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1. 여대 잠입-61-
* * *
남자 캐릭터와는 달리 여자 캐릭터들은 그 조형이 남다른 편이었다. 남자들이 대충 비슷하게 생긴 마네킹에 남자 옷을 입혀놓은 느낌이라면, 여자들은 한명 한명이 유명한 조각가가 혼신의 힘으로 빚어 깎은 것처럼 예뻤다.
입고 있는 의상이라든가, 조그만 장신구 하나까지···. 그야말로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제작자 새끼···.'
[네?]
'미소녀 오타쿠, 뭐 이쪽 계열로 보이는데?'
[설마요? 명색이 플레이언데요.]
'플레이어라고 오덕 하나 없겠냐? 암튼, 내 추측이 확실해. 남자 캐릭터 빚을 때 대충 뭉개서 랜덤으로 돌렸다면, 여자 캐릭터는 눈꼬리부터 입 모양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가며 공들여 만든 거야.'
나는 옥봉사선자라 불리는 이들의 뛰어난 외모에 감탄했다. 빼어난 가상공간의 현실성 덕에, 또 다른 생명체가 바로 옆에서 살아 숨 쉬는 느낌이었다.
"여기 간단히 요기할 것 좀 가져다주세요."
상태 창으로 스캔하니 금소소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목소리 또한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무척 아름다웠다.
[주인님. 그러다 눈 빠지겠습니다.]
'쓰읍, 너무 쳐다봤나?' 나는 그들이 대화하는 것을 내공을 이용해 몰래 엿들으며 음식을 먹는 척했다.
'···아무래도 이거 뭔가 있어.'
[네? 뭐가 말입니까?]
'로시 네 말대로라면 이걸 제작한 플레이어가 어딘가에 실존한다는 뜻이잖아.'
[그렇죠. 플레이어 개발자 모드니까요.]
'캐릭터에게 제공되는 검의 이름도 그렇고, 옥봉사선자라는 호칭도 그렇고···. 분명 한국에서 무협 소설을 즐겨 읽던 미소녀 변태의 냄새가 물씬 풍긴단 말이지?'
[네?]
여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상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는 한 귀로 흘려들으며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아직까진 게임 진행에 대한 단서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한국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려 달라고 힌트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게 무슨 뜻입니까?]
'잘 생각해 봐. 플레이어는 특정 레벨에 도달하지 못하면 서로 교류가 불가능하잖아.'
[그렇죠.]
'하지만 만약 이런 게임 속에 자신의 흔적을 몰래 남겨 놓는다면?'
[아! 서, 설마.]
'확실해. 이걸 만든 제작자는 나와 같은 한국인 플레이어고, 게임 속 곳곳에 자신의 정체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숨겨 놓은 거야. 마치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듯 말이지.'
[설마 다른 플레이어와의 교류를 위해 만든 모드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바로 이 게임의 이스터에그인 거지. 내공심법을 준다는 그 보상 말이야.'
[세상에! 놀라운 추리력이군요. 빠가였던 주인님이 이런 놀라운 추리를 해내시다니!]
'뭘 자꾸 빠가래? 이제 열매 먹은 지 좀 돼서 아이큐 100은 넘을 텐데. 암튼 분명한 의도가 담긴 게임이야. 직감적으로 느낌이 와.'
[그럼 주인님이 만약 게임 속에 남겨진 단서를 모두 찾아 낸다면 해당 플레이어와 실제 접촉해 보실 생각입니까?]
'무협 식으로 게임을 만든 걸 보면 누군지 몰라도 굉장한 실력을 갖춘 플레이어일 가능성이 크겠지. 만약 실제로 만날수만 있다면 나에겐 굉장한 도움이 될 거야. 보상이라는 내 공심법을 줄 수도 있을 테고.'
[흐음. 중수 레벨에서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는 것이 가능할지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렇겠지. 보통은 정체를 알리는 순간, 플레이어의 제재를 받을 테니까. 누군지 몰라도 굉장히 머릴 잘 쓴 것 같아.'
그때였다.
"읏, 사매! 먹지 마요! 으, 음식에 독이!"
갑자기 음식을 잘 먹고 있던 사선자 중 하나가 입에 핏물을 머금고 소리쳤다. 그러자 이제껏 손님으로 위장하고 있던 놈들이 동시에 칼을 빼들며 달려들었다.
"···독이라고? 푸학-!"
나 역시 좆된 건 마찬가지였다.
객잔이 마교의 비밀지부라더니, 나 역시 음식에 넣은 독극물에 당하고 만 것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며 손발이 먼저 마비되기 시작했다.
"이런 씨팔, 이게 무슨···."
"흐흐흐. 멍청한 정파 놈들! 이곳이 감히 어딘 줄 알고···."
"가, 가까이 오지 마!"
옥봉사선자 중 금소소라는 여자가 무기를 꺼내며 맞서 보았지만, 이미 중독이 된 듯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음식에 독을 탔을 줄이야! 그때 주방에 있던 흉측한 외모의 주방장이 커다란 중식도를 들고 나타났다.
"흐흐, 오늘따라 신선한 식재료가 많이 들어왔네. 야들야 들한 젊은 아가씨들이면 상등품이지."
"저 사내놈은 어떻게 할 까요?"
"개돼지에게 던져주거라."
'뭐, 뭐야 설마 나를 개돼지 밥으로 만들겠다는 소리야?' 하지만 이미 마비는 입까지 진행된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명색이 게임의 주인공인데 이렇게 죽는 것인가?
'로, 로시 이게 뭐냐?'
[아무래도 공략 실패하신 것 같은데요?]
'와 씨, 무슨 난이도 헬 급이네. 튜토리얼 깨자마자 사망이라니!'
그 순간 거대한 박도가 내 머리로 날아들었다.
그게 내가 기억하는 게임속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아, 안돼!'
-플레이어가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패널티로 현실 시간 3일 후 재접속이 가능합니다. 앞으로 남은 재생횟수는 2번입니다.-
"헉!"
2층 체력단련실 한가운데서 정신을 차린 나는 깨어나자마자 내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거대한 칼날이 목에 떨어지는 느낌이 너무나 리얼했던 것이다.
"씨, 씨발 진짜로 죽는 줄 알았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안타깝게도 시나리오 모드 도전에 실패하셨습니다.]
'그럼 게임 오버라고? 내 만 포인트는?'
[설명에 따르면 사망 페널티로 3일간 접속 불가입니다. 라이프 횟수도 차감되었고요. 아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와 씹, 이거 미친 난이도 게임이잖아?'
[주인님이 너무 방심하셨던 게 아닐까요?]
'무슨 방심? 튜토리얼 깨자마자 인육 식당에 발을 들인 게 내 잘못이라는 거야? 애초에 그렇게 설계된 게임인데?'
[그게 아니라···. 산적 두목이 마교의 비밀지부라는 힌트를 미리 알려 주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음식이든 사람이든 처음부터 바짝 경계를 했어야한다는 뜻이죠. 미녀들을 보면서 침 흘릴게 아니라요.]
'아 놔 젠장. 이 게임 만든 새끼 만나면 확 그냥!'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그리고 실토하자면, 옥봉사선 자인가 뭔가에 정신이 팔려 생각 없이 음식을 먹은 내 탓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녀의 등장이 트릭이었구만?'
[네?]
'일부러 정신을 팔리게 해서 음식에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깜빡하게 만든 거야. 이거 진짜 거지 같은 난이 도네.'
[아무튼 부활 횟수가 정해져 있기때문에 다음번 도전에서는 더 신중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3번 죽을 때까지 공략 못 하면 만 포인트는 그냥 쌩으로 날리는 건가? 이거 완전 사기잖아?'
[음, 그래도 플레이어 평점은 꽤 좋은 편이었는데요. 그리고 라이프는 포인트를 통해 추가 구매가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과금이라고? 만 포인트 받아 처먹고 또?'
[뭐,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하여간 이 개발자 새끼 진짜로 만나기만 해봐.'
나는 분을 못 참고 주먹으로 바닥을 쾅- 내리찍었다. 그러나 힘 조절을 못 했는지, 마루바닥에 주먹이 박히고 말았다.
"헉!"
[쯧쯧. 사고 치셨네요. 그렇게 풀 파워로 때리면 어떻게 합니까?]
'바닥에 구멍 나 버렸네, 헐.'
바닥재를 뚫고 콘크리트까지 깨뜨린 나는 난감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따금 내가 일반인의 파워를 아득히 뛰어 넘는 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한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업자 불러서 보수 공사 해야지.'
시나리오 모드를 구매하느라 포인트를 거의 다 소진했기 때문에 더 이상 수련은 무리였다. 다만 3일 뒤 부활이 시작될 때에는 좀 더 신중히 접근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또한 게임을 만든 플레이어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분명 랭커는 아닐 것이다. 랭커라면 굳이 이스터에그를 이용해서 힌트를 남겨놓지 않았을 테니까.
아마도 고수는 되어 보이는 플레이어고, 한국 어딘가에서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또 다른 플레이어라···. 이것 참.'
나 말고도 굉장한 사람들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이런 저런 생각에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 * *
다음날 수업을 마친 도훈은 슬슬 과외에 나설 준비를 했다.
멀쩡한 얼굴을 일부러 망가뜨리는 것은 아무리 미션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얼굴에 역용마스크를 쓰고, 대머리 가발을 뒤집어 쓸 땐, 정말 이렇게까지 해서 레벨업을 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게 했다.
[이제 제법 자연스러워지신 것 같습니다.]
'욕이냐 칭찬이냐?'
[생각하기 나름이지요.]
'암튼 오늘은 꼭 박회장의 비밀 금고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야 겠어. 그나저나 지문은 어떻게 확보한담? 통상적인 방법보다 더 쉬운 방법이 천상계 아이템에 있을 것 같은데?'
[그것도 한 번 검색해 보겠습니다. 참, 주인님 잔고가 얼마 안 남았는데 포인트가 간당간당할지도 모르겠군요.]
'젠장. 빌어먹을 게임에 만포인트만 안날렸어도.' 도훈이 새벽간 결정을 후회하자 로시가 위로했다.
[아직 날리신 건 아닙니다. 라이프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리고 또 혹시 압니까? 정말로 내공심법의 보상까지 받게 되실지도요. 그렇다면 만포인트는 충분한 투자 가치가 있을겁니다.]
'근데 정말로 구음진경은 아니겠지? 준다는 보상이. 그건 그냥 무협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일 뿐이잖아.'
[모르죠. 하지만 아무리 저가의 내공심법이라도 심법은 심법입니다. 어지간한 무공서보다는 훨씬 비싸니 뭐든 받게되면 이득일 겁니다.]
'오케이. 어차피 그건 이틀 뒤에 다시 접속할 수 있다니 일단 오늘 미션에만 집중하자.' 박회장의 저택에 입장하자 금자가 주방에서 과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훈에게 아는 체도 못할 정도로 바빠보였다.
"어, 오셨소. 딸아이는 금방 올 거요."
박 회장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옆으로 비서인 유리와 처음 보는 사내가 앉아 있었다.
"상태창."
"응? 뭐라고 하셨소?"
"아, 아닙니다. 저녁으로 생태탕을 먹고 왔더니 저도 모르게."
"하하. 어차피 딸아이를 기다려야 하는데 같이 앉아서 과일 좀 들고 가시오."
"아닙니다.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사양하지 말고."
박회장이 한 번 더 권유하는 바람에 도훈도 어쩔 수 없이 말석에 쭈그려 앉았다.
[아니, 난데없이 상태창이 뭡니까?]
'순간 어제 했던 게임 모드랑 착각했지 뭐야. 말하면 저 사내 프로필이 뜰 줄 알고.'
[아이고. 너무 과몰입을 하셨나 봅니다. 스킬도 착각하시고.]
"처음 뵙는 거 같은데 반갑습니다."
박회장 오른편에 있던 사내가 먼저 도훈에게 악수를 건넸다. 도훈은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마주잡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무슨 손바닥이 사포처럼 거칠담?'
"네, 넵. 지수학생 외국어 과외를 맡고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회장님 밑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저희 회사 실장님이세요."
유리가 사내를 소개하자 도훈은 곧바로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 권투선수 출신 경호원이구나!'
[어떻게 아셨습니까?]
'손바닥이 엄청 까칠한 게 주먹 쓰는 운동을 상당히 한 것 같았거든. 굳은 살이 장난이 아니야.'
[호오. 마침내 2인자의 등장인가요?]
'겉보기엔 생각보다 평범한데.'
하지만 도훈은 실장으로 불린 사내를 예의 주시했다.
박회장이 거느린 4명의 경호원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자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복싱 챔피언 출신이라고 했던가? 하긴 뭐 세계 챔피언이라고 대수겠냐마는.'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 마십시오. 박회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일이 굉장히 복잡해 지니까요.]
'하긴 그렇네. 하필 저 인간이 집에 같이 있으면 오늘 여자들이랑 뒹굴기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암튼, 그 건은 그럼 자네가 직접 마무리 해봐."
"제가 직접요? 회장님이 안 하시고요?"
"나이가 드니까 말이야. 뭐든 귀찮아져. 어차피 나 죽으면 물려줄 사람도 없으니···. 자네도 슬슬 일을 배워야지."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회장님. 아직 정정하신데요."
실장은 겸손한 척했으나 도훈은 내심 그가 속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후계자가 없는 현금 재벌이라···. 이것 참 내부가 뒤숭숭하겠구만.'
[그만큼 지수양에 대한 경계도 높아질 겁니다.]
'하긴. 지수를 꿰차는 놈이 결국엔 박회장의 유산을 꿀꺽하는 셈이니.'
"과일 가져왔습니다."
그때 금자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과일 접시를 내왔다. 금자는 도훈을 보더니 슬쩍 눈치를 주며 씩 웃었다. 도훈은 그것이 나중에 따로 보자는 사인처럼 읽혔다.
'금자도 나한테 완전히 중독된 것 같아.'
[주인님이 좀 중독성이 있긴 하죠.]
'잘 됐다. 나중에 세탁실 내려가서 CCTV 설치해야 하는데 ···. 금자 좀 써먹어야 겠다.'
"흐음, 왜 안오지? 딸아이가 올 때가 됐는데···."
"김기사에게 연락해 볼까요?"
"어. 과외 선생님 먼저 와서 기다린다고 해."
"네, 알겠습니다."
회장의 명령을 받은 유리가 김기사에게 전화했다. 전화를 마친 유리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폰이 고장나서 AS센터를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퇴근길에 강변북로가 많이 막힌다고 합니다, 회장님. 좀 걸릴 것 같다는 데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