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1. 대학 축제-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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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오셨군요!"
일손이 모자라 서빙을 돕던 혁준은 PC방 알바 소연을 마주하고 크게 환영했다. 교내 롤 대회 16강전에 안착했을 때보다 더한 성취감이었다.
‘저, 정말로 왔어! 빈말로 한 얘긴 줄 알았는데 날 보러···.’
그러나 잠시 후 소연의 뒤에서 키 큰 남자가 코를 파며 등장하는 순간 그의 기쁨은 산산조각이 났다.
“여기 분위기 좀 특이한데? 왜 서빙하는 여학생들 의상이 다들 ···."
“반가워요. 이쪽에 앉으면 되죠?"
소연은 혁준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뒤따라온 창범도 마주 앉으며 혁준에게 말했다.
“오,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네? 맞죠?"
“···그, 그렇습니다."
“다른 주점 안 가고 일부러 이쪽으로 왔으니까 서비스 좀 듬뿍부탁해, 학생."
“그, 그럼 메뉴판 보시고 결정되시면 주문해 주세요."
혁준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도망치듯 어디론가 사라졌다. 창범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저 학생 왜 저래? 손님 응대가 영···."
“저보고 실망했나 보죠."
“왜?"
“그렇잖아요. 나름 용기를 내서 데이트 신청을 한 셈인데, 그 자리에 다른 남자랑 함께 왔으니."
“다른 남자? 누구? 나 말하는 거?"
창범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순진한 척은··· 풉."
소연은 속 보이는 창범의 연기에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혁준에게는 미안함을 전했다.
‘미안. 명백한 거절이라고 받아들여도 어쩔 수가 없네.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라서.’
“뭔 소린지 모르겠고, 여긴 뭐가 맛있을까? 30분 넘게 줄서서 기다렸는데 하여간 맛없기만 해봐."
체육교육과 주점을 찾은 소연과 창범은 엄청난 대기 줄에 깜짝놀랐다. 평범한 축제 주점일 뿐인데, 다른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손님이 많았던 것이다. 그나마도 이후에 테이블이 더 추가되면서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맛은 딱히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요?"
“왜?"
“무슨 요리를 배운 셰프가 있는것도 아니고, 대학생들끼리 주물럭거리면서 만든 안주가 뭐가 그렇게 특별하겠어요."
“맛집도 아니면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건데 여긴?"
“몰라서 물어요?"
소연이 턱짓으로 서빙중인 여학생들을 가리켰다.
때마침 엘사를 코스프레한 아영이 옆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병맥주 두 명을 들고 지나가는 캣우먼과 자리를 치우고 있는 원더우먼도 보였다.
“···다들 서빙하는 애들보러 왔겠지."
하지만 창범은 소연이 말고는 다른 여자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저 신박한 아이디어로 콘셉트를 잘 잡았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암튼 가격도 저렴한 것 같은데 배터지게 시켜보자. 확실히 대학교 주점이라 싸네. 파전에 계란말이까지 추가해도 만원밖에 안해!"
“오빠가 알아서 시켜요. 그럼."
“오케이 좋아."
예상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눈이 돌아간 창범이 이것저것 안주를 고르고 있는데 소연이 물었다.
“그나저나, 미호언니는 진짜로 안 올거래요?"
“미, 미호?"
“네. 진짜 혼자 돌아다니게 놔두실 건 아니죠? 아무리 대학이라도 요새 또라이들 얼마나 많은데요? 괜히 누가 술먹고 추행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추행? 미호를?"
“헐, 진짜 오빠 그럴 때마다 어이없는 거 알죠? 미호 언니처럼 예쁜 사람이 어딨다고."
창범은 속으로 기가 막혔다. 물론 미호가 미인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인격이 바뀔 때마다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지 는데, 팔색조라는 말이 절로 어울릴 만큼 다양한 매력을 뿜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플레이어를 처단할 때의 모습을 못 봐서 하는 소리였다.
마녀.
창범은 그렇게 미호를 정의했다. PK단 내부에도 마법사 계열은 여러사람이었지만, 미호는 어떤 마법사보다 강력한 실력자였다. 특히 플레이어를 사냥할 때 보여주는 공격성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
PK단의 인원 구성은 대체로 ‘레이드’라 불리는 전술 방식을 따르는데, 이는 강력한 플레이어를 잡기 위해 서로의 포지션을 명확하게 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강력한 탱킹을 바탕으로 팀의 방패막이를 자처하는 탱커, 물리력 혹은 마법 등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딜러, 그리고 이 둘을 다양한 유틸기로 보조하는 서포터가 핵심 구성이었다.
물론 지부마다 인적구성이 다르므로 탱커나 부르저가 둘인 곳도 있고, 딜러가 하나인 곳도 있었고, 강력한 서포터가 주축인 곳도 있었다. 그리고 미호처럼 혼자서 모든 공격을 담당하는 강력한 마법사 딜러를 ‘누커’라고 불렀다.
염동술사인 건이 합류하기 전까지, 미호는 혼자 딜러 2인분 이상의 화력을 전담하던 누커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몇번이고 목격했던 창범으로서는 감히 미호를 추행할 수 있는 사내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미호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세상에서 미호 걱정이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야."
“그래서 안 부를 거라고요?"
“본인이 오지 않겠다는데 어째 그럼?"
“참나."
미호 이야기로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 사이로 누군가 메뉴판을 들고 찾아왔다.
“손님 메뉴판 드릴까요? 아, 있구나."
전신 공룡 옷을 입은 예쁘장한 여대생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다른 코스프레 복장과 달리 유달리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복장이었지만, 소연은 정음의 등장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헐, 여기 서빙하는 애들은 뭐가 저렇게 예쁘담? 여자인 내가 봐도 반하겠네.’
어리어리한 정음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려는데 소연이 그녀를 붙잡았다.
“저기요. 주문할게요."
“앗, 네 손님."
“음, 여기 병맥으로 3병 주시고요, 소주도 있죠?"
“네 있습니다."
“그럼 병맥주 3병, 소주 한 병에 오빠, 안주 다 골랐어요?"
“안주는 파전에 계란말이, 오징어 땅콩이랑 과일화채 주세요."
“그걸 다 둘이서 다 먹자고요?"
“왜? 남으면 내가 다 먹을게."
“잠시만요 너무 빨리 말하셔가지고···."
서빙이 서툰 정음은 창범이 한번에 여러 개를 주문하자 쩔쩔맸다.
“한 번만 더 불러 주시겠어요?"
“그러니까 메뉴판에서 1번부터 4번까지 하나씩 주시면 돼요."
창범이 메뉴판을 보고 일일이 알려주자 정음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네,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창범은 공룡 꼬리를 흔들며 물러나는 정음의 뒷모습을 보고 한참 쳐다보다 말했다.
“알바생이 좀 맹한 구석이 있네."
“방금 걔 예쁘지 않았어요?"
“응? 누가?"
“아니, 방금 주문 받은 여자애요. 서빙하는 애들 중에서 얼굴은 제일 낫던데."
“그랬어? 난 의상이 좀 웃기던데···. 근데 넌 남의 얼굴을 뭘 그렇게 유심히 보고 있어?"
“그게 왜요? 잘생긴 남자 알바생도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소연의 기대와는 달리 서빙을 돕는 남학생 중에는 딱히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 없었다.
‘···여긴 좀 특이하네. 여자애들은 엄청 예쁜데 남자들은 죄다 별로라니.’
소연과 창범이 앉은 테이블 반대편에 자릴 잡은 채원도 소연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훈 오빠 빼고는 하나같이 영 꽝이네. 그나마 영철 오빠가 제일 낫구나.’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골라봐. 내가 금방 가져올게."
여자친구인 채원과 함께 주점에 방문한 영철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주점이 첫날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소위 대박이 나버린 것.
첫날은 한가할 줄 알고 여자친구를 축제에 초대해 데이트를 즐기려던 영철은, 다른 동기들과 후배들이 정신없이 바쁜 모습을 보고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테이블 추가 설치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나마 도훈이 형이 해결해서 다행이다.’
“불편하면 그냥 일 도와줘요. 난 괜찮으니까."
“어떻게 그래. 그리고 난 지금 손님으로 온 거라고."
“무슨 손님이 주문 들어올 때마다 움찔움찔 눈치를 보는데? 손님 몰려와서 정신없는 것 같은데, 괜히 불편하게 앉아있지 말고 가서 일 봐요. 난 혼자 마시고 있을게."
영철은 자신을 배려해주는 채원이 몹시 고마웠다. 가끔 까칠하게 굴때도 있지만, 알보고면 속은 무른 여자였다.
“아, 알았어. 그럼 내가 맥주랑 안주 좀 챙겨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래요. 사람구경이나 하고 있을 게."
동기들의 눈치를 보던 영철이 서둘러 자리를 뜨자 채원은 본격적으로 주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야외 잔디밭에 차려진 테이블만 얼추 50개. 사방에서 몰려드는 주문덕에 코스프레 복장을 한 여학생들 외에도 남학생들까지 총 동원되어 서빙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처음맞는 상황에 눈코뜰새 정신이 없을만한데 그럭저럭 주점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육교육과 학생들이 단체로 술집에서 알바를 경험해봤을리도 없으니, 지배인 역을 맡은 누군가가 굉장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훈 오빠려나?’
도훈은 체육교육과의 회장.
이번 주점을 기획하고 총괄하는 책임자이다. 아직 도훈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채원은 그가 이곳을 운영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당장은 정신없을테니 나중에 여유 좀 생기면 불러야지. 미안하지만 날 가지고 논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채원이 복수심에 불타는 눈빛을 이글거렸다.
한편 천막으로 달려간 영철은 카운터를 맡은 서현에게 대뜸 사과부터 했다.
“미안하다. 이렇게 바쁜 줄도 모르고···."
“영철 오빠?"
“여자친구 불러서 축제 구경 하던차에 도훈이 형한테 연락 받았어. 테이블 추가한다더라고."
“네. 회장님이 연락하셔서 아까 업자가 새로 보충해 줬어요."
“그랬구나···. 면목이 없다. 내가 맡은 역할이었는데."
자꾸 사과하는 영철을 향해 서현이 괜찮다며 말했다.
“에이, 그럴수도 있죠. 애들한테 말하고 가셨다면서요? 여자친구분이 축제 놀러와서 오늘은 늦게 합류할 거라고. 근데 벌써 오신 거예요?"
“응. 지금부터 도울게. 내가 할일이 뭐야?"
“잠시만요. 계산부터 먼저 받고요."
서현은 계산서를 내미는 손님을 빠르게 응대하더니 고개숙여 배웅했다.
“내일도 모래도 운영하니까 또 오세요!"
“네, 잘먹고 갑니다."
“홍보 많이 해드릴게요."
현금을 정리한 서현이 다시 영철에게 말했다.
“미안요 오빠. 지금 좀 정신이 없어서··· 뭐라고 하셨죠?"
“응, 내가 도울일이 뭐 있을까하고."
“아뇨. 서빙은 되는대로 남학생들까지 채웠고···. 굳이 돕자면 설거지거리가 좀 쌓이긴 했는데···."
“응. 내가 가서 도울게. 근데 도훈이 형은 어디계셔? 왔다고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테이블 쪽에 없어요? 주방에 갔나?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 잠시만요. 네 이쪽에서 계산하시면 됩니다."
혼자 카운터를 맡은 서현이 너무 바빠보였기 때문에 영철은 머쓱하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진짜 도훈이형은 어디간거지? 테이블 업자한테 추가로 요청해놓고 그냥 가버렸을리가 없는데?’
영철은 설거지팀으로 합류하기 전 계속 주점 안을 돌아다니며 도훈을 찾았다.
“도훈이형이요? 아까 코스프레 복장하고 저쪽으로 가신 것 같은데?"
“네? 주방에 없어요? 테이블 쪽엔 계속 없었는데?"
“카운터에 계신거 아니에요? 근데 형 오늘 여자친구 온다더니 여기서 뭐하세요?"
하지만 누구도 도훈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밀려드는 손님때문에 정신이 없는 나머지 서로 다른 파트에 있을 거라고 추측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파트를 다 확인한 영철은 도훈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운터에도, 테이블쪽에도, 주방이나 설거지쪽에도 없었어.
눈에 띄는 복장임에도 아무도 본 학생들이 없다는 건 주점에 아예 없다는 뜻인데···.’
영철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전화라도 해봐야 하나.’
영철이 도훈을 찾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테이블을 추가로 배달한 사장이 다짜고짜 영철에게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가져다 달라고 해서 가져다 주긴했는데 계산은 언제 해주시려고요? 두 배로 쳐준다고 해서 밤 늦게 왔더니만 연락도 안받아 버리고···.
-네? 무슨 말씀이세요? 두 배라뇨?
-아니 그쪽 책임자가···. 누구냐? 아무튼 아까 나한테 전화해서 그랬다니까? 추가로 빌리는 테이블 가격은 두배로 쳐주겠다면서. 급하다고 해서 챙겨왔는데 전화를 안 받아 버리면 어쩌자는 거냐고. 그쪽이 원래 나랑 계약했던 사람 맞지?
-네, 맞는데요.
-일단 내가 갖다주고 가긴 가는데 아무리 학생이라도 돈 문제만큼은 확실히 해야지. 안 그래? 나도 저녁에 집에서 쉬다가 직접 차몰고 나온 거라고.
-일단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고요, 아마 일이 바빠서 연락이 잘 안된것 같으니 오해는 마세요. 제가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암튼 난 배달 다 했어?
“흐음···. 전화를 해보는 편이 빠를지도."
영철은 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가 계속 울리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 연거푸 2번을 더 걸었지만, 여전히 소리샘으로 연결될 뿐이었다.
통화에 실패한 영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주점이 이렇게 바쁜데 도훈이 형은 어디로 사라진거지? 게다가 테이블까지 추가로 배달시켜놓고선 연락두절이라니. 뭔가 이상한데?"
영철이 도훈의 부재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