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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1406화 (1,370/2,000)

1389. 대학 축제-14-

점심을 다 먹고난 도훈은 약속된 시간에 맞춰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흡역 구역으로 가더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뭐하십니까? 약속시간 다 돼가는데요?]

'일부러 좀 늦게 가려고.'

[네? 기다리게 하시겠다는 건가요?]

'아니. 미리도 나랑 똑같이 행동할 것 같아서.'

[미리양도 일부러 지각을 할 거란 건가요?]

'당연히 그럴 걸? 걔는 남자를 많이 가지고 놀아본 여자야.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약속 시간에 늦는게 어떻게 몸값을 높인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봐. 보통 사람들은 약속 시간을 잡으면 그보다 먼저 도착하잖아.'

[네. 그게 예의니까요.]

'하지만 자신이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은 일부러 5분에서 10분 정도 늦는단 말이야.'

[대체 왜요?]

'뭐, 내가 이만큼 바쁘다. 나는 중요한 사람이다를 강조하고 싶은 거지. 아니면 상대를 기다리게 만드는 데서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거나.'

[하지만 그러다 신의없는 사람으로 찍혀서 오히려 반감을 사면요?]

'그러니 많이 늦지는 않겠지. 그리고 늦었다는 핑계로 찻값을 내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상대의 기분을 풀어준단 말이지.'

[하-. 정말 그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군요.]

'미리는 수가 뻔히 보여.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도훈은 담배를 연달아 3개비를 피우며 최대한 약속 시간을 지연시켰다. 그의 예상대로 10분이 지나 커피숍에 도착한 미리는 멀리서부터 뛰어온 것처럼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커피숍 문을 열었다.

"하아, 하아··· 죄송해요 수업이 늦게···.”

하지만 아무리 커피숍을 뒤져도 도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서 뻘짓을 했다는 생각에 미리가 민망해 하며 구석 자리에 앉았다.

'와씨, 설마 나보다 늦게 오는 거야?'

미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하는 남자는 도훈이 거의 유일했다.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하-. 진짜 어이가 없네.'

미리는 오늘 도훈에게 잘보이기 위해 값비싼 명품 가방과 구두도 신었다. 새로 산 신상 가을 패션옷으로 예쁘게 차려입기까지했다. 하지만 도훈은 자신이 도착하고나서 5분이 지난 후에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미리가 어이가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그를 기다렸다.

"미안, 갑자기 오는 길에 후배들을 만나서 말이야. 많이 기다렸니?”

"···아뇨.”

"늦었으니까 내가 쏠 게. 뭐 마실래?”

"그냥 아무거나 사주세요.”

미리는 삐졌다는 티를 팍팍내며 도훈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나 도훈이 전혀 신경쓰지 않자 오히려 혼자만 열내는 것 같아 뻘쭘해졌다.

'진짜 열받네. 내가 어떻게든 꼬시고 만다. 꼬셔서 단물만 쪽 빼먹고 비참하게 차 버릴거야.'

오히려 오기가 생긴 미리는 짜증나는 감정을 털어버리고 다시 도훈에게 생글거리며 말했다.

"오빠, 조모임 말인데요.”

"응. 그것 때문에 얘기할 거 있다며?”

도훈은 미리가 앞에서 얘기하는데도 듣는 둥 마는 둥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게 음. 오빠 혹시 모텔 예약 해보셨어요?”

"엉?”

도훈은 그제야 핸드폰을 내리며 미리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미리는 순간 숨이 멎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면으로 마주본 도훈의 얼굴이 너무나 잘생겼던 것이다.

피부는 화장으로 커버한 자신보다 깨끗했고, 서글서글한 이목구비는 흡사 연예인을 보는 것처럼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몸은 어찌나 좋은지 단순한 티 하나만 걸쳤는데도 커다란 골격과 근육이 그대로 느껴졌다.

'와씨, 왜 저렇게 잘생긴 거야? 진짜 할말 없게 만드네.'

도훈의 무성의한 태도에 골이 나 있던 미리는 그 순간 모든 화가 풀리고 말았다.

"모텔 예약이요.”

"딱히 예약은 해본적이 없지만··· 왜?”

"아니 제가 조모임 때문에 파티룸을 예약하려고 하는데, 모텔을 한 번도 가본적이 없어서요.”

"아 그랬어?”

도훈은 그제야 미리의 의도를 깨달았다.

'나한테 처녀라고 어필하려고 불렀구만?'

[네?]

'실제로 미리는 남자 경험이 없잖아. 근데 모텔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약하면 혹시나 경험많은 여자처럼 보일까봐 걱정되었던 거야.'

[그래서 일부러 저 얘기하려고 주인님을 불렀다고요?]

'자기 딴에는 처녀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나 보지. 남자들 중에선 은근히 처녀면 더 좋아하는 유니콘 같은 새끼들이 있으니까.

아니 적어도 처녀라서 싫다는 남자는 거의 없지.'

"네. 그래도 제가 먼저 파티룸에서 하자고 했는데 아무곳이나 예약하면 안될것 같아서요. 오빠한테 도움을 받았으면 해서.”

"그래? 알아본 곳은 있어?”

"여기.”

미리가 자기 폰을 내밀었다. 와놀자라는 어플에 미리가 미리 찜해둔 모텔과 파티룸이 담겨 있었다.

"가성비가 더 좋은 곳도 있는데, 아무래도 싼데는 또 거리도 멀고 편의시설도 별로인 것 같아서요. 일단 이거랑, 또 이거···.”

미리는 핸드폰 화면을 같이 보는 척 일부러 도훈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의도적인 스킨십에 도훈은 속으로 또 코웃음을 쳤다.

'향수 진한 거 보소. 아주 작정을 했구만.'

[미리양은 너무 티나게 남자에게 꼬리치는 것 같습니다.]

'배운게 여우짓이니 그럴 수 밖에. 공대에서 호구같은 사내새끼들이 얼마나 떠받들어 줬겠어?'

[근데 솔직히 외모가 엄청 빼어난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화장술은 나이에 비해 상당하긴 한데, 원판 자체가 예쁘다고는···.]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8선녀 수문장인 효민이도 꾸미면 미리보다 나을 거라고. 미리는 솔직히 공대 빨이지. 여신은 무슨.'

[공대가 그 정도인가요?]

'생각해봐. 요새는 좀 늘었다곤 하지만, 전통적인 남초학과란 말이지. 공대 전체 학년에 200~300명이 있으면 여학생은 진짜 10명 내외밖에 안 돼.'

[그 정도 비율이라고요?]

'과마다 다르지만 10% 안 쪽이라고 봐야지. 암튼, 10명 내외의 여자들이 예뻐봐야 얼마나 예쁘겠냐? 사범대같은 여초과에서도 미인이라 부를 수 있는 애들은 손에 꼽는데 말이야.'

[확률의 문제군요.]

'그렇지. 그러니 저정도 외모로도 여왕벌 짓이 가능 한 거야. 자기가 잘난 줄 안다니까?'

도훈은 계속 끼부리는 미리를 골탕먹여줄 생각이었다.

'주제 파악 좀 시켜줘야 겠어. 지금 쯤 올때가 됐는데···.'

미리가 옆에 붙어서 이런저런 파티룸을 설명하고 있을 때 커피숍 문이 열리며 여학생 세명이 등장했다.

"엇, 저기다. 도훈 오빠?”

"안녕하세요 선배.”

꾸벅.

등장한 여학생들은 각각 희주와 서현, 그리고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인 아영이었다. 갑작스러운 여학생 무리의 등장에 미리가 떨떠름해 하는데 도훈이 세 사람을 소개했다.

"아, 이쪽은 우리과 후배들. 여긴 같이 영어회화 수업 듣는···, 아무튼 서로 인사해.”

"안녕하세요.”

여자들끼리 부딪히자 순식간에 날카로운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특히 미리가 핸드폰을 같이 본다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영이와 서현은 노골적으로 미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비교적 냉정한 아영조차도 그 순간 만큼은 차가운 시선으로 미리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되자 오히려 미리가 난처해하며 살짝 거리를 벌려 물러섰다.

"아, 안녕하세요.”

"미안. 축제 준비 때문에 급하게 논의할 게 있다고 해서 잠깐 불렀어. 따로 시간이 안맞아서 말이야.”

도훈은 미리에게 일방적으로 양해를 구하더니 여자 후배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했다. 미리는 쪽수에 압도당해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와, 이건 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자기 주제를 알라는 거지. 여기 있는 후배들 누구랑 비교해도 눈이 있다면 자신이 꿀린다는 걸 알테니까.'

길거리 캐스팅을 받은 희주는 그렇다고 치고, 가슴으론 학과에서 최고 존엄인 서현에, 차갑지만 독특한 매력을 풍기는 아영까지 누구하나 미리에 비해 꿀리는 사람이 없었다.

도훈은 최대한 짧게 대화를 끝낸 이후에 후배들에게 말했다.

"나 조모임 때문에 회의중이니까 나머진 다음에 얘기하자.”

"네, 선배.”

"그럼 저흰 수업 가볼게요.”

꾸벅.

세 사람은 폭풍처럼 등장했다가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처음엔 미리를 경계하는 모습이었지만, 얼마안가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관심없다는 티를 팍팍 풍겼다. 그만큼 도훈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고 여겼고, 솔직히 신경쓸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었다.

"미안. 갑자기 후배들이 몰려와서 당황했지? 다음 주 우리과에서 주막 여는 것 때문에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거든.”

"아··· 네.”

미리도 사람인지라 도훈의 여자후배들이 하나같이 미인이라는 사실에 완전히 기가 꺾인 상태였다. 또한 도훈이 왜 그렇게 자신에게 무성의하게 대했는지도 이해가 갔다.

'와씨···. 무슨 후배들이 하나같이 예쁘담? 한 과에 저렇게 예쁜 애들이 몰릴 수가 있나?'

8선녀 중 고작 3명을 봤을 뿐인데도 미리는 압도적인 격차를 실감했다.

"맞다. 우리과 주막하는 데 놀러오고 싶다고 했던가?”

"제, 제가요?”

"응. 저번 수업때 물어봤잖아. 한 번 올래? 서비스 많이 줄게.”

"아··· 그, 네 한 번 우리과 애들한테 말해볼게요.”

"응. 꼭 와. 이번에 진짜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거든. 아참, 어디까지 얘기했지?”

"음···. 그니까 여기랑 여기 중에서 어디가 좋을지···.”

"둘다 괜찮아 보이니까 아무곳이나 상관없을 것 같아. 아, 그리고 예약하려면 돈 필요하지? 내가 미리 낼테니까 이걸로 예약해.”

도훈이 지갑에서 5만원권 4장을 꺼내더니 미리에게 건넸다.

"20만원씩이나요? 너무 많은데요?”

"남으면 그걸로 간식이라도 사라고.”

"갹출해서 하는 거 아니었어요?”

"뭘 그런걸 가지고···. 그냥 내가 낸다고 해.”

"아, 아니 그럴 필요는···.”

"괜찮다니까 그래. 암튼 그러면 대충 정리는 된 거지? 난 다음 수업이 있어서.”

"네···.”

미리는 먼저 물러가는 도훈의 뒷모습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볼품없이 느껴졌다.

'뭐지···. 저렇게 잘나가는 오빠인줄은 몰랐는데···.'

미리는 자신에게 굴욕감을 안겨준 도훈에게 더욱 감정이 솟구쳤다. 이제껏 자신의 어장에 넣고 싶은 놀잇감 정도로 생각했는데, 진심으로 그가 탐이 나기 시작했다.

'잘생겼지, 돈도 많지, 인기도 많지···. 완전히 무슨 인싸였잖아?'

도훈의 도발 전략에 제대로 넘어간 미리는 오히려 그에 대한 감정이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 * *

"그럼 오빠가 말한대로 오늘 중으로 인터넷 주문할 건 주문하고 바로 사야할 건 장보러 가자.”

"응. 난 시간 돼.”

"아영이도 괜찮아?”

끄덕.

아영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처음엔 그런 아영을 오해한 동기들이 싸가지 없다는 둥 재수없다는 둥 태도를 비난했지만, 이제는 원래부터 말이 별로 없는 아이라고 인식되어 다들 그러려니 했다.

함께 장을 보러 가던 세 사람은 도훈의 옆에 있던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데 아까 그 사람은 뭐지?”

"같이 조모임하는 사람이라며?”

"조모임이면 조모임이지 왜 오빠 옆에 딱 붙어서는.”

"야. 양희주. 도훈 오빠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 그런 여자한테 관심이나 있겠니?”

"하긴. 오빠한테는 너무 안 어울리긴 하더라. 아영이 너도 그렇지?”

아영 역시 별로 신경 안쓰인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영이 너는 코스프레 의상 정했어?”

"아직.”

"엘사 하라니까? 가발만 쓰면 딱 엘사 느낌 날것 같은데?”

"음···. 고민중이야.”

"희주 넌 뭐 할거야?”

"나? 맞춰봐.”

텐션이 유난히 높은 희주가 갑자기 노랗게 염색한 긴 머리를 양갈래로 잡고 늘어뜨렸다.

"빨간 머리 삐삐?”

"땡.”

"양갈래 머리가 뭐 있지 또?”

"할리퀸!”

"헐! 대박.”

서현은 희주가 할리퀸으로 변신한 모습을 상상하더니 너무나 잘 어울린다는 듯 박수를 쳤다.

"딱 할리퀸이네. 그러고 보니 몸매도 비슷하고.”

"히히. 벌써 야구배트도 빌렸어.”

"대단하다. 난 원더우먼 생각중이었는데.”

"원더우먼?”

"응. 별로야?”

서현은 유독 가슴이 컸기 때문에 원더우먼 의상을 입을 경우 글래머러스한 몸매가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것에 구애받지 않는 희주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서현의 선택을 존중했다.

"최고야. 잘 어울릴것 같아. 기왕이면 채찍도 하나 준비해놔.”

"어우야!”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데 아영만 말이 없었다. 그녀도 사실 코스프레 의상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밝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공주 캐릭터는 절대 안 할 거야.'

그녀는 누구나 예상하는 착한 캐릭터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파격적인 역할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도훈 오빠도 코스프레 하려나? 오빠는 뭘 해도 잘 어울릴것 같긴 한데.'

아영은 도훈과 함께 커플 코스프레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특별한 관계인 것을 다른 학생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오빠랑 그렇고 그런 사이인건 비밀로 해야겠지? 오빠가 곤란한 건 싫으니까.'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조금씩은 동기들에게 마음을 여는 아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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