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 대학 축제-19-
* * *
"어? 080이거 뭐냐?”
"뭔데?”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는데 080으로 시작하는데?”
"야, 받지마 백퍼 스펨임.”
"지금 전화 받을 여유가 있냐? CS 똑바로 안 처먹을래?”
"적 정글 탑!”
체육과 1학년들이 대회준비에 열중이었다. 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피씨방에 모여 합숙하듯 게임을 연습하곤 했다. 물론 집에서도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5인용 게임이다 보니 가까이서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하는게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걸려온 전화를 무시하고 다시 게임에 열중하는데 잠시후 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 씨 정신없어 죽겠네. 전화 끄라고!”
"뭔 전화를 꺼? 그냥 무음으로 하면 되지. 근데 이 새끼 누군데 자꾸 전화질이지?”
핸드폰 화면에 뜬 번호는 080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근데 080 그거 수신자 부담 번호 아니냐?”
"아, 맞네.”
"어떤 새끼길래 자꾸 수신자 전화를… 어? 설마 태영인가?”
"태영이라고?”
"맞다! 훈련소 끝날 때 다 됐네. 태영인가봐!”
태영임을 직감한 친구가 스피커 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야이, 개새끼들아! 전화 좀!
"오, 김태영? 웬일이냐?”
-웬일은 씨바! 훈련소 마지막날이라고 겨우 전화시켜주더라.
와 진짜 날씨 더워서 뒤는 줄 알았다. 니들도 군대….
"야야! 미드! 미드 모여!”
"태영아 우리 지금 게임중이라….”
-게임? 지금 군대간 동기가 한달만에 겨우 전화했는데 게임한다는 소리가 나오냐? 니들이 인간이야?
태영의 성난 목소리가 스피커 폰에 쩌렁쩌렁 울렸다. 게임에 몰두하고 있던 동기들은 머쓱해하며 서로 눈치를 봤다. 한달만에 겨우 전화를 했다는 말에 측은한 마음이 든 것이었다.
"야, 어차피 게임 터진거 같은데 통화나 하고 와.”
"그래. 혁준아. 태영이 심심한가 보다.”
결국 전화를 먼저 받은 혁준이 잠시 휴게실로 이동해 태영과 통화를 이어갔다. 태영은 훈련소 한달 동안 너무 힘들었고, 동기들이 보고 싶다고 장장 10여분여를 하소연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군대에 있는 사람은 한달이 1년처럼 느껴지는 반면, 밖에 있는 민간인들에게 한달은 일주일보다 짧았다. 하물며 방학이라면야.
어느정도 회포를 풀었는지 태영이 물었다.
-야, 근데 너희들 전공 수업아니냐? 금요일 오후부터 피씨방이라니? 수업 쨌어?
"그렇게 됐다.”
-그렇게 됐다니?
"그냥 그렇게 됐다고, 인마.”
-뭔데 씨발. 똑바로 말 안해?
"아니 군대 간 너한테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뭔데?
"다음 주 학교 축제 시작하거든.”
-…….
"우리끼리 롤 대회 출전하기로 했단 말이야.”
-야씨, 니들 진짜 나만 빼고!
"그래서 말 안하려고 했잖아. 니가 물어봐서 대답해 준 거라고.”
-와, 똥쟁이들끼리 무슨 대회를 나간다고. 니들이 나없이 될 것 같냐? 캐리머신도 없이 롤 대회를 나간다고? 진짜 어이 털리네.
내가 한달을 쉬었어도 니들보단 잘하겠다.
"몰라 새끼야. 우리도 그것 때문에 미치겠어. 너 대신 민서 새끼가 대신 뛰는데 티어가 후달려서 그런지 맨날 구멍이야. 방금도 게임 터졌어.”
-당연하지 인마. 민서 그 새끼는…. 어휴, 롤 고자잖아 완전.
너 그런말 알지? 4명의 에이스보다 한명의 구명을 막는 게 더 어렵다고. 롤판의 진리야 인마. 민서는 진짜 아니다.
"알아 새끼야. 그나마 남은 애들 중에서 민서가 제일 나은 데 어쩌라고 그럼. 그니까 왜 대회 전에 군대를 쳐 가가지고, 새끼가!”
-아, 내가 가고 싶어서 갔냐고! 넌 평생 안 갈것 같냐?
"아씨, 됐고. 암튼 피씨방 요금 나가니까 다음에 또 통화하자.
애들 나 기다리느라 매칭도 못 잡고 있어.”
-잠깐.
"왜?”
-너네 지금 어디서 연습하는데?
"상대 쪽문 뒤에 라온 피씨방. 알지?”
-미쳤냐? 거기 졸라 비싸잖아. 밥도 더럽게 맛 없고.
"여기가 학교에서 제일 가까워서 그래. 다른데는 너무 멀고.”
-야, 그러지 말고 내가 옛날에 다니던 피씨방 알려줄 게.
"어디 아는 데 있어?”
-우리 집에서 별로 안 먼데 거기가 어디냐면….
태영은 자신이 다니던 싸고 서비스 좋은 피씨방을 추천했다.
-내 기억에 거기 여자 알바도 졸라 이뻤던 거 같아.
"오오, 진짜?”
-어. 군대 가기전에 마지막으로 갔을 때 보니까 엄청 예쁜 알바가 있더라고. 아, 내가 군대만 안 갔어도 한 번 대시해 보고 오는 건데
"미친놈.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정신 차려 동방 딸쟁이 새끼야. 여름 캠프 때 아영이한테 생지랄하다 군대로 튄 새끼가 무슨.
”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암튼 거기 사장님 엄청 친절하셔.
머리 벗겨진 사람이 사장님이거든? 저녁에는 무슨 양아치 같은 형 하나 있는데 그 새끼한테는 뭐 시키지마라. 존나 궁시렁대면서 가져다 주니까.
"알았어. 근데 정확히 위치가 어디라고? 안 그래도 이번 주말내내 연습해야 할 것 같아서 가성비 좋은데 찾고 있었거든.”
태영과 간만에 통화를 끝낸 혁준은 다른 동기들에게 태영이 추천한 피씨방을 소개했다.
"시간당 500원이나 더 싸고, 서비스도 더 좋은 데가 있다고?”
"에이, 그냥 여기서 해. 가격 차이 해봐야 뭐 얼마나 한다고. 고작 피씨방.”
"새끼야. 오늘만 날이냐? 토일 내내 12시간 이상씩 빡세게 돌려야할 삘이구만. 게다가 사람이 다섯이고 하루 12시간 씩이면 무조건 싼데 찾아가야지. 혹시나 월요일에 예선 통과하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연습할 곳도 필요하고.”
"혁준이 말이 맞아. 한 두시간이면 모를까 수십시간이 될 수도 있는데 굳이 학교 앞 피씨방에서 500원씩 더주고 할 필요 있나?
오늘이야 학교 오는 날이니까 그렇다 쳐도, 내일하고 모래는 주말인데.”
"나도 옮기는 쪽 찬성. 여기 마우스가 내 손에 안 맞는거 같아.”
"고수가 장비탓을 하는 법 봤냐? 그냥 니 손이 병신이겠지.”
"니도 아까 쌌거든?”
"너보단 안 쌌거든?”
"지가 졸라 잘하는 줄 아네 씨발.”
"1:1 함 뜨까?”
"떠, 씨발아. 탑으로 와라. 누가 진정한 탑신병자인지 겨뤄보자.”
"아 쫌, 씨발. 적당히 좀 해 늬들은. 암튼 지금 옮기자고?”
"갈거면 일찍가자. 여기 터가 안좋은지 계속 연패중이다.”
"근데 위치가 태영이네 동네 근처라며? 학교선 거리 멀텐데?”
"택시 타고 가면 돼. 해봐야 기본료 거릴걸.”
"택시는 4명까지 밖에 못 타지 않냐? 우린 다섯인데?”
"그럼 한명 좆돼봐라 하고 뛰어 오는 걸로 해.”
"오케이 콜!”
"해보자.”
"가위바위보!”
* * *
소연은 오늘도 대근의 피씨방에서 열심히 근무중이었다.
금요일 오후라 그런지 유난히 학생들이 많은 시간대였다.
'으으, 초글링들 너무 시끄러운데.'
흔히 초글링으로 불리는 초등학생들 무리도 몇 있었는데, 목청이 유난히 커서 그런지 자꾸 신경이 쓰이는 소연이었다.
'어휴, 차라리 사장님한테 야간 알바로 바꾼다고 해볼까? 저녁 10시 넘어가면 최소한 학생들은 없을 거 아냐? 주간도 진짜 할게 못 돼네.'
소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카운터 의자에 앉아있는데, 문이 열리고 일단의 대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혹시 다섯 자리 붙어 있는데 있어요?”
"컴터 사양은 상관없어요. 롤만하면 돼서.”
"잠시만요.”
다짜고짜 들어와 자리부터 찾는 걸 보니 단단히 게임을 벼른 사람들로 보였다. 끽해야 자기 또래.
"34번부터 쭉이요.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음료수 5개만 가져다 주세요.”
"네.”
피씨방에 들어온 체육과 1학년 학생들은 자리를 잡고 나서야 알바에 대한 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헐, 봤냐?”
"대박.”
"졸라 예쁘네.”
"태영이 이새끼, 하여간 눈은 높아가지고.”
"몇 살일까? 남친 있겠지? 남친 전생에 나라를 구했구나.”
앞에선 애써 무심한 척 했지만, 자리로 오자마자 소연에 대한 품평을 쏟아내는 1학년 후배들이었다. 피씨방 시설이 낡았다느니, 인테리어가 구리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암튼 태영이 말대로 가성비는 괜찮아 보이네. 오늘부터 계속 여기서 특훈할 테니까 그런 줄 알어.”
"몇시까지 할 건데? 나 저녁에 여친이랑 약속있는데.”
"장난해? 지금 예선이 3일도 안남았는데 여친 만날 생각이 들어? 니가 사람 새끼야?”
"아, 알았다고.”
"이번 주말 동안은 그냥 여기서 날샌다고 생각해. 집에 가면 잠만 잤다가 다시 오는 걸로. 알겠지?”
"근데 진짜 그렇게까지 해야 돼?”
"해야 됌마! 지금 우리 실력으로는 64강 예선도 못 뚫어. 학과 대표로 이름 걸고 나왔으면 못해도 16강은 뚫어야지. 하, 씨발 진짜 태영이만 있었어도….”
"군대간 태영인 그만 찾고 일단 연습이나 하자. 근데 알바생 졸라 예쁘긴 하다.”
"꿈깨 새끼야. 저 와꾸에 알바하는 거 보면 딱 모르겠냐?”
"뭔데?”
"사장 딸이지 인마.”
"아!”
"장인어른 언제 오시려나?”
1학년 남학생들은 시끌벅적 떠들며 또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 * *
손 교수와 오랜만에 회포를 푼 도훈은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1시간 알뜰하게 때웠네.'
[설마 손 교수가 심심풀이 땅콩같은 건 아니시죠?]
'당연하지. 너무 오래 방치하면 미안하기도 하고, 또 2학기 때도 도움 받을 있을테니 시간 있을 때마다 한번씩 챙겨 주는 거지.'
[손 교수는 다른 여자들처럼 주인님한테 욕심을 많이 안내서 다행입니다.]
'그럼 30대 중반의 잘나가는 여교수가 20대 초반 대학생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내고 다닐까봐? 은주는 딱히 내가 신경 안써도 알아서 거리두기를 할 거야. 어차피 앤조이라는 걸 아니까.'
[하지만 손 교수는 혼기도 꽉 찼고….]
'노노. 결혼하곤 별개지.'
[네? 별개라뇨?]
'은주는 애초부터 나랑 결혼할 마음이 없는 여자라고. 아까 말했던 현실적인 이유랑 주변 시선 때문에라도. 그러니 본인이 결혼을 하고 말고는 자기 선택일 뿐,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안 만나거나 하지 않을 거란 뜻이야.'
[주인님과 비밀스럽게 만남을 가지면서, 결혼할 남성을 찾을 수도 있다는 얘깁니까?]
'그럼. 섹파 있다고 남친 안 사귀는 줄 알아? 가정 있는 여자도 얼마든지 애인 만들고 바람 피우는 판에. 그건 전혀 다른 문제라고.'
[허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이군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야.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고.'
차를 끌고 간 도훈은 정문 근처에 주차한 뒤 조모임 멤버들을 기다렸다. 가장 먼저 경영대 범우가 도착했다.
'쓸데없이 성실한 타입이군.'
[네?]
'약속 시간 20분이나 남았는데 알아서 튀어 오잖아.'
[그럼 주인님은요?]
'나야 시간이 애매해서 담배나 태우면서 기다리려고 했지.'
"여어, 일찍 왔네?”
"내가 1등일 줄 알았는데 언제 온 거야?”
"나도 방금왔어.”
"여자애들은 늦으려나? 연락해볼까?”
"일단 기다려보고. 제 시간에 안 오면 전화하자.”
"그래.”
범우하고는 동갑내기긴 했지만 딱히 겹치는 부분도 없고 할 말이 별로 없었다. 도훈은 머쓱한 마음에 등 뒤에서 담배를 하나 뽑아내 범우에게 권했다.
"혹시 담배?”
"아니.”
"그럼 나 한 대만 피울게.”
"그래.”
평소처럼 전격 능력으로 불꽃을 발화하고 싶었으나, 범우가 보고 놀랄까봐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도훈이었다.
"다이얼로그 뭐 할지 주제는 정했어?”
"아직.”
"나는 영화 장면 같은 거 패러디 하면 좋겠던데.”
"영화?”
"응. 어차피 역할극을 해야 하는 거라면, 익숙한 게 낫지 않겠어?”
"그것도 괜찮겠네.”
'범우는 정말 이름처럼 범생이구나.'
[정말요. 학점 밖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게 정상이지. 아무리 조모임에서 새로운 여자들 만났어도, 어떻게 하면 따먹을까 하는 고민하는 건 보통 사람은 거의 안하거든.'
[그야 주인님은 난봉꾼이니까요. 국성대 카사노바 아닙니까?]
"안녕하세요! 벌써 와 계셨네요?”
이이서 미리도 도착했다.
미리는 오늘도 한 껏 꾸미고 온 모습이었다. 도훈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와, 근데 미리 쟤는 무슨 화장에 2시간은 매일 꼴아 박을듯. 저렇게 매일 풀메이크업 하기도 쉽지 않은 데.'
[대단한 노력이군요. 공부를 2시간을 더 했으면 인생이 바뀌었을 거고, 아무튼 화장 아닌 다른 것에 투자했어도 엄청난 시간인데요.]
'미리는 저게 시간 아깝다고 생각 안할 걸?'
[정말요?]
'여왕벌의 목적은 꿀벌은 유인해 노예처럼 부리는 게 전부야.
그러니 외모를 치창하는데 공을 들이는 건 시간 낭비가 아니라 일종의 투자라고 봐야지.'
[하지만 그건….]
'맞아. 그냥 남자 등골 빼먹겠다는 거잖아. 하지만 그것도 여자로서 취할 수 있는 생존 전략중에 하나니까.'
[호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군요.]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누군가 멀리서 헐래벌떡 뛰어왔다. 도훈과 범우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입을 떼지 못했는데, 오신아의 거대한 젖가슴이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와우 씹. 미쳤다 슴부먼트.'
"죄, 죄송해요. 저 안 늦었죠?”
"어. 늦진 않았어.”
"다 모였으니까 택시 타고 이동할까?”
"아니. 내 차로 가자. 차 가져 왔어.”
"오빠 차도 있어요?”
미리가 눈을 반짝이며 도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