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9.. 2학년2학기-74-
영철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야, 이번엔 달라 인마."
"뭐가?"
"이번엔 내가 먼저 들이댄게 아니라고."
"그럼?"
"거짓말 않고 후배들이 먼저 와서 번호 따갔다니까?"
"까고 있네. 누가?"
"누구냐, 그 자주 붙어 다니는 1학년 여자애들. 나은이랑 연주라던가?"
"나연이랑 연두겠지. 걔들이 진짜 니 번호를 따갔다고?"
희준은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나연두는 1학기 초에도 예쁘기로 유명해 같은과 3학년남자들도 눈독들이는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원체 틈을 주지 않아 대부분 대쉬도 못하고 포기한 상황이었다.
"어. 수업 끝나고 친하게 지내자고 내 연락처 받아가더라. 놀라지마, 서로 먼저 받겠다고 싸우는데 민망해서 원···."
영철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희준이 그 모습에 혀를 끌끌 찼다.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걸수도 있지. 어차피 번호를 알아야 학년 단톡방에 초대할 수 있을 거 아냐."
"뭐···. 그거야 모르지만 암튼. 근데 애들 사이에 나 아직도 소문 안좋냐?"
"말이라고 하냐? 니가 한 짓을 생각해 인마."
영철은 2년 전 도망치듯 군대를 갔다.
사범대 전 과를 대상으로 사귀고 헤어지기를 반복했고, 마지막에 사귄 여자와 안 좋게 끝나는 바람에 도저히 버틸수가 없었다.
"음. 군대가서 많이 반성했어. 지금은 그렇게 안 살거야."
"차라리 개가 똥을 끊지. 그 말을 믿으라고?"
"야. 왕희준. 적어도 너는 나 믿어줘야 되는 거 아니냐?
친구라는 새끼가 진짜."
"그래서 내가 미리 알려주는 거잖아. 처신 똑바로 하라고. 이제 핏덩이 스무살도 아니니까 실수하면 그대로 매장이야. 가뜩이나 소문도 안좋은데."
"알았어 인마. 적어도 내가 먼저 들이대는 일은 없을 거야. 대신."
"대신?"
"1학년들이 먼저 들이대면 그건 어쩔 수 없지."
듣고 있던 희준이 이죽거렸다.
"푸하. 과연?"
"왜? 말했잖아. 벌써 두명이나 번호 따갔다고."
"그게 아니라 너 집행부 한다고 거기있는 애들 꼬실 수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거 같아서 불쌍해서 그래."
"안 될건 뭐야? 자꾸 얼굴보면 친해지고, 그러다 보면 또 사귈수도 있고. 뭐 그런거 아냐?"
"도훈이 형이 회장이잖아."
"근데 뭐?"
"와, 너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1학년 여자애들 사이에서 도훈이형 완전 연예인이야. 다들 좋아할 걸?"
"그건 그냥 선배로서 흠모하는 거지. 남자로선 모르지."
"글쎄. 내가 볼땐 니가 도훈이 형보다 앞서는 게 거의 없는 거 같은데."
"에이, 그 정도는···."
"너 도훈이 형보다 키 크냐?"
"나도 180은 넘어."
"도훈이형 185야. 도훈이 형보다 운동 잘해?"
"아니 운동은···. 그 형 특기생 아냐?"
"전혀. 근데 특기생보다 잘하는 걸로 유명하지."
영철은 실제로 야구장에서 도훈이 날아오는 야구공을 맨손으로 캐치하는 장면을 눈 앞에서 목도했기 때문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건 인정."
"그리고 도훈이 형 공부도 존나 잘해. 사범대 수석인건 알고 있냐?"
"말도 안돼. 무슨 엄친아야?"
"엄친아보다 더하지. 부모님은 미국에 계실걸?"
"미국에?"
"아버지가 작가라던가? 암튼 난 책은 안 읽어서 모르겠는데, 되게 유명한 분이라고 들었어."
"흐음."
영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자신이 도훈보다 우위에 있는 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관계라는 건 상대적이라, 객관적인 지표보다는 상대적인 비교우위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의 싸움이라고 볼 때 영철이 도훈을 이길 수 있는 분야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영철의 입장에선 도훈의 존재야 말로 넘지 못할 산이었다.
"···듣고 보니까 뭔가 이상한데. 너무 완벽한 거 아냐?"
"나도 개인적으로 친하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어."
"그거네."
"뭐?"
"남자들은 안 챙기고 여자만 챙기는 거."
"전혀 아닐걸. 넌 모르겠지만, 여름 방학 때 후배 두명군대 간다고 백화점에서 입대 선물로 고급 전자 시계 사준 거 아냐? 남자 후배들도 얼마나 챙기는데?"
"······."
"괜히 비비지 말라고.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야이씨. 내가 뱁새면 넌 씹새냐?"
"뭐래? 불똥이 왜 나한테 튀어? 니가 혼자 왕자병 걸려서 행복회로 오지게 돌리니까 객관적으로 조언해 주는 거지. 영철이 너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솔직히 주변에 잘난 선배들이 없었지. 체육과 전통이잖아. 운동하는 애들 무식하고 몸만 좋은거. 그때는 니 얼굴이면 진짜 먹어줬지."
"······."
"근데 어쩌냐. 뛰는 놈 위에 나는 분도 있는 거지. 하필 도훈이형이랑 같은 시기에 학교 다니는 게 너의 불운이겠지."
"야.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맞어. 근데 도훈이형이 너보단 좀 더 완벽에 가까워 보인다."
희준이 자꾸 놀리자 영철도 화가 났다.
"야. 너는 친구라는 놈이 내 편은 못 들망정, 도훈이형만 겁나 빠네."
"친구는 친구고, 객관적인 팩트는 팩트지 인마. 담배 다 폈음 수업이나 가자. 첫 시간부터 지각하겠다."
희준이 곧바로 강의실로 돌아가는데 분개한 영철이 주먹을 쥐고 씩씩거렸다. 8선녀니 구운몽이니 한참 기분 좋은 상상으로 행복했는데, 무참히 꿈을 짓밟힌 느낌이었다.
'씨. 그래도 어차피 도훈이 형도 한 번에 한 명만 사귈 수 있을 뿐이야. 나머진 내가 고르면 그만이라고.'
현실을 모르는 영철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 * *
수업을 듣던 도훈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뭐야. 또 누가 내 뒷담화 하나? 왜케 귀가 간지럽지?'
[그냥 귀 청소를 안 해서 그런게 아니고요?]
'누가 귀 좀 시원하게 파주면 좋겠는데.'
[청결은 스스로 유지하십시오. 남한테 기대지 말고요.]
'안 그래도 지금 찝찝해 죽겠어. 아침부터 기운 빼느라 땀을 뻘뻘 냈는데, 결국 씻지도 못했잖아.'
학교에 와서 샤워하려고 했던 도훈은, 아침에 우연히 경희를 만나는 바람에 급하게 옷만 갈아입은 채였다. 새 옷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제대로 씻지 못해 여전히 찝찝함이 남아있었다.
[상관없을 걸요?]
'뭐? 여름이라 땀 냄새 풀풀 풍길텐데?'
[잘 모르시나 본데, 주인님의 땀에는 강한 유혹의 페로몬이 섞여 있습니다.]
'으잉? 나한테?'
[네. 마성의 지배자와 연동된 옵션인데, 주인님에게 호감도를 가진 여자에 한해선 강력한 유혹의 기운이 담깁니다.]
'호오. 그건 몰랐는데.' 본래 좋아하는 이성의 땀에는 상대를 안정시키는 체취가 스며든다. 실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숨겨도 대부분 자기 파트너의 체취가 담긴 베개를 골랐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니 오히려 땀냄새를 풍길 때는 더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인님에게 빠진 여자들에겐 강력한 유혹의 사인이 될 수 있으니까요.]
'허어. 그러면 오히려 큰일이네.' 다행히 전공수업 위주로 듣고 있었기 때문에 강의실에 여자들은 거의 없었다. 다만 오후에 있을 영어 회화수업이 문제였다.
교양필수로 들어야 하는 회화 수업엔, 학년 단위로 수업이 배정되는데 이때는 여러과가 동시에 섞일 수밖에 없었다. 도훈도 처음 듣는 수업이다 보니 구성원이 누군지도 몰랐다.
'뭐. 별일 있겠어? 저녁에 있을 개강총회나 신경 써야지.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에 들어간 도훈은 생소한 분위기에 약간 긴장했다. 간만에 다른 과 학생들과 섞이다 보니 아는 얼굴이 거의 없었다.
'윽. 시간표 배정을 잘 못 했나. 우리과에선 나 혼자 뿐인 거 같네.'
다들 비슷한 상황인지 서로 말똥말똥 두리번 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회화 강사가 등장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학기 회화 수업을 맡게 된 제니퍼라고 해요. 한국말도 곧잘 하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제니퍼의 능숙한 한국어 구사에 학생들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외양만 봐서는 완벽한 외국인이었던 것.
본인을 독일계 영국인이라고 소개한 제니퍼가 가볍게 수업에 대해 설명했다.
"본 수업은 1학점이지만, 졸업 학점를 위해 꼭 필요 교양 필수인거 아시죠? 학점은 Pass/Fail로만 평가 됩니다."
'와, 무슨 외국인이 한국어를 저렇게 잘한담?'
[그러게요. 말투만 봐선 한국사람인 줄 알겠는데요.]
계속된 능숙한 한국어에 학생들이 놀란 반응을 보이자 제니퍼가 간단하게 자신의 약력을 소개했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한국에 넘어와서 회화 강사를 했어요. 한국에 산지는 벌써 10년 째고요."
'아하. 그래서 한국어를 잘하는 구나.'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도훈을 발견한 제니퍼가 도훈을 향해 말했다.
"거기 핸섬 가이?"
"네? 저요?"
"혹시 유인물 배부 좀 도와줄래요?"
"아··· 넵."
도훈은 갑자기 자신을 지목한 제니퍼의 의도를 몰라 당황했지만 이내 일어서서 프린트물 배부를 도왔다. 도훈이 돌아다니며 A4용지를 나눠주는 동안 제니퍼가 설명했다.
"첫시간이니 만큼 서로 친해질 수 있도록 가볍게 아이쓰브래이킹 시간을 갖도록 하겠어요."
[아이스 브레이킹이 뭡니까?]
'처음이라 어색하니까 가볍게 자기 소개하면서 친목 도모 하자는 거야.'
[호오.]
"회화 수업은 조별 과제가 많으니 지금 바로 팀을 짤 거예요. 출석부 명단에 따라 남자 둘 여자 둘로 짰으니 배치 표에 따라 자리를 이동해 주세요. 배치표는 나눠 준 유인물에 적혀 있어요."
유인물 배부를 마친 도훈도 배치표를 보고 다시 자리를 이동했다. 강의실 구조가 테이블 단위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조별로 함께 앉아서 진행하는 수업같았다.
"오늘 시간은 자기 소개 시간이에요. 각각 영어로 된 닉네임을 정하고 그 이유도 함께 적어주세요."
도훈은 같은 조에 포함된 조원을 둘러보았다.
다른 과가 섞여서 그런지 다들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다.
도훈이 먼저 이름을 밝혔다.
"안녕하세요. 사범대 체육과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저는 경영학과 조범우입니다."
"공대 윤미리예요."
"저는 행정학과 오신아요."
다들 돌아가며 소개를 하는데 도훈은 특히 공대생이라고 밝힌 윤미리가 눈에 띄었다.
'오, 제법 예쁜데? 공대 여신인가?'
[네?]
'아니. 원래 공대는 남자의 학과라고 불리잖아. 여자도 거의 없는데 저 정도면 거의 여신 취급 받을 듯?'
[오.]
윤미리에 비해 오신아는 상대적으로 평범한 얼굴이었다.
다만, 유독 가슴이 커보였는데 커다란 옷으로 잘 감추고 있어 별로 티는 나지 않았다.
'신아는 글래머구나.'
[딱 보면 압니까?]
'당연하지. 바로 견적 나오잖아.'
[조별 과제에서 얼평 몸평부터하는 주인님도 정상은 아니군요.]
'보이는 걸 어떡하나?'
다들 이름을 밝히고 조용히 앉아 있는데 경영학과라고 밝힌 조범우가 나서 진행했다.
"교수님께서 영어 닉네임 정하라고 했으니 그것부터 해볼까요?"
"근데 다 영어로 적어야 하는 거예요?"
"아마도 그렇겠죠?"
다들 나눠준 종이에 영어로 이름을 쓰자 도훈도 펜을 들고 고민에 빠졌다.
'영어 닉네임은 뭘로 할까?'
[주인님을 잘 드러내는 단어가 좋지 않을까요?]
'그럼 대물이니까 빅 딕?'
[그건 좀 풍기문란하지 않겠습니까?]
'하긴. 존슨엔 존슨은 어때?'
[역시 너무 의도가 보입니다.]
'젠장. 큰 걸 어떻게 하라는 거야?'
[평범하게 하십시오.]
도훈이 고심하는데 먼저 이름을 정한 범우가 말했다.
"전 버핏으로 할게요."
"버핏이 무슨 뜻이에요?"
"버핏 테스트의 버핏인가요?
"아뇨. 오마하의 현인이라 불리는 주식 투자의 귀재 이름이에요. 워렌 버핏. 제가 요새 주식 동아리를 운영하고 있거든요."
"오, 주식도 하세요?"
도훈은 대수롭지 않게 들었으나 다른 여학생들은 주식이라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오랜 직장생활을 해왔던 도훈에게 주식은 익숙한 일이었지만, 20대 초반의 대학생에게 주식은 미지의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윤미리가 유독 관심을 보이자 범우가 신이나서 떠들었다.
"하하, 별거 아니에요. 그냥 새벽에 미국장 분석하고 선물지수 같은 것 보면서 연구하고···. 국내 주식도 가끔 하고요."
"와, 대단하다."
"멋있어요. 역시 경영대 생들은 빠르구나."
도훈은 그래서 얼마 투자해서 얼마나 수익이 났는지 묻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괜히 처음보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봐야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끽해야 일이백 넣거나 모의투자 할 것 같은데 엄청 유세부리네.'
[대학생이 주식을 한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죠.]
'나도 한다고.'
[주인님은 뭐···.]
"저는 아프로디테로 지었어요."
"그게 뭐예요?"
"비너스?"
아프로디테는 흔히 비너스로 알려진 그리스 신화의 미의 여신이었다. 미리가 단발 머리를 귀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냥 뭐, 이름이 예뻐서?"
"하하."
"잘 어울리세요."
다들 화기애애 했지만 도훈은 곧바로 미리가 약간 공주병이 있다는 걸 캐치했다.
'살짝 밥 맛인데.'
[네? 왜요?]
'자기가 공대 여신이라고 우쭐 대는 거 같아서.'
[별게 다 마음에 안드시는 군요.]
'난 얼굴 값하는 애들은 별로더라. 그나저나 다들 자기과 특성 따라가는데? 그럼 나도.'
"도훈씨는 어떤 걸로 지었어요?"
갑자기 훅 들어오는 신아의 질문에 도훈이 엉겹결에 대답했다.
"매, 매직 존슨이요."