다.
김 형사는 고개를 옆으로 슬쩍 틀어 담뱃불을 피하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니들이 먼저 시비 건거다?”
“야, 조져 씨발!”
그러나 늘 조져지는 건, 조지라고 외치는 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