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6. 정체불명의 그녀-11-
'데미지라니?'
[강제 종료는 리스크가 큽니다. 캐릭터가 죽는 게 싫어서 갑자기 게임을 종료한 셈이니까요.]
'그렇다고 진짜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단 말이야?'
[가상 현실은 오감의 완벽한 구현을 위해 뇌파 수준까지 싱크가 맞춰진 상태입니다. 즉, 동기화 시킨 뇌의 연결을 억지로 끊어 버렸기 때문에 주인님까지 함께 쇼크를 먹은 셈이죠,]
'흐음. 대충 알 것 같군. 내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지?'
[대략 2시간 정도입니다.]
'빌어먹을.'
아무리 생각해도 공략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 한 번의 라이프가 남았지만, 이대로 다시 도전해 봐야 계란으로 바위치기 수준이다. 난 아마도 또 죽을 거다.
자하의 무공이 말도 안되게 높게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노애만 그런게 아니었어. 자하도 완전히 오버파워(OP)야. 게임을 진행하기 힘들 정도로 먼치킨을 만들어 놨어.'
노애는 탈인간급 정력을 가진 섹스 머신.
자하는 초월급 무공을 지닌 마교 소교주라는 설정.
이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공략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즉, 내 공략법이 틀렸다는 소리다.
'잠깐 진행을 멈춰야겠어. 한번만 더 죽었다간 다시 접속불가페널티를 받을 것 같으니.'
생각을 해야했다.
모든 게임엔 공략법이 존재한다.
아니, 존재 해야 했다.
제아무리 극악의 난이도를 가진 게임이라도, 공략 자체가 불가능할 순 없다.
게임 제작자가 미친 변태가 아니고선 말이다.
[원래대로 정석코스로 가는 방법은 어떻습니까?]
'정석코스라면?'
[산적을 물리치고,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어 객잔으로 가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옥봉사선자와 만나게 될테고 그들과 인연을 맺어 진행하는 게 올바른 수순으로 보이는데요.]
로시의 말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오픈 월드류 RPG라고 할지라도, 제작자는 최소한의 가이드 장치를 해 놓는다. 그렇다면 맨 처음 게임에 접속했을 때의 흐름이 원래 제작자가 제시한 코스라고 해도 무방하다.
한편 나는 한방에 무림비급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백도어를 찾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현 상태에선 결코 공략이 쉬울리 없다.
문제는 그런 방식은 앞으로도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 게임은 결코 친절하지 않으며, 동시에 수많은 함정이 숨어 있다. 정석코스대로 공략을 진행하다 보면 아마도 수십번의 죽음을 겪어야 할 것이다.
3번 연속 죽으면 일주일의 접속 페널티가 주어지고, 또 다시 처음부터 다시 게임을 시작해야 한다. 이는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다.
'원래라면 그게 맞겠지. 하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야.'
[주인님의 고집이 게임을 더 어렵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죠.]
'그건 그렇고 궁금한 게 하나 있어.'
[어떤 부분인가요?]
'보통 게임에서는 아이템을 얻거나 레벨업을 통해서 점점 더 강한 상대를 극복하게 되어 있잖아. 하지만 천상크래프트에선 아이 템은 그렇다치고 레벨업은 불가능한 구조 같은데, 원래 그런 식인가?'
[맞습니다.]
'레벨업이 없다고?'
[주인님의 현 상태가 곧바로 게임에 반영되니까요. 즉, 현실에서의 레벨업이 게임에 반영되는 이중구조 입니다.]
'아!'
이 부분이 가장 독특한 점이었다.
천상크래프트는 일종의 가상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와 똑같은 물리법칙이 적용된다.
즉, 현실에서의 나의 힘이 10이라면, 가상에서도 그대로 10인 것이다. 어떤 왜곡도 보정도 없이 모든 스킬또한 똑같이 구현된다.
물론 마나가 더 빨리 차오르는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강함의 차이를 낼 정도는 아니다. 즉, 게임 속 캐릭터가 강해지기 위해선, 현실의 내가 더 강력해 지는 방법 밖에 없다.
실제로 미호의 내공을 흡수한 뒤 나는 훨씬 강해졌고, 재접속게임 속의 캐릭터 역시 똑같이 강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가만. 뭔가 재밌는 생각이 났는데?'
[네?]
'로시 네가 그랬잖아. 뇌파가 동기화되서 게임 속에서의 데미지가 현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럼 반대로 게임속에서 내가 강해지면, 현실의 나도 똑같이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역으로 말입니까?]
'그렇지.'
[물론 가능합니다. 일전에 훈련장에서 연습했던 것도 같은 원리를 이용한 것이니까요.]
'지금 내 공략법에서 문제는 노애와 자하가 너무 강력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거거든. 성적인 능력이건 무공이건 현재 나의 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죠.]
'근데 만약 가상 공간에서 수련해서 능력을 키우게 되면?'
[네?]
'생각해 보니까 미호의 내공을 흡수하고 나서 제대로 수련한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그냥 사용만 했을 뿐. 하지만 수련을 하고 나면 더 강해질 여지가 있는 거 아니야?'
[흐음, 틀린 말은 아닌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 텐데요?]
나는 씩 웃었다.
'시간은 아직 5일이나 남았지.'
[네?]
'그리고 현실에서의 5일은 가상세계에서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일거고.'
[아 설마!]
'맞아. 어쩌면 대물을 쓸 수 없는 신벌은, 나에겐 천상크래프트에서 단련할 시간을 주신 걸지도 모르지. 내가 왜 진작 그 생각을 안했는지 모르겠어.'
[계획을 세워봐야 겠군요.]
새벽부터 아침을 든든히 챙겨먹은 나는,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훈련할지 계획을 세웠다.
'일단 학교는 꼬박꼬박 출석해야 해. 학점은 잘 받아야 하니까.'
[대신 오후에는 무조건 수련을 하시는 거군요.]
'그렇지. 지난번에 연습할 때 보니까 빡세게 수련을 마치면 지쳐서 못하겠더라고. 즉, 휴식과 훈련이 병행되도록 시간 배분을 잘해야 한다는 소리지.'
천상크래프트 속에선 시간이 현실의 1/100로 간다.
즉 현실에서의 5일이면, 가상에서는 500일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24시간 내내 훈련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학교는 꾸준히 나가야 한다. 그러면 하루 훈련 시간은 16시간 정도가 확보된다.
'포인트도 따져봐야해. 지난번에 많이 모아놓긴 했지만 무한정쓸 수는 없을 거야. 마지막에 게임에 접속할 여유도 남겨놔야 하니까.'
학교에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은 시간을 모두 투자한다고 봤을 때 최대 훈련 시간은 대략 하루에 일주일 남짓이다.
시간당 100포인트가 소모되니, 대충 계산해도 하루당 1만 포인트가 날아가는 셈이다.
'내가 지금 가진 포인트가 얼마나 있지?'
다행히 포인트는 최근 많이 쌓아뒀기 때문에 5일 가량 훈련할 수준은 될 것 같았다. 남은 5일을 거의 한달처럼 보낼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한달 수련하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미호의 내공을 흡수하고 한번도 제대로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내공의 양이 달라지면서 무공의 위력도 덩달아 증가했을 테니까요.]
'오케이. 그럼 오늘 저녁부터 한 번 시작해보자.'
계획을 모두 세운 나는 여자애들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피해다녔고, 수업만 딱 마치고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외의 모든 연락은 인공지능 자동응답이 대신하도록 했다.
"로시, 천상크래프트 훈련장 모드 접속해줘."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면 나는 곧바로 가상현실로 접속했다.
게임이 아닌 훈련장이었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검술 훈련이었다.
내가 일전에 배운 것은 칠성권이라는 권각술이었고, 이를 검술로 응용하기 위해선 연습이 필요했다.
가상세계이다 보니 묵향을 자유자래로 불러올 수 있었는데, 게 임에서와 똑같은 능력치로 복제해 검술을 연습했다. 제대로 된 검술서가 있으면 좋아겠지만, 당장은 내가 가진 기술을 응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검술 훈련과 휴식을 번갈아가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너무나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무공이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가상 훈련이 끝나면 기절하듯 잠을 잤는데, 정신은 일주일간 각성상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육체의 피로보다 정신적 피로가 극을 달렸다.
자고 일어나면 학교를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를 잔뜩 채우고 다시 훈련에 몰입했다.
오로지 자하를 꺾는다는 일념으로.
상대 캐릭터 역시 자하로 설정했다.
그녀가 쓰는 무공은 참으로 독특했는데, 마치 염력처럼 사람을 옭아매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무공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무공이 더 고강하다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속된 훈련으로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였다.
말이 한달이지, 한달동안 검을 들고 휘두르고 내공을 운용하다보면 내가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3일 째 되는 날은 너무 지쳐 다 포기하고 싶었다.
'젠장, 내가 잘못 생각했나봐. 강해졌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아닙니다. 주인님은 전보다 훨씬 강해지셨습니다. 주인님이 못느낄 뿐이죠.]
'정말로? 현실에서도 내가 강해진 게 맞아?'
[실험을 한 번 해보시죠?]
'실험이라니?'
나는 로시의 말을 듣고 목검을 하나 구입한 뒤 마당으로 나갔다. 우리집 마당은 담벼락이 높아서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훈련하던 것처럼 검에 의식을 집중해 보십시오.]
나는 목검을 들고 묵향에 했던 것처럼 기를 불어 넣었다.
기의 운용이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손끝에 기를 넣는 것처럼 사물에도 내공을 주입할 수 있게 되었는데, 현실에서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응? 오오오!"
놀랍게도 천상크래프에서 한 것처럼 단순한 목검에도 내공이 실렸다. 목검의 주위로 은은하게 푸른빛이 돌면서 검기가 형성되었다.
"이게 되네 진짜?"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주인님의 실력이 훨씬 강해졌다고요.]
내공이 주입된 검을 허공으로 붕 휘둘러 보았다.
단순한 목검인데도,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한번 시험해 봐야 겠는데?'
[어떻게요?]
마당에는 이전 주인이 설치한 조경수와 수석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중 가장 단단해 보이는 돌덩이 앞에 섰다.
'진짜로 내공이 주입되었다면 목검으로 돌덩이도 자를 수 있을 거야.'
나는 검을 들고 집중하며 내공을 더욱 불어 넣었다.
목검을 둘러싼 푸른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합!"
일도양단의 기세로 돌덩이를 향해 내리쳤다.
그 순간 돌이 날카로운 칼로 베인 것처럼 정확히 두동강이 났다.
"오우 쉣! 이게 되는 구나!"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검기를 완벽히 습득하셨군요.]
'좋아. 이 기세로 계속 간다.'
지치고 힘들었지만 현실에서의 성과를 본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체력단련장으로 돌아가 가부좌를 틀었다.
가상 현실에 들어간 나는 남은 이틀을 다시 미친듯이 훈련했다.
마지막 주차에 접어들었을 땐 스스로도 처음과 엄청나게 달라진 것을 느낄 정도였다.
미호에게서 얻은 내공이 내 몸에 완벽하게 안착된 것처럼 일전에 비해 훨씬 강력한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그저 몸에 가지고만 있던 내공을 온전한 내것으로 흡수해낸 것이었다.
또한 익숙하지 않았던 검술도 이제는 많이 적응되어 손발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자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적어도 이전처럼 허무하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 훈련이 끝나는 날은 신벌을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현실에서 발기된 대물을 내려보며 순간 고민했다.
'아씨, 게임이고 뭐고 그냥 한 판 하러 갈까?'
[네?]
'말이 일주일이지 실제론 한달을 고자로 살았다고. 불알속이 정액으로 터져버릴 것 같단 말이야.'
[그 에너지를 담아 게임을 공략하시는게 어떠신가요?]
으음.
어차피 섹스라면 게임속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괜히 현실에서 물을 빼고 온다면, 게임에서의 욕구도 똑같이 줄어들 것이다.
차라리 굶주린 짐승 상태로 가는 것이 게임을 공략하는 데는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좋아. 간다. 이번에는 꼭 성공한다.'
[무운을 빕니다.]
산적들을 이끌고 다시 용문객잔을 침투했다.
레파토리는 똑같았다.
불을 지르고, 산적들로 소란을 일으킨 뒤 지하층에 침투했다.
"누구, 컥!"
엽적은 맞은 마교 졸개가 그대로 즉사했다.
놀라운 것은 이전에는 엽전이 이마에 박힌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뒤통수를 뚫고 나와 벽에 박혔다는 것이었다.
강해진 무공의 힘을 세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정도면 역용술을 쓸 필요도 없겠는데?'
저번에 역용술을 썼던 건 마령을 단숨에 제압할 실력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묵향을 빼들고 정정당당하게 지하2층으로 내려갔다.
복면을 쓴 마령은 내 눈빛을 보자마자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다.
"문을 열어라. 소교주를 만나러 왔다."
"누, 누구냐?"
"알 필욘 없고. 죽기 싫으면 그냥 비켜."
"갈!"
마령이 검을 빼들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현격한 실력의 격차를 느끼고, 선공으로 우위를 점할 생각인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4검으로 끝냈지. 이번에는 과연.'
나는 곧바로 한달 간 수련한 칠성검을 펼쳤다.
일검에 튕겨나간 마령의 검은, 이검째에 두동강이 났다.
마령은 믿기지 못한다는 얼굴로 그대로 죽었다.
"주인님, 상황을 보고 올까요?"
"아니 됐어. 정면으로 간다."
나는 그대로 석문을 향해 묵향을 내리쳤다.
두꺼운 석문이 반으로 쪼개지며 입구가 열렸다.
"왠놈이냐!"
"나다, 씹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