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3. 여대 잠입-13-
'베드로가 누구지? 설마···.'
지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마치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상대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던 것. 사실 애매하게 헤어진 것 때문에 집에 오자마자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지수는, 도훈으로 추정되는 베드로의 연락에 몹시 기뻤다.
'세상에···. 신부님도 내가 마음에 드셨던 걸까?'
지수는 도훈의 연락에 조심스럽게 답장을 남겼다.
-지수 : 누구세요?
* * *
"하, 요거 봐라? 뻔히 알면서 누군지 묻는 거."
바닥에 누워 폰을 만지고 있던 나는 코웃음을 쳤다.
평소 만나는 남자도 없고, 연락하는 사람도 없으니 베드로라는 세례명만 보고도 누군지 알았을 텐데 괜히 한 번 튕기는 모습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근데 왜 하필 베드롭니까?]
'엉? 왠지 느낌있더라고.'
[그리고 주인님 폰으로 연락하셔도 상관없습니까?]
'응? 뭔 소리야?'
[아니, 아까 일부러 대포폰 번호 알려주시지 않았던가요?]
'아항, 이거 대포폰 번호 맞어. 깨톡 계정만 내 폰에 등록시킨 거야.'
[그게 가능한가요?]
'응. 스마트 폰 듀얼 메신저 기능을 이용하면 폰 하나에 깨톡을 두 개 깔 수 있거든.'
[호오.]
'대신 번호가 하나 더 있어야 계정을 등록할 수 있으니, 대포폰 번호를 내가 쓰는 폰에 등록시킨 거지.'
[아까 인증번호 받고 하신 게 이 작업이었군요.]
'그렇지. 바람피우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꼼수랄까? 듀얼메신저로 쓰는 깨톡은 스마트 폰 폴더 구석에 꽁꽁 숨겨놓고, 애인과 연락할 때만 쓰는 거지.'
[폰 두 개를 몰래 들고다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겠군요.]
'그러니까.' -도훈 : 아까 배화여대에서 뵈었던 부제입니다.
지수는 답장을 읽고서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깨톡은 상대가 메시지를 읽으면 읽었다는 표시가 뜨기 때문에 지수가 일부러 시간을 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답장이 좀 느린데요? 바쁜 일이 있는 걸까요?]
'아니. 그냥 밀당하는 거야.'
[밀당요?]
'자기가 쉽지 않은 여자라는 걸 보여주는 거지. 메시지 오자마자 칼답 날리고 먼저 선톡하면 괜히 꿀리는 거 같으니까.'
[남자 경험이 거의 없는데도 저런다고요?]
'남자를 휘어잡으려는 건 여자의 본능과 같아. 저런건 굳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서 배우니까.' 나 역시 오지 않는 답장에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밀린 청소나 빨래 등 집안일을 하면서 여유를 갖고 기다렸다.
[연락 다시 안 하셔도 되겠습니까?]
'두번 연속 연락하면 내가 말려드는 거라고.'
[그런건가요?]
'버릇은 초장부터 잡아야 돼. 남녀 간의 깨톡 대화는 별거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 주도권 다툼을 하는 핑퐁 게 임이거든.'
[호오.]
'만약 내가 먼저 계속 연락을 취하면, 상대는 나한테 관심이 시들해 질 거야. 자기가 우위에 있다는 걸 간파하는 거지.
더 좋아하는 쪽이 약자니까.'
[주인님이 여자에게 휘둘린 적이 있었나요?]
'그러니까. 상대를 잘못 본 거지. 나를 뭘로 알고.' 30분 넘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단언컨대, 지수는 30분 내내 답장을 언제 보낼까, 혹시 내가 다시 또 먼저 보내지 않을까 전전긍긍 했을 것이다.
세탁기에 돌린 빨래를 꺼내 건조기에 넣고 있는데, 그제야 답장이 왔다.
-지수 : 아, 부제님 세례명이 베드로였군요. 잠깐 뭐 하고 있느라 답장이 늦었어요.
"봤지? 기다리니까 결국 오는 거."
[정말로 바빠서 늦게 보냈을 수도 있잖습니까?]
'아닐 걸. 일부러 시간 끌다가 먼저 조바심 나서 결국 항복한 거지. 잘보라고. 이제부턴 재깍재깍 답장 올 테니까.'
-도훈 : 네, 자매님. 다름이 아니라 내일도 시간 되시는 지여쭤보려고요.
-지수 : 시간요? 수업은 4시에 끝나요. 그때 제가 성당으로 갈까요?
-도훈 : 아닙니다. 성당은 저녁 미사가 예정되어 있어서 번잡스러울 것 같아요. 혹시 괜찮으시면 다른 곳에서 뵐까요?
-지수 : 다른 곳이요? 어디요?
-도훈 : 학교 밖도 괜찮습니다.
재깍 답장이 오던 지수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딜레이가 길어졌다.
'고민하는 거 같은데?'
[그렇겠죠 아무래도. 학교 안이면 모를까, 밖으로 나가는 즉시 김씨라는 경호원이 들러붙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외부인인 내가 학교 어디서 보자고 먼저 말하기도 뭐하잖아.'
-지수 : 그러면 저희 학생회관 안에 있는 커피숍은 어떠세요?
-도훈 : 중요한 얘기를 나눠야 해서 사람이 많은 곳은 좀 부담스럽습니다.
-지수 : 아···.
-지수 : 어쩌지.
지수는 혼잣말을 하듯 채팅을 남겼다.
예상대로 김씨의 존재 때문에 학교 밖은 무리고, 학교 안에서 마땅한 장소를 찾기가 곤란한 상황같았다.
사실 여대 안에서 남학생은 어딜가든 시선을 끌기 십상이다. 오늘은 성당 안에서 사제로 위장했기 때문에 정체를 숨길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장소에서 남자는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주목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수 : 혹시 그럼 저희 과방은 어떠세요?
-도훈 : 과방이 뭔가요?
-지수 : 저희 철학과 과방이 따로 있거든요. 그러니까 동아리방 같은 곳인데, 저희 과 자체적으로 동아리 신청을 해가지고 받은 과방이 있어요.
-도훈 : 그럼 철학과 동아리 방인가요?
-지수 : 네, 그런 셈이죠.
-도훈 : 근데 아무래도 남자가 가면 좀 불편해하지 않을지.
-지수 : 괜찮아요. 평소엔 사람이 없거든요. 아마 내일 그 시간이면 드나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오케이. 딱 좋은 장소구나.'
[그래도 명당 스킬로 확인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일단 도착해서 상황을 파악하면 되겠지. 만약 관계를 치르기 부적합한 장소면 명당 스킬에서 안된다고 말해줄 거니까.'
[그렇군요.]
'이쯤에서 적당히 끊어야겠다.'
-도훈 : 그럼 자매님, 내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이제 또 기도시간이라···.
-지수 : 네.
[너무 대화를 짧게 끝내신 것 아닙니까? 평소 주인님 답지 않은데요?]
'지수가 그랬듯이 나도 밀당하는 거야. 관심을 보이지 않을수록 끌려오는 스타일 같거든.'
[호오. 역시 주인님은 심리전의 대가십니다.]
'순진한 처녀 따먹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 * *
깨톡 대화를 마친 지수는 다시 침대로 벌러덩 누웠다.
그러나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였다.
"꺄아! 내일 또 만나다니!"
혼자 침대에 누워 발버둥을 치던 지수는 갑작스러운 노크소리에 정색을 하며 자세를 바로했다.
"아가씨, 과일 가져왔습니다."
"흠흠, 문 앞에 놓고 가세요."
"네?"
"옷 갈아 입는 중이에요."
"아, 네."
잠시 후 인기척이 사라지자 지수는 빼꼼 문을 열고 문 앞에 놓인 과일 그릇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각양각색의 이국적인 과일들이 조금씩 예쁘게 담겨 있었다.
"그나저나 내일 뭐 입고 가야하지?"
지수는 벌써 부터 도훈을 만날 때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며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옷장 한켠이 가득 채워져 있었지만 아무리 뒤져도 마음에 드는 옷이 보이질 않았다.
"세상에! 입을 옷이 하나도 없네?"
지수는 갑자기 조바심이 일었다. 평소 좋아하던 원피스도 하나같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안되겠다. 얼른 쇼핑하러 가야지."
지수는 그즉시 김씨에게 연락했다.
운전기사 겸 경호원인 김씨는, 저택 밖의 조그만 별채에 상시 대기중이었는데, 갑작스러운 지수의 호출에 불려나갔다.
"아가씨, 무슨 일이 십니까?"
"아직 백화점 안 닫았죠?"
"네? 시간이···. 네. 아직 2시간 정도는 남은 것 같습니다."
"입을 옷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쇼핑하러 나가요."
"지금요?"
"네. 왜요?"
"아, 아닙니다. 그럼 바로 차 준비 시키겠습니다."
조급한 지수의 표정에서 김씨는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저녁에 갑자기 쇼핑을 나가겠다고? 흐음.'
어쨌든 그는 지수를 모시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수를 태우고 백화점으로 향하던 김씨가 슬쩍 지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평소 자주 가시는 명품관으로 모실까요?"
"아뇨. 그냥 백화점이요. 옷파는 곳."
"네."
지수는 대체로 명품을 즐겨입었지만, 도훈 앞에서 괜히 위세를 떠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신부인 도훈이 보기엔 뭐가 비싸고 싼 옷인지도 모르겠지만, 괜히 평범해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무 비싼 옷을 입으면 허영기 많은 여자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적당한 옷으로 골라야 겠어.'
"근데 입을 옷이 없던가요?"
"네. 옷장에 있는 옷들 다 버려야 겠어요."
"한 달 전에 산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냥 싫증나서요. 안 입는 옷 어차피 필요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기부할 곳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퉁명스러운 지수의 대답에 김씨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참, 예의 바르던 아가씨였는데···. 흐음.'
어려서부터 지수를 가까이서 살펴 온 김씨에게, 지수는 단순히 고용인의 딸 정도가 아닌 친조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대학에 들어가면서 변해가는 모습에 안타까웠다.
'그래, 뭐. 돈 많은 집 아가씨가 기분 내서 쇼핑하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말리겠어.'
백화점에 도착한 김씨는 VIP전용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러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달려와 키를 받더니, 차를 대신 주차했다. 년간 1억원 이상의 물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제공되는 서비스였다.
곧바로 백화점 여직원 한명이 지수와 김씨를 에스코트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고객님?"
"여성복 코너요."
"네. 다른 직원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음···. 두 분 더 있으면 좋겠어요."
"알겠습니다."
여직원은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워치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성복 코너에 도착하자 다른 여직원 두 명이 따라 붙었다.
"아저씨는 잠깐 쉬고 계세요. 금방 사서 올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어때요? 백화점인데."
김씨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로 물러섰다. VIP 라운지는 백화점에서 별도로 관리되는 공간으로, 애초에 허락받지 못한 일반 손님들은 입구에서 저지당했다. 또한 층마다 검은 정장을 입은 경비원들이 깔려있었기 때문에 김씨도 경호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 둘 수 있었다.
김씨가 물러나자 지수는 여직원 셋을 대동하고 가을 신상복을 파는 가게에 들어섰다. 딴에는 명품급이 아니라고 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선 준명품으로 불리는 값비싼 브랜드였다.
"고객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매장 직원은 대학생에 불과한 지수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VIP라운지에 입장한 손님들은 나이 고하에 상관없이 엄청난 큰 손이라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었다.
실제로 VIP동의 매출은, 일반 매장의 4배가 넘을 정도였다.
상위 20%의 손님들이 백화점 매출의 80%인 4배를 차지 한다는 파레토의 비율이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음, 보통 대학생들이 즐겨 입는 룩으로 보고 싶은데."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용 코디네이터까지 달라붙어 이런저런 옷들을 소개했다. 지수 한 명의 쇼핑을 위해 동원된 인원만 5명이 넘었다.
1 시간이 지나 쇼핑을 마친 지수가 휴게실에 있는 김씨를 찾았다.
"아저씨, 집에 가요. 쇼핑 다 끝냈어요."
고급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고 있던 김씨가 벌떡 일어났다. 지수의 뒤에는 백화점 직원 셋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김씨는 오늘 쇼핑한 금액만 해도 천만원이 넘을 거 라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후-. 하룻밤에 천만원이라니···. 정말 재벌들의 삶은 일반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들구만.'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발렛 파킹 된 차가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트렁크에 쇼핑백을 가득 싣고 있는데 지수가 지갑에서 5만원권 현금 몇 장을 꺼내더니 수행하던 직원들에게 건넸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앗, 고객님. 팁은 괜찮습니다. VIP 고객님을 위한 당연한 서비스인걸요."
"그래도 받아주세요."
지수는 억지로 팁을 건네더니 김씨가 모는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김씨가 아무말이 없자 이번엔 지수가 먼저 말했다.
"아버지가 그러는데 팁을 줄 땐 아낌없이 주라더라고요.
그래야 다음에 올 때 더 친절한 대접을 받는 다면서."
"아버님께서 그런 말도 하셨습니까?"
김씨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비록 박회장의 밑에서 부족함 없는 월급을 받고 있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부를 이루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더니, 딸한테 정승처럼 쓰는 법을 가르쳤구만. 하긴, 외동딸이 물려받을 재산만 해도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지수는 일찍이 상처한 박회장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재산 문제로 친척과도 대부분 의절했기 때문에, 사실상 지수가 유일한 상속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면에서 보면 김씨도 한직으로 밀려났다고 볼 순 없었다.
앞으로 길어야 십년, 짧으면 3년 안에 지수는 강력한 미래권력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까지 김씨는 최선을 다해 지수를 보필할 생각이었다.
"···무쪼록 즐거운 쇼핑 되셨길."
그런 김씨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수는 내일 도훈을 만날 생각에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만 미리 알리바이를 만들어 어떻게든 김씨를 떨어뜨려 놔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한 차를 타고 가는 두 남녀는 동상이몽에 빠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