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1. 여대 잠입-71-
* * *
철우가 박회장의 방문을 열었다.
"일어··· 나 있네?"
자는 박회장을 깨우려던 철우는 그가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는 걸 보고 살짝 놀랐다. 마치 자신의 방문을 기다린 듯한 느낌이랄까?
"최실장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하여간 노인네, 늙으니까 잠도 없단 말이야?' 철우는 박회장이 자신의 배신을 알아챘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새벽에 깨어있을 뿐이라고.
"허락도 없이 왜 왔겠어? 그것도 야심한 시각에 말이요."
"설마 내 재산을 탐내는 건가?"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있지. 박회장 당신이 개처럼 벌었으니, 내가 정승처럼 펑펑 써드리려고."
"미친놈. 목에 칼이 들어와도 네까짓 놈에게 한 푼도 주지 않는다."
"그럴까 봐 미리 준비했지. 고스케, 끌고 오라고."
잠시 후 방문 뒤에서 고스케가 지수를 끌고 왔다.
고스케는 장검을 꺼내 지수의 목을 겨누고 있었는데, 잠결에 끌려온 지수는 박회장을 보자마자 서러움에 울음을 터뜨렸다.
"아, 아빠!"
"지수야!"
그 모습을 본 철우가 비아냥거렸다.
"눈물의 부녀 상봉이로군. 당신 같은 구두쇠가 순순히 금고를 열지 않을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 하지만 딸의 목에 칼이 들어가도 괜찮을지 궁금해지는데?"
"이놈! 최철우!!!"
박회장의 눈빛이 배신감과 분노로 이글거렸다.
"감히 네놈이 나를 배신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배신? 웃기고 있네. 자그마치 10년이야."
"뭐라고?"
"당신 밑에서 똥 닦아 준 지 10년이 넘었다고. 이 정도면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만큼 너를 대우를 해주지 않았더냐? 조직의 2인자로도 모자란단 말이냐?"
"내가 뭐하러 2인자를 자처하겠어? 박회장 당신걸 뺏으면 내가 곧 1인자인데."
"이, 이놈이!"
"혹시나 김씨가 구하러 올 것이라곤 기대 말라고. 그놈은 이미 만석이랑 사이좋게 뒈져버렸거든. 자, 얼른 금고문을 열어."
"···못 열겠다면?"
분노하던 박회장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졌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습이 싹 다 연기였던 것처럼.
"내가 못 열겠다면 어쩔 텐가? 내 도움 없이 강제로 금고를 열었다간 내부의 폭약이 폭발하면서 이 집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걸? 그 정도는 알고 이 짓을 벌이는 게지?"
"흥, 딸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군. 고스케, 살짝만 맛 좀 보여줘."
"······."
위협을 가하라는 철우의 명령에도 고스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고스케가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고 판단한 철우가 구체적으로 명령을 하달했다.
"죽이지만 말고, 어디 한군데 잘라 버리란 말이야. 손가락이 됐건, 발가락이 됐건."
"······."
하지만 고스케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상한 마음에 철우가 자세히 보니 고스케는 검날을 거꾸로 돌려 칼등으로 지수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즉, 위협이 아니라 위협하는 척하고 있었던 것. 날이 한쪽으로만 서 있는 일본도의 특징을 간과한 것이었다.
철우는 순간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서, 설마 고스케 너!"
박회장이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넨 고스케와 나 사이를 너무도 몰랐던 것 같아."
"뭐, 뭐라고?"
"고스케는 보통 경호원이 아니었어. 언젠간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처음부터 배신을 대비해 심어둔 내 심복이지. 아니나 다를까 네놈이랑 만석이 이빨을 드러내더군. 만석이가 죽었다고 그랬나?
어쩐다, 널 도와주러 올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은데?"
"이, 이 고스케 이 개자식이!"
흥분한 철우가 고스케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한때 동양 챔피언까지 올랐던 복싱 선수. 지금과 같은 근거리에서 맞붙으면 누구든 대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스케는 덤벼드는 철우를 보더니 지수를 풀어주고는 곧바로 일본도를 들고 대치했다. 서슬퍼런 검날에 놀란 철우가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이 쪽바리 새끼, 네 놈이 박쥐 같은 놈이었구나!"
철우는 계속 스텝을 밟으며 고스케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비록 고스케의 검이 위협적이라고 하지만, 한 번만 공격을 피할 수 있다면 주도권을 쥐는 건 자신이라고 판단했다.
'검을 든 이상 놈의 공격은 단조로울 수밖에 없어. 한 번만 피할 수 있으면 돼.'
하지만 철우의 생각과 달리 고스케는 쉽사리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역습을 노리는 듯 스텝을 밟으며 파고들 준비를 하는 철우를 노려보기만 했다. 철우는 시간을 계속 끌면 자신이 불리할 거로 판단했다.
'박회장은 고스케를 통해 나의 배신을 사전에 알고 있었어. 그렇다면 이미 부하들까지 싹 다 불러 모았을 거야. 어떻게든 고스케를 해치우고 이 집에서 빠져나가야 해.'
마음을 굳힌 철우는 현란한 스텝으로 고스케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현역 시절 그의 특기는 바로 카운터펀치. 일부러 상대에게 빈틈을 보여 공격을 유도한 뒤, 이를 흘림과 동시에 반격을 하는 것이 그의 필살기였다.
공격 거리에 들어오자 고스케가 사선으로 일본도를 내리쳤다.
철우는 놀라운 위빙으로 허리를 젖히며 검을 피하려 했다.
"헉!"
하지만 철우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날아오는 주먹도 눈으로 보고 피할 수 있었던 철우는, 검술 유단자의 내리치기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몰랐던 것.
이는 무기술을 배운 적 없는 깡패들의 무지성 휘두르기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그리고 그 속도를 예측 못 한 철우는 단 일합에 가슴팍이 베이는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크흑!"
털썩-.
철우가 위빙 자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고스케는 쓰러진 철우를 내려보더니 그대로 검을 심장을 향해 내리찍었다.
푹-!
보나 마나 즉사였다.
잔인한 장면에 박회장이 지수의 눈을 대신 가렸다.
"멍청한 놈 같으니. 고스케를 포섭했다고 착각한 게 네 놈의 실수다. 안 그런가 고스케?"
박회장이 철우의 주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스케는 말없이 칼을 뽑아 들더니 이번엔 박회장을 가리켰다.
"···당신도 나를 너무 믿는 거 아닌가?"
"뭐, 뭐라고?"
박회장도 이번만큼은 제대로 당황했는지 지수를 자신의 뒤로 보낸 뒤 소리쳤다.
"갑자기 왜 그러는 겐가?"
"왜 그러긴? 훼방꾼들이 모두 사라졌으니 혼자서 네놈의 재산을 독차지하겠다는 거지."
놀랍도록 완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고스케였다.
박회장은 그제야 고스케의 속셈을 간파했다.
"네 놈이 설마!"
"당신이 나를 왜 그렇게 신뢰했는지 이해를 못 하겠군."
고스케가 피 묻은 장검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어서 금고를 열어. 나는 말로만 협박하지 않으니까."
"이, 이놈이!"
그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 나와 본 금자가 박회장의 서재에 왔다가 비극적인 참상을 목격하곤 비명을 내질렀다.
"꺄, 꺄악! 사, 사람이!"
고스케가 인상을 찌푸렸다.
"못 본 척했으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고스케는 곧바로 검 끝을 금자에게로 돌렸다. 금자는 철우의 시체를 보고 놀란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는데,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무슨 일인데 소리를··· 허, 헉!"
뒤따라온 유리 역시 서재 앞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오랜 세월 군인으로 살아온 터라,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난 것이었다. 도망치는 유리를 향해 고스케가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달아났다간 이 년을 죽이겠다."
유리가 힐끔 고개를 돌려보니 고스케는 이미 금자의 목에 칼을 겨눈 상태였다. 칼끝에선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철우의 시체까지 목격한 터라 유리는 고스케의 위협이 빈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 어떡하지? 이게 대체 무슨.'
유리는 박회장의 서재 책상 서랍에 총을 풀어 놓고 온 걸 후회했다. 총이 없는 그녀는 민간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금자를 죽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유리가 손을 들고 항복했다.
"그녀를 살려줘.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잖아?"
유리의 헐거운 옷차림을 본 고스케는 유리가 무장하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만의 하나를 위해선 확실히 확인해둘필요가 있었다.
"너도 이쪽으로 와."
금자가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는 어쩔 수 없이 고스케가 시키는 대로 했다. 유리가 가까이 오자마자 고스케는 칼끝을 유리를겨누었다. 현재 박회장의 서재에 모인 사람 중 위협적인 인물이라곤 총을 소지했을지 모를 유리뿐이었다.
"숨긴 무기가 있다면 얼른 꺼내는 게 좋을 거야."
"없어."
"그거야 확인하면 알게 되겠지."
고스케는 눈으로 박회장과 지수, 금자를 한 번씩 노려보며 협박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한다면 가차 없이 죽이겠다."
"······."
"사, 살려주세요."
"고스케 네 놈이 감히!"
눈빛만으로 모두를 제압한 고스케가 유리를 향해 명령했다.
"넌 옷 다 벗어."
"무, 무슨 소리야?"
"무기를 어디에 숨겼을지 알고? 난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으, 으!"
유리는 정말로 수중에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억울했지만, 고스케의 협박이 농담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미친 싸이코패스 새끼!'
고스케는 박회장이 특별히 거액을 주고 일본에서 영입해온 용병이었다. 박회장의 밑에서 일하기 전까지 그의 직업은 살인 청부업자. 충분한 돈만 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알았더니 말로 안 통하는 모양이군."
고스케가 칼을 치켜들자 유리가 소리쳤다.
"버, 벗을 게!"
유리는 지체하지 않고 상의를 탈의했다. 생사가 걸린 마당에 자존심을 지킬 여유 따윈 없었다. 속옷을 따로 입고 있지 않았던 유리는 상의를 벗자마자 두 손으로 젖가슴을 가렸다.
"돼, 됐지? 무기 같은 건 없어."
"밑에도."
고스케는 유리의 몸매에는 흥미가 없다는 듯 다시 명령했다. 유리는 눈물이 날 것 같이 창피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따랐다.
"흐, 흐흑."
유리가 완전히 알몸이 된 다음에야 고스케는 그녀가 무장하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총 없는 총잡이는 경계할 필요가 없지.'
옷이 홀딱 벗겨진 유리는 알아서 쭈그러져 구석으로 이동했다.
이를 본 고스케가 뭔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여자들은 수치심이 있으니 홀딱 벗겨 놓으면 아무 것도 못하고 제압당할 수밖에 없군. 나머지도 모두 벗겨야겠다.'
결심한 고스케가 이번엔 금자에게도 말했다.
"너도 벗어."
"저, 저는···."
"주머니에 핸드폰이라도 숨겼을지 어떻게 알고?"
결국 금자도 옷을 싹 다 벗어야 했다. 그나마 금자는 유리에 비해 수치심이 덜했는지 알몸이 노출되는 것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두 여자를 벗겨 구석에 몰아세운 고스케의 시선이 이번엔 박회장 뒤에 숨은 지수를 향했다.
"네 딸년도 벗겨야겠다."
"미, 미친놈! 감히!"
"예외는 없어."
"차라리 나를 죽여라! 어차피 네놈도 돈을···! 윽!"
박회장이 잠시 저항해 보았지만, 고스케가 칼등으로 박회장의 머리를 내리쳐 입을 다물 게 만들었다.
"까불지 마. 다음엔 어디 하나 잘릴 테니까."
박회장이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지자 뒤에 숨어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지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너도 저쪽으로 가서 벗어."
"사, 살려주세요."
"누가 죽인대?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이지 않는다."
"흐, 흑!"
결국 지수까지 옷을 벗어야 했다. 잠시 쓰러져 있던 박회장은 자신의 딸까지 알몸으로 변하자 오열했다.
"미, 미친 새끼! 내 딸을 감히!"
"지금은 딸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고스케가 다시 칼끝으로 박회장을 위협했다.
"선택해. 금고에서 돈만 꺼내주면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겠다.
하지만 거부하는 순간 저기 있는 년 목을 하나씩 칠 거야. 네 딸년까지 예외없이."
"으, 으!"
"사람 목숨값보다 돈이 더 중요한가, 박회장?"
"······."
박회장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목숨이 위협받는 그 순간에도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말로는 안 되겠다고 여겼는지 고스케가 결국 여자들 쪽으로 향했다.
"본보기를 보여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아, 안 돼!"
다들 겁을 먹고 쭈그려 있는데 유리가 고스케 앞을 막았다. 자신이 먼저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고스케가 숭고한 희생정신에 눈 하나 깜빡할 사람은 아니었다.
"먼저 죽기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때였다. 박회장의 서재로 도훈이 난데없이 나타난 것은.
"아니, 잠깐 물 마시고 오겠다더니 왜 둘 다··· 헉!"
"···이놈은 또 뭐야?"
하나둘 늘어가는 인질에 고스케가 눈살을 찌푸렸다. 유리까지는 몰라도 도훈은 계획에 없던 인물이었다. 도훈이 놀라서 제자리에 얼어붙자 고스케가 칼을 들고 소리쳤다.
"도망치면 여기 있는 여자들을 모두 죽이겠다."
"아, 아니, 저는."
도훈은 홀딱 벗은 채 구석에 쭈그려 있는 여자들을 쳐다보고는 낯빛이 사색으로 변했다. 더욱이 방에는 아직까지 최철우의 시체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완전히 짓눌린 듯 도훈이 몸을 덜덜 떨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도훈이 납작 엎드렸다. 고스케는 도훈을 곧바로 죽일까 망설이다 곧 그의 쓸모를 생각해냈다.
"살고 싶나?"
"네, 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살고 싶으면 너도 벗어라."
"네, 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아, 알겠습니다."
결국 도훈마저 훌렁훌렁 옷을 벗더니 알몸이 되었다. 고추를 가리고 선 그를 본 고스케는 곧바로 도훈에게 명령했다.
"어디서 묶을 것 있나 찾아서 가져와. 그리고 저 보기 싫은 시체는 거실로 당장 치우고."
"네, 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