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3. 제주도 푸른 밤-3-
* * *
인천발 제주도행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활주로를 내달렸다. 양력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고속의 질주에 자연스럽게 몸이 뒤로 밀려나갔다.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비행기가 떠올랐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이륙하는 순간은 늘 짜릿하다.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두근거리는 느낌이 지루한 일상으로부터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러고 보니 예정에도 없던 여행이구나.'
갑작스러운 특임대의 등장은, 바쁘게 살아온 나에게 깜짝 휴식을 선사했다. 1학기 때부터 쉬지도 않고 달려왔는데, 처음으로 자유가 주어진 셈이다.
[미호를 포섭해 놓지 않았다면 큰 고초를 치를 뻔했습니다.]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네.'
솔직히 미호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학교를 다니다 놈들에게 발각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를 찾으러 온 것인지는 지금도 확실치 않지만,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엄한 불똥이 나에게 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에 제주도 가셔서 윤소미의 단서를 찾으시려는 거죠?]
'응, 시간이 다소 지나긴 했지만 분명 흔적이 남아있을 거야. P K단은 놓쳤을지 몰라도 같은 플레이어끼리는 통하는 게 있을 테니까.'
처음으로 마주할 랭커급 플레이어.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뭐해? 사진 찍으려고?"
그때 옆자리에 앉은 귤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 소린가 하고 옆을 쳐다보니, 통로 쪽에 앉은 리나가 셀카 모드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친구인 귤희까지 한 컷에 담으려다 보니 끝에 앉은 나까지 앵글에 걸리는 상황이었다.
'저건 또 뭐하는 짓이야?'
"응, 나중에 인스타에 올릴까 하고."
SNS에 올린다는 말을 듣자마자 급히 몸을 틀어 창가 쪽으로 돌렸다. 남모르게 떠난 여행 동선을 노출시켰다간, 나중에 무슨 우환을 당할 지 몰랐다. 나의 예민한 반응에 셀카를 찍으려던 리나가 사과를 건넸다.
"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나는 대답하기도 귀찮았기 때문에 헤드셋의 볼륨을 최대로 올린 후 눈을 감아 버렸다.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엮이고 싶지 않은데 계속 걸리적거리잖아.'
[주인님이 여자를 마다하는 모습은 처음 봅니다.]
'귀찮아. 이번 여행에선 무조건 혼자 다닐 거야.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나의 무심한 반응에 자기들끼리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딴에는 둘이서 속삭인다고 생각했겠지만, 귀가 밝은 나로서는 볼륨을 높인 음악을 뚫고 속속들이 들려왔다.
-야, 더럽게 까칠하네. 누가 보면 우리가 도촬하는 줄?
-그러게. 성격 못됐다 진짜. 미안하다고까지 했는데.
아무리 헤드셋을 끼고 눈 감고 있다고 해도, 사람 면전에서 대놓고 뒷담화를 까는 인성이 더 못 된 것 아니냐 따지고 싶었지만 그냥 상종을 안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착륙만 하기만 해봐. 다신 안 엮여야지.'
제주도까지 비행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잠깐 떠올랐다 싶더니, 어느새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나는 착륙과 동시에 곧바로 렌터카를 빌리려고 했기 때문에, 서둘러 짐을 챙기려고 했다.
"손님.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기 전까지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짐을 빼려고 안전벨트를 푸는데 승무원이 저지했다. 하필 통로 위 짐칸에 짐을 놔둔 나는 비행기가 도착하고 내 옆자리 여자들이 나갈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짜증 나. 왜 국내선은 퍼스트 클래스가 없는 걸까?'
[아예 자가용 비행기라도 한 대 구매하시지 그러십니까? 돈도 많으신 분이.]
'됐어. 한 번 찍어 놓으면 다음엔 비행기 탈일 없을 테니까.'
[마법의 문고리요?]
'응. 포털 위치만 찍어 놓으면 그 다음엔 옆 집 드나들듯 할 수 있잖아. 사실 난 윤소미도 그런 방식으로 제주도를 빠져 나가지 않았을까 의심하고 있거든.'
[일리 있는 의견입니다. 만약 내륙으로 향하는 포털을 열 수 있다면, 비행기나 배를 타지 않고도 제주도를 빠져나가는 건 식은 죽 먹기였겠죠.]
'아니면 투명인간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투명인간요?]
'왜, 이번에 특임대 인원 중에서 투명화 능력자가 있다고 했잖아. 투명인간이면 비행기를 타더라도 아무도 몰랐을테니까.'
[하지만 공항 검색대에서 걸리지 않을까요? 몸수색 때문에 탑승은 어려울 것 같은데요. 투명해졌다고, 엑스레이를 통과할 수 있는건 아니니까요.]
'흐음, 그러려나?'
[주인님. 이제 내릴 차례입니다.]
'응.'
앞선 승객들이 대부분 빠져나가자 드디어 내 차례였다.
하지만 통로 쪽에 앉은 리나와 귤희는 뭐가 그렇게 챙기게 많은지 나갈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짐을 빼고 있는 것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뒷좌석 승객들이 두 사람을 건너뛰고 먼저 나가기 시작했다.
'아씨, 뭐하는 거야. 지금 나가야 하는데.'
아까부터 서두르던 나에게 엿 먹이려고 일부러 늦장을 부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부터 먼저 나가도 될까요?"
"저희 다 챙겼어요. 잠시만요."
하지만 그 말을 하고도 한참 동안 짐을 챙긴 두 사람은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뒤에야 미적거리며 통로를 빠져나갔다. 속에서 열불이 터졌으나, 나는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으 진짜 느려터져가지고.'
그런데 수화물 칸에서 가방을 꺼내려는데, 내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어?"
영문을 몰라 계속 뒤적이고 있는데, 정말로 내 짐이 사라져 버렸다.
"이 칸이 아니었나?"
"저희 먼저 나가면 안 될까요?"
"거, 뒷사람 생각 좀 합시다."
졸지에 길막 해버린 나는 급히 안쪽으로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후에야 나는 다시 수화물 칸을 확인했다.
분명 내가 들고 온 백 팩은 검은색이었는데, 그곳엔 진녹색의 가방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설마 누가 바꿔 들고 갔나?"
그때 앞서 빠져나간 두 여자가 떠올랐다. 양손 가득 짐이 많았던 두 사람은, 나랑 같이 가방을 넣어둔 수화물 칸에서 가방을 바꿔치기해간 것 같았다.
"아 놔, 진짜! 이것들이 끝까지!"
나는 급히 진녹색의 가방을 꺼내 들었다. 하필 모양도 비슷하게 생긴 것이 착각할만도 했다.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빠져나가게 된 나는 사람들을 헤치며 급히 두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입국장까지 샅샅이 뒤지면서 왔는데,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뭐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나는 혹시나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제주공항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여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짜증나네 진짜."
결국 나는 입국장 벤치에 앉아 남의 가방을 뒤져야 했다. 혹시나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가방을 열자 보이는 것은 화장품을 모아놓은 꾸러미와, 속 옷, 그리고 반쯤 쓰다 남은 생리대였다. 전형적인 여자 물건. 신분증이 있나 앞주머니를 살피는데 가방 끈에 영어로 이름이 적힌 태그가 달려있었다.
{Ri-Na Jang}
[장리나라면 주인님으로부터 핸드폰을 빌렸던 그 여자 아닙니까?]
'맞아. 뒤에 온 여자가 귤희라는 애였고. 가방 바꿔 간 게 맞네.
'물론 내 가방에 귀중품 같은 건 들어있진 않았다. 끽해야 속옷 몇 벌, 핸드폰 충전기, 그나마 잃어버리면 짜증나는 것이 차 키 정도? 어차피 필요한 것은 현지에서 구매하기로 했기 때문에 여행용 가방이라고 보기엔 정말 든 것도 없는 구성이었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내 실수도 아닌데 남의 가방과 바뀌었다는 게 짜증이 났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특히 신분증까지 가방에 있었기 때문에 야밤에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선 꼭 가방을 다시 찾아야 했다.
[주인님. 리나양의 번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결국 나는 아까 남아있던 번호로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저기 비행기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잔데요."
-아, 네. 기억나요.
-누군데?
-아까 그 남자.
-헐, 완전 쌩 까더니 비행기 내려서 갑자기 연락이래? 너한테 관심있나 봐. 꺄하하.
옆에서 꺄르르 떠드는 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그게 아니라 제 가방이랑 바꿔 들고 가신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예요? 저희가 그 쪽 가방을 바꿔갔다고요?
"네. 검은색 백 팩인데 확인 좀 해주실래요?"
-죄송한데 지금 택시 타가지고 트렁크에 짐을 싹 실어버렸거든요. 저희랑 바뀐 거 확실해요?
"···제가 지금 장리나씨 가방을 들고 있거든요."
-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스토커냐고 따지는 듯한 말투에 인내심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가방에 이름표가 달려있길래요. 아니 그리고 남의 가방을 잘 못 가져간 사람이 누군데 지금."
-아···. 일단 죄송해요. 잘은 모르겠지만 저희가 급해서 두서 없이 안에 있는 걸 챙기다 보니. 귤희 네가 내 가방 챙겼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근데 가방 바뀐 줄 아셨으면 공항에서 바로 알려주셨어야죠.
저희 이미 숙소로 가고 있단 말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쫓아갔는데 안 보이는 걸 어떻게 합니까?"
-아···. 저희가 바로 화장실을 들르면서 엇갈렸나 봐요.
"일단 바뀐 건 확실한 것 같으니까 택시 돌려주세요."
-지금요? 지금 제주시 막 벗어나서 유턴이 어려울 것 같은데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다시 만나실래요?
정말 끝까지 열받게 하는 여자들이었다.
"저랑 지금 장난해요? 저도 렌터카 빌려야 한다고요. 가방에 신분증 있고요."
-아니면 저기 저희 숙소 주소 알려 드릴테니까, 택시 타고 오실래요? 택시비는 저희가 드릴게요.
-야, 그냥 끊어. 사람 성가시게.
"아니, 실수는 그쪽이 해놓고 지금 누구한테 오라가라···."
뚝-.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내 이성의 끈도 같이 끊어졌다.
"이런 미친년들이 진짜!"
나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자동응답메시지만 날아올 뿐이었다.
"아놔, 이 싸가지가 진짜!"
[주인님, 고정 하십시오. 공항이라 사람도 많은데 괜히 주목받지 마시고요.]
"진정하게 됐어? 진짜 인천에서 출발할 때부터 계속 신경 거슬리게!"
그때 핸드폰으로 주소가 날아왔다.
정말로 날보고 찾으러 오라는 소리였다.
"아오! 씨발 이것들을 확 그냥!"
[주인님. 이렇게 흥분하시면 더욱 사람들 눈에 띌 뿐입니다. 몰래 비밀 여행을 왔는데, 계속 주의를 끄실 생각입니까?]
'후웁후웁- 오케이 알았어.'
하지만 아무리 심호흡을 하고 진정하려고 해도, 이기적인 여자들의 태도에 너무 화가 났다.
'근데 킹 받게 하네 진짜. 뭐? 택시비를 준다고? 어차피 지들이 차 돌려서 와도 내야 할 돈이잖아!'
[그냥 가방을 포기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중요한 물건도 없는데요.]
정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차 키야 귀찮아도 키 박스만 교체하면 될 일이고, 가짜 신분증은 복제기 아이템을 이용해 당장도 생성이 가능했다.
다만 내가 장리나의 가방을 들고 있는게 문제였다. 대충 거들떠보긴 했지만, 혹시나 안에 지갑이나 귀중품이 들어있다면 나중에 괜히 절도죄를 뒤집어 쓸수도 있는 것이었다.
'에이씨 그냥 연락을 안했어야 했는데.'
[이럴 줄은 몰랐으니까요.]
'근데 그 여자애들 숙소까지 가서 렌터카는 또 언제빌리냐고.'
[그냥 이렇게 된 거 해당 숙소에서 하루 묵으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미쳤어? 그럼 내가 진짜로 지들한테 관심있어서 쫓아다닌 줄 알거 아니야? 됐어.'
나는 씩씩거리며 공항 앞 택시 승강장에서 택시를 잡았다. 숙소위치를 말하자 기사가 곧바로 내비를 검색해 차를 출발시켰다.
'아오, 참자. 그냥 액땜하는 셈 쳐야지.'
[근데 좀 이상합니다.]
'뭐가?'
[리나양은 그렇다 치고, 옆에 있던 귤희양은 왜 전화를 끊으라고 했을까요? 전화를 다시 안 받은 것도 그녀가 사주한 것 같은데요.]
'대놓고 엿먹어 보라는 거지.'
[네?]
'지들 딴에는 나한테 관심을 보였는데, 내가 일방적으로 개무시했으니까.'
[그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주인님을 일부러 골탕 먹이는 거라고요?]
'일부러는 아니겠지. 서로 같이 짐을 챙기다가 귤희가 리나 가방인 줄 알고 내 가방을 들고 택시까지 가서 트렁크에 실어버린 모양이야. 근데 나중에 실수를 깨닫고도,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으니까 대놓고 골탕 먹어봐라 이거겠지.'
[하-. 참으로 못 된 여자들이군요.]
'내가 이럴 것 같아서 안 엮이려고 했다니까? 하여간 남자친구 몰래 여행와서 바람이나 피려는 년들 인성이 똑바로 박혀 있을 리가 없겠지만.'
"제주도 혼자 여행오셨나요?"
"네?"
혼자 로시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인상좋은 택시 기사님이 나에게 물었다.
"왜, 요새 젊은 사람들은 혼자 와서 게하에 묵곤 하잖아요. 지금 가는 곳도 엄청 인기 많은 곳 중 하나거든요."
"여기 아세요?"
"알다마다요. 아주 핫 플레이스죠. 밤마다 야외에서 술 마시고 바비큐 파티하는데, 젊은 남녀들이 그렇게 눈이 맞는다지 뭐요?
지금 도착하면 막 파티 시작했겠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한다니까."
그제야 나는 그녀들의 속셈을 간파할 수 있었다.
게하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가하고 싶어서 차를 돌리지 않은 것이었다.
간만에 복수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이것들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